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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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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2.1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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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19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DUMMY

“현장에서 생존한 주민들의 증언과 론크리스님께서 카나반으로 망명했다는 정황을 토대로 이런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증언이라니? 도대체 무슨 증언이에요? 카나반의 붉은 탕나무기라도 봤답니까?”


대신 브린타이나의 전언을 정리해주는 마누앙을 향한 로빈의 표정과 목소리엔 분명한 짜증이 담겨있었다. 물론 그 비난의 대상이 마누앙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새어나올 만큼 로빈이 느끼고 있는 당혹감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접대용 소파에 앉아 카나반의 총리를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끼워 넣어서 마치 제가 사주라도 한 것처럼 꾸며냈군요. 덕분에 전 복권을 위해서라면 타국의 힘을 빌려 국민들을 학살할 수 있는 폭군이 돼버렸습니다.”

결코 농담조가 아니었음에도 ‘폭군’이란 단어에 웃음을 터트린 디미르는, 차가운 불꽃처럼 자신을 쏘아보는 크리스 시선에 웃음과 표정을 삼켜야 했다.

“아니, 애초에 디나스어맨드는 강의 하류라는 점만 빼놓으면 전략적 가치라곤 하나도 없는 곳인데, 뭣하러 다른 나라 군대의 손을 빌려서 공격하겠냐고. 기자들이 바보인줄 아나.”


“어쩌면 전략적 가치가 전무했기에 공격한 것일 수도 있겠죠.”


창가에 걸터앉아 와인을 홀짝이던 벤의 의견이었다. 흥미롭다는 듯, 디미르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벤의 비어가는 와인잔을 채워주기 위해 다가선다.


“너는 이번 일의 배후를 욘의 대통령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네.”


“제의한 거래의 내용, 찾아온 시기, 그리고 의도. 모든 게 들어맞잖아요. 아직 대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은 브린타이나를 자극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과 해결사들일 겁니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지금 브린타이나의 태도를 유도할 필요가 있나? 거래를 앞당긴다고 해서 욘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건 본인에게 물어봐야겠죠.”


모두의 시선이 새롭게 집무실로 들어서는 얼굴을 향한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의 무게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곁에 함께하는 경호실장은 빠르게 분위기를 읽고 대통령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아, 이거 죄송합니다. 관광에 열중하다 보니 멋대로 늦어버렸네요.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접대용 의자에 앉으려는 그륜. 그런 그의 미소를 제지한 것은 크리스의 날선 목소리였다.


“브린타이나의 해안마을 디나스어맨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용병과 해결사가 무차별 습격을 해왔습니다. 그에 브린타이나의 현 왕실은 그 배후를 카나반과 저로 지목하며 비난성명을 발표했는데, 혹시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집무실에 모여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만히 그륜의 반응을 기다린다.


“.......디나스어맨드.......? 그런 마을도 있었나요? 죄송합니다, 반도의 지리에는 다소 무지해서요.”


그렇게 나오시겠다?

벤은 씁쓸하게 웃으며 머금었던 와인을 삼킨다.


“저는 개인적으로 욘이 배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지부진한 브린타이나의 대외표명을 앞당기기 위해 계획한 일이 아니던가요?”


“예에? 핫하, 이거 카나반의 검성께서 저를 너무 극단적으로 보고계시군요. 미묘하게 모든 일의 시기가 맞물려서 그렇게 생각하시나 본데, 우리가 굳이 저런 일에 돈을 써서 무슨 이득을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 모른다. 결국 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륜을 계속 추궁해봤자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용병과 해결사를 고용하여 타국을 침략하고, 그를 통해 분쟁을 유도한다는 것은 이미 중립국의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나버린 행위다. 욘이라는 국가를 지탱해온 중립성을 훼손하면서까지 그가 이번 거래를 빠르게 성사시켜야 할 어떠한 이유도 생각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크리스조차도 입술을 깨물 뿐 추가적으로 별다른 항의를 내보일 수가 없었다.

“뭐어, 저도 여러분의 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해도 괜찮습니다만.”


비죽 웃는 그의 입가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확신하고 있는 웃음이었다. 모두가 침묵을 예상하는 가운데 의외로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로빈이었다.


“아뇨, 거래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번 성명 건으로 의회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의견이 기울었어요. 대통령께서는 용병과 해결사를 모아주세요. 그들을 어떻게 쓸지는 저희가 결정하겠습니다.”


크리스는 멋대로 일을 진척시키는 로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입은 디미르에 의해 저지당하고 만다. 그녀로서는 호의든 악의든 모든 것을 품고 나아가야 할 상황이다. 여기서 섣부른 감정싸움을 통해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는 디미르의 생각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동의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디나스어맨드에 관련하여 욘이 조금이라도 개입한 흔적을 찾게 된다면, 그 책임은 엄중히 물을 것입니다.”


“거참 아니래도 그러시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력의 파동에도 그륜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럼 최종적으로 의회의 뜻을 헤아려보고, 차후 계획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마누앙의 뒤로 깊은 어색함이 내리깔린다. 유일하게 나머지 얼굴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여유로이 와인을 홀짝이는 그륜을 향해, 디미르가 얕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대통령께선 복귀하지 않고 계속 머물 생각이신가?”


“아, 네. 상황도 지켜봐야 하고,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니까요. 거래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카나반에 머물 생각입니다.”


“대통령과 국제무역기구의 대표라는 직책이, 다른 일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장기간 비워놔도 되는 자리인 줄은 몰랐네요.”


여전히 무심한 벤의 어투였지만 그 내용엔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별 상관하지 않았던 것인지, 대답하는 그륜의 얼굴은 여전히 느슨했다.


“저따위 것이 없어도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게 수장이란 사람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한사람에게 힘과 시선이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세계를 보는 눈은 좁아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어 특유의 경박한 웃음을 터트리는 그륜.

그 얇은 소리는 로빈과 크리스의 가슴 속에 확실하게 파고든다.




==============




스멀스멀 겨울의 어둠이 물들기 시작한 거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6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로등이 본궁을 밝힌다. 입김이 서리는 날씨에도 별관 뒤뜰에 마련된 정원에는 금빛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멍한 붉은 시선으로 정원을 훑는 소녀의 곁으로, 후덕한 인상의 여인이 다가선다.


“감기 걸려요, 예쁜 아가씨.”


“아, 감사합니다.”


여인이 내미는 담요를 받아들고서야 소녀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식어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여인은 소녀를 향해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밀었다. 다시금 그녀의 입에서 감사의 인사가 나오기 전, 먼저 여인이 입을 연다.


“아델, 아버지하고는 이야기해봤니?”


“.......아뇨. 수도로 온 뒤로 바쁘신 모양이라.......리즈한테는 소식 없어요?”


차를 홀짝이는 입술 위로 떠오르는 걱정스런 표정에, 리반나는 작게 웃으며 아델의 차가운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그 아이는 걱정하지 마. 내 딸이긴 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살아남을 년이니까.”

아델은 쿡 하고 웃는다. 하지만 웃고 있는 것은 그녀의 입가뿐,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은 빛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성께서 그러시더구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조엘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갖고 그의 이름을 딴 정원을 본궁에 조성하겠다고.”


“그런다고 그가 돌아오지는 않죠.”


아델의 목소리에 원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허망함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그녀였기에, 눈가가 아리는 그리움만이 그녀가 품고 있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이제 어떡할 거니? 네 아버지는 가문의 일원으로 복귀를 희망하는 것 같던데. 폐하의 배려로 일단 정략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잖아.”


“.......모르겠어요.”

아델은 따스한 찻잔을 품으로 끌어안는다. 그러나 손의 한기는 가실지언정, 가슴의 한기는 좀처럼 벗겨낼 수가 없었다.

“제 모든 것이었던 목소리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잖아요...... 아무것도 못한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가 무엇으로 속죄를 할 수 있을까요......?”


“아델, 조엘은-”


“알아요. 그는 제가 속죄 따윈 생각하지 않길 바라겠죠.”

겨울하늘에 말라버린 정원의 꽃과 나뭇잎들. 그들과는 다르게, 이제 그의 목소리가 함께했던 여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손길이 닿는 정원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따스했던 그의 숨결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결국 제가 머금을 수 있는 건 무력감뿐이에요.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 무력감을 계기로 만들어보렴.”

따스한 리반나의 목소리를 쫓아, 아델의 붉은 눈동자가 움직인다.

“제2의 조엘이 나타나지 않도록, 그들의 아픔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네가, 그들에 대한 무력감을 가장 잘 느끼고 있는 네가 그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어줘. 이 세상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영원하지 않아. 모든 일엔 원인이 있고, 결론이 있지만, 그만큼 변수라는 것도 도처에 깔려있어.”

리반나는 정원입구에 드리운 익숙한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너와 조엘은 목을 죄였던 굴레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렴. 그게 바로 너와 조엘의 시간에 대한 속죄가 되지 않을까?”

그녀는 아델의 시선을 뒤로하고, 자신을 찾아온 듬직한 그림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마지막으로 미소를 품은 얼굴 아래 목소리를 흘린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숙명을 거부하는 것엔 큰 고통이 따르지. 하지만 단언컨대, 분명 그럴 가치가 있단다.”





==============





“저녁식사 10분 전까지 모든 개인정비 마치고 집합한다. 알겠나?”


“예엣.......”


“알겠나?!”


“예엣!”


카논은 생도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나서야 만족했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것을 신호로, 짤막한 휴식시간을 부여받은 모든 얼굴에서 같은 한숨과 신음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분대용 천막으로 들어서는 셰르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안 해도 되니까 좀 누워있으면 안 되나.......”


자신의 몸무게에 육박하는 군장을 내려놓는 셰르의 목소리는 죽어가는 사람의 떨림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그를 돌아보는 유진의 입가로 비웃음이 떠오르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성이라곤 모르는 시즈키치의 생각답네. 식사를 거르면 당장 내일 오전 훈련 때 쓰러져버릴걸? 괜히 우리한테 피해 주지 말고 알아서 챙겨 먹어.”


평소의 셰르였다면 가슈펠라르 가문의 패악을 들먹이며 맞섰을 테지만, 그에겐 이미 열을 올릴 기운조차 남아있지않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닭이네.”


그리고 둘은 마지막으로 막사에 들어서는 리즈의 해맑은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너 진짜 대단하다.”


체력이- 라고 덧붙이지는 않은 셰르였다.

왕녀라는 신분은 제쳐두고 자신을 ‘동기’로서만 대해달라고 당부한 리즈였기에, 셰르와 유진은 약간의 어색함을 극복해내고 예전과 같은 태도로 리즈를 대할 수 있었다. 오히려 신분을 뛰어넘은 리즈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흥미가 커져가는 참이었다.

물론 이런 동기생에 대한 흥미와는 별개로, 야외훈련은 말 그대로 지옥과도 같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진행되는 훈련과 행군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한계로 몰아넣고 있었고, 주말마다 시행되는 멘토링과 시험은 개인정비시간과 취침시간까지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특히 유진과 같이 기초체력성과에 계속해서 지적을 받는 생도들은 그 압박감이 더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모두 ‘의도적인’ 중간의 성적으로 통과해나가고 있는 리즈는, 나름 기수대표후보로 평가받는 셰르와 유진 둘에게도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신기하다는 듯 리즈의 다리를 쓰다듬는 유진. 그 부드러움과 단단함은 진정 왕녀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곡선이었다. 유진은 이미 모포와 침낭 위에 쓰러져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순간 리즈의 얼굴에 떠오르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지 못한 채였다.


“너야말로 이렇게 큰 걸 달고 다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꺄악!”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땀을 식히기 위해 반쯤 풀어헤친 유진의 제복. 그 흐트러진 사이로 리즈가 불쑥 손을 집어넣는 바람에 유진은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감쌌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유진 거는 말랑말랑 기분 좋아.”


“야, 야야! 차가워! 그, 그만.......”


셰르는 지친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아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샤워실에서 우연찮게 그 맛(?)을 본 뒤로, 리즈는 걸핏하면 유진을 습격하곤 했던 것이다. 아무리 동기라고는 하나, 셰르도 남자다. 처음엔 이런 광경에 익숙해지질 않아 얼굴을 붉혔던 그였지만, 이제는 덤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경지까지 와버렸다.


“야, 적당히 해. 애 숨넘어가겠다. 그렇게 기분 좋으면 네 걸 만지면 되지 왜 만날 괴롭히냐.”


“그래도 난 유진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은걸. 내 친구 중에도 부드러운 애는 있지만, 이렇게 말랑말랑 푹신푹신하지는 않아. 셰르도 만져볼래?”


울상을 지으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는 유진의 얼굴을 한 번 스윽 바라보고, 셰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아니, 사양할게.”


그 순간 유진의 목소리가 멈췄기 때문에, 셰르는 자연스럽게 다시 두 소녀가 붙어있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유진에게서 벗어난 리즈의 시선은 천막의 밖을 향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분위기에 셰르가 입을 떼지 직전, 리즈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온다.


“누구지?”


“어? 누구냐니?”


리즈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다가서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셰르는 그 순간 그녀가 본인의 코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후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은 식사의 모든 구성을 부식차가 오기도 전에 맞춘다던가,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교관이 누구인지 먼저 말해주었던 일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누구지?’라고 물었다는 것은-


“새 교관? 아니면 정부관계자?”


정답이 누구든지 훈련장을 방문하면 피곤해지는 건 자신들이었기에, 셰르의 표정은 잔뜩 뒤틀릴 준비를 한다. 하지만 돌아보는 리즈의 표정은 그의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니, 이건 도시의 냄새가 아닌.......”


리즈는 말을 마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셰르는 코를 훌쩍이며 옷매무새를 고치는 유진과 눈을 맞췄고, 자신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피곤이란 존재와의 치열한 갈등 끝에 둘은 결국 리즈의 뒤를 따라나서기로 정한다.




셰르는 리즈의 검붉은 뒷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빨래와 근무일정을 알아보기 위한 생도들로 북적거리는 중앙공터의 구석, 아직 부식차가 도착하지 않아 한산한 식당의 뒤편으로 통하는 모서리에서, 리즈는 자신을 쫓아 나온 두 동기를 손짓으로 부르는 중이었다.


“뭐야, 여기서 뭐-”


“쉿!”


목소리를 제지당한 셰르는 리즈의 시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식당의 뒤편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그의 눈으로도 세 명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둘이 입고 있는 것은 자신과 마찬가지인 남색의 생도복. 나머지 한 명의 복장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교관의 복장이다.

잠시 후, 셰르는 그 어색함의 정체를 알게 된다.

“.......저 교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낮은 속삭임과 함께 셰르는 마침내 리즈의 ‘누구지?’라는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새로운 교관이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위병소가 순순히 입소를 허락했다는 건 신분상에 문제가 없다는 뜻. 그럼에도 리즈는 어째서 이토록 경계를 하고 있는 걸까.

세 그림자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까지는 들려오지 않았기에 셰르와 유진은 별다른 반응 없이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리즈는 오히려 앞으로 몸을 내밀어 버린다.


“교관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세르와 유진은 크게 당황한다. 그들은 순간 리즈를 만류하기 위해 다가섰지만, 리즈는 이미 어둠을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에 둘도 덩달아 같이 대화에 끼어드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뭐, 뭔가?”


세 그림자의 거리가 황급하게 벌어진다. 되물어온 목소리는 교관복장의 남자였으나, 그 얼굴에 떠오른 황망함은 결코 그들이 보아온 교관의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야훈련일정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2소대부터 순환식으로 야간행군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3소대는 야식 먹고 대기합니까, 아니면 이론훈련 들어갑니까?”


좀처럼 리즈에게선 볼 수 없었던 절도있는 동작과 목소리, 그리고 바람 같은 혀놀림. 셰르는 교관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그 농도를 더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정은 각자 확인해야지 왜 나에게 묻나? 큰 변동은 없을 것이다. 대기하고 통제에 따르도록.”

뒤돌아서기 직전, 교관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두 생도를 향한 말을 잊지 않는다.

“자네들은 내 이야기 잘 생각해보고.”


교관의 그림자는 빠르게 사라진다. 뒤이어 슬쩍 빠져나가려던 생도의 발걸음을, 리즈가 굳은 목소리로 붙잡는다.


“저분 누구셔? 뭔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 너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야. 신경 쓰지 마.”


차갑게 리즈의 시선을 뿌리치고 사라지는 두 명의 생도. 결국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 듯 보였지만, 유진의 붉은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늘 심야훈련 없는 날이지.”


셰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교관이라면 모를 리가 없겠지.”



리즈가 둘을 향해 뒤돌아선다. 그녀의 얼굴엔 마침내 재미있는 것을 찾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있었다.



“카논 교관님께 가보자.”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ㅠ

시험은 곧 끝납니다만, 과제까지 엇물려 있어 요번 주는 계속 들쑥 날쑥입니다. 죄송합니다 ㅠ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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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2.13 22:16
    No. 1

    리즈가 크게 한 건 해결해줄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14 00:25
    No. 2

    불의검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
    리즈가 냄새 하나는 잘 맡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2.14 01:10
    No. 3

    저 짭교관놈 왠지 욘첩자일듯? 죽여라 리즈 죽여버려 욘에게 큰거 한방 먹여요 작가님 능글능글한게 누군가를 보는거같아서 마음에 안드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14 02:36
    No. 4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23 02:42
    No. 5

    이건 약간 후각이라고 할수 없는듯하네요 ㅋㅋ
    무협지에서 경지에 다르면 눈으로 어떤 기의 흐름이나 기세 혹은 카르마(업보)를 보는 것처럼 리즈는 \'그런걸\' 맡는 재능을 타고난 듯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3 04:24
    No. 6

    초월적감각이라 함은 결국 순수하고 원초적인 감각일지, 아니면 말씀대로 어느 경지라고 명할 수 있을지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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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7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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