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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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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0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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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글자
18쪽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DUMMY

싱그러운 여름향기의 한가운데에서, 조엘은 가만히 언덕아래 빛바랜 저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식힌다는 이유로 식사준비가 되었다는 지든의 말을 뿌리치고 나온 그였으나, 사실은 같은 식탁 위에서 올란과 아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을 뿐이었다. 애초에 저 저택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자신을 붙들고 있었던 유일한 이유마저 흐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참지 못해 사고를 치고 말았다.


“후우.......”


한숨밖에는 그의 입에서 새어나올 목소리가 없었다.

무슨 표정으로 그녀를 봐야하는가.

나를 역겹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수도에서 정신이 이상해져 돌아온 것이라고 변명을 해볼까. 그나마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기회마저 내가 스스로 차버린 게 아닐까.

수많은 자책이 조엘의 흐릿한 눈동자를 뒤덮는다. 아니,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밝은 목소리는, 깜깜해진 시야가 단순히 자신의 절망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반가움이었다.


“누구~게?”


그 이름을 부르는 데 고민은 필요 없었다.


“오랜만이야, 리즈.”


“조오엘~!”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려 그대로 조엘의 목덜미를 끌어안는 리즈. 무게감 있는 그녀의 가슴이 얇은 천 너머로 자신의 등을 압박해왔지만, 조엘은 그녀를 이성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또한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향한 부끄러운 감정은 전무했다. 마치 오랜만에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매달리는 그녀를, 조엘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떼어놓을 수 있었다. 마치 영력이라도 실은 듯한 괴력이었다.

“1년 만이네! 나한텐 말도 없이 가버리고, 나중에 아델한테 듣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미안, 갑자기 생긴 사정이라 어쩔 수 없었어.”

마지막으로 봤을 땐 어깨에 닿아있던, 아무렇게나 기른 검붉은 머리가 이젠 허리까지 닿을 지경이다. 숲의 가호를 받은 덕분에 여름빛에도 그녀의 하얀 피부는 그다지 그슬리지 않은 듯 했지만, 헤실헤실한 얼굴, 낡아빠진 셔츠와 반바지는 여전히 영락없는 야생동물의 인상이었다. 그 편안함에, 조엘은 굳은 마음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넌 변함없구나. 아주머니는 어떠셔? 피난 안가신데?”


“피난은 무슨. 제국놈들이 간다면 평원 쪽으로 가겠지 이런 변방 숲까지 오겠어, 설마.”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했던 모양이네.”


활기와 온기를 잊은 마을. 하지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조엘은 생각했다. 저들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면, 자신이 겪었던 그 처참한 목소리들을 아델이 똑같이 겪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뭐어, 너 이마를 보니 아저씨는 이미 만난 것 같고, 아델은 만나봤어?”


이어지는 일상의 대화처럼 가볍게 물은 리즈였지만, 조엘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사실이 다시금 그의 머리에 스멀스멀 기어들어온 덕분이었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으로 입을 여는 조엘.

“나도 모르게 키스해버렸어.”


“뭐어?!”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 리즈. 하지만 조엘의 표정은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고통으로 물들어있었다.


“그 아이한테 상처를 줘버렸어. 나에게 보여줬던 모든 미소는 남매로서, 가족으로서 당연한 것이었을 텐데, 나는 그걸 내 멋대로 해석해버린 거야. 여태까지 내가 곁에 있었던 모든 시간을 배반당한 기분이겠지. 역겹다고 생각해도 난 할 말이 없어.”


금빛머리를 감싸 쥐는 조엘.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알아왔고, 또 유일하게 이런 말을 털어놓을 수 있는 리즈였기에 그는 감정의 분출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조엘의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조엘의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다.


고통에서 회복될 틈도 없이 리즈의 격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강타한다.

“병신아!!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계속 말하던 건 똥구멍으로 쳐들었냐?! 다시 말해줄게, 이번엔 귓구멍으로 잘 들어.”

불처럼 번지는 영력의 파동과 함께 조엘은 그녀에게 멱살을 잡혔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검붉은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지난 1년간 그 아이가 얼마나 자신과 네 속에 흐르는 피를 저주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알아?! 결코 축복받지 못할 감정이라는 건 아델도 알고 있어! 그래서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거야, 바로 너처럼! 그런데 네가 멋대로 떠나면서, 결국 그 핏줄 때문에 곁에 있지 못하게 된 줄 알고 걔가 얼마나 처절하게 후회했는지 알아!?”

리즈가 크게 숨을 삼킨다.

“아델은 너한테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네가 영영 떠나버린 줄로만 알았단 말이야! 그게 넌 단순한 남매로서의 감정이라고 생각해?!”


조엘은 리즈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기쁘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어쩌면, 항상 가슴의 한구석에서는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코 허락받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서로의 가슴에 닿기 전에 합리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위태로운 감정의 선을, 자신이 무심코 깨트리고 말았다. 이제는 절대 평범하게 서로의 곁에 남아있을 수가 없다. 암묵적으로 합의했던 일상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반쪽이라도, 남매는 남매야. 나는......, 우리는, 절대 행복할 수 없어.”


뿌득-하고, 리즈에게 잡힌 그의 옷깃이 찢어진다.


“가문이니, 배다른 자식이니, 남매니, 지금이야말로 그 모든 굴레가 가장 얕아진 때 아니야?! 저 저택에 도대체 뭐가 남아있는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한테 몸을 팔아서라도 지켜야할 가치가 저기에 남아있어?! 너 기사잖아?! 안되면 힘으로라도 뒤집어엎으란 말이야!”


조엘은 리즈의 손길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난다. 아직 채 식지 않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확연하게 당혹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10년 전, 리즈가 벌레를 생으로 집어먹었을 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녀에게 놀랄 것이 남아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조엘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자신의 피에서 기사의 힘이 느껴진 것은 6년 전 겨울. 유전으로 이어지는 기사의 피가 아닌, 그 사례가 극히 드물다고 알려진 발생학적 기사의 피. 단순한 감기인줄로만 알았던 열은 끊임없이 치솟았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흐려진 눈동자와 미세하게 흐르는 영력이었다.

뒤늦게 기사의 힘이 발현된 이들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영력의 운용이나 그 그릇에서 이미 타고난 기사들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랬기에, 그는 단 하나의 선택밖엔 할 수 없었다.


기사임을 숨긴 채로, 그녀의 곁에 남자.


그리고 그는 훌륭하게 자신을 숨기며 그녀의 곁에 남아있었다. 6년 간 그 누구도, 심지어 수도에 있었던 1년의 시간 중에서도 그가 기사임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한없이 가벼웠던 눈앞의 이 녀석이 자신의 정체를 간파해냈는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경악을 읽어낸 리즈는 답답하다는 듯 푸석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당장 아델한테 달려가. 가서, 그녀에게 네 감정을 전해. 그리고 그 아이의 감정을 들으라고. 이상한 곳에 그녀를 팔려가게 두고 싶지 않으면, 단단하게 붙잡으란 말이야. 이제 이 세상에 남아있는 건 너네 서로뿐이야. 그 외엔 누구도 너흴 굴레에서 구원해줄 수 없어.”


머릿속엔 아직 의구심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과 시선은 어느새 저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내딛는 속도도 더해져간다. 이미 달리라는 리즈의 외침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원으로 들어서는 조엘의 모습을 바라보며, 리즈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건 아저씨인데......., 너무 성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평생을 봐왔던 두 친구의 감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피의 굴레.

그것이 갑갑하여 부추기게 되었지만, 과연 이 감정이 흐르는 선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을지,

그녀로서도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괜히 나서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은,

숲바람에 묻혀 나무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




곧바로 아델의 침실을 향하는 조엘의 발걸음은 그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방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으리라.

노크는 하지 않는다. 이번엔 그녀를 놀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문을 두드리는 그 짧은 순간마저도 용납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


그녀 또한 놀란 눈으로 돌아보지 않는다.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젖은 눈으로 갑자기 들어선 조엘의 흐린 눈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조엘은 그런 그녀의 표정에 어째선지 가슴이 찔린 듯 아파온다. 가쁜 숨을 정돈할 틈도 없이, 그는 침대로 다가서며 거칠게 입을 열었다.


“너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야.”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아델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 사실이 너를 향한 내 가슴을 짓눌러야할 정도로 커다랗고 무거운 굴레라면, 그리고 결코 그 피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말해.”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선다.


“........시작부터 잘못됐던 거야.”


울먹이는 아델의 목소리. 그러나 조엘은,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선다.


“용납될 수 없어. 결코 축복받지 못해. 더럽다고, 역겹다고 손가락질 받을 거야. 우리가 손을 맞잡고 서있을 곳 따윈 없을 거야......”

투명한 볼을 따라 흐르는 맑은 눈물.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못하고 아델은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는다. 그러나 조엘은,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선다.


“하지만......... 하지만........”

바로 옆으로 다가선 조엘을 향해, 떨리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뻗는 아델.

“.......네 키스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는걸........”


조엘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다시 한 번 그녀에게 행복을 선물해 주었다. 다른 온기를 지닌 눈물이 아델의 닫힌 눈에서 새어나온다. 조엘은 자신의 뺨으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가슴 속에 수년을 묵혀두었던 감정이 숨결에 섞여서 입술을 오고간다.

말로 전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엘은 천천히 그녀의 온기가 묻어있는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이에 굳게 서있었던 벽을 무너트린다. 결코 축복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지금 이 커다란 굴레의 선을 넘는 순간, 무엇이, 그리고 어떤 시선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누고 있는 온기는 그 모든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따스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한센 경의 형님이시라고요......”


검성의 집무실, 벤은 자신을 찾아온 한센과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백골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이해한 슈리안은 황급하게 자신의 턱뼈를 쓰다듬는다.


“아, 죄송합니다. 깨끗하게 한다고 했는데 아직 뭐가 붙어있나요?”


“아뇨아뇨, 그게 아니라.......”

뭐가 붙어있었는지는 생각조차하기 싫은 벤이었다.

“망자로서 남아있기로 결정한 다른 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거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고 하던데, 슈리안님은 어째서 다시 검을 들겠다는 거죠?”


검만을 위해 살아오다, 검을 들고 죽었다. 그리고 우연찮은 기회를 부여받아 제2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금 검을 잡기 바라는 건지, 벤은 궁금했던 것이다.

그의 질문에, 슈리안은 공허한 시선을 돌려 한센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그에 씁쓸하게 웃었고, 망자는 다시 시선을 벤에게 돌리고 영력으로만 이루어진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부터 설명을 해드려야겠네요.”

그가 삐걱거리는 관절을 움직여 벤의 맞은편에 앉았고, 벤은 무심코 찻잔을 내밀려던 자신을 속으로 질책해야했다.

“지금은 대전쟁이라고 부르는 그 침략이 시작됐을 때, 저는 아직 채 임관도 하지 않은 스물넷의 꼬마였습니다. 하지만 입대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검에 뜻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검이야말로 제 인생의 전부였죠. 이 녀석과 함께 평생을 집에서 검만 잡고 지내왔으니까요.”

한센을 향해 ‘녀석’이라고 칭하는 사람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벤은 차향과 함께 이 묘한 괴리감을 삼킨다.

“제국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신문에선 연일 끔찍하고 절망적인 소식만 들려왔지만 저는 오히려 들떴어요. 마침내 묵혀왔던 제 검을 세상에 펼칠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장 동생놈과 손을 잡고 입대했죠. 그리고 제게 처음 부여된 임무는, 수도와 아르바티앙을 잇는 국도에서, 퇴각하는 중앙군의 후방을 보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망자의 시선이 벤의 먹색 눈동자에서 벗어나, 머나먼 시간을 되짚는다.

“머지않아 추격섬멸전을 벌이는 제국군의 선발대와 조우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전 철이 없었습니다. 맨 앞에 서서, 놈들의 선발대를 향해 검을 뽑아들었거든요. 그 때, 중앙군을 추격하던 적 선발대의 선봉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벤은 고개를 젓는다. 한센과 슈리안의 힘없는 웃음이 터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벤은 그들의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그 웃음이 재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조적인 웃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학살의 검성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낮은 웃음소리.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함께 흩뿌려지는 피가, 제가 생명으로서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평생을 갈고 닦았던 검을,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하고 끝나버린 겁니다. 뭐, 그거에 교훈을 얻었는지 동생은 끝까지 살아남아 검성까지 올랐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습니다만, 결국 제 검은 그 시대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죠.”


“즉, 다시 제대로 기사로서 검을 쥐고 싶으시다- 이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도 눈을 못 붙일 것 같아요. 물론 눈은 없지만, 하하.”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기사로서, 그리고 검을 들었던 자로서의 사명감과 포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오랜만에 일어나보니 동생이 검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더더욱 자신의 그릇을 재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계시겠지만, 망자의 몸으로 기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면 그 영력의 소모가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할당된 수명은커녕 수년밖에 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이 부분은 확실하게 인지를 하고 계십니까?”


“허망하게 잊히기보다는, 한순간이라도 불타오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슈리안의 답변이 200여 년 전 유행했던 어떤 음유시인의 유서내용을 차용했다는 사실을 벤이 알 리가 없었다.

더 이상 표정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슈리안의 얼굴이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굳건한 인상이 그려지는 듯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한센이 직접 찾아와 부탁을 할 정도면 그 실력만큼은 신뢰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꺼내려했지만, 벤이 손을 내밀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나타난 얼굴은 벤에게도, 한센에게도 너무도 뜻밖인 얼굴이었다.


“검성님께 부탁드리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곧바로 벤을 향해 다가오는 지나. 그 발걸음엔 아직 불편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목소리와 표정만큼은 날카롭게 날이 서있었다.

“특무대로의 임시편입을 요청합니다. 근위대직무는 폐하께 말씀드려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지나, 몸은-”


“괜찮습니다.”


걱정이 담긴 벤의 입을 곧바로 봉해버리는 그녀의 기세. 벤은 입술을 깨물며 곤란하다는 듯 푸석한 머리를 긁적인다. 계속해서 어둠과 절망 속에 박혀있는 게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흔들리는 감정과 답답한 상황을 분노라는 형식으로 풀어내려 한다면, 그 끝은 결코 좋을 수가 없다. 그녀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저 태양 같은 눈동자는 거절의 답변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불타고 있다. 벤은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일은, 자신이 정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알겠으니, 일단 몸을 완전히 회복하세요. 로빈과 얘기를 해볼게요.”


그제야 지나는 몸의 긴장을 풀고, 접대용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놓는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한 것도 그때였다.


“어, 할아버지?”


“몸은 괜찮니?”


놀람을 뒤로하고, 인자한 주름을 내보이는 노인.


“.......응.”

자신의 무모함을 나무라지 않는 한센을 바라보며 지나는 희미하게 웃는다. 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했던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책망과 죄책감. 그 모든 죄책감을 병실에 있던 벽난로에 태워놓고 온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이질적인 존재를 알아챈다.




“이 해골바가지는 뭐야?”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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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71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6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6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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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1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9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1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4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10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9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4 33 24쪽
»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9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2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6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5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40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6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7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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