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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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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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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12.1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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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글자
21쪽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DUMMY

경직된 도시로 새로운 햇빛이 내리쬔다. 하지만 회색도시 아르다르를 완벽하게 뒤덮고 있는 것은 여름의 찬란함이 아닌 계엄령에 따른 긴장감이었다. 베르메스 평원엔 검은 그림자 하나 드리우지 않았고 아르보리스로부터 그라우치 장군의 지원군이 당도하는 등 언론을 통해 노출되는 정보에선 비관적인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외성의 유동인구는 현저하게 줄어있었다.

특별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시의, 그리고 이 공화국의 운명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


평소라면 분주하게 기상나팔이 울릴 시간이지만 근위대막사 또한 도시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언제나 해가 뜨기 전부터 몸을 푸는 오즈카에겐 기상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리 큰 의미는 없었으나, 오늘 그의 아침은 단순히 점호를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특별한 초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대는, 베르달이 함락된 이후로 비번 없이 순환근무에 투입되고 있는 다른 근위대 동료들에겐 깊은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었다. 한동안 연락이 닿지 못했던 훈련소 동기들도 만날 수 있는 자리였기에, 오즈카는 그 초대를 거부할 어떠한 용무나 변명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단추를 채우는 그의 손가락은 무겁다. 그리고 마땅히 미소를 품고 있어야할 그의 입술은 그보다 더욱 무거웠다. 스스로는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구릿빛 얼굴은 분명히 무표정보다 굳어있었다.


“스파인! 아직이냐? 가자.”


노크와 함께 들려온 드렌턴의 목소리는 굳이 그 후덕한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미소를 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순간일 것이다. 절망적인 시국이다. 저렇게 밝은 목소리로 떠들 수 있는 날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 사실만으로도 이 ‘초대’는 가치가 있는 셈이었다.


“예.”


오즈카는 굵고 짧게 대답을 뱉지만, 곧바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가만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근위대제복 아래로 감춰진 듬직한 근육과 상처들. 옷매무새를 고치려던 그는, 문득 손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씹는다.


‘이제 와서 무슨.......’


의미 없음을 사무치게 깨닫고서, 그는 방문을 향해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




본궁 근처에 위치한 왕립교회는 꽤 오랫동안 그 기능을 멈춘 상태로 모든 행사를 미루고 있었다. 예산이 급격하게 감축됐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실상은 세뮈엘의 은총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목소리가 최근 들어 확연하게 줄어든 탓이었다. 국가차원의 행사를 제외한 모든 운영을 대부분 기부를 통해 유지하는 교회로서는 그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인 것이다.

때문에 교회주변은 선선한 날씨와 맑은 햇빛에도 불구하고 한산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로빈의 선택을 받은 가장 큰 이유. 제복을 입은 기사들 몇몇이 교회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그 분위기와 움직임을 눈치 챈 시민이나 기자는 없었다.

도시의 그 누구도,

왕립교회에서 왕의 약혼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 분 빼고 다 온 것 같네요.”


로빈의 미소를 받은 대사제는 지금의 상황이 영 못마땅한 듯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아무리 시기가 시기라지만, 국왕의 약혼식을 이렇게 도둑질하듯 넘겨버리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이라는 어중간함도 이해가 되지 않은데다가,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교회가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는 사실이 그의 사심을 괴롭히고 있었다.

온 국민의 축복을 받는 대신 로빈이 교회 안으로 모은 얼굴은 20명도 채 안 되어보였다. 흐뭇하게 실실 웃고 있는 드렌턴과, 벌써부터 박수칠 준비를 하는 오즈카. 의회대표로는 오로메와 란다가 참석한 모양이었다. 그 외 대부분의 하객들은 로빈과 지나의 훈련소 동기들이었다. 공화국 곳곳에 흩어져있던 동기생들이 중앙군이란 형태로 간신히 수도에 모이게 되었으니, 이참에 이렇게라도 자리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로빈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객이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든 기사들은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그에 대한 예를 표한다. 환자용 바퀴의자에 의지한 채로 모습을 드러낸 한센이었다. ‘검성이었던’ 노인은 천천히 바퀴를 밀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모든 기사와 귀족들에게 일일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다. 야윈 얼굴과 깊어진 주름은 지난 200여 년간 공화국을 대표하는 검성으로서 이름을 높였던 그의 세월이 끝나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 그러나 검과 직책을 모두 놓은 그의 몸은 한없이 가벼워 보이기도 했다.

지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음으로써 인사를 대신한다. 어째선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는 더없이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다짐했기에, 그녀의 미소는 태양보다 밝게 교회를 비추고 있었다.

약식으로 이뤄지는 약혼식이다. 로빈도 지나도 예복이나 드레스가 아닌 남색제복을 입은 채였다. 그것이 미안하다는 로빈에게, 지나는


“난 결혼식 때도 드레스 따윈 안 입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라며 새빨간 혀와 함께 웃어주었다.


모든 하객이 자리에 앉았고, 대사제는 목을 가다듬으며 결혼을 맹세하는 선언문을 낭독할 준비를 마친다.

그 순간까지 로빈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는 건,

마땅히 이 자리에 함께했어야할 얼굴이었다.




===============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던 도시의 건물들은 새카만 물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잔해만 남은 그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은 내성벽 높이에 맞춰 조립된 수많은 공성탑과 사다리들. 그들의 영마력원동기가 내뿜는 불길한 연기와 소음이 성벽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사거리에 들어왔음에도 성벽 위의 마법사들은 공격마법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 포격에 쓸 마력을 최대한 아껴야한다는 자히르의 명령이 있었던 탓이다. 그의 예상대로, 이제 곧 쏟아질 적들의 포격을 막아내기에도 이미 지쳐있는 마법사들의 마력은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공성탑에서 내려놓는 도개교는 기사들이 담당한다. 뚫리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막아라. 마법사들은 무조건 방어막 유지에만 집중해. 당장 눈앞에 칼이 날아들어도 마력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네가 미련을 놓는 순간, 도시는 끝장난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검은 파도를 눈앞에 두고도 영력이 실린 자히르의 목소리는 이질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차분함도, 그의 목소리를 흘리다시피 떨고 있는 병사들의 마음까지 다잡아주기엔 무리였다.

성벽과 망루에서 자히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자들은 드라흐마 가문의 사병들과 아르바티앙 경비대가 전부였다. 물론 시즈키치 가문의 지원군이 늦은 건 아니었다.


“내성 지하에서 밀고 올라올 망자들은 시즈키치 가문과 저희가 담당하겠습니다. 아르바티앙의 병사들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요.”


자히르는 벤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닥까지 떨어진 사기다. 병사들이 자신의 가족이자 선조였던 이들을 직접 상대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차선책일뿐, 망자들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되지는 못한다. 남은 영력과 생명을 오로지 살육의 명령만을 위해 소진할 망자의 군대다. 그리고 그 숫자는 ‘명령자’의 기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수만, 수십만의 망자를 상대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성벽의 아르바티앙군도 공성탑과 사다리를 통해 밀려오는 망자의 군대를 맞이해야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지만, 성벽 위가 아닌 땅 위에서, 그것도 모든 지하입구를 통해 몰려드는 망자들에게 포위당한채로 그들을 제압한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압박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쪽의 병력을 나눌 여력은 없다. 살의와 파괴만을 품고 이곳을 향하고 있는 제국의 해병대 8천. 그들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의 기사가 있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주력을 분할시키는 위험을 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제 이 도시에서 안전한 곳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지.”


글레이브를 꺼내들며 중얼거린 자히르의 목소리였지만, 그 허망함에 영력은 담겨있지 않았다.

어느새 그림자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다가온 공성탑. 도개교를 내리기위해 쇠사슬이 비명을 내질렀고, 탑의 최상층에서 제국전투마법사들의 맹렬한 포격이 시작된다.



===



“최대한 지하로 통하는 입구들을 봉쇄해두긴 했지만, 임시일 뿐입니다. 내성에만 해도 입구가 수백 개에요.”

성벽 바로 아래 위치한 광장. 시즈키치 가문의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 중앙 분수대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물장난을 치는 벤의 표정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보고하는 카논의 표정이 다급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레이쇼 중위가 본궁 앞에서 저지선을 구축해놨습니다. 유사시엔 그곳이 마지막 방어선이 될 테니까요.”

‘유사시’라는 말이 왜 이리도 확정적으로 들려오는 것일까. 벤은 덥수룩한 먹색머리를 벅벅 긁으며 쓴 웃음을 삼킨다. 동시에 그의 깊은 시선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새로운 그림자를 눈치 채고는 여름빛을 받아 번뜩인다.


“본궁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벤의 푸념에, 고도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옆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그녀의 허리에 안겨있던 이리스가 곧바로 벤의 품으로 달려든 것은 물론이었다.


“마음이야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지. 근데 네가 이리스 표정을 봤어야 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고도. 그에 벤은 기특하다는 듯이 이리스의 은빛 머리칼을 어지럽게 흔들어 주었다. 그게 또 기분이 좋은 듯, 얇게 웃으며 더욱 깊이 파고드는 소녀. 그 은빛 정수리 위에 턱을 얹으며 벤이 한숨을 내쉰다.


“이리스는 너한테 붙여놓을 테니까, 괜히 또 답지 않은 짓 하려다가 다치지 마.”


“걱정 마셔.”


그 이상으로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이리스를 향하고 있는 고도의 바닷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에 남아있는 한, 고도 또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


폭발음과 거센 함성이 동시에 도시를 찢는다. 모두의 시선이 그 근원지를 쫓아 성벽 위를 향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내성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빨리 움직여! 위치로!”


“위치로!”


카니아와 카논의 영력이 실린 강력한 외침이 성벽 위의 소란을 덮으며 내성에 울려 퍼진다. 그것을 신호로 시즈키치가의 병사들은 광장을 비롯한 내성 곳곳에 분대단위로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시선은 각분대별로 할당된, 깊은 어둠을 삼키고 있는 입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음의 농도를 더해가는 성벽 위와는 달리, 광장은 더더욱 깊은 침묵에 가라앉는다. 무기의 끝에 담겨있는 불길한 감정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으나, 단 하나, 다른 곳을 바라보는 먹색 시선이 있었다.


“조심해.”


고도는 갑자기 들려온, 기대하지 못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벤을 돌아보았다.

벤은 그녀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도는 그것이 너무도 불안하게 다가와, 자신도 모르게 이리스의 손을 꼬옥 붙들어야했다.




================




“라로프!”

아실레마제국 제2군단 ‘해병대’ 특수강습여단장 댄 스파인은 계속 침묵하고 있는 혈마법사의 이름을 외친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다급함은 담겨 있지 않았지만, 많은 수의 공성탑과 사다리가 투입됐음에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아르바티앙의 내성벽을 향한 불쾌감이 슬그머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흑색 로브 아래로 감춰진 마법사는 그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라로프! 뭐하고 있나? 어서-”

댄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여 마법사를 향해 다가가 구릿빛 손을 뻗었지만, 손끝으로 스며들어오는 불길한 기운에 황급하게 손길을 거둬들여야 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그였으나, 엄습하는 불길함에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마치, 그 마법사가 서있는 공간만은 이 세계에 귀속된 현실이 아닌 것만 같은, 그가 봐왔던 그 어떠한 영력의 파동보다도 이질적인 뒤틀림. 그리고 감히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악마의 속삭임.


마법사는 침묵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계약자를 종속시키는 그 압도적인 목소리에 심취하여, 그의 권능을 빌리고 있었다.

비루한 생명을 매개로 바친 마법사는 두 눈을 비롯한 몸의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혈마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불길한 반액체의 형상은, 도시의 지하로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스며들어간다.




==============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영력과 마력을 느낄 수 없는 일반병사들 조차도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는 음산한 기운을 피부로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미세하게 느껴지는 땅의 울림. 그것이 성 밖에서 다가오는 공성탑 때문이 아님은, 죽음으로 통하는 어둠 속을 주시하고 중인 살아있는 목소리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무기를 고쳐 잡고, 마른 침을 힘겹게 넘긴다. 이제부터 막아야하는 존재는 여태까지 상대해왔던, ‘생명’을 거두는 것만으로는 멈출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 물리적 실체를 넘어, 남아있는 의지와 영력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들어선 안 되며, 공허한 눈동자는 마주해선 안 된다.

그럴 수 없다면, 필멸자들의 얕은 생명은 이슬처럼 빨려 들어갈 것이다.

계속해서 그토록 마음을 다잡았건만, 결국 그 실체를 처음으로 맞이하는 건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나, 나왔다!”


봉쇄가 무색할 정도로 망자들은 동시에, 그리고 맹렬하게 살아있는 냄새를 탐하며 지상으로 쏟아져 나온다. 담담하게 반응하리라 확신했던 카논마저도 입술 끝에 이는 경악을 숨길 수가 없었다.

눈동자가 있었던 짙은 공허엔 검붉은 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미 사라지거나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살점들과, 너덜한 가죽 사이로 채 썩지 못한 근육이 시취를 풍기며 흐른다. 불결함과 불길함 그 자체였다. 부패의 농도에 따라 저마다의 외견은 달랐지만, 그 기괴한 움직임만은 공통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벤의 생각보다 치명적이었다.

벤은 처음 망자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의지를 잃고 느슨하게 다가오는 걷는 시체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지금 지하에서 튀어나오는 붉은 존재들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부여받은 짐승처럼 뒤틀린 움직임으로 뛰어나오는 악몽이었다. 이성과 육신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난 그 기세와 속도는, 도저히 일반적인 사고로는 상상해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그들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은 병사들도 마찬가지. 곧이어 곳곳에서 비슷한 비명과 혼란이 튀어나온다.


“모여라! 중대단위로 모여서 대처해라! 방어태세를 취해! 성벽으로 접근을 허용하지 마라!”


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카니아의 목소리가 먼저 그의 생각을 대신하여 병사들의 시선을 붙들어준다. 성벽의 바로 아래에서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망자들을 침착하게 베어 넘기는 그녀였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그리 수월하지 못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망자들의 숫자와 빠르기에 병사들의 대열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목을 물어뜯기고 심장이 파헤쳐지는 병사들의 비명이 광장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카논은 망설임 없이 기병도를 뽑아들었고, 이리스가 몽환적인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너진 대열 사이로 파고든 망자들이 자석처럼 분수대를 향해 광기를 뿜고 있었다.


“허, 지휘부를 파악한 건가? 망자들을 조종하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알겠군.”


고도는 느긋하게 분석이나 하고 앉아있는 벤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녀 또한 발화와 소거 주문을 외우던 참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붉은 위협 속에 가만히 앉아 카논과 이리스의 보호만 받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라흐마 가문 소속의 전투마법사로 복무하는 동안 고도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다시는 나약하게, 다른 이의 손길만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지는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총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했다. 학업적인 분야를 뛰어넘어, 마법에 관련된 그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 짧은 절망 속에 자신이 했던 선택은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 참으로 굴욕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선택을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투르탄 숲의 쓰레기더미에서는 작은 불씨의 역할만을 했던 그녀의 발화마법이, 이젠 높은 불기둥과 함께 공간왜곡으로 주변의 망자들을 끌어들이고, 그 자리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한다. 산산조각으로 광장에 흩어지는 망자의 조각을 고도는 소각마법을 통해 2차 파편으로 만들어 다가오는 붉은 존재들의 다리를 찢어버린다. 벤의 감탄을 자아내는 연계였다.

하지만 그는 입 밖으로 칭찬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녀의 집중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거니와, 광장으로 진입하는 망자의 숫자가 그녀의 지구력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던 탓이다.

카니아의 외침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 의미 없음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성벽으로 향하는, 한때 숭고했던 존재들이 점점 더 그 위대함을 버리고 있는 것인지, 벤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천천히, 고도와 카논, 그리고 이리스가 분투하고 있는 분수대로부터 한걸음, 한걸음 떨어진다. 곧바로 그는 무리에서 떨어진 유체를 노리는 짐승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고도와 카논이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 직후였다.


“벤!”


고도의 비명 같은 외침이 카논보다 빨랐다. 그녀는 손끝에 몰려있던 마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력을 놓지 않았지만, 벤의 뒤로 접근하는 세 명의 망자는 그녀의 바닷빛 눈동자를 격하게 흔들고 있었다.

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주문을 외웠고, 푸른 줄기가 대리석바닥을 꿰뚫고 튀어나와 망자들의 발을 휘감는다.


“바보야!”


고도의 이어진 외침은, 벤이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튀어나온 질책이었다. 벤 특유의 자연계 주문이 담고 있는 독은, 분명 ‘생명’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망자의 ‘생명’은 신체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독을 비롯한 자연계주문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줄기를 벗어나 벤에게 달려드는 망자의 짓무른 손길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고도의 눈에, 당황한 벤의 얼굴이 들어온다.


제일 앞서 있던 망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벤의 목을 휘감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무서운 광경이 점점 명확하게 고도의 이성을 조여 온다. 주문을 외우기엔 이미 늦었고, 카논과 이리스는 다른 망자들에게 발목이 잡혀있다.


고도의 머릿속에서, 이제부터 이어질 끔찍한 광경이 여태까지 그녀가 풀어왔던 모든 문제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자신이 겪어왔던 그 어떠한 절망보다 끔찍한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다. 의문을 용납하지 않는 그녀조차도 순간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을 정의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목청으로 터져 나오는 그 감정과 공포를 억제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안 돼에에에에에에!!!”



오랫동안, 평생 동안 감추어왔던 그녀의 감정이 폭발하는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천천히 흐르던 시간은 그녀의 사고와 함께 완전히 멈췄고, 그 정경에 환희하는 불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스친다.


“대가는 잘 받았다.”


그 속삭임은, 너무도 정확하게 고도의 눈물을 씻겨내고 있었다.


“절망의 나락에서 분출하는 목소리는 언제나 달콤하고, 그 색은 한없이 붉을 수밖에 없지. 침묵을 되돌려주겠다. 니 새끼의 그릇은 그 모든 것을 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있었다.


“스스로의 무능을 탓하며 무저갱에서 울부짖어라. 동시에 그 침묵하는 짐승을 길러라. 이 세계에서 나의 권좌는 이제 이를 통해 사도들의 시기를 받으리라. 그 그릇됨을 찬양하며 탐욕을 놓지 마라. 그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존재할 리가 없는 침묵. 다가오는 붉은 시야.





[이제 나의 목소리를 들려주겠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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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5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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