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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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함만은 어느 순간에나 놓지 않는 덴쿠레와, 친절함만은 어느 순간에나 놓지 않는 유라였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다소 무거워진 동아리방의 분위기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책에 집중하고 있는 데로 때문이 아니었다.
“아, 죄송합니다. 냄새가 좀 나나요?”
“아뇨, 아뇨!”
덴쿠레와 유라가 동시에 손사래를 친다. 책상 위에 반듯하게 앉아 고도가 읽던 3류연애소설을 탐독중인 사람은, 다름 아닌 망자. 그것도 얼굴과 왼팔을 제외하고는 모든 살점이 뜯겨나간, 끔찍한 몰골의 망자였다. 고도와 벤이 이 망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 그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난생 처음 보는 망자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유라가 습관적으로 차를 대접하긴 했으나, 고맙다고 웃으며(입가의 근육이 뒤틀리는 것으로 대충 이렇게 짐작함) 머금은 차가 턱 아래로 줄줄 새는 광경을 보고 덴쿠레는 유라에게 꿀밤을 먹여야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변한 게 없군요.”
공허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망자. 결국 덴쿠레는 참지 못해 묻고 만다.
“아스트로바톰 출신이신가요? 성함이.....?”
“아아, 저도 알려드리고 싶은데, 우리 대장께서 일단은 비밀로 하고 있으라고 해서요.”
“......대장?”
‘대장’이란 게 누굴 말하는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무언가를 더 물으려던 덴쿠레의 목소리는 교내에 울리는 종소리에 묻혀버렸고, 그는 유라와 함께 간단한 인사만을 남기고 안심 반, 아쉬움 반의 표정으로 동아리방을 나서야했다.
두 명, 정확히는 한 명의 망자와 한 명의 악마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동아리방에 남는다. 마치 서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떠한 말도, 시선도, 관심도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피’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니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건가.”
놀랍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데로였다. 그러나 망자의 푸른빛엔 어떠한 동요의 흔들림도 없었다.
“일곱 번째 주인들에겐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절망의 군주’께서, 어쩐 일로 이곳에 강림해계신 건가요?”
결국 책에서 시선을 떼는 데로.
악마의 표정은 흔치 않은 ‘당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새카만 혀가 뱉을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오캄푸스가 재차 입을 연다.
“예, 첫 번째 생명과 함께 끊기긴 했지만 저도 계약자였습니다. 당신 형님과 말이지요.”
“......흐음.”
모든 표정을 지우고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로. 하지만 오캄푸스는 그를 놔주지 않는다.
“이제 와서 갑자기 인간들에게 흥미를 가지시는 건, 당신 형님에 대한 반감입니까?”
“그 새끼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난 집안일에 관심 끊은 지 오래다. 여기 있는 이유는 이상한 놈한테 소환을 당했을 뿐, 자의가 아니야.”
“......그렇습니까.”
오캄푸스의 어조엔 단순한 수긍보다는, 그저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데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망자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러는 니 새끼는, 사도국에서 악마계약자 출신의 망자라는 신분으로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이미 한 번 생을 다했으면서도 말이야.”
“하고 싶다라.......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습니다. 그저, 보고 싶을 뿐이죠.”
“뭘.”
“저에게 아직 피부라는 것이 붙어있을 적에 제가 남긴 것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분명하게 읽히는 망자의 미소. 그는 턱 아래로 줄줄 새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특이하군. 보통 제2의 시간을 부여받은 녀석들은 자신이 매듭짓지 못한 걸 직접 하려고 지랄들이던데.”
“제2의 시간....... ‘걸어 다니는 시체’보다는 어감이 좋네요. 제2의 시간이라.......”
망자의 공허한 시선이 다시금 창문 밖 교정을 향한다. 그러나 그의 의식이 닿은 곳은, 아스트로바톰으로부터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 끝을 스스로 정할 수 있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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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모든 나뭇잎들이 여름과 작별을 준비하는 시기. 하지만 수개월 만에 변색되고 낙하하는 나뭇잎들로선 상상하지 못하는 시간이 끝나려하고 있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왕립현충원.
일주일 전에 있었던 전투마법사 ‘아센 하파’의 하관식 때와는 달리,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되는 의식이 준비 중에 있었다. 보통의 장례식이나 하관식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떠나는 본인’이 신나게 입을 놀리고 있다는 것.
“아, 그냥 화장시켜주면 되는데, 뭐 하러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향긋한 탕나무향이 물씬 풍기는 관 속에서, 낮게 웃으며 유일하게 남아있는 ‘신체’인 손을 빙글빙글 돌리는 슈리안. 로빈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큰 공헌을 해주셨어요. 마땅히 현충원에서 잠드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공헌은 무슨, 그냥 시간 끌려고 깝죽대다가 얻어맞은 것뿐인데요 뭐. 나 같은 것보단 그 조엘인가 뭐시긴가 그 아이를 현충원에 모셔야 맞는 거지. 여동생이 자기 정원에 묻고 싶다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망자의 웃음사이를 가르고 다가오는, 또 하나의 늙은 그림자.
“.......형님.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어요?”
깊은 눈으로 자신의 형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센이었다.
“혹시 대학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고, 아직 남아있는 영력도 정정하신데 굳이-”
“한센.”
노인의 말을 끊으며, 망자는 반쯤 부숴진 턱뼈를 느긋하게 움직인다.
“남은 것이라곤 머리와 한쪽 팔밖에 없는 지금, 내 기사로서의 생명은 진짜로 끝난 거야. 모든 것을 놓고 천천히 유랑이라도 하고 싶지만, 몸이 이래서야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이렇게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데에도 영력의 소모가 엄청나다. 이제 놓는 게 맞아.”
“하지만-”
“내가 왜 이런 몸으로 일어났는데도 아르바티앙의 무덤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는지, 기억하지?”
입을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센.
“.......억울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모든 것을 검을 위해 살고 검을 위해 노력했는데, 단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하고 끝나다니 너무 억울했어. 상대가 비록 ‘학살의 검성’이었다지만, 그래도 내 검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확인은 해보고 싶었거든. 그리고 폐하와 네가 그 기회를 주었어.”
만족이 깃든, 짧은 한숨.
“제국의 검성과 검을 맞붙어보다니, 기사로서의 한을 풀었지 뭐.”
“.......형님.......”
“그러니까, 미련은 없다. 비록 200년이나 더 걸렸지만, 내가 지니고 있던 검의 무게를 마침내 스스로 느낄 수 있었어. 그것으로 만족한다. 아니, 감사한다.”
“.......”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에서 물러난다. 그것을 신호로 드렌턴과 오즈카가 양쪽에서 관 아래를 감싸고 있는 붉은 나무의 인장을 천천히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하관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신속하게 끝날 수 있었다.
“이야, 사각의 하늘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광중(壙中)에서 올려다보는 풍경도 썩 나쁘지는 않네요.”
슈리안의 웃음소리. 그는 사각의 하늘로 다가오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부탁해요, 아가씨.”
“.......수고하셨습니다.”
고도의 바닷빛 눈동자가 심연의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끝까지, 존경을 담은 눈으로 ‘옛 기사’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한 번 더럽혀진 몸이지만, 그대를 위한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세뮈엘이시여.”
붉은 마력이 휩쓸기 직전, 백골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기도.
“미트라블루스.”
모두가 그에 답을 해준다.
본래의 죽음으로 회귀하는 망자의 눈에서 공허한 빛이 사라지고, 마침내 길었던 기사의 시간은 진정한 마지막을 고한다. 관을 덮고, 신성한 흙으로 그 위를 보듬어줄 때까지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본래 근위대 전체의 축복을 받으며 행해질 하관식이지만, 그 대상이 망자이고 게다가 혈마법을 이용하여 그를 ‘죽음’으로 되돌려달라는 본인의 요구는 공화국으로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주기 힘든 일이었다.
그 결과, 혈육인 한센과 특무대 대원들만이 함께할 수 있었던 그의 마지막.
그러나 한센은 불평하지 않았다.
자신의 형이 무엇을 원했고,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벤!”
모든 의식이 끝나고, 고도와 함께 학교로 되돌아가는 길. 벤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아, 카논. 좌익에서 수고 많으셨어요.”
사무적인 그의 격려였지만, 카논은 적갈색 피부를 살짝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아녜요. 복귀하기 전부터 내내 병원에 있느라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벤은 괜찮아요?”
슬며시 고도와 벤의 사이로 끼어들어 걷기 시작하는 카논. 다시금 후드를 벗으려는 이리스를 제지하며, 고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저야 뭐, 그냥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었으니까요.”
카논은 지나친 겸손이라는 듯이 웃었지만, 사실 벤은 그 말대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력이 소용없는 상대였다지만, 전투마법사로도, 그리고 검성으로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였다. 로빈이 아니었다면 전투는 물론이고 그의 목숨까지 내놓아야했을 판이었으니.
“폐하가 정말 대단하셨죠. 직접 세뮈엘님의 축복을 이끌어내시다니.”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논의 들뜬 평가가 이어진다.
“처음엔 병사들도, 기사들도 무슨 일인지 모르고 벙쪄 있었어요. 그러다가 숲이란 존재 자체가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진짜 몸이 가벼워서 다시 싸우고 싶었는데 적이 물러나더라구요. 비록 짧긴 했지만 진짜 황홀한 경험이었어요! 벤은 어땠어요?”
“.......저요?”
갑작스런 지목이었지만 벤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가만히 시간을 되짚기 시작하더니, 표정이 없는 먹색 시선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다.
“.......글쎄요. 저는 그때 축복 같은 거 받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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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로빈은 지나의 허리를 안아준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아래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양 같은 눈동자에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좋은 분이시긴 했지만, 본인이 원하셨으니 뭐.”
얇게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는 로빈을 향해, 지나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아? 복귀하기 전부터 계속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역시 날카로운 그녀다.
얼굴로 그늘을 내비치지 않아도, 언제나 그녀는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만으로 이쪽의 가슴을 읽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거짓은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로빈은 짧게 웃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접대용 소파로 이끌었다.
“좀 신경 쓰이는 게 있긴 있어.”
“뭔데, 혹시 세뮈엘님과 관련된 거야?”
이젠 날카로움을 넘어서, 약간 무섭기까지 하다.
“응.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주저함을 용납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말끝을 흐리는 로빈의 턱을 잡고 시선을 강제로 마주한다.
“.......거기서 뭔 일 있었어?”
“......으음......”
구겨지는 로빈의 얼굴. 잠시 회상을 따라 기억을 헤집던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땅한 자격과 여건을 갖추었는데도, 사도정도 되는 존재가 ‘그런 놈과는 계약하고 싶지 않다-’며 대신 군 전체에 축복을 내려 줬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 작가의말
「아뮤르 슈리안, 아르다르 출신, 카나반의 기사. 향년 2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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