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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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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2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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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18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DUMMY

“하파님이......?”


“응......”


로빈은 대답과 함께 시선을 떨어트린다. 시원한 숲의 그늘 아래,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와의 와인 한 잔이 너무도 쓰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 먹색 눈동자를 가진 차가운 친구가 좀처럼 감상에 젖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런 그의 시선도 지금은 먼 시간을 들추어내며 회상을 쫓고 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난 널 만나기도 전에 반역죄로 잡혀서 처형당했을지도 몰라.”


“아아, 베르달로 도망쳐왔을 때? 이것저것 많이 해주셨지....... 왜 반역자로 수배까지 당한 너를 도와줬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드렌턴 아저씨가 부탁해서 그랬다더라. 들어보니 시설에 있을 때부터 아저씨한테 후원을 받았던 모양이던데.”


“그래......? 아저씨는 좀 어때? 아까 처음 인사하고 나선 얼굴을 못 봤는데.”


“이래저래 심란할 텐데, 그래서인지 그냥 특무대 전술 짜는 거에만 매달려 있어. 지금은 그냥 혼자 두려고.”


벤 또한 술맛을 잃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려놓는다.

얻은 것만큼이나 잃은 것도 많았던 전초전을 끝내고, 베르달의 숲은 다시 침묵으로 물들었다. 미끼였다고는 해도 아실레마제국군 본대의 일부에게 타격을 입힌 것은 분명 성과라고 부를만하다. 하지만 베르달 탈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검성이라는 산의 높이를 체감했기에 병사들의 사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검성에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무대도 결국 소용없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군 전체로 번져나간 것이다. 특무대 중 최강전력이라고 평가받았던 ‘광기의 꽃잎’은 중상, 심지어 사망자까지 나온 마당에 로빈으로서도 병사와 지휘관들에게 마땅히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는, 벤이 이끌고 온 ‘숲의 군대’. 그를 사절로 내세워 수인과 드루이드 최후의 안식처 ‘칸시온 델 보스케’에 협조를 요청한 것은 로빈의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그가 정말로 그들을 설득해서 군대까지 일으키게 만들리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군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덕분에 살았어. 근데 그 편지엔 분명 대의표명과 축복정도의 협조만 요구해달라고 써져있었을 텐데, 어떻게 저들을 직접 끌고 온 거야?”


로빈의 물음에 순간 벤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적어도, 로빈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물론 숲의 축복을 받았다고는 해도 나는 인간일 뿐. 대의와 명분만으로는 숲의 목소리를 움직일 수 없지만, 거기에 희생자 본인의 호소가 곁들어진다면 충분히 계기가 되지.”


“희생자?”


“.......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

로빈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줄곧 벤의 머리 위에서 황금빛을 내뿜으며 날갯짓을 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지금은 파괴된 카모라숲의 수호자, 페어리 아이데아. 고향이 피의 군주에게 짓밟혔다는 소리를 듣고 충격에 모습을 감췄던 그녀가, 칸시온 델 보스케로 다시 찾아온 벤에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숫자로는 오백이 채 안되지만 숲에서만큼은 좋은 전력으로 쓸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응......”


마주치는 눈동자. 로빈은 낮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베르달 전역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거대한 산. 그것을 무너트리지 못한다면 나아갈 수 없다.


“그럼, 일단 아저씨한테 가보자. 우리끼리 머리 짜봤자 나오는 건 없잖아.”


벤의 말에 둘은 동시에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군영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앞서가던 벤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검붉은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보다 다소 진한 붉은 기운을 품고 있는 눈동자와 날카롭지만 쳐진 눈꼬리. 무엇보다도, 짧은 바지 아래로 신발은커녕 어떠한 가죽이나 천도 걸치지 않은 그 야만스러움에 벤은 당황하고 만다.


“아- 여기 있었네. 뭐하는 거야 이런데서?”


태평한 시선과 목소리. 그러나 그 얼굴을 바라본 로빈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리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수도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응, 근데 엄마가 아저씨랑 이야기해야 하는 게 남았다고 그래서. 아저씨가 그러면 군영에 당분간 남아있으라고 했데.”

로빈을 향해 무덤덤한 어투로 대답을 하면서도 리즈의 시선은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벤의 얼굴, 왜소한 체격, 여기저기 헤진 로브와 지저분한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을 꼼꼼히 눈동자에 담으며, 리즈는 마침내 로빈을 바라본다.

“이건 누구?”


“아, 벤이라고. 내 친구야.”


“친구......?”


괴상한 그녀의 행동에도 벤은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간격을 물어보기 위해 로빈에게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이내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다가오는 리즈와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다시금 경악하고 만다.


“.......로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가씨가 내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데.”


“걔 이름은 리즈야. 누구냐면....., 음, 말하자면 긴데......”



.........



“동새앵?”

로빈이 그간 일어났던 사건들의 설명을 마쳤을 때쯤엔, 이미 눈앞으로 숲속에 위치한 카나반 중앙군의 주둔지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리즈는 여전히 벤의 곁에 붙어서 그의 냄새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끈질기게 목으로 달라붙는 그녀의 입술을 밀쳐내면서, 벤은 혼란과 경악이 담긴 표정으로 로빈과 리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저씨 부인이.......? 이건 뭐.......”


“그치? 근데 아직 아저씨가 말하지 않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 같아. 그것 때문에 리반나랑 리즈를 붙잡아 두고 있는 건가 싶네.”


“일단 그건 아저씨한테 따로 물어보고, 네 동생분한테 대체 왜 자꾸 이러는지 좀 대신 물어봐 줄래?”


결국, 로빈은 벤에게 달라붙어있다시피 한 리즈를 직접 떼어내야 했다.


“리즈, 왜 그래?”


미련이 남은 눈으로 공포에 질린 벤을 노려보는 리즈. 그녀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로빈의 손을 떼어내며 중얼거린다.


“.......안 나.”


“뭐?”


자신의 오빠를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아무런 냄새가 안 나, 저 사람.”


불평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로빈은 셔츠의 목덜미를 들추어 냄새를 맡고 있는 벤을 바라본다. 후각에 있어서는 그 어떤 짐승보다도 세밀한 리즈가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했다는 건 믿기 힘든 사실. 하지만 마치 자신의 코에 대한 굴욕이라도 느낀 듯 불만이 가득한 리즈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인다.


“냄새가 없는 사람도 있어.......?”


“나도 몰라. 처음이라서.”


수상한 시선과 함께 수군거리는 남매를 보며 벤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내보이지만, 새롭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모두의 사고를 빼앗는다.


“폐하, 근위대장이 특무대를 소집했습니다.”


마침내 찾았다는 듯, 황급하게 다가오는 장교의 보고에 벤과 로빈의 시선이 부딪친다. 로빈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고, 벤의 발걸음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리즈의 손이 그의 로브자락을 붙잡을 때까지는.


“저기, 당신-”


“아, 죄송. 지금 제가 좀 바쁘니까 나중에 로빈이랑 다시 찾아뵐게요.”


정중한 몸짓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로빈의 그림자를 밟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즈는 내밀었던 손을 다시 천천히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아직 미세한 온기가 남아있는 그 손가락을 코끝으로 가져가보지만, 역시나 원하는 ‘정체’는 묻어있지 않았다.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는 얇게 미소 지었다.


“저 사람이라면.......”




==================




“엘라론은 어때?”


로빈과 벤이 천막으로 들어섰지만 대화는 끊기지 않고 지속된다. 그 안에 있는 인원 중에, 로빈이 자신에 대한 예의 따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자리에 앉으며 꾸벅 인사를 하는 로빈에게 약한 고갯짓으로 대답을 하며, 크라트는 드렌턴의 질문에 답한다.


“워낙 회복이 빠르니까 무릎은 금방 괜찮아질 거다. 다만, 지독한 ‘악의’에 당해서인지 어깨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팔을 쓰려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전력 외로 구분해야 하나?”


별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진 않았지만, 드렌턴의 질문과 목소리엔 다소 가시가 돋쳐있었다.


“본인은 팔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떼를 쓰고 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이는군.”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드렌턴은 훤한 자신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둘러보는 표정들에 패배감은 서려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로 깊게 내리깔려있는 것은, 패배감에 가까운 무력감. 더군다나 자리 하나가 영구적으로 비어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 달갑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이 자리에서, 아니, 우리군 전체에서 ‘그녀’와 정면으로 맞붙어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엘라론과 크라트 정도다. 그것도 ‘버틴다’는 수준이지, 결코 그녀를 무너트릴 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은 아냐. 우리의 목적은, 그 ‘틈’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바로 이거다.”


벤이 다가오자, 고도의 품에 안겨있던 이리스가 울상을 지으며 그의 품으로 달려든다. 더 이상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푸근했던 얼굴엔 아직 창백함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는 벤. 그는 이리스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괜찮다고 소녀를 달래주었다.


“일단은 그녀에게 어떠한 마력도 소용이 없다는 게 큰 변수가 됐어요. 애초에 이러면 ‘혈마법’특무대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고도가 목소리를 내본다. 어린 전투마법사의 일침이었지만,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한다.


“제국황제의 무기로 알려진 오미누스움브라가 그녀의 손에 있었을 줄은 몰랐다. 확실히, 유일한 악마계약자인 아가씨의 힘을 바탕으로 그녀를 제압한다는 게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특무대 전력의 절반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어.”


드렌턴의 푸념에 구석에 쭈그려있던 슈리안이 잘려나간 아래팔뼈를 들어 올리며 턱뼈를 흔들었다.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장비 좀 어떻게 안 됩니까? 순간적이라 당황한 것도 있지만, 단칼에 잘려나가다니 이건 좀 아니잖아요. 이스누시아 연철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슈리안님, 그건 200년 전과 제식무기에 들어가는 철의 농도나 제련방식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슈리안님이 요즘 무기에 익숙해지시는 방법 외엔.......”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한센의 무기나 좀 빌려올 걸 그랬네.”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름’을 내뱉는 슈리안 때문에 움찔한 사람이 천막 안에서 한둘은 아니었으리라.

“저기, 이거 아무 뼈나 대신 붙여놓으면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잘려나간 뼈를 내보이며 속삭이는 큰할아버지에게, 지나는 어떤 표정과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저을 뿐. 그리고 그건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로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일차적인 목표를 그 무기로 정하면 되겠네.”

모두의 시선이 이리스를 품에 안고 있는 벤에게 집중된다.

“기사들이 먼저 최대한 틈을 만들어서 오미누슨가 뭐시긴가 그걸 놓치게 하거나 파괴하면 되는 거 아냐?”


“아뇨, 악의의 검은 절대로 파괴할 수 없습니다.”

높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누구와도 가까이 있지 않고 홀로 차를 음미하고 있던 오캄푸스였다. 비록 그 뜨거운 물은 그의 공허한 목청을 통해 밖으로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아펜타우스가 이 땅 위에 강림한 사도들을 인간의 손을 빌려 죽이기 위해 만든 무기. 주인의 영력과 생명을 흡수하며 기생하기에 검성급의 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소유조차 할 수 없는 무기이기도 하죠. 다만, 그 검 또한 악마와의 계약과 마찬가지로 주인과의 영혼과 매듭이 지어져 있기 때문에, 존재의 원료로 삼고 있는 계약자를 직접 죽이지 않는 이상 그 형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계약자와 떨어트려 놓는 건 가능하죠?”


벤의 반문에, 오캄푸스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조금이나마 영혼의 매듭이 끊기는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그녀의 영력이 가장 위태한 기회이기도 하죠. 하지만-”

비죽 움직이는 그의 살점. 누구나 그가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장미 본인이, 과연 호락호락 그를 허용할까요? 모든 검성들의 기사로서의 역량이 호각이라고 봤을 때, ‘흑도’를 통해 마력을 흡수하고 또 그 흡수한 마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영압을 터트릴 수 있는 붉은 장미의 검성은 분명 다른 검성들보다 마력내성에 있어서는 한 수 우위에 있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게 가장 커다란 약점이 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째서 그녀가 직접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그것도 카나반으로 침공해왔는지 그 본질적인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본질적인 의도? 그 의도가 오미누스움브라에 있단 말인가?”


차가운 크라트의 눈빛에, 오캄푸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영원한 적인 세뮈엘의 뜻을 이 땅 위에서 말끔히 지움으로써, ‘피의 군주’ 아펜타우스와 계약을 하려는 겁니다.”

빈 찻잔이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탁자 위로 내려선다.



“그로써, 그녀는 완벽해지겠죠.”




================




“아저씨!”


로빈의 부름에, 회의를 마치고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서려던 드렌턴이 움직임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자 벤 또한 로빈과 함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로빈의 표정을 보며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짐작했고, 작은 한숨과 함께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인다.

전장에, 군영이긴 했지만, 근위대장의 천막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내부를 밝히는 전등 하나와 1인용 간이침대가 전부. 그의 존재를 대변하는 어떠한 물건도 없는 그곳에서, 세 남자는 접은 침대를 탁자삼아 둘러앉았다.


“아저씨, 리즈한테 들었어. 수도로 돌아가지 말고 남아있으라고 했다며? 여긴 전장이야, 군인도 아닌 그들을 왜 여기에 남아있으라고 한 거야?”


“그 아이....., 아니 왕녀님께는 따로 부탁하지 않았어. 그냥 리반나에게 할 말이 남아있으니 남으라고 한 건데 왕녀님께서 덩달아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신 것뿐이야.”


“리반나에게? 할 말이란 게 뭔데?”


드렌턴의 마른 입술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는 잠시 지친 눈과 표정으로 로빈을 바라보더니, 습관보다는 조금 무거운 손으로 대머리에 가까워지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긴다.


“.......우리 아이를 낳으면서 리반나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됐다는 건 들었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빈. 덩달아 벤도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마지막에 얻은 그 아이도 오랜 기간의 노력과 여러 번의 유산 끝에 얻은 결과였다. 그만큼 각별하기도 했지만, 리반나는 더 이상 그 아이에게 형제를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어. 우리 둘 모두 외동으로 태어나는 외로움과, 기사 가문의 후계자로 집중되는 시선이라는 게 얼마나 커다란 굴레로 다가오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꼭 우리의 아이들만은 혼자로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거든.”

앞에 술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들이마실 것만 같은 드렌턴의 표정만큼이나 로빈의 가슴도 괴로웠다. 그렇게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키며, 자신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니까.

“어떻게든 다시 임신을 가능하게 해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나이도 적지 않았고 그동안 누적된 상처가 많았기에 어렵다는 말만 들었지. 밤마다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하는 그녀에게 나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그저 아이가 성장하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흐려졌던 그의 시선이, 서서히 로빈에게 향한다.

“그런 그녀에게,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 그녀에게, 네 아버지 데르하와 한나는 대리모를 부탁한 거다. 리반나는 그들의 사정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리반나의 사정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리반나는.......”


“그래.”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드렌턴.

“내 의문은 거기에서 시작됐지. 왜 그녀는 자신이 아기를 가질 수 없음에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왜 나에게는 그런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가장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억지로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하지만....... 리즈는 분명 자신이 리반나의 배에서 나왔다고 했어. 어떻게 된 거야?”


로빈의 질문에 드렌턴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로빈과 벤 둘 다 침을 삼키며 그의 웃음이 멎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한나의 남편이 그녀와 왕 사이의 관계를 눈치챘을 때가 아닌가 싶군.”


“.......어?”


당혹감이 번지는 로빈의 얼굴. 하지만 여전히 드렌턴의 입가엔 웃음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이미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한나는 사과와 함께 대리모를 해달라던 제안을 거두려 했지. 그런 네 아버지와 한나에게 리반나가 역으로 제의한 방법이 뭐였는지, 상상할 수 있겠냐? 나는 리반나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그건 뒤틀린 집착이라고 소리를 지르려다 겨우 삼킬 수 있었는데.”


“.......”


로빈의 벤의 침묵 위로, 낮은 웃음과 함께 드렌턴이 입을 열었다.




“이미 기능을 못 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면, 망가지지 않은 부품을 받아서 기능하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게 리반나의 제안이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음....... 새삼스럽게 말씀 드리지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조금이나마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 덕에

재밌게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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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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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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