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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23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2.06 20:03
조회
1,363
추천
35
글자
19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DUMMY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그로 인해 맺히는 눈가의 서리를 떼어낸다. 새벽바람에 맞서 몇 번이고 허연 입김을 뿜어보지만 로빈의 눈가에서 서리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피로를 제대로 풀지 못한 탓이 아니었다. ‘아예’ 풀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서 표정을 죽이고 있는 지나도 마찬가지.

달콤했어야 할 밤이 느닷없는 싸움으로 아침까지 번져버린 게 원인이었다.



“결혼 안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잖아! 좀 더......, 좀 더 검을 들어보고 싶어. 너도 동의했잖아, 당분간은 이렇게 만족하자며!”


“그러니까 언제까지 약혼한 상태로 이러고만 있을 거냐고? 네가 검성이라도 되고 나서야 만족할 거야? 네가 기사로서 곁에 있고 싶다는 걸 허락한 이유는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어. 하지만 지금 우리를 봐. 오즈카나 아저씨가 당직이라도 바꿔주지 않으면 만나기도 힘들잖아.”


지나가 이불로 몸을 감싸며, 불타는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허락? 너 진짜 웃긴다. 내가 네 허락받지 않으면 기사도 못해? 그리고 바빠서 못 만나는 게 내 탓이야? 난 훈련하고 근무서고 나면 너만 기다리고 있어. 비번인 날엔 너랑 같이 나가서 아이스크림 먹고 싶고, 손잡고 분수대도 거닐고 싶고, 밤엔 너한테 어리광도 좀 부리고 싶어. 그러지 못하는 게 내 탓이야?”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원망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나를 향해, 로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같이 있자는 거잖아. 나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날마다 너무 힘들어. 난 너와 가족이 되고 싶은 거지 단순한 애인이 되고 싶은 게-”


혀를 멈추어야 한다고 느낀 것은 이미 늦은 뒤였다. 암묵적으로 묻어놓고 무시해왔던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로빈은 자신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는 지나의 손에 대해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난 너에게 ‘가족’을 줄 수 없어, 로빈.”


“알아, 지나, 다시 생각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가족이 꼭 그런 가족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


“왕이라는 존재에게는 꼭 그런 가족만을 의미하는 거야.”


결국 지나는 시린 달빛 아래에서 로빈을 향한 태양을 거두었다. 단순히 시선이 벗어난 것뿐인데도, 로빈은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다시는 꺼내기 싫었지만, 결국에는 꺼내야 하는 말을 위해.


“.......지나-”


“그 이야기는 하지 마.”

그러나 역시, 그녀도 예상했던 모양.

“넌 지금 루디 선배님이랑 리반나 씨랑 어떻게 됐는지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그 얘기가 나와? 누군가의 행복이 될 수도 있는 권리를 빼앗아서 나에게 심으라고? 난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






결국 둘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논쟁을 마무리 지을 수 없었고, 겨울의 태양보다도 어색한 분위기의 차량 속에서 베르메스 평원을 가로지르게 된 것이다.

비공식 시찰이었기에, 업무가 시작되지도 않은 이른 시각을 통해 드렌턴과 지나만을 데리고 아르다르를 빠져나온 로빈이었다. 평소였다면 오순도순 일상대화라도 나누며 산책처럼 이뤄졌어야 할 이번 ‘원정’이 본의 아니게 정말로 전쟁터를 향하는 기분이 되어버린 건 결국 자신의 책임. 로빈은 침묵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리즈를 보러 가는 거지?”


그랬기에, 의외로 먼저 입을 열어준 드렌턴이 더없이 고마운 로빈이었다.


“아, 응.”


대답과 함께 운전대를 잡은 드렌턴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단단한 시선은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시 끊겨버린 대화와 그를 대신하여 올라오는 하품. 코를 훌쩍이며 눈가에 맺힌 서리를 떼어내려는 로빈의 손을 멈춘 것은 새벽안개처럼 내리깔리는 묵직한 목소리였다.


“그 아이는......., 어때?”


무의식적으로 질문의 의도를 되물으려던 로빈은 잠시 드렌턴의 돌아오지 않는 시선을 확인한다. 그에게 있어 리즈라는 아이의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감히 예측해보았지만, 저 표정이 품고 있는 게 무엇인지까지는 생각이 닿을 수 없었다.


“싹싹하고 착한 애야. 만난 지 반년도 안 된 나를 진짜 친오빠처럼 따르더라구. 조금 겉으로 돌 거 같은 끼가 보이긴 하는데 아직까진 괜찮아 보여. 기사로서는....... 잘 모르겠다.”


“.......나나 리반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디?”


“걱정하고 있어.”


걱정이란 단어로 함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 시찰의 목적이 단순히 동생바보오빠의 사심 가득한 면회가 아니란 것쯤은 드렌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오즈카나 다른 근위대가 아닌 굳이 자신을 대동했다는 점에서 드렌턴은 로빈의 의중을 반쯤 읽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네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지금 불편한 건 리반나와 네 아버지, 그리고 아뮤르의 어머니에 대한 문제들이지 너는 크게 상관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럼 왜 나랑 눈을 못 마주치는데?”

차체가 크게 덜컹거리는 것을 신호로 왕과 근위대장의 눈이 실로 오랜만에 마주친다. 그리고 로빈은 드렌턴의 눈동자가 덜 포장된 도로와는 별개로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했다.

“내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의 연장선인지, 그로 인해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날 살려낸 선택에 회의감이 든 것인지, 눈을 마주치고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알 수가 없어. 물론 내가 그에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혼자 끙끙 앓고 있지는 말아줬으면 해. 이건 왕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아저씨 친구로서의 부탁이야.”


“.......친구라.”

드렌턴의 갈색 시선이 다시금 흔들리는 전방을 향한다. 그러나 그것은 로빈의 얼굴과 목소리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은 아니었다.

“로빈, 나는 아티카에서부터 지금까지, 너를 아들과 비슷한 존재로 여겨왔다. 그건 내 손으로 미래를 끝내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 또는 자기합리와 대리만족이라는 욕망에 가까웠을 수도 있겠지. 내가 왜 너를 피하냐고? 당연히 고통스러우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

그의 고통은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리반나의 상처 또한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리반나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니, 그녀가 그러더군. ‘당신을 위해서 였다’고. 그녀는 자책하고 있었고, 나와 아이 모두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새로운 생명을 품고 싶어 했던 그녀를 차마 비난할 수 없었어. 내가 그건 집착이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하지만 너를 안고 아르다르에서 도망쳐 살아온 지난 18년이 결국 그녀와 나에게 어떤 시간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과연 집착하고 있었던 것은 누구일까? 그런 고통의 되새김질이었다.”


“.......결국, 아저씨는 내가 아저씨를 ‘친구’ 이상으로 여겨줬으면 했던 거야? 죽은 그 아이를 대신해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선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지.”

절망적인 전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깊은 한숨이 드렌턴의 마른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난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너는 물론이고 리반나에게도, 리즈에게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혼란을 알아달라고 강요할 수가 없어. 결국엔 내가 안고 가야 할 짐이니까.”


더 이상의 하품이나 눈가에 스미는 서리는 없었다. 드렌턴이 안고 가야 할 시간, 그리고 여태까지 그가 안고 왔던 시간. 리반나의 집착이 아닌 집착을 가장 절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그녀를 납득할 수 없는 모순. 로빈은 자신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인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놓는다.


“아저씨. 나는 여태까지 가족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어. 그리고 여기, 이 자리에 와서야 토우칸형님, 리즈라는 가족을 얻을 수 있었지만, 나에게 진정한 가족이란 의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아저씨와 벤이야. 아버지에 가장 가까운 존재, 그리고 형제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구. 아저씨의 상처를 마음껏 내보이고 대리로 만족할 상대를 찾고 싶으면 언제라도 되어줄게. 그러니까 제발 혼자서 수그리고 있지는 마. 그리고....... 나는 아저씨가 아저씨의 ‘가족’을 되찾았으면 좋겠어.”


어깨를 온기로 물들이는 로빈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는 드렌턴. 그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낭이 들으면 기겁했겠구만.”

마주 웃는 두 남자. 드렌턴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만큼 로빈의 가슴도 가벼워질 수 있었는데, ‘가장 가족에 가까운 측근’으로서의 드렌턴은 곧바로 아픈 틈을 치고 들어와 버린다.

“하지만 네가 아뮤르에게 제의한 건 나로서도 지지해줄 수가 없다.”


“.......어?”


‘저 자식이-’


드렌턴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원망을 담은 눈빛으로 뒷좌석의 지나를 노려보지만, 이미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자는 척을 하는 중.


“아뮤르에게 뭐라고 하지 마라. 저 애도 밤새 혼자 고민하다가 끝내 나를 찾아온 것뿐이니까.”


지나가 드렌턴과 리반나를 들먹였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로빈은 결국 반박할 생각은 접은 채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알고 있어. 어리광부리는 거. 터무니없는 욕심이라고 욕해도 좋아. 그래도 난....... 지나와 가족을 이루고 싶어.”


“왕비란 그다지 낭만적인 존재가 아니다, 로빈. 기사와 병행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은 제쳐두고라도, 왕비라는 직책은 총리보다도 우선시되는 왕의 대리이자 후계자의 어머니가 되는 거야. 넌 정말로 그런 굴레에 그녀를 옭아매고 싶은 거냐? 그리고 ‘왕비’로서 그녀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자 의무를, 지금 그녀로서는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응........”


로빈은 답답했다.

그녀를 곁에 두고 싶다. 그녀와 언제나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리반나와 드렌턴이 겪었던 고통을 누군가에게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함께하고 싶은 이 마음을 모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랬기에, 로빈은 너무도 답답했다.


“너희에게 아직 시간은 많아. 자연치유 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냐. 아뮤르가 가진 기사로서의 회복력을 믿어봐라. 언젠간 너희를 위한 시간이 올 거야.”


우리를 위한 시간.

로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나는 자신을 조급하다며 다그친 이유를 직접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자연치유’의 가능성. 물론 지나를 치료했던 본궁의 의사도 모두의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 희망을 잃지 말라는 건 그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의무니까.

그러나 후에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로빈과 독대하며 의사가 꺼낸 이야기는,

조금 그 무게가 달랐다.


“다 왔다.”


죽은 땅 위에 마련된 훈련장. 마치 군영과 같은 엄숙함을 품고 있었지만 역시 그 구성을 이루고 있는 얼굴들의 풋풋함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이미 한차례의 훈련을 마치고 복귀한 뒤였는지 생도들의 눈동자는 짙은 피로가 휘어잡고 있었다. 남색 교관복장을 하고 있는 카논 외에는 그 누구도 갑자기 위병소로 다가오는 차량에 대해 관심을 주고 있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교관으로서의 위엄과 엄숙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왔던 덕분인지, 한없이 부드럽고 둥글기만 하던 카논의 얼굴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야외훈련장에서 유일하게 로빈의 방문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신속하게 천막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으로 차량을 유도할 수 있었다.


“아! 오빠아!”


내리자마자 로빈을 반기는 익숙하고도 명랑한 목소리. 빠르게 달려와 가슴에 안기는 리즈의 머리를 로빈은 마주 웃으며 마구 헝클어주었다. 동시에 짙은 땀 냄새가 그의 코를 찔러왔지만, 아무리 리즈라도 그걸로 놀린다면 얼굴을 붉힐 것 같았기에 로빈은 참기로 한다.


“쉬는 시간 뺏어서 미안. 살은 좀 쪘어?”


“오빠랑 언니라면 언제라도 괜찮아. 에헤헤헤.”


절로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동생의 풀린 얼굴이다. 리즈는 뒤에서 나타난 지나에게도 똑같이 달려들어 안긴다. 볼을 비비적거리며 재회를 만끽하더니, 갑자기 이쪽을 노려보는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에 로빈은 숨을 삼켜야 했다.


“둘이 싸웠구나?


“싸, 싸우긴 뭘.......”


도대체 이 아이의 코는 어디까지 잡아낸단 말인가.

그리고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리는 드렌턴을 향하게 된다. 머쓱한 표정으로 차문을 닫는 그를 향해 먼저 반응한 것은 리즈였다.


“아.”


지나의 품을 벗어나, 천천히 드렌턴을 향해 다가서는 리즈. 그런 그녀의 똘망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드렌턴에겐 고역이었다.

하지만 리즈는 그런 그의 손을 덥석 맞잡고는,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오랜만이네요, 엄마의 남편님.”




=================




“이상이 현재 브린타이나의 상황과, 욘의 대통령께서 제의하신 내용의 전부입니다.”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마누앙은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의 반응을 살핀다. 큰 소란은 없었지만, 모두가 이 얇은 종이에 담겨있는 내용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두고서 폐하는 어디에 가신 겁니까?”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 란다의 표정과 목소리. 하지만 답하는 마누앙은 담담하기만 했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용무가 있어 잠시 시찰을 나가셨습니다. 점심 전까지는 복귀하실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용무라니........”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드는 란다. 그의 반응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마누앙이 다시금 검푸른 입술을 움직인다.


“폐하께선 일단 현재 브린타이나 신정권의 반응을 보고 나서 결정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잡으셨습니다만, 다른 의견이 있으신지요?”


“파이튼을 침략하고, 공화국의 왕자를 빼돌려 내전과 전쟁을 유도한 론크리스 국왕을 우리 공화국에서 옹립할 이유가 있는 거요?”


“그건 브린타이나 정보부장관의 독자적인 작전이었다고 판명이 나지 않았습니까?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손해가 막심한 지금, 함께 동맹을 구축한 론크리스 정권의 복권은 공화국에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직 신정권은 제국의 편에 설지, 우리와의 동맹을 유지할지 천명하지 않았잖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론크리스의 머리를 베어 그들에게 넘김으로써 호감을 사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궤변입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니에브나 블라고슬로바와의 동맹도 깨져버릴 겁니다!”


란다 가슈펠라르를 중심으로 한 귀족파는 론크리스를 배척하는 쪽으로 미리 의견을 모은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오로메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는 마누앙과 로빈의 의견대로 브린타이나 신정권의 반응을 지켜보자는 방향이었다. 로빈이 기대했던 제3의 의견은 나오지 않는 상황. 회의실을 채우는 의견마다 간단하게 받아 적고 있는 마누앙이었지만 좀처럼 영양가 있는 내용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브린타이나에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혼란의 틈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 마누앙은 그 출처를 향해 시선을 옮기지 않아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귀족파의 의원직을 맡고 있는 그의 사촌동생, 폴론 니바르토였다.

“우리가 먼저 브린타이나에 서신을 보내보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와의 동맹을 유지할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제국의 편에 설 것인지 답을 요구하지요. 만약 그들이 동맹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의리나 도의적 책임을 따지는 것보다는 론크리스의 목이 그 계약의 훌륭한 증표가 될 수 있을 테지요.”


마누앙은 짧은 한숨 뒤에 입을 열었다.


“단순히 말로만 동맹을 유지하겠다 표명하고 론크리스가 죽은 뒤에 태도를 바꿀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론크리스 국왕이 없다면, 동맹이라는 국가 간 계약을 묶어둘 그 어떠한 강제력도 우린 구사할 수가 없으니까.”


“흐음, 이상하군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모두의 시선이 의문을 제기한 폴론에게 집중된다.

“애초에 제국이란 공통의 적에게 대항하고 있을 뿐이지, 4개국을 묶어두고 있는 건 우리 측 검성이 맺은 구두계약뿐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브린타이나나 니에브, 블라고슬로바가 아닌 ‘중립국’ 욘이 가장 확실한 요구와 보상을 들고 왔지요. 지금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도 팔루뎀과 동맹 둘 모두를 쉽게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오열의 검성이 장악한 브린타이나 측에 먼저 의견을 보내, 욘과 론크리스가 제시한 보상을 공개하면서 저울질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폴론의 말대로 잘만하면 팔루뎀과 동맹 모두 론크리스의 복권이라는 복잡한 과정 없이 얻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마누앙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폴론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욘의 대통령, 그륜이라는 인물의 기질이었다.




=============




“이래서 장사해본 적 없는 인간들은 안 돼. 필요할 때 과감하지 않고, 그저 어설프게 머리를 굴릴 뿐이거든.”


그륜이 노릇하게 익은 양고기를 뜯으며 푸념한다. 도시에서 배를 채울만한 곳이 있냐는 그의 질문에 로빈이 추천해준 여관, ‘은벽의 낭만’. 섬나라사람의 입맛을 그럭저럭 만족시켰는지, 이미 그가 비워낸 접시만 해도 벌써 다섯 그릇째였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제가 카나반의 왕이었어도 아마 각하 같은 사람이 불쑥 찾아오면 의심부터 할 텐데요.”


“뭐 임마?”


깨끗하게 살을 발라낸 뼈를 집어던진 그륜이었지만, 재규는 가볍게 그를 피하며 맥주잔을 내려놓는다. 목소리와 차림새부터 행동까지, 일국의 대통령과 그의 경호대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경박함이었기에 주변의 그 누구도 그들과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진짜로 ‘오열’이 입장을 표명할 때까지 기다리실 겁니까?”


“으음, 시간이 애매한데.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는 길을 틔워놔야 놈들과 거래를 할 수 있지 않겠어?”


“딱히 기한을 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괜히 민감한 시기, 민간한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손해만 보고 물러날까 걱정입니다.”


불만 가득한 재규의 표정을 향해 큰 웃음과 함께 고기의 파편을 튀기는 그륜.


“너는 날 그렇게 봐와 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아직아직 멀었구나, 정 재규.”


“그거 황공하네요.”


맥주잔을 맞부딪치는 둘. 시원하게 잔을 반쯤 비우고 나서 다시 나타난 그륜의 눈동자는 즐겁게 번뜩이고 있었다.


“찌질한 인간들이 머뭇거리고 있으면, 나 같은 대인배가 좀 부추겨줘야겠지.”


이 인간 또 시작이군.

라고 웃으며, 재규는 맥주잔을 비운다.





브린타이나 왕국의 수도 ‘디나스아리얼’의 서쪽, 디나스 강의 하류에 닿아있는 마을 ‘디나스어맨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용병들과 해결사에게 습격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날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던 때였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ㅠ

요번 주와 다음 주는 시험기간이라 연재 속도가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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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5.02.06 20:36
    No. 1

    잘 보고 갑니다만...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군요. 하핫~ 전투씬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검성님은 왜 안나오시는거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06 20:47
    No. 2

    우왕 주정님 빠른감상 감사드립니다!
    역시 외세얘기만으론 풀어나가기가 힘들군요 ㅠ
    벤은 안보인다 싶으면 어디선가 구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07 14:27
    No. 3

    근데 요즘 로빈 좀 왕으로서의 자질이 좀 부족해보임...
    힘든 일이 많은건 이해하는데 저런 회의가 진행되는데 두사람 화해시킨다고.. 우선순위결정장애끼가 좀 있음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07 15:38
    No. 4

    어엌 에볼루션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우선순위결정장앸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긴급회의 같은걸 농땡이 치는건 아니니 너그럽게 봐주시길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2.07 15:53
    No. 5

    엄마의 남편님... ㅋㅋㅋ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07 15:59
    No. 6

    동결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래그타임
    작성일
    15.02.09 09:11
    No. 7

    아...근대 네덜란드 공화국은 통령 자리를 오라녜 가문이 사실상 세습(?) 하는 공화국인지 왕국인지 모를 이상한 국가였거든요. 그것 또한 알고 있으신가 해서... 이름은 공화국이었는데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09 15:27
    No. 8

    래그타임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아 그랬나요? ㄷㄷ;; 빌럼1세에 대해선 겉핥기식으로만 배운지라 자세히는 몰랐어요 ㅋㅋ; 그냥 특이한 구조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지라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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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70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5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7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4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1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9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5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7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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