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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03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24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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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
추천
30
글자
20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DUMMY

“상황은?”


지휘천막으로 들어서는 벤의 얼굴은 다급함으로 물들어있었다. 전술지도의 곁에는 크라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은 그에게서 들려왔다.


“숲의 정화를 위해 서쪽으로 향했던 건 본대의 일부였던 것 같다. 해가 진 틈을 타서 이쪽으로 우회한 거겠지. 진지 북쪽의 1차 전초기지와의 통신이 끊겼고, 아직 습격해오는 적의 규모나 ‘그녀’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통신교란인가요?”


“모른다.”


“적의 방향은?”


“모른다.”

벤은 보랏빛 입술을 씹는다. 천천히 전술지도를 살펴보지만, 크라트의 말대로 지금 얻을 수 있는 정보와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굉장히 빈약했다.

“일단 한발 물러나 정보를 수집하고 태세를 정비하는 것이-”


“안 됩니다.”


자신의 말을 끊는 벤의 단호한 목소리에, 크라트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그를 돌아본다.


“로빈이 의식에 들어갔어요. 목소리를 찾을 때까진 신단에서 벗어날 수도,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그를 지키면서 버텨보는 쪽으로 하죠.”


“적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다. 무리해서 맞상대하다가 그 의식이란 거 자체가 소용없게 돼버릴 수도 있어. 검성, 너는 그것에 이 모든 걸 걸어도 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나?”


“물론입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 그것은 벤 스스로가 의심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천막 안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확신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크라트는 천천히 검성의 흔들림 없는 먹색 눈동자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전술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중앙은 베르달군이 맡겠다. 언제 통신교란이 시작될지 모르니 지휘관들에게 유선망을 제대로 유지하라고 강조해. 특무대는 왕의 가까운 곳에서 가급적이면 노출되지 말고 대기하도록. 이번엔 나도 합류하겠다.”


치켜 올라가는 벤의 얇은 눈썹.


“예? 그럼 베르달군 지휘는요?”


“올리와 듀라에게 맡기면 된다. 엘라가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지금 특무대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어.”


“아잉, 난 괜찮은데 여보?”


교태를 부리며 미소 짓는 엘라. 그녀의 곁에서 목발은 사라져 있었지만,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붕대는 여전히 그녀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저는 특무대와 개별로 행동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묵직한 목소리를 따라 오즈카에게 향한다.


“아아, 로빈에게 들었어요. 허가합니다.”

벤의 말에 오즈카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천막 밖으로 그림자를 감추었다. 그의 뒤로 지나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흘렀지만, 곧이어 벤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자, 우리 병사들을 믿어봅시다.”




==================




가장 깨끗한 감각이 모든 것을 맑게 비춰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시야. 미풍에 흘러가듯이, 로빈의 몸은 의식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흐름에 올라 푸른 향을 음미한다.

존재는 하지만, 몸을 이루는 형체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는 실로 어색하면서도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눈으로 본다는 개념자체가 흐릴 정도로 주변의 풍경은 그대로 그의 머릿속에 직접 스며들고 있었다.

하얗고 푸른빛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러나 결코 눈이 부시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니, 이미 눈을 비롯한 신체기관이란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보이지만 보인다고 할 수 없는 몽환적인 공간. 하지만 그런 실과 허의 경계 속에서도, 로빈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스--------?」


“예?”


그림자로부터 퍼져 나오는 높고 괴상한 진동음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허, 인간? 이제 들리니?」


“아, 예.”


가청권으로 들어온 다정한 목소리. 로빈은 두루뭉술한 형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허락되지 않은 ‘리벨리움의 바다’에 인간이라니. 너 혹시 드루이드니? 명상좌표를 잘못 잡은 거 아니야?」


“아뇨, 드루이드의 도움을 받아서 오긴 했지만 드루이드는 아닙니다. 그냥 인간이에요. 누굴 좀 만나고 싶어서.......”


「만나? 감히 누구를?」


여전히 감각을 누그러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감히’라는 단어에 깃든 어조는 분명했다. 이런 태도에 대해 특별히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환영받지 못하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기에 로빈은 망설임 없이 울림을 내었다.



“숲의 사도, 세뮈엘님을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세뮈에엘? 너 그년의 씨앗이구나? 어쩐지 그냥 인간의 의식이 이런 곳에 흘러들어올 리가 없지.」


‘그년.......?’


묘한 단어의 괴리감을 씹으며, 로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체를 허용하지 않는 곳이야. 너희가 쓰던 몸짓은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모든 의식은 목소리에 집중하렴.」


“아....... 옛!”


다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로빈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로빈이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눈앞의 형체는 사실 형체라기보다는 흐릿한 존재감에 가까웠다. 공간의 이질감. 그것이 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이런 곳까지 찾아와 사도를 만나고 싶다는 건 그다지 좋게 봐줄 수가 없어. 내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였으면 너는 그 자리에서 찢겨버렸을 걸.」


“죄송합니다. 무례함은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숲의 안위가 심히 위협을 받고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죄송하지만 성함이.......?"


「라후드엘. 달을 관장하는 미모의 사도란다.」


“아아.......예.......미모.......”


다시 말하지만, 보이는 것은 일렁이는 존재감뿐.


「너 지금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 중이었지? 확 명계로 추방해버릴까 보다.」


“죄...죄송합니다. 라후드엘님, 제 주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라도 세뮈엘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요?”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라후드엘은 분명 로빈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공허한 공간만큼이나 아찔한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그걸 견디지 못하고 로빈이 다시 무례를 무릅쓰려는 순간,


「너희들의 시간은 참으로 폭풍처럼 몰아치지. 순간적으로 가장 밝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말이야. 그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너희가 역사라고 부르는 소용돌이는 사실 우리에겐 미약한 봄바람이나 마찬가지인 거 아니?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는 이런 존재들에게 손을 빌리려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후폭풍이 몰아칠지, 이해하면서도 그년을 부르려는 거냐고.」


그녀의 타고난 살가움인지, 라후드엘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다가왔으나 그 흐름에 섞여 있는 진중한 의미는 분명히 로빈의 흔들림을 시험하고 있다. 보이지 않겠지만, 로빈은 굳건하게 표정을 굳히는 것으로 그에 답한다.


“예. 저에겐 선택권이 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다’라. 너희는 정말로 그 말을 좋아하는구나.」

파동에 실려 분명하게 느껴지는 달의 미소.

「우연치고는 즐거운 만남이었어, 숲의 씨앗. 보통은 네가 스스로 찾아가야 할 목소리지만, 특별히 이번만큼은 내가 안내해주도록 할게.」


“아! 감사합니드아아아악!”


빛을 담고 있던 욕조에 마개가 빠진 것처럼, 로빈의 의식과 존재 모두가 급류에 휩쓸려 들어간다. 마치 절벽으로 내던져지는 듯한 그 느낌에 로빈은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대답이, 결국 너희에게 최선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을 거야.」


마지막까지 친절한 목소리만을 뒤에 남기고, 로빈의 비명은 어둠으로 흐르는 소용돌이에 묻혀갔다.




===============




침묵과 어둠을 밀어내고, 날카로운 함성과 비명, 그리고 마법사들이 내뿜는 파괴의 빛이 숲을 어지럽힌다. 내려다보이는 숲의 전경에 걸쳐 남색의 파도와 흑의 파도가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붉은 피를 흩뿌리고 있었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벤의 표정은 굳어만 간다.

숲에서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기병대의 후방침투는, 그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이 매복하고 있던 제국의 전투마법사들과 화기중대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러나 기병대를 잃었다는 사실보다, 간신히 생환한 기사가 보고한 적 매복군 지휘관의 이름이 벤의 머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쥬넨이 버티고 있다면, 숲에서의 기동전이나 기병대 운용은 사실상 읽히고 있다고 봐야겠지.”


곁에서 같은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크라트의 말에,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한숨을 내쉰다.


“화력전은 비등하네요. 제국군에 맞설만한 전투마법사전력이라니. 저렇게 키워놓느라 하파 씨가 정말 고생 많이 했겠어요.”


“그래, 유능한 마법사였지.”


두터운 나뭇가지 위에서 짧은 침묵이 이어진다. 그러나 사라진 이에 대한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나무의 줄기가 흔들릴 정도의 함성과 폭발음이 밤하늘을 찢으며 솟아오른 것이다.


“아, 좌익이-”






“물러나지 마라!”


카논은 방패를 앞세워 달려가는 병사들의 비호를 받으며 기병도의 탄창을 교체한다. 하지만 자신이 외친 명령의 허망함을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대대 중앙으로 떨어진 적 ‘계약자’의 혈마력 덩어리가 그대로 나무와 풀, 그리고 그 위에 서있던 전투마법사 중대 전원의 생명을 빨아들이며 그 ‘생명’들을 원료 삼아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아군 전투마법사들의 절명. 그것은 즉 보호막이 사라진다는 의미였으나, 화력에 노출되었다는 두려움이 번지기도 전에 곳곳에서 카나반 병사들의 비명과 절망이 먼저 숲을 적신다. 눈을 두는 곳마다 적 기사에게 썰려 나가는 병사들의 얼굴을 들어왔고, 그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드는 남색정복의 기사들마저 검은 제복에게 삼켜지고 만다.

카논에게 재장전의 시간을 벌어주던 병사들의 상체가 방패와 함께 하늘로 치솟는다. 피의 안개를 뚫고 카논에게 달려드는 검은 제복의 기사. 그의 장검과 기병도를 맞댄 순간, 카논은 눈앞의 영력이 자신에게 버겁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기병도의 날과 불꽃을 일으키며 밀고 들어오는 장검에 카논의 무릎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모든 감각은 손잡이에 연결된 방아쇠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병기에 의존한 기사전은 되도록 삼가라고 언제나 충고했다. 그러나 병기에 의존해서라도 벗겨내야 할 상대에게 카논이 부릴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사선의 끝은 적의 미간. 기병도의 정체를 모르는 적에겐 필승의 구도.


“-!”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납탄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숙인 적 기사의 머리카락을 스쳤을 뿐이었다.

비웃음도, 만족의 웃음도 없다.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자신은 그저 빠르게 벗겨내야 상대 중 하나.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발차기. 카논은 무릎과 정강이뼈를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공중에 몸을 던져야 했다. 무너지는 자세와 덮쳐오는 영력의 파동.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장검을 두 손과 기병도를 앞세워 막아내긴 했지만, 서슬 퍼런 날은 그녀의 눈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기합과 함께 영력을 집중시킨다면, 다음으로 ‘벗겨지는’ 것은 자신의 두개골일 터.

그러나 장검이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카논을 짓누르고 있던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위로 쓰러진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카논이 그를 옆으로 치워내자, 옆에서부터 그의 목을 관통하고 있는 화살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여전히 수많은 비명과 철끼리의 파열음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카논은 화살의 주인공을 찾아 침착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활을 들고 있는 기사의 모습은 없었다. 기사가 아닌 병사의 것이라고 하기엔 화살촉에 깃들어있는 영력의 잔재는 너무도 확연히 피어오르고 있다. 그러나 결국 카논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다시 눈앞에 나타난 적병을 맞이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높은 나무, 그 위로 드리운 나뭇잎의 그림자 사이로, 리즈는 새로운 제국의 기사를 찾아 활시위 위로 검붉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평생 동안 자신의 영력을 감춰왔던 그녀였기에, 달빛까지 피해가며 빠르게 나무사이를 오가는 그 그림자를 알아채는 눈동자는 없었다.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마다 끼우고 있는 화살은 사냥을 즐기던 그녀의 속사를 위한 일종의 버릇. 온갖 짐승과 야수의 목을 꿰뚫었던 그녀의 화살은 지금 제국군 기사들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밤을 꿰뚫는 그녀의 눈이 어느 굵직한 선을 가진 얼굴에게 고정된다. 그 구릿빛 피부와 깊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리즈는, 당겼던 시위를 내려놓고 다른 나무를 향해 움직여야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저 목을 꿰뚫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좌익이 돌파 당했습니다! 적의 일군이 그대로 이곳을 향해.......”


다급한 전령의 표정. 크라트는 대답 없이 시린 눈으로 검성을 돌아본다. 벤의 고민은 짧았다.


“휘둘릴 필요 없겠죠. 카니아 경의 예비대에게 돌파해온 군대는 무시하고 그대로 좌익 대열을 대신하라고, 들어온 놈들은 본대가 상대하겠다고 전해.”


“옛!”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지는 전령의 그림자를 눈으로 쫓으며, 크라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전황을 내려다본다.


“카니아라는 패를 너무 일찍 쓰는 것 아닌가. 지금 좌익을 메운다고 해도 중앙과 우익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그의 말대로, 와해된 좌익은 물론이고 베르달군의 중앙과 우측도 전투가 시작한 후로 계속해서 밀리고만 있었다. 적은 아직 ‘그녀’를 포함한 예비대나 본대도 움직이지 않은 상황. 기병대를 너무 일찍 잃은 것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단순히 밀리고 있다는 게 아니에요.”

마른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입술을 씹고 있는 벤의 목소리.

“이렇게 밀리면서도 퇴각할 수 없는 우리의 상황과, 그 의도를 장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더욱 촉박해지겠죠.”


“돌파해온 적의 기세를 보면, 분명 정예기사급 인물이 있을 거다. 우리 본대엔 누가 남아있지?”


대답하기까지 벤의 고민은 짧았다.


“오즈카 스파인.”






불안으로 방황하는 병사들의 눈동자. 기사라고는 모두 전방으로 차출당한 본대에 남은 것은 두려움과 절망이 섞인 긴장감이었다. 아군의 좌익을 무너트리며 곧장 이곳으로 돌파해 들어오는 적은 수많은 기사들을 앞세운 정예군일 것이 분명하다. 그에 비해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기사라고는 다른 병사들보다 앞서 다가오는 진동을 마주하고 있는 근위대 한 명뿐.


“두려워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마라.”

영력이 실린 오즈카의 목소리가 숲바람을 따라 흐른다.

“우리가 이곳을 내준다면 뒤에는 폐하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와 함께 원정에 참여하신 폐하를 이렇게도 쉽게 놈들의 검 앞에 내어줄 생각이냐? 폐하가 아직도 퇴각하지 않고 군영에 남아계신 것은, 바로 우리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숲의 그림자 사이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검은 물결. 오즈카는 단검을 쥔 양손에 편안히 영력을 흘려 넣는다.

“폐하가 보고 계신다. 폐하가 믿고 계신다. 그의 앞이라면, 너희 한 명은 적의 기사 백 명보다도 용맹할 것이다. 숲의 가호가 함께하길, 미트라블루스.”


“미트라블루스.”


모두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기도문이 튀어나온다. 그것으로 그들의 근력이 증가하고, 없었던 영력의 파동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거친 울림과 함께 다가오고 있는 적의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는 표정을 얻을 수 있었다.


“전선을 두텁게 유지해라. 기사가 덮쳐오면 덤빌 생각하지 말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어. 버티고 있으면 내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보겠다.”


물론 거짓말이다. 버티고 있다고 해서 오즈카 혼자서 적의 모든 기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가 본대에 남아있었던 이유. 무모한 줄 알면서도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가 지금 저 물결에 있기에, 그는 단검을 들었다.

반드시 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제국군의 선두를 이끌던 기사가, 순간 이쪽을 바라보곤 군의 움직임을 멈추고 큰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그 웃음소리는 크고 날카롭게 카나반 병사들의 가슴으로 파고들었지만, 오즈카만큼은 반대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숨과 목소리를 간신히 가라앉혀야 했다.


“재밌구나. 기다리고 있었나? 생각보다 빨리 다시 만난 것 같아 기쁘구나, 아들아.”


피가 엉겨 붙은 검을 흔들며, 댄 스파인은 한걸음, 오즈카를 향해 발을 내딛는다.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명령?”


단검을 앞세우고 다가오기 시작하는 아들을 향해, 댄이 뒤틀린 미소로 되묻는다.


“답을 찾아오라고 명령을 받았다. 나는 당신에게서 답을 뜯어내어 가슴에 품고 그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흐흠, 그래?”



비슷한 색을 가진 두 쌍의 깊은 눈동자가

천천히 마주친다.




“그럼 가져가 보시지.”




================




피비린내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높은 나뭇가지.

하얗고 얇은 손가락을 나뭇잎을 튕기며 놀고 있던 델핀의 곁으로 익숙한 그림자가 다가온다.


“댄 장군이 우측을 돌파하여 본대로 향합니다. 중앙과 좌측도 곧 무너질 거라 판단됩니다.”


카나반 기병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준 장본인, 쥬넨 니바르토. 델핀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얇게 웃으며 가지고 놀던 나뭇잎을 입으로 가져가 씹기 시작한다.


“느낀 점을 짤막하게 읊어 보거라, 젊은 니바르토.”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한번쯤은 되묻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쥬넨의 검푸른 입술은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제국군은, 아니 2군단은 강합니다. 비슷한 숫자의 군세일지라도 정면대결에서 이 정도로 적을 압도하는 것은, 실로 200년 전의 위용을 체감케 해주는 기세입니다.”


붉은 장미의 꽃피는 웃음과 하얀 이.


“부족하구나.”


쥬넨은 침을 한 번 삼킨다.


“승기는 잡았습니다. 이대로 댄 장군의 적 본대 교전을 시작으로 예비대를 투입하여 전선을 무너트리면-”


“부족하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검성님과 본대가 직접 나서서 말끔하게 정리하시는 편이-”


“부족하구나아.”


결국 쥬넨은 잠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미천한 이 몸에게 부디 가르침을.......”


그의 말에 델핀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뭇가지의 끝으로 과감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사람의 체중을 버티기는커녕 발을 들여놓기도 위태한 굵기의 잔가지였지만, 델핀은 마치 곡예라도 하듯 그 위에 서서 흥미롭게 전장을 내려다본다.


“승기를 잡은 순간까지도 지휘관은 두 개의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시선. 하나는 적의 지휘관이 이쪽을 보고 있는 시선.”

달빛을 등지고 빛나는, 붉은 장미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눈웃음.

“내가 적의 지휘관이었다면, 좌익이 무너진 순간 퇴각전을 준비했을 거다. 아마 중앙을 미끼로 두고, 우익과 예비대로 본대를 호위하며 물러났겠지. 하지만 적은 움직이지 않는구나. 단순히 함정이라고 하기엔 전방에서 죽어 나가는 목소리가 너무 처절하거니와, 오히려 예비대를 무너진 좌익으로 투입하고 있지 않느냐.”


“.......그럼.......?”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매혹적인 웃음소리.


“분명히 무언가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어. 이 많은 목소리를 희생시켜가면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쥬넨은 당황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본다. 가지 끝에 걸려있던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 그의 뒤로, 얇은 장미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스친다.




“본대와 예비대의 지휘를 맡기마. 나는 놈들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겠어.”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 문맥이나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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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4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0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0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299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7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4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1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4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7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7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3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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