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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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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2.1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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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글자
20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DUMMY

“외부인?”

훈련생도가 교관막사로 찾아오는 일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기에, 카논은 자신을 불러낸 세 명을 굳은 얼굴로 따라나섰다. 그중에 왕녀가 섞여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생도나 교관들의 눈에 노출된다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꺼낸 이야기는 잔소리를 준비하고 있던 카논의 생각을 말끔히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외부인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임시로 만든 야외훈련소라고는 해도 엄연한 군사시설이다. 사전 통보 없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야. 괜한 신경 쓰지 마라.”


생도들의 터무니없는 잔걱정으로 치부하고 돌아서려는 카논.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셰르의 목소리였다.


“교관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관?”


“예. 혹시 새롭게 부임예정인 교관이 계십니까?”


구겨지는 카논의 미간. 그것으로 셰르는 미리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인원이 외부인이라는 증거는?”


“.......이 녀석의 코입니다.”


셰르가 가리킨 것은, 뒤에서 멀뚱히 지켜보고만 서 있던 리즈였다.


“코.......?”

셰르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는 이유는 명백했다. 철저하게 검증된 증거를 내밀어도 시원찮을 판에 대뜸 동기 녀석의 코를 증거랍시고 내밀었으니. 카논이 불같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름은 봤나?”


그랬기에 카논의 진중한 반응은 셰르에겐 예상치 못한 호응이었다. 카논이 검성으로부터 ‘왕녀의 후각은 소름끼친다.’라는 감상을 들었다는 사실을, 그로서는 알 턱이 없었으니.


“에드윈.”

모두의 시선이 무심코 흘러나온 리즈의 목소리를 향한다.

“명찰에 에드윈이라고 써져 있었어. 짧은 머리는 약간 갈색기가 감돌았고, 눈동자도 비슷. 키는 나보다 한 뼘 정도 크려나. 영력은 느껴졌지만, 최근에 기사로서 단련한 기운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어. 무엇보다도.......”

빠르게 내뱉던 감상을 멈추고, 리즈는 마땅한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 한참이나 머리를 굴린다.

“.......비린내라고 해야 하려나. 그런 냄새가 났어.”


냄새는 그렇다 쳐도, 얼굴조차 흐릿했던 그 어둠 속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리즈의 밤눈에 유진과 셰르는 감탄한다. 그러나 그들의 감탄과는 별개로, 카논의 표정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센 에드윈. 본래 기사단의 교육장교로 임시파견 나온 교관이다. 외부인이 아니라 야외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분이다만......., 엘리자베스. 네가 본 그 인간이 확실히 외부인이 맞나?”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리즈. 카논은 저녁식사로 분주해지는 중앙공터를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발길을 돌려 교관천막으로 되돌아간다. 자신들에게 어떠한 말도 없었기 때문에, 생도들은 그림자 속에서 카논이 돌아오기만을 마냥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분이 에드윈 대위님이시다.”


카논이 데려온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 명의 생도를 바라본다. 여전히 빛은 흐릿했지만, 식당 뒤에 깔렸던 어둠보다는 아니었다. 그래도 유진과 셰르의 표정엔 확신이 없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뒤의 리즈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 사람이 아냐.”




=================




“일차적으로, 우선 팔루뎀에 잠입해야 합니다.”


크리스의 단호한 표정과 어투에 벤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구긴다. 팔루뎀이란 장소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은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으니까. 흥미롭다는 듯이 반문한 것은 로빈이었다.


“팔루뎀이요? 굳이 왜 그곳에?”


“수도권의 군부는 검성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지만, 지방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특히 팔루뎀같은 경우는 디미르의 영향력이 높은 지역이고, 아직 철군하지 않은 카나반의 병사들도 있지 않습니까?”


연합전선을 이루기 위해 팔루뎀에 파병시킨 카나반의 병사들. 그 존재를 기억해내고 로빈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라우치 장군에게 다시 연락을 해놔야겠네요. 비난성명까지 나온 마당에 철군을 지체할 명분이 없으니 이쪽에서 빠르게 움직여야겠어요. 생각해두신 경로는 있으신가요?”


“육로는 두 국가의 분위기가 냉랭해짐에 따라 감시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니, 바다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아! 그거라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겠네요! 중립국의 무역선이라면 경계가 비교적 느슨할 테죠.”


그륜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크리스였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팔루뎀으로 들어간 후, 크리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군세를 규합하여 도시를 장악한다-. 지금으로선 왕국 내 가장 확실한 거점을 만들기에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만, 지방귀족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생각은 해보셨겠죠?”


“.......”


와인을 홀짝이는 벤의 표정은 느긋했지만, 크리스는 그의 말이 지니고 있는 날카로움을 알고 있었기에 크리스는 침묵으로 반응한다.


“폐위된 왕이 타국을 등에 업고 갑작스럽게 거점도시를 점령하여 중앙정부와 대립. 그리고 그 사이에는 거점도시를 두고 오고 간 비공식적 거래가 있었다-. 게다가 왕이 복권을 위해 처음 한 행동이 타국의 병사를 비롯한 군세를 모으는 일이라면, 어떤 식으로 비난을 받으실지는 명백하죠.”


“.......내전유도.”


혀를 씹는 기분으로 크리스는 간신히 그 단어를 내뱉을 수 있었다.

폐위된 왕을 향한 지방귀족들의 시선이 마냥 고울 수만은 없다. 게다가 그녀가 복권을 위한답시고 하는 일이, 결론적으로 도시를 팔아먹고 타국의 병사까지 끌어들이며 거점도시에서 군세를 확충하는 것.

왕좌를 되찾기 위해서 부당한 지원과 거래를 통한 내전도 감수한다며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내전을 유도하려는 속셈이다-아니다를 떠나서, 거점을 세우고 남아있는 지지자들을 끌어들인다고 칩시다. 그 뒤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설사 내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중앙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검성을 몰아내기엔 객관적으로 이쪽이 절대열세입니다. 이번 판을 장기적으로 보고 계시다면, 냉정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카나반은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들의 상처까지 끌어안고 지지를 해드릴 수는 없어요.”


로빈은 벤의 말을 제지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무례가 아닌 현실이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크리스가 가장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막연하긴 하지만, 일단 팔루뎀을 장악 후, 왕국 내 남아있는 제 지지자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전까지 가는 상황은 저로서도 바라지 않습니다만, 무른 생각은 접어두어야겠죠.”


무른 생각.

로빈에게 있어서 낯선 단어가 아니다. 지금 저 소파에 누워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녀석으로부터 지겹게 들어오던 이야기였으니까.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나름 순탄치 않다고 생각해온 그였으나, 당장 이런 상황에 처한 크리스를 눈앞에 두니 자신의 느슨함마저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단순히 권력만을 위해 왕좌를 되돌려 받길 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공화국의 왕’이 아닌 ‘왕국의 왕’이 어떤 의미인지 그로서는 감히 가늠해볼 수 없다. 하지만 로빈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크리스 둘 모두에게 왕이라는 직책은 ‘자신만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

그의 검붉은 시선은 어느새 와인을 나누고 있는 디미르와 벤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무실 입구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나에게도.


“지지자-라고 하셨는데, 론크리스 님께선 팔루뎀에 입성한 뒤에 어떻게 새로운 지지자를 끌어오실 생각이십니까?”


“.......끌어오다니요?”


그륜의 경박한 목소리에 반문하는 크리스의 표정이 의문으로 물든다.

전통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아직 크리스에 대한 충성을 몰래 묻어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도시를 팔고 타국의 도움을 받아 복권하려는 크리스의 의도를 인정해 줄지는 미지수. 이런 상황에 등을 돌리는 자들도 있을 터인데, 오히려 새로운 지지자를 끌어모은다?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상황에 유동적이죠. 가장 믿을만한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자도 순식간에 뒤통수를 때릴 수도 있고, 가장 치명적인 적이라고 생각했단 자도 상황만 맞는다면 든든한 아군이 됩니다. 폐하께선 단순히 디나스아리얼의 왕좌에 앉아계실 적의 아군과 적군을 생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좀 더 시야를 넓게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의견이 있으시다면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씀하세요.”


어디까지나 지원을 받고 부탁해야 할 입장이지만, 크리스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또 마음에 든 듯, 그륜은 호탕하게 웃으며 삐죽 수염이 올라온 턱을 쓸었다.


“간보기가 제 특기 아니겠습니까? 하핫! 일단 팔루뎀으로 입성해 주세요. 그 사이에 방도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아, 이건 계약을 기념해서 제가 드리는 선물이니까 사양하지 마시고요.”


사양을 말라니.

마치 선심을 쓰는 듯 말하지만,

당신이 욘의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 힘을 쓸 리가 없잖아.


벤은 간신히 와인과 함께 말을 삼킬 수 있었다.




===================




“엘리자베스의 코가 맞다면, 에드윈 대위님의 이름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훈련소를 활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냄새로 그를 추적해낼 순 없나?”


“워낙 땀냄새에 찌든 인간들이 모여 있어서 힘들어요.”


평소 같았으면 몇 번을 지적해도 고쳐지지 않는 리즈의 느긋한 말투에 소리를 질렀을 카논이지만, 취침시간을 넘긴 싸늘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의 속삭임은 계속됐다.


“위병일지를 확인해봤지만 대위님이 중복으로 입소하신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즉, 누군가가 자신이 위병근무를 서는 시간을 이용하여 대위님의 신분을 도용한 자를 몰래 들여보냈다는 뜻이지.”


“아, 그러고 보니 그와 이야기를 하던 생도 두 명이 있었습니다.”


유진이 리즈를 돌아본다. 냄새로는 구별해내기 애매하지만, 이 별난 왕녀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생도번호 67하고 68번.”


“너희와는 면식이 있으니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내가 가서 데리고 나오도록 하지.”


일어서려는 카논을 향해 유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역시 다른 교관분들이나 훈련대장님께 보고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희 생각보다 큰일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큰일일 수도 있기에 확실해지기 전까지 퍼트리면 안 되는 거다. 교육과정을 개편한다는 이유로 새로운 장교와 부사관들이 대거 유입됐어. 왕실참모의 자격으로 파견된 나처럼 기존 중앙군소속의 인원도 있지만, 많은 인원이 지방 귀족소속의 사병출신. 그중에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가 없으리란 보장이 있나?”


“.......다른 마음이라면.......”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볼까? 제2의 밀라 시즈키치가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유진은 더 이상 식당을 빠져나가는 카논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밀라 시즈키치.

카나반의 기사된 자로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물론 그 이름이 나올 때 기사들의 표정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시즈키치라는 대표귀족가문의 기사로서 고등교육을 받고 어린 나이에 임관, 차기 근위대장으로도 언급되던 그녀가 어째서 왕을 시해하려 했는지, 그 의도도 배경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그녀는 암살자의 이름으로 침묵하고 말았다. 전 근위대장은 망명에, 차기 근위대장으로 기대를 모았던 밀라는 시해미수. 귀족파 의원들이 강경한 태도로 근위대의 해체를 요구한 것은 당연했다. 로빈과 마누앙의 중재가 없었다면 그 미래가 불투명했을 터.

카논이 밀라의 이름을 꺼낸 것은 단순히 이 세 명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함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불길한 족쇄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훈련교관으로 파견된 진짜 목적은, 단순히 전장과 전투의 경험을 살려 교육과정개편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표면적 이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밀라 시즈키치 사건에 관련된 조사는 흐지부지 식어버린 상태가 아니었다.


“아시다시피, 우린 밀라 시즈키치라는 ‘기사’에 대한 조사에서 그 어떠한 위화감이나 징후를 발견해내지 못했어요. 이걸 단순히 우리의 정보파악이 미흡했다는 해석으로 두기엔 찝찝해서 안 되겠습니다. 분명 계기나 접근이 있었을 겁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잡아내지 못한 ‘기사로서의 밀라 시즈키치’가 아닌, 좀 더 원초적인 단계에서 그 족쇄를 색출해 내야 해요.”


그리고 벤이 생각해낸 그 ‘족쇄’의 시발점이 바로 훈련소였다.

기사가 되기 전, 모든 불합리에 노출된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고통을 씹어야 하는 곳. 심지어 이번 기수는 자원입대가 아닌 반강제적인 징용에 가까운 형태로 모집되었다. 로빈은 탐탁지 않아했지만, 그런 그를 무르다고 윽박지르며 벤이 내놓은 말은 ‘큰 고기를 잡기 위해선 큰 미끼를 써야한다’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적으로 유약한 생도들.

분명히 그런 그들의 족쇄를 풀어준다며 유혹할 새로운 족쇄가 나타날 것이라 벤은 카논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카논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아직 졸린 티를 벗지 못한 두 생도를 앞세운 채였다. 교관의 부름에 욕을 참고 선잠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불려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두 남녀는 식당에 이미 자신들 말고도 생도복을 입은 얼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곧바로 그 얼굴들이 꽤나 익숙하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표정을 굳힌다.


기병도가 허리춤에서 흘러나오는 소름끼치는 금속음, 그리고 그보다 더욱 소름끼치는 카논의 목소리.



“앉아라. 물어볼 것이 있다.”




===============




아무리 전운이 가실 날이 없다는 국경이라고는 해도 침묵은 찾아오는 법. 그 위태한 평화의 시간은 언제나 병사들의 환영을 받는다. 쉴 새 없이 찌르고 들어오던 아실레마제국군은 브린타이나 국경수비대에겐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밀고 들어오면 속이라도 편하게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제국군은 모든 전선에 걸쳐 도발수준의 공격만 해올 뿐, 지쳐가는 건 오직 브린타이나의 병사들뿐이었다.

정신과 몸 모두가 피폐해진 그들에게 정권이 뒤바뀌었다는 소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친제국성향인 신정권에 의해 어서 이 지루한 소모전이 완벽하게 끝나기만을 바라는 목소리가 초소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카나반을 비난하는 신정권의 성명이 나오자마자 귀신같이 달콤한 침묵에 휩싸인 국경이었다.


“이걸로 한숨 트이지 않겠습니까? 사실상 카나반과의 동맹은 깨졌다고 봐도 무방한데, 제국과 계속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적의를 거둔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적의를 거둔다는 보장은 없지. 윗선에서 명확하게 정리가 될 때까지 당분간은 경계태세를 유지하게.”


모처럼 찾아온 평화도 제7중앙국경초소를 담당하고 있는 믈렌 소령의 눈빛을 죽이진 못했다. 부관들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고는 있지만, 그의 시선과 이성은 계속해서 동쪽을 향해 기울어진 상태였다.


“저희야 이제 부임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대장님은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나반 측의 말대로 정말 정복전쟁을 다시 벌일 것 같습니까?”


“200년 전에도 제국이 반도를 통일할 것이라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난 단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으면 할 뿐이야.”


“하하, 역시.”


“부하된 자로서 존경스럽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죽어나가는 병사와 부관들 틈에서 수개월 동안 곁을 지켜준 부하들이다. 전시경계태세를 유지하면서도 이렇게 와인을 주고받는 것은 휴가도 제대로 내주지 못하는 지휘관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 이것만으로 만족하는 그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화장실? 나도 같이 가.”


장난스럽게 경례를 하며 지휘소를 빠져나가는 두 부관을 바라보는 믈렌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들의 말대로 한숨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설사 동맹선언을 하더라도 제국은 믿을 수 없다는 게 오랜 기간 국경수비대를 맡아온 그의 본심이었다.

그로서는 동맹을 결성하고 난 뒤에도 제대로 된 반격계획을 수립하지 않은 군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신중히 적의 전력을 분석해야 한다는 표면상의 이유를 둘러댔지만, 지금은 선대왕이 되어버린 론크리스의 뜻은 ‘분명한 타격’이었다.


‘.......어쩌면 제국과의 협력을 통해 베르달을 침공하려던 계획은 정보부의 독단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군.......’


그 사건의 주동자로서 파면당한 전 정보부장관 헤샤 예르거가 만약 신정권에서 새로운 자리를 꿰차고 등장한다면, 이번 군사정변이 어디서부터 이어져 왔는지를 예상할 수 있는 증거가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믈렌은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음?”


하지만 그 와인이 목을 넘기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금고 있던 와인을 거칠게 잔으로 다시 내뱉었다. 맛이 변질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감하기로 소문난 그의 혀는 서늘한 위화감을 다시고 있었다.


‘이건.......’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문고리가 아닌, 허리춤에 있는 검의 손잡이였다. 지휘부 건물 전체가 침묵에 휩싸여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평화였지만,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최전방에서 다려진 그의 본능은 끊임없이 경고를 외치고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문고리. 믈렌은 망설이지 않고 영력이 실린 검을 휘둘러 문과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그림자를 한꺼번에 베어낸다.

불길했던 예상대로, 조용히 들어오려던 그림자는 부관들의 것이 아니었다.


“제국군?”


피를 내뿜으며 나자빠지는 기사의 군복은 지겹게 보아왔던, 동시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검은색이다. 그리고 기사의 손에 들린 검에 묻어있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믈렌이었다.


“내습이다! 통신병!”


모든 전방초소가 아무런 보고도 없이 뚫려버렸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후방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들이 어디서 침입해왔는지가 아니다.

지휘소 전체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복도로 나타난 얼굴들. 하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군복의 색깔은 믈렌의 혀를 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어색한 군복들 사이에서 나타난 익숙한 얼굴.


“그러니까 와인을 드셨어야죠. 그럼 이 친구처럼 자고 있는 사이에 편히 보내드릴 수 있는데.”


잘린 부하의 머리를 들고 있는 부하.


아니, 부하라고 믿고 있었던 남자.



믈렌은 분노로 넘치는 고함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복도의 검은 얼굴들이 아니었다. 집무실 창문을 박살 내며, 어둠 속에 삼켜지는 그의 그림자였다.


그런 믈렌을 추격하려는 먹색 제복의 병사들을, 방금까지 동료였던 자의 머리를 들고 있는 남자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제지한다.


“상관없어. 냅둬.”


왜 상관이 없는 것인지, 왜 남자의 태도가 여유로운 것인지,

침묵을 깨고 비명이 잠식해가는 지휘소의 바닥으로,

잘린 머리는 의문조차 품지 못하고 힘없이 굴러떨어진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시험 끝 과제 끝 :)))

즐거운 설 보내세요!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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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2.20 01:15
    No. 1

    설날 잘보내셨나요 ㅎㅎ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0 13:51
    No. 2

    동결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ㅎㅎ
    즐거운 설 보내셨는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슈크림빵이
    작성일
    15.02.21 23:04
    No. 3

    흠. 로빈과 벤은 너무 운에 기대는 경향이 있는거 같아요. 장미를 잡은것도 운. 로빈에게 강림한것도 운..이번 카나번도 운이 작용될려나.. 그래서 그런지. 무슨 사건이건 머. 어차피 운빨이 좋아서 이기겠지란 생각만 듭니다. 전략 전술적 승리가 아니라..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1 23:41
    No. 4

    헠 슈크림빵님 오랜만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확실히 델핀을 잡은 것은 순전히 '조엘'이라는 변수에 의지한 운이었죠....
    나름 구상했던, 연관된 떡밥을 깔아놓는 용도로 깔끔히 사용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숨겨진 떡밥이란 것은 글쟁이가 부리는 횡포에 지나지 않으니 ㅠㅠ
    글쟁이의 생각과 표현이 많이 부족한 탓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23 02:59
    No. 5

    제국에 비하면 로벤(로빈+벤)은 비교할수 없을 정도의 약체이고 그래도 잔쟁이 일어났으니 싸우긴해야겠는데 한번에 밀리면 소설이 끝나니 그럴순 없고.. 운말고 다른걸로 이길수 있는게 있나요? 갑자기 말도안되게 엄청 강해지는 것보단 약간 운이 섞여서 겨우겨우 막아야 담엔 또 어떻게 막나 하는 걱정반 기대반 조마조마하게 읽는 맛이 있는거 같아서 전 좋은 것 같은데요? ///그리고 운이 아니라. 이 모든게 거대한 판위에서 톱니처럼 돌아가는, 이미 짜놓여진 판짜기에 의한 진행에 불과하다는 걸 아직 눈치 못채셨군요. 그륜이란 저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23 03:00
    No. 6

    그륜이란이 아니라 그륜이랑 ㅎㅎ 모바일 크롬으로 보면 추천도 못하는데 띄어쓰기랑 오타는 덤이라는 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3 04:26
    No. 7

    어엌 로벤ㅋㅋㅋㅋ
    생각지도 못한 합성어에 빵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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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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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71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6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6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6 29 20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2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7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5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1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8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1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4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10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9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4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8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2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6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5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40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6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7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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