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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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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9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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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DUMMY

계절의 끝을 고하는 한기를 품고 새벽바람이 매섭게 휘날린다. 브린타이나 왕국의 수도, ‘디나스아리얼’을 품고 있는 디나스강의 수면에도 서서히 살얼음이 돋고 있었다. 해가 고개를 드는 시간이 늦어지는 겨울인 만큼 어둠 속에서도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그림자가 많을 법도 한데, 나루터로 이어지는 외성의 주민들은 그 누구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비록 무지한 어부와 상인들일지라도, 지금 바깥에서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읽을 줄은 알았기 때문이다.


한산한 거리에 짧은 비명이 울려 퍼진다.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복부를 꿰뚫고 있는 검을 맨손으로 붙들어 시간을 벌어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곧바로 다른 검에 의해 목이 잘려나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도시 외곽에서 벌어진 그 살인이 더욱 어색했던 이유는, 목이 잘린 여인도, 그 시체를 뛰어넘어 다시 달려 나가는 남자도 모두 같은 왕실근위기사단 ‘엑스클라마트’의 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헉......,헉........”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달리고 있는 여인의 입에서 거친 숨이 새어나온다. 깊게 눌러쓴 후드 덕분에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얇은 숨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다급한 떨림과 마른 목소리였다.


“이쪽으로.”


그런 그녀의 호흡을 기다려줄 새가 없다는 듯이, 선두의 근위기사가 재촉하며 걸음을 옮긴다. 목적지인 북문의 나루터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명의 근위대를 희생시킨 보람도 없이, 그들이 접어든 골목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새벽을 틈타 사그라지는 불꽃이라니, 당신 아버지가 본다면 통탄할 일입니다, 폐하.”


“.......!”


후드를 뒤집어쓴 여인은 물론이고, 디나스아리얼에서 가장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기사들이라고 알려진 엑스클라마트의 단원들조차 낮은 절망의 신음을 흘린다. 그 누구도 무기를 내밀지 않은 이유는, 약간의 위협이라도 내보이는 순간 눈앞의 남자에 의해 목이 꿰뚫릴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시대와 흐름을 읽지 못함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당신의 아버지, 그리고 그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후세에 제 이름이 반역자로 알려지더라도 이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돌아오십시오.”

거칠게 길러 내린 얇은 흑발이 골목을 가로지르는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굳건한 푸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분명한 위협. 답이 없는 여인과 조심스럽게 무기를 다잡는 근위기사들을 바라보며, 남자의 깊어지기 시작한 주름이 미세하게 뒤틀린다.

“무의미한 출혈이 될 것이란 건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아들놈도 그걸 생각해서 당신을-”

남자의 입술이 멈춘다.

차가운 눈동자가 빠르게 여인을 중심으로 하는 일행을 훑었고, 곧이어 남자는 낮은 신음을 내뱉는다.

“.......디미르가 보이지 않는군요.”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 뿐.


남자는 거대하고 기다란 창을 어깨에 걸친 채로 성큼성큼 일행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다. 경계의 적의는 모든 근위기사의 눈에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이 후드를 눌러쓴 여인의 바로 앞에 당도할 때까지도 감히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인의 얼굴을 덮고 있는 후드를 벗겨내고, 안의 얼굴을 바라본다.

분명 ‘그녀’와 비슷한, 새카맣고 얇은 머리카락이다.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두터운 안경 또한 그녀와 똑같다.


그러나 후드 속의 여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대역인가. 당연히 니에브로 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뒤엎어주시었군.”

남자는 짧게 웃으며, 일행의 뒤를 쫓아온 근위기사들에게 손을 들어 보여 무기를 거두라 명한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상, 이들이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쪽과 남쪽 나루터와 출입관리자한테 통신을 보내라. 어젯밤과 새벽사이 검은 머리의 여자와, 장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빠져나갔는지 확인해봐.”


“옛.”


빠르게 모습을 감추는 근위병.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체포되는 일행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남자는 반듯하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흘려보내야하는 역사도 있는 법이거늘.......”




===============




갓난아이라고는 믿기 힘든 우렁찬 울음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진다.


“내가 가지.”


동시에 눈을 뜬 크라트와 엘라였지만, 먼저 몸을 움직인 쪽은 늑대였다. 울음소리의 근원은 벽난로 가까이에 있는 아기침대.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눈물 없는 울음을 터트리고 있던 로즈는, 크라트의 품에 안기자마자 얇은 숨소리를 남기고 다시 침묵에 빠져든다. 어느새 불쑥 자란 새빨간 머리칼이나, 커다랗고 새카만 눈동자가 어미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가는 중이었다.


“.......신기하단 말이야. 당신 품에만 안기면 귀신같이 조용해져.”


엘라의 웃음 섞인 말에, 크라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무서운 거겠지. 내가 아이들한텐 서투르기도 하고.”


“그건 당신생각이고. 첫 단어가 ‘아빠’였는데 말 다했지. 내가 안으면 짜증부릴 때도 있다니까? 첫걸음도 당신 앞에서 했다며? 엄마 싫어하는 유전자라도 물려받았나봐.”


크라트는 대답대신 평화로운 얼굴로 다시 잠에 빠져든 로즈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남편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뒤돌아 눕는 엘라.

밤새 벽난로를 태우고 있긴 했지만 나체로 누워있던 그녀였기에, 크라트가 들춘 이불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고 만다. 그런 그녀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늑대는 부드럽게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었다. 살짝 드러난 그녀의 가슴과, 달빛보다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목선은 늑대로서도 입을 맞추지 않고 품기엔 어려운 절경이었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기분이 좋은 듯, 고양이처럼 얇은 숨소리를 내뱉는 그녀를 향해 크라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괜찮나?”


“뭐가?”


어깨를 넘어온 그의 굵은 팔을 끌어안으며, 엘라가 대답했다.


“붉은 장미 말이다. 일단은 네 어머니였잖나.”


“글쎄....... 이어진 피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원수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애초에 날 딸이 아닌 ‘드리브달’이라고만 생각해왔던 그녀고....... 뭐어, 유일하게 맘에 걸리는 건 내가 직접 끝을 맺지 못했다는 거정도?”

그녀는 턱을 돌려 늑대의 시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가 잘못된 걸까?”

라고 떨리는 눈동자로 묻는다.


“아니, 넌 잘못하지 않았다. 네가 받지 못한 것들, 네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이제 네가 로즈에게 심어주면 되는 거다. 우리의 역사는 결국,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평가받는 거니까.”


더욱 힘을 주어 엘라를 끌어안는 크라트. 그녀는 곧바로 뒤돌아 그와 가슴을 맞대고, 그의 거친 입술과 숨결을 탐한다. 가장 차가운 듯 보이면서도 가장 따듯한 이 남자의 온기를, 자신에게 찾아온 축복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엘라는 진심으로 그의 품에 매달려 있었다.

까슬하면서도 부드러운 늑대의 손이,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녀의 등선을 따라 그 완벽한 곡선을 음미하며 아래로, 아래로 뻗어나간다. 조심스럽게 피어오르는 쾌락 속에서, 짧은 신음과 함께 늑대의 목을 감싸는 엘라.



로즈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다시 터진 것은 그때였다.


황홀경에 빠져들던 두 시선이 마주치고, 맑은 미소가 교차한다.


“로즈가 동생보기 싫은가봐.”

드러눕는 크라트로부터 이불을 빼앗아 몸에 두르며, 엘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크라트는 그로서는 보기 드문 웃음으로 그에 응대하며, 천천히 벽난로를 향해 다가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 공주님이 왜이러실까아~?”

최대한 사랑스러운 손짓으로 로즈를 안아든 엘라였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간다. 끅끅거리는 중간중간에는 ‘아빠’라며 노골적으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이거 봐, 이거.”


난처한 듯 웃는 엘라를 향해, 크라트는 그녀를 괴롭혔던 만족스런 표정을 다시 지어보이며 창문 밖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차갑게 빛나는 달이 그의 시선을 반기고 있었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까의 말을 되짚는다.


“다음 세대라.......”




==================






“베르달로부터의 중간보고입니다.”

로빈은 지친표정으로 마누앙에게서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의 검붉은 눈이 그 내용을 훑기 전에, 총리의 입에서 먼저 요약이 튀어나온다.

“숲의 회복은 겨울로 접어들면서 다소 지체되고 있긴 하지만, 엘론족과 드루이드들의 협조에 힘입어 겨울이 끝나기 전까진 어느 정도 예전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적은요?”


생기가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서류를 한 장 넘기는 로빈.


“제국 2군단은 마즈다힐로 퇴각한 후 재정비에 들어간 모양입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검성이란 존재가 전사한 것은 반도를 통틀어도 2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저쪽의 충격도 이쪽의 피해와 충격에 못지않겠지요.”


“다른 전선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나요?”


“브린타이나 쪽에서는 특별한 보고가 없었습니다만, 니에브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성 몇 개를 빼앗긴 모양입니다. 블라고슬로바는 여전히 조용합니다. 제국과 전투를 벌이고는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니에브를 위해서라도 우리 쪽에서 빨리 움직여줘야겠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카나반 중앙군의 피해는 다시금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와 더불어 세뮈엘의 축복에 대한 대가로 약속한 숲의 복구도 지체되고 있는 상황. 땅이 녹기 전까지는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이 총리와 검성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분명 일국의 검성을, 그것도 기사에 있어서는 최강이라 평가받는 제국의 검성을 잡았다는 사실은 경악에 가까울 정도의 성과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아직 후폭풍이 몰려오지는 않았지만, 겨울이 지나고 나면 정세는 급박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축배를 들기보다는 상처를 핥아야한다는 것이야말로 벤과 로빈이 무엇보다 빠르게 합의한 사항.

검성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스치자, 로빈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마누앙을 향해 입을 연다.


“벤과 한센 경이 계획한 기사교육과정개정안 말인데요, 의회에서 통과하자마자 너무 빨리 적용시키는 것 아닌가요? 무리해서 겨울에 대상자들을 모집하는 게 아닐지 걱정되네요.”


“글쎄요, 저는 기사가 아닌 몸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루디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눈치였습니다. ‘애초부터 이랬어야 한다’라고.”


“그 아저씨야 애들 굴리는 맛으로 교관해먹던 인간이니까.......”

로빈은 빠르게 서명을 마친 서류를 마누앙에게 넘겨주었지만, 총리가 새롭게 내미는 서류뭉치는 전보다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두꺼운 것이었다.

깊은 신음을 흘리며 그것을 받아들고 넘기는 순간, 로빈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총리님, 이건.......?”


“왕립교회의 출석요구서입니다.”


“누구, 저요?”


절망스런 표정의 로빈에게서 종이를 뺏어들고, 적혀있는 이름을 읊기 시작하는 마누앙.


“로빈슨 미트라블루스, 벤, 제르나비 고도, 제르나비 오캄푸스, 이상 네 명을 ‘혈마법특무대’라는 이단 행위에 대한 종교재판의 피고인으로서 출석을 요구한다.”


“.......네에에에?!”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그의 뒤로 나뒹굴었지만, 로빈의 표정에 깃든 경악은 그 소음조차 덮어버릴 정도로 처참했다.

“아니, 의회에 승인받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지랄이래요?!”


평소의 마누앙이었다면 로빈의 단어선택에 미간을 찌푸렸을 테지만, 이번에 그의 굵은 주름에 깃든 것은 로빈에 대한 공감이었다.


“국가위기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특무대입니다. 급박한 상황에 종교적인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간 교회의 명성이 실추될 것을 염려한 것이겠죠.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이제 죄를 묻겠다는 겁니다.”


“........아이고 맙소사....... 세뮈엘님이라도 다시 소환하고 싶네요.”


쓰러지듯 자리에 앉는 로빈. 하지만 의자가 넘어져있었기에 그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일국의 왕이라고는 볼 수 없는 추태를 애써 외면하는 총리의 헛기침.


“종교재판은 다음 주에 열릴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욘의 대통령께서 면담을 요청하셨는데 날짜를 언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욘? 직접 찾아오신대요?”


“예.”


“으음.......”

이 시기에 갑자기 움직이는 욘. 로빈으로서도 그 저의를 예측하기 힘들다.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누앙에게 서류를 받아들었다.

“언제라도 환영한다고 답신을 보내세요. 아, 종교재판하고는 날짜를 다르게 잡아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로빈은 길게 지친 한숨을 내쉰다. 붉은 장미의 흑도가 자신의 목을 꿰뚫었을 때보다도 지금이 더욱 정신이 없는 기분이었다.

마누앙이 자신에게 내밀 서류를 고르고 있는 그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몇 가지 사실들이 로빈의 머리에 스친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로빈에게 새로운 근심을 안겨주고 있었다.


‘걔는 괜찮으려나.......’




==================




“이야아, 이게 누구신가아, 충직의 가문 가슈펠라르의 유진님 아니신가아?”


기사훈련소로 향하는 오르막길.

유진은 뒤에서 건방지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눈을 감고 한숨부터 내쉰다. 귀밑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쓸어 넘기며 여유롭게 뒤돌아서려고 했지만, 그녀의 입가에 스민 미소는 혐오감으로 인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가주뿐만이 아니라 근위대까지 반역에 몸 바친 시즈키치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셰르님?”


유진의 빛나는 금발과 새빨간 눈동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미소 짓는 셰르. 그는 비웃음을 멈추지 않고 한걸음, 유진을 향해 다가선다.


“우린 전 가문이 단합해서 군사를 일으키진 않았거덩?”


“응? 그쪽은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나? 아아, 맞다! 돈이 궁해서 브린타이나에 모두 팔아버렸다고 했던가?”


소년소녀의 눈이 낭만과는 거리가 먼 온도로 맞부딪치기 시작한다. 서로 필사적으로 미소는 잃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그 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뒤틀린 그들의 미소를 승리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아아, 너랑 동기가 된다는 걸 알았으면 소집불복이라도 했어야했는데에~.”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셰르를 향해 유진의 웃음소리가 크게 번진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반역과 불복이 너네 시즈키치의 가언 아니었니?”


“에이 그럴 순 없지. 금발의 누군가가 생도들을 선동해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떡해. 나라도 막아야지, 안 그래?”


무기는 없었지만, 둘의 눈과 미소에서 영력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분명한 적의였다. 무거운 표정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던 다른 후보생들은 이들을 구경할 생각조차 못한 채 최대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붉은 장미와의 전투를 계기로 기사들의 보충과 훈련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예고한 정부였다. 그 대대적인 통지 이후 이뤄진 첫 번째 소집이었기에 언덕을 오르는 표정들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두 귀족자제의 모습은 별 감흥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가문의 자제들, 그 중에서도 기사들은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에 미리 가문차원에서 훈련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가문의 본가출신이 아니고서야 자택에서 기사훈련을 받는 것엔 한계가 있는 법. 그런 귀족들을 대상으로 사설로 운영되는, 이른바 ‘기사학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합동훈련에 가까운 방식으로, 철없는 자식을 교육시킬 목적인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는 학원이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학원 내에 가문별로 파벌이 갈린다는 사실이었다.

유진과 셰르는 다름 아닌 그 파벌의 중심에 있던 얼굴이었다. 그들이 다시 만났으니, 좋은 말이 오고갈 상황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언덕길의 중앙, 그들을 제지할 경비병이나 근위병은 없었고, 평민에 불과한 후보생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일촉즉발의 상황, 둘의 충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아, 거 더럽게 시끄럽네.”


어느 무심한 표정의 그림자가, 둘의 사이를 파고들기 전까지는.

유진과 셰르는 자신들을 밀치며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소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녀에게서 귀족을 상징하는 어떠한 기품이나 외견을 찾을 수 없었기에, 두 기사가 동시에 자존심을 난자당했다는 기분이 든 것은 물론이었다.


“뭐야, 이건?”


셰르가 먼저 소녀의 팔을 낚아챈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그녀를 향해, 유진의 비웃음이 빠르게 번진다.


“웬 예의 없는 시골뜨기까지 소집을 했나? 사람을 치고 갔으면 사과를 해야지? 너, 어느 가문 출신이야?”


“.......딱히 소속가문 같은 건 없는데. 빨리 올라가서 쉬고 싶으니까 좀 놔줄래?”


여전히 귀찮음이 묻어나는 표정과 말투. 셰르는 엉겁결에 그녀의 팔을 놓았고, 그것이 유진에게 놀릴 건덕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미 늦은 후였다.


“하! 뭐야 너, 고명하신 가슈펠라르가의 기사께서 지금 평민 기사나부랭이한테 쫄은 거야?”


“쫄긴 누가? 너야말로 건들지도 못했으면서.”


다시금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소녀는 다시금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야! 너 이름이 뭐야? 가문은 없어도 이름은 있을 거 아냐?”


처음부터 그녀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유진의 어투엔 약간 가시가 돋쳐있었다.


소녀는 검붉은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뒤돌아본다.

마찬가지로 검붉은 눈동자는, 지금부터 내뱉을 자신의 이름에 어떠한 감흥도 없다는 듯, 느긋하게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즈.”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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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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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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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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