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87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27 23:17
조회
1,359
추천
35
글자
21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DUMMY

“아, 이런.”


가벼움이 걷힌 검성의 흑도는 200년간 묵혀온 세월로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영압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지는 소태도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망자의 쇄골부터 골반까지 베어버리는 악의의 그림자. 슈리안은 박살나며 허공으로 튀어나가는 자신의 뼈들을, 눈동자를 대신하는 공허한 푸른빛으로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무너진다.


“-!”


그 와중에도 절대로 틈을 허용하지 않는 붉은 장미였지만, 엘라는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잽싸게 다가온 벤이 슈리안의 해골과 남아있는 파편들을 수습하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벤의 존재 자체는 장미에게 있어서 야생동물만도 못한 위협이었기에, 그는 어렵지 않게 망자의 잔해를 주워 무시무시한 영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 이거 미안합니다. 역시 장비빨이란 게 믿을 건 못된다니까.”


벤에게 온몸이 박살난 와중에도 유쾌하게 움직이는 턱뼈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크라트가 보조하기 위해 내려오기는 했지만, 성치 않은 몸의 엘라가 그다지 길게 버티지 못할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대충 알겠어. 최후의 저지선이 아니다- 이거지. 정말 너희는 나를 진짜 얕보는구나.”



밤바람이 멈춘다.

나뭇잎들은 흔들림을 멈추었고

나무는 숨을 쉬지 않는다.


크라트가 뒤로 물러나며 몸을 숙인 것은, 순수한 기사로서의 본능이었다.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휘두른 장미의 흑도가 파괴의 영역을 만든다. 크라트는 눈보라처럼 번지는 영력의 광풍을 피해낼 수 있었지만, 그 후폭풍이 만들어내는 ‘영역’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숨 쉬던 모든 나무가 잘게 부서지며 달빛아래 흩날리고, 촉촉함을 품고 있던 대지는 먼지가 되어 장미의 발아래 그 호흡을 멈춘다. 생명의 흔적을 가진 모든 존재를 삼킬 듯 몰려드는 붉은 파동의 품에서, 영력이 담긴 검 하나만으로 몸을 보호하기엔 붉은 장미의 전력(全力)은 그 무게와 의도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내상의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코와 입에서 비죽 흘러나오는 건 분명한 상처의 잔재. 후들거리는 신체와 간신히 그 유약함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관절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지만, 크라트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눈앞에 서있는 것은 분노한 장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로 내리쬐는 달빛을 가로막고서

당당하게 두 발로 서있는 존재는

그를 등지고 있는 꽃잎의 뒷모습이었다.

“.......엘라?”


“저 아줌마 화나면 무섭다고 했잖아, 여보. 한 호흡 쉬었다가 나왔어야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밝은 목소리. 그러나 크라트는 그녀의 전신에서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는 영력의 파동을 읽을 수 있었다. 붉게 번지는 그녀의 셔츠. 말라버린 바닥을 적시기 시작하는 피.

크라트는 깨닫는다.

자신이 ‘붉은 장미’의 가시폭풍 속에서도 멀쩡히 서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바닥에 꽂힌 장검을 축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엘라의 몸이 서서히 흔들렸고, 크라트는 곧바로 달려 나가 그녀의 쓰러지는 몸을 간신히 안을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피가 터져 나오는 엘라의 입. 흑도의 악의를 그대로 맞받아낸 복부의 상처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이렇게 터트려보는 건 흐름의 영감이랑 붙었을 때 이후로 처음인데, 그걸 버텨내다니 역시 핏줄은 속일 수가 없구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는 장미의 그림자. 차마 감정을 지우지 못한 크라트의 시린 눈동자가 제국의 검성을 올려다본다. ‘늑대’가 검을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미세하게 떨리는 차가운 손이 그의 팔을 붙잡는다.


“.......하지 마....... 로즈를 고아로 만들 수는-”


핏덩이와 함께 새어나오는 엘라의 목소리를, 크라트는 부드러운 손으로 저지한다.


“그럴 생각 없다.”



붉은 장미를 향한 늑대의 포효.

빠르게 도약한 그의 검이 날카롭게 장미의 심장을 노리며 파고든다. 그 또한 상당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눈에 서린 차가움마저 증발시킨 분노는 모든 고통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엘라는 가능했다면,

그 순간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늑대의 도약을 예상했다는 듯, 어머니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가 밤하늘 아래서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 무거운 악의를, 회색빛도 아닌 그의 검이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터진 것은 엘라의 피에 잠긴 목소리가 아니라 거대한 마력의 파편이었다.


과도하게 솟아오르는 폭염과 대지의 파편에 당황한 얼굴은 크라트도 마찬가지. 그런 그의 뒤로 망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엘라론님을 부축해서 후방으로 가세요. 절대 누구도 죽는 일은 없게 하라고 우리 대장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오캄푸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크라트의 분노를 잠재우고 이성을 되찾아준다.


“.......알았다.”


마력 그 자체를 흡수하는 흑도 오미누스움브라에게 마법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장미 본인을 노리지 않고 주변 지형과 지물을 파괴, 이용하면서 시야와 감각 모든 것을 방해하는 방법으로 시간을 끄는 오캄푸스 덕분에, 크라트는 고통스러워하는 엘라를 안아들고 숲의 폐허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저번에 나한테 비슷하게 덤볐던 마법사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나?”


폭염과 먼지의 안개를 뚫고 다가온 장미의 미소. 하지만 오캄푸스의 목소리는 느긋함을 잃지 않는다.


“모를 리가 있나요.”


발 아래에서 일렁이는 마력의 파동.

델핀은 크게 웃었다.

단순한 마력지뢰가 아니다. 그저 지표면에서 폭발하는 마력지뢰였다면 자신의 흑도가 흡수했을 테니까.

망자가 심어둔 것은 지하 깊숙한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의 거대한 기폭제. 지뢰가 폭발하며 마력을 분출시키자 그 위를 덮고 있던 모든 흙과 모래, 자갈들이 산탄총의 파편처럼 날카롭게 주변을 꿰뚫는다. 순간적으로 흑도를 휘둘러 대부분의 파편을 걷어내는 것엔 성공했지만, 제복의 손상과 다리의 작은 상처들은 피할 수 없었다.


“......흐응.”


모든 그림자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망자 마법사는 자기 신체의 대부분을 함께 희생하면서 장미를 끌어들였을 터이지만,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델핀은 기분이 나쁘거나 모욕을 받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왔던 하나의 ‘호기심’. 그것에 다가가는 길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없어진 것뿐이니까.






드루이드들의 평화롭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운다. 에페를 잡은 지나의 손에 긴장과 힘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환도를 꺼내드는 드렌턴은 마른 혀로 마른 입술을 핥는다. 언덕 위로 나타난 붉은 꽃의 자극적인 향기는 모든 긴장과 시선을 집어삼키며 능글맞게 미소 짓고 있었다.


“뭔 짓을 하고 있나 했더니.”

밤보다 어두운 델핀의 눈동자는 오직 신단 위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줄기의 호흡에 집중되어 있었다. 거대한 나무의 요람이 감싸고 있는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누가 저기에 잠들어 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잠들어 있는지.

“이제 와서 숲에게 구원을 바라는 거냐. 참으로 나약-”

태양 같은 눈동자가 안광을 흘리며 델핀의 입을 막는다. 장미는 어깨를 향해 내려오는 에페검을 쳐내려고 했으나,

“.......흐응.”

예상외의 무게감에 놀란 듯, 붉은 장미의 먹색 시선이 지나의 굳은 얼굴을 부드럽게 훑는다.

“놀랍구나, 저번에 만났던 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검성이라는 이름에 짓눌렸던 지난번과 다른 것이라곤,

그저 지켜야할 상대가 바로 뒤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장미가 알 리 없다.


뒤에서 달려드는 드렌턴의 환도를 손등으로 쳐내는 것을 신호로 검성의 흑도와 지나의 에페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얇은 검신에 실려 있는 영력의 크기와 흐름은 가장 치명적이고 날카롭게 장미의 사고를 찌르며 회색빛을 발한다. ‘붉은 장미’ 특유의 위협적인 기합과 검기를 내뿜을 시간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드렌턴이 순간적으로 ‘대등하다’라고 생각할 정도의 접전이었으나, 지나와 드렌턴 모두 잊고 있었다.

장미가 운용할 수 있는 무기가, 흑도 하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


마주친 흑도와 에페 아래로 장미의 손날이 빠르게 날아든다. 부드러운 외견 속에 감춰진 날카로운 살의를 읽어낸 지나는 황급하게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해내지만, 델핀의 무릎이 그 동작을 위해 축으로 삼은 자신의 왼다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였다.

놀라운 영력의 감각으로 뼈가 으스러지는 것은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의 휘청거리는 중심을 놓칠 리 없는 장미의 흑도가 이미 지나의 가슴으로 향하고 있었다.

간신히 에페검을 앞세워 흑도의 악의 가득한 날은 막아내지만, 장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력을 온건히 막아내기엔 지나의 몸은 너무도 가벼웠다.


신단 아래로 튕겨져 나가는 지나의 몸. 검신이 휘어진 에페가 땅에 나뒹굴었고, 지나는 본능적으로 놓친 검을 찾기 위해 일어나려했지만 입으로 터져 나오는 핏덩이가 먼저 지나의 목소리를 훔쳐버린다.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는 지나의 시선도, 박살난 환도를 내버리고 맨손으로라도 달려들려던 드렌턴의 시선도, 흐름의 손녀를 향해 마지막 도약을 하려던 장미의 시선도,

모두가 동시에 같은 존재를 느끼고 그 발산지를 찾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드루이드들.

땅 속으로 사라지는 나무의 줄기들. 그 사이로 드러난,

초록빛의 눈동자.


“아오, 허리야.......”

잔뜩 굳어있던 허리와 팔목을 문지르며 일어난 로빈은 그제야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색한 기류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그의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입가로 붉은 흔적을 머금고 있는 지나의 노란 눈동자였다.

“지나! 괜찮아?!”


“아, 으...으응......”

뭣도 모르고 대답을 내뱉긴 했지만, 지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숲의 줄기 사이에서 나타난 이 남자가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었다.

검붉은 눈동자를 대신하고 있는 초록색 빛. 손끝으로 미세하게 반투명한 연기와 향이 피어오르고,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새롭게 풀이 돋아나고 꽃이 핀다. 지나는 교본에서 읽었던 이 ‘형상’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엘더 드루이드.......?”



“숲의 축복이라. 숲에서만큼은 세뮈엘의 은총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이건가?”

델핀의 미소.



“그게 뭐.”



이어지는,

검성의 도약.

나무 위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벤의 자연계마법과, 황급하게 경로를 가로막는 지나의 검도 소용이 없었다. 너무도 손쉽게 그 모든 방해를 떨쳐내고 로빈의 가슴을 짓밟는 장미의 그림자.


델핀은 지체하지 않고

‘붉은 나무’의 목으로 흑도를 꽂아 넣는다.


밤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지나의 비명.


떨어지듯 나무에서 내려오는 벤의 당황한 표정.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드렌턴.




영원한 침묵이 흐를 것만 같은 순간,




“어라?”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로빈의 것이었다.



델핀은 당황한다.

분명 자신의 흑도는 카나반 왕의 목을 꿰뚫고 있다. 하지만 그 악의가 가득 찬 날이 스쳐간 것은 오직 그의 그림자 뿐.

마치 흑도자체가 그림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처음부터 아무것도 닿지 않은 것처럼,

로빈의 목은 깨끗했다.



장미의 눈은 빠르게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악의’를 중화시킨다. 그렇다면, ‘악의’가 아닌 평범한 날붙이로 끊으면 그만.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허리춤에 달려있는 보조무기인 단검을 향해 비어있는 반대편 손을 뻗는다.



드렌턴이 고함을 지른다.


그에 지나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떨리는 무릎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만다.

교차하는 급박한 표정 속에서 그 누구도 장미의 미소를 거둘 수 없다고 좌절하는 순간,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있었던

리즈가,

조용히 활시위를 놓는다.



그 흐린 존재감은 일찍이 델핀조차도 겪어보지 못한 미세함이었기에, 장미는 화살이 날아오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나서야 반응을 할 수 있었다.

화살이 날아드는 방향을 향해 휘두른 흑도.

덕분에 빗겨나가는 화살의 궤도.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 화살은 흑도를 쥐고 있는 장미의 손가락에 붉은 흔적만을 남기고 숲속으로 사라진다.


.......분명 치명상은 아니었다.


델핀으로서는 처음으로 겪는 손가락의 상처.

그와 더불어 분노와 짜증으로 뒤섞여있던 델핀의 달아오른 감각이

흑도를 놓치게 만들고 만다.



그와 동시에

신단 뒤에서 바닷빛 눈동자의 소녀가 튀어나온다. 그녀의 양손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모든 목소리를 앗아가기 위해 태동 중인 혈마력의 응집체. 자신이 신호할 때까지는 절대 나오지 말라고 했던 벤의 당부가 있었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화살’과, 그리고 그 화살이 만들어낸 상황을 지켜보던 명석한 두뇌가 내린 결론은 지금 바로 튀어나가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고도는 기사라는 존재를 상대함에 있어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이 모든 정경이 느린 화면처럼 벤의 시야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고도를 향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오른손이 놓친 흑도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델핀의 왼손. 그녀의 흑도보다도 깊은 눈동자는 이미 새롭게 나타난 마법사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검을 놓친 것은 분명 그녀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그러나 검성의 순발력은 이 어린 마법사의 생각처럼 무르지 않았다.


벤과 델핀, 그리고 모두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끔찍한 광경이 그려진다.

왼손으로 떨어지는 흑도를 낚아채고, 그대로 불길함을 품고 다가오는 소녀의 심장을 꿰뚫는 붉은 장미의 미소가 보이는 듯 했다. 짧은 순간, 오직 자신의 혈마력만이 거대한 검성의 영력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생각 외에 고도가 다시 계산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그 광경은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델핀이 느낀 것은

아주 미세한,

너무도 미세해서 자각할 수도 없었던 위화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요소는 놓치지 않는,

검성으로서의 예리한 감각.

그 감각조차도 잊고 있었던,


아주 미세한 위화감.



델핀의 왼팔에 감긴 붕대 아래에는,

이미 대부분 아문 상처가 약간의 형체만을 품은 채 남아있었다.

크지 않은 상처였다. 깊지 않은 상처였다.

더욱이, 쓰지 않는 팔이기에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 따지기 좋아하는 댄조차도 납득했던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품고 있었던 작은 위화감이, 그 희미한 흔적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거대한 집착이,

장미가 영력을 집중시키는 순간,

아주 살짝, 보통 때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살짝’,

근육을 경직시켰다.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의 시선도,

그리고 델핀 본인조차 깨닫지 못했던 그 작은 뒤틀림이,


떨어지는 흑도를 낚아채는 걸 방해한 것이다.


장미의 하얀 손가락을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흑도.

먹색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녀는 납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다가오는 심연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로빈의 몸에서 시작된 초록빛은 서서히 그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하더니, 지나와 드렌턴을 거쳐 언덕 전장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숲의 축복을 직접 받는 순간, 지나와 드렌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던 입안이 상쾌해지고, 가벼운 영력이 온몸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신비한 축복이나 힘에 대한 경외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로빈과 벤, 드렌턴과 지나. 모두의 발걸음은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흐음.”

일반적인 기사였다면 이미 모든 생명을 다하고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혈마력의 게걸스러운 힘은 분명 비명으로도 부족한 고통이었지만, 풀숲에 쓰러져있는 델핀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검으로서, 기사로서 정점에 올랐지만, 시간이란 참으로 의미 없구나. 결국 이름도 모르는 녀석에게 당해 버리는군.”


짧은 탄식에 가까운 장미의 목소리에, 다시금 바닷빛 눈동자를 되찾은 고도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한다.


“고도. 제르나비 고도야.”


“아아니, 작은 계약자, 너 말고.”


“......어?”


당황한 소녀의 얼굴 위로 모이는 표정들. 델핀은 사력을 다한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천천히 훑는다.


“.......이 승리가 너희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카나반의 기사와 마법사들아. 최강의 힘을 굴복시켰다는 착각에 만족하여 모든 가능성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나를 죽인 것은 어디까지나 왼팔의 작은 상처를 무시하고 있었던 나의 오만과, 그리고 이 상처.......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덕분이지.”


“이름 없는 죄인.......? 하, 당신은 그저 패배를 인정하기 싫을 뿐 아닌가?”


드렌턴의 가시 돋친 물음에, 장미는 입술 옆으로 자신의 새빨간 머리보다도 짙은 피를 뱉어내며 웃는다.


“패배는 인정한다. 다만, 제국의 검성을 죽인 자로서 너희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지는 게 떨떠름할 뿐이야. 승자의 이름으로 쓰여 진다는 역사지만, 그 승자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고 가기엔 ‘최강’의 이름으로서 너무 억울하지 않겠나.”




“당신 팔에 상처 냈다는 그 죄수, 혹시 금발에 붉은 눈동자 아니었어?”


새로운 목소리를 향해 모두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리즈였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녀가 둘러멘 활과 화살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두였다.


“.......맞아.”


얇은 장미의 미소. 리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장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이름 없는 죄수가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을 되찾은 숨의 밤하늘.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시간에 비하면 지금 이 순간은 너무도 짧은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바람에 실린 목소리의 무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누구의 것보다도 무거운 숨소리였다.



“.......이름 없는 죄수가 아니라고.......”




==================




“쥬넨!”


아실레마제국군 본대의 지휘를 준비 중이던 쥬넨은, 뒤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린다. 옆구리를 움켜잡고 있는 댄이었다.


“댄 장군! 저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쥬넨이 가리킨 것은 반대편 언덕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는 초록빛의 안개였다.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빛이 닿는 전장마다 통신이 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판단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댄은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상황은?”


“적 본대를 향했던 별동대와 우익으로부터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남은 중앙군과 좌익에서도 저 빛의 정체를 물으면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검성께선 아직 복귀하시지도 않았고.......”


“........복귀하지 않으셨다.........? 독단으로 나가신 건가?”


“예.”


댄은 침묵한다.

지휘관으로서, 가장 긍정적인 상황일지라도 언제나 가장 부정적인 상황을 가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가장 ‘부정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는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군을 불러들이게.”


“예?”


쥬넨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되물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지금상황에서 더 밀어붙인다면 베르달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그러나 숲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저 정체모를 빛과, 연락이 닿지 않은 군단장이라는 변수에 모험을 걸만한 가치는 없다고 판단한 댄이었다.


“이 정도면 재기불능의 피해를 줬다고 봐도 되겠지. 일단은 군단장님이 복귀하신 뒤에 다시 재편하여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제국의 두 장군이 전투를 중지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

높은 나무 위에서 모든 전황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붉은 장미를 도와 ‘숲의 정화’를 도맡았던 늙은 마법사였다. 다만, 노인의 얼굴과 전신은 이미 핏기가 가신 채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이렇게 나오신다?]


목소리는 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림자라고 생각됐던 그것은,

노인의 곁에서 남성의 ‘형체’를 이루고 있는


붉은 ‘피’의 덩어리.


노인의 입과 눈을 뿌리로 두고 있는 인간의 형체,

그 검붉은 물결처럼 일렁이는 입술 사이로,

소름끼치는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겠군.]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2막도 막을 내립니다.

득실을 따지자면

가장 많은 득은 차지한 것은 누구일까요......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5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