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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0,906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3.04 23:11
조회
975
추천
27
글자
21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DUMMY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작고 짧은 전투였지만, ‘내전발발’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신문의 1면을 장식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팔루뎀의 본궁 앞은 몰려든 취재진과 그들을 저지하려는 ‘엑스클라마트’ 단원들의 몸싸움이 한창이었다. 폐위된 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국왕과,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다짐한 팔루뎀의 군부.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한 장이라도 담기 위한 기자들의 몸부림이었지만, 활짝 열린 팔루뎀의 성문과는 달리 본궁의 입구는 좀처럼 길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계엄령을 내리지 않고 성문을 열어두자는 것은 벤의 조언이었다. 강압적인 분위기로 도시를 경직시키지 말고, 꿀릴 게 없는 당당한 태도로 복귀를 천명하라는 의미였다. 국왕이 팔루뎀으로 복귀한 지 이제 3일이 지났지만, 그 효과는 꽤나 가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본래 철군했어야 할 카나반의 주둔군이 여전히 잔류해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표출하는 시선이 옅어졌다는 점이 중요했다. 카나반의 지원을 받기로 표명한 국왕이 만약 계엄령과 함께 성문을 폐쇄하고 카나반의 주둔군의 품에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면, 언론은 과도한 내정간섭의 여지를 물어 카나반과 크리스를 비난했을 터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크리스 주도의 탈환전에 카나반은 보조만 해줬다는 형식으로 팔루뎀에 복귀할 수 있었고, 그 증거로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고 도시가 국왕군의 자율적인 통치 아래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언론과 귀족들의 시선이 크리스에게만 집중될 수 있었다.

크리스의 실각 후 눈치만 보며 상황을 지켜보던 남부의 지방귀족들이 ‘당당한’ 크리스의 귀환소식을 듣고 팔루뎀으로 직접 찾아오거나 지지의 서신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녀가 적법성에 부합된 모습으로 복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상황을 보여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어수선한 본궁의 입구와는 달리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본궁 내의 회의실에서, 크리스는 기자무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팔루뎀을 양도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이 도시가 브린타이나 남부와 동부전선에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팔루뎀의 영주이자 남부군 지휘관 마르틴 도른 준장. 발언을 허락받자마자 거세게 항의하는 그의 심정을 크리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다. 검성을 필두로 한 반군을 내몰고 최대한 신속하게 정세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대들뿐만이 아니라 ‘동맹’의 힘도 필수적이다. 붉은 장미의 침략으로 인해 어려운 와중에도 손을 뻗어준 카나반에게 당장 약속할 수 있는 보답이 달리 뭐가 있겠는가?”


모여 있는 귀족들의 표정 사이로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고작 표면적인 지지와 약간의 지원군만으로 중요거점 하나를 순순히 내놓겠다는 크리스의 선택에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공식’지원인 욘의 존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도른의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을 거라고 크리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무기를 겨누던 적국. 그 참혹함을 잊고 손을 뻗어준 카나반의 의리에는 분명 백번 감사해도 모자랍니다. 하지만 팔루뎀이라니요?! 남부 최대거점을 그냥 넘겨준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태까지 이곳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귀족과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폐하께선 아직 입지가 불안정하신 상태입니다. 아군을 끌어들여도 모자랄 판에 적을 늘릴 선택을 하고 계신 겁니다!”


덤덤한 벤과는 달리 회의실에 모여 있는 귀족과 장군들의 얼굴엔 꽤나 당혹감이 깃들고 있었다. 벤은 처음엔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으나, 곧 이곳이 카나반이 아닌 브린타이나임을 기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도른의 태도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카나반은, 당장 총리만 해도 왕에게 딴지를 걸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귀족파 의원들은 타당성을 접어두고 일단 왕과 왕당파에 반대부터 외친다. 그런 모습들이 일상인 카나반과는 달리, 브린타이나는 철저한 왕당독재체재. 중앙에서 실각했다고는 하나 상석에 앉아있는 존재는 분명 왕의 이름과 혈통을 가지고 있는 자다. 그런 절대자의 앞에서 도른처럼 서슴없이 목소리를 높여 의견을 내뱉고 있는 것이 이들에겐 어색한 광경인 거겠지.


“물론 양도는 내가 디나스아리얼에 재입성하고 난 뒤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자네들이야말로 새로운 왕당의 중심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먼저 털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결정이다.”


마침내, 크리스의 안경 너머 푸른 눈동자가 ‘독재자’의 빛을 되찾는다. 빠르게 회의실을 짓누르는 위엄은 단순히 목소리에 영력이 실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위태한 순간임에도, 오직 스스로에 대한 확신만으로 가질 수 있는 군주의 오만함과 폭력성.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눈빛에 도른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무례를 사과한다.


벤은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혈통뿐인 크리스에게 이들은 어째서 복종하고 그녀를 지지하는가.

납득할 수 없는 결정도 단순히 그녀가 내린 결론이라는 사실만으로 수긍하고 고개를 숙인다. 카나반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광경이었기에, 벤은 자신도 모르게 친구와 그녀의 얼굴을 대비시켜보고 있었다.

극도로 집중되어있는 권력. 어쩌면 그 집중된 권력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는 허무하게 왕좌를 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즉, 지금 그녀를 감싸고 있는 모든 상황과,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에 대해 그녀가 느낀 감정은 굴욕이 아닌 분노.

그 날선 창의 끝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는, 회의실 안의 모두가 알고 있다.


“폐하, 성문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조심스럽게 크리스의 곁으로 다가온 엑스클라마트 근위대원. 크리스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입으로만 대답한다.


“말하라.”


“경상을 입은 장교 하나가 폐하께 보고드릴 내용이 있다며 찾아왔습니다. 신분을 확인하여 현재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는 중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름은?”


“믈렌 제이코 소령입니다.”


그제야 근위대는 크리스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믈렌.......? 제7중앙국경초소의?”


“예.”


“........잠시 실례하겠다.”


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일개 장교의 이름과 직책까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머리에 감탄을 하던 벤은 크리스의 눈빛을 받고 나서야 의도를 깨닫고 뒤를 따라나선다.





“폐, 폐하!”


경비대의무실이 발칵 뒤집어진다. 갑자기 천막입구에 드리운 그림자를 향해 군의관이 커다란 목소리로 경례를 올렸고, 지난 전투로 신음하고 있던 병사들 또한 아픔을 잊고 병상에서 일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손짓 한번으로 모든 소란을 진정시킨 크리스가 찾고 있는 얼굴은 오직 하나였다.


“보고를 듣고 왔다. 믈렌 소령은 어딘가?”


“이, 이쪽입니다!”


군의관이 안내한 곳은 천막의 안쪽이 아닌 바깥 공원에 마련된 간이 치료소였다. 전투로 인해 기존 의무대에 자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인이 자처하여 비교적 경상인 자신은 밖으로 옮겨달라고 했다는 것이 군의관의 설명이었다.


“폐하!”


크리스와 벤, 그리고 디미르는 공원에 도달하기도 전, 목발을 짚은 채로 다가오는 기사의 경례를 볼 수 있었다.


“믈렌 소령. 오랜만이군. 사열식 이후로 처음인가?”


불편한 다리로 무릎을 꿇으려는 믈렌을 제지하며, 크리스는 대신 손을 내민다. 감격에 찬 눈길로 그 손을 맞잡는 믈렌.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기억해주고 계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잖나. 난 유능함의 작은 조각이라도 보인다면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에게 ‘기억당했다’는 사실은 브린타이나의 모든 관료, 기사, 마법사들에게 있어 일종의 영광이자 책무이기도 한 관례였다. 지위와 직책, 그리고 종족에 상관없이 그녀가 기억했던 모든 대상들은 자신들만의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기에, 재능을 보는 그녀의 눈은 출세를 보증하는 징표와도 같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모든 이들이 재능을 터트린 건 아니었다. 자신의 그릇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녀에게 ‘기억되었다’는 압박감에 스스로 무너진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커다랬기 때문에, 믈렌은 진심으로 감격스러운 표정을 내비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넨 동부전선에서 복무 중인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있나?”


하지만 기쁨과 감격도 잠시, 본론을 찾는 크리스의 목소리에 믈렌의 표정은 곧바로 싸늘하게 식는다.


“전선에서도 폐하의 실각 소식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신 과정에 힘을 보태지 못한 점에 대해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그저 당장은 군인으로서의 직무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제국군으로부터 대규모 습격을 받아 초소를 잃었습니다.”


“제국군?”

크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하지만 국경에선 어떠한 보고나 소문이 없었다. 어찌 된 건가?”


“당연합니다. 국경의 장군들은 모두 검성의 뜻에 따르는 자들. 제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의 입장이 난처해질 테니 함구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믈렌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것은 단순히 부상에서 피어오른 것이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분노에 가까운 것이었다.

“부하 중에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제국과 결탁해왔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전방소초들의 보고도 없이 갑자기 본대가 습격을 받은 것도 아마 그들 덕분이었을 겁니다.”


“배신자라니, 제국이 브린타이나의 최전방에 첩자를 심어놓았단 말이냐?”


“최전방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 부관은 제가 중앙군에 있던 시절부터, 그러니까 적어도 5년은 알고 지낸 자입니다. 그런 그가 제국의 끄나풀이라면,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얼마나 높은 인간들이 제국의 마수 아래 있는 건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폐하의 왕위를 찬탈한 세력들, 그들이 진실로 검성을 우대하기 위해 기사도를 져버린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북쪽으로 퇴각하지 않고, 폐하를 따라 팔루뎀으로 찾아온 이유입니다.”


크리스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난다.


“.......그대는 지금 나에게 등을 돌린 모든 이들이, 단순히 검성과 뜻을 함께했기 때문이 아니라 왕국 그 자체를 배신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건가?”


믈렌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린다.

믿었던 부관이 배신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결론까지 닿는 것은 물론 비약에 가깝다.

하지만,

만약 그의 예상이 진실이라면,

그 파장은 실로 거대하게 왕국의 기틀을 뒤흔들 것이다.

그 모든 중심이 검성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던 크리스였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는 빠르게 그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다다른 결론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동맹’이라는, 가장 확실한 계기를 심어주게 되었다는 의미였으므로.


“........”


벤은 이 대화를 끝까지 별다른 반응 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크리스가 디미르와 함께 본궁으로 발걸음을 되돌릴 때까지도, 그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지금은 묻어두는 게 좋다고 판단했으니까.




===================




케타르디노 상회.

사무실에 걸려있는 상표명은 분명 건전하고 활기찬 상인들의 조합을 대변하는 온갖 희망찬 표정과 광고들로 장식되어 있지만, 그 문고리를 열고 들어선 내부는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벽을 장식하고 있는 온갖 무기들, 부를 과시하기 위한 동물의 박제장식. 결정적으로, 사무실에 모여 있는 얼굴들은 결코 상인의 인상이 아니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방문자에도 맞이하는 남자의 얼굴에선 전혀 당혹감이나 반가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경어 아래에 감춰진 것은 분명한 경계의 목소리와 눈빛. 짙은 후드의 그림자 안에 얼굴을 감추고 있던 손님은, 대답 대신 후드를 걷어 먹색 눈동자를 드러내는 것으로 반응을 이끌어 낸다.


“허어-, 이거 고명하신 총리님 아니십니까? 나랏일이 너어무 바쁘셔서 우리 같은 축생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으신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행차를 하셨나?”


마누앙의 얼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사무실 가장 구석진 곳에 책상을 두고 앉아있던 험악한 인상의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와 함께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는 얼굴들도 험악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빛바랜 왼쪽 눈과 그 눈을 품고 사선으로 새겨진 흉터는 그 누구보다도 높은 그녀의 무법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케타.”


“어머, 이름은 까먹지 않으셨네?”

그녀와 안면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른 ‘사무원’들은 흥미를 잃은 듯, 곧바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되돌아간다. 케타는 얇은 미소를 유지한 채로, 공화국의 총리를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접대용 탁자로 안내했다. 숙성된 향의 차를 내놓으며, 그녀는 마누앙의 첫마디를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먼저 입술을 움직인다.

“우리와는 손을 씻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찾아오시다니 좀 의외네요. 니바르토 가문에서 또 무슨 말썽이 있으셨길래?”


“니바르토의 가주로서 찾아온 것이 아니오.”


“허?”

점잖은 움직임으로 찻잔을 내려놓는 마누앙을 향해 케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뒤튼다. 이 남자가 가주라는 직책을 맡기 전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가주라는 직책을 얻는 일에 ‘협조’했던 그녀로서는, 가문의 범주를 벗어난 자격으로 이 남자가 찾아온 적이 없었기에 잠시 혼란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가주로서가 아닌 그의 직책을 기억해낼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첫 반응은 더욱 뒤틀린 표정이었다.

“......총리라는 직책으로 이런 곳에 얼굴을 내보이시는 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요.”


“내 걱정은 마시오.”


“당신 걱정을 하는 게 아니야.”


마누앙은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이쪽을 향하는 직원들의 시선은 악의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감정이 실려 있다. 그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하조직의 일원이라고는 해도, 그들 중 전직 기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직 해결사나 용병이 차지하는 비율보다도 월등하게 높다. 당연하게도, 정상적으로 은퇴한 출신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보통.

전장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기사, 내부고발이나 항명 등으로 파면당한 기사, 몰락한 귀족, 또는 제3국출신의 범죄자.

그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분노에 가까웠다. 상이군인에 대한 복지가 전무하다시피하고, 연금은커녕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한 기사들이 마지막으로 힘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국가로부터 팽당한 그들의 유약함을 교묘하게 분노로 변질시켜 고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조직들.

그랬기에, 국가를 대변하는 ‘총리’로서 이 자리에 찾아온 마누앙을 향한 시선이 고울 리가 없는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하지만 마누앙은 다시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며, 구겨진 케타의 얼굴을 마주한다.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진 것은 물론이었다.


“뭐가 문제냐고? 총리로서 이곳에 찾아왔다는 건, 카나반의 대리라는 자격으로 찾아왔다는 뜻이잖아? 그건 즉 국가차원에서 우리의 손을 빌리고 싶다는 이야기지?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필요 없다고 내팽개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불명예제대를 당한 기사들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자신 또한 부상을 입음과 동시에 제대‘당한’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었기에 마누앙은 직접적으로 쏟아지는 분노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 빗나간 방향성에 대해서는 지적할 필요성을 느낀 그였다.


“무언가를 의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오. 동시에 당신은 총리라는 직책을 국가의 대리인으로 표현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뭐어?”


짜증과 의문이 뒤섞인 케타의 되물음. 하지만 이미 총리의 시선은 다시금 입을 벌리는 사무실의 입구를 향해 있었다.


“저는 안내의 역할을 맡았을 뿐, 국가의 이름으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누앙의 심기는 명백하게 불편했다.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 그리고 찾을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곳을 직접 방문해야 했다는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생각을 이번만큼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아, 총리님 죄송해요. 갑자기 배가 아파서. 먼저 인사는 나누셨나요?”


기사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없이 나타난 이 허술함에, 케타를 비롯한 사무실의 직원들은 경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느슨히 접대용 탁자로 다가오며 손을 내민 덕분에, 유일하게 케타만이 인사에 반응을 했을 뿐.

하지만 무의식적인 악수 뒤에 튀어나온 그의 소개에, 사무실의 모든 얼굴은 경악하고 만다.



“반갑습니다. 국왕인 로빈슨이라고 합니다.”





=============




달빛조차 흐린 겨울밤.

평원의 새벽은 짙은 차가움만큼이나 고요하다.

지평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야외훈련장은 어느덧 가까워진 복귀에 대한 흥분조차 식은 채로 침묵에 빠져있었다. 야간훈련이 없는 날의 전형적인 풍경. 그러나 근무자가 아닌 눈동자가 깊은 그림자 속에서 홀로 빛나는 중이었다.


“왔나.”


눈동자가 빛의 방향을 바꾼다. 처음엔 바람만이 가득한 것으로 보였지만, 이내 새롭게 나타난 눈동자들이 그의 부름을 받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말끔한 교관복의 차림새였다. 마치 그 복장 자체에서 권력이 우러나오는 듯, 남자의 어투와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그에 압도당한 건 아니지만, 다가오는 예비부부의 표정과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남자는 빠르게 부부의 뒤에 붙어 다가오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살펴본다. 전투모를 깊게 눌러쓴 탓에 이마 윗부분부터는 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저번에 이 부부와 이야기하던 중 덮쳐온 세 명의 생도는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나 부부가 그들로부터 추궁을 당해 계약을 위반했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들었던 것이다.


“이 한 명밖에 없었나?”


“예에.......”


부부 중 남편 쪽에서 힘없는 대답이 들려온다. 애초에 이들은 기사로서의 가치보다는 훈련소 내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을 목적으로 계약한 자들. 자신의 존재가 노출된 탓에 남자는 한동안 훈련소 내에 잠입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었지만, 야외훈련이 끝나감에 따라 실적에 대한 조급함이 생겨 다시 그들을 불러내어 ‘계약대상’을 찾아보도록 요청한 참이었다.


“.......뭐, 없는 것보단 낫겠지.”

여기서 그들의 무능을 욕해도 실적은 오르지 않는다.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부부가 데려온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다부진 신체를 한번 주욱 훑어보았다.

“그래, 계약하고 싶다고? 이번 기수에서 적어도 30등 안에는 들어야 계약을 해줄 수 있어. 그런 기량이 되지 못하면, 이들처럼 다른 생도들을 꼬득여 데려오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종이를 꺼내 드는 남자. 그것을 받아들며, 여인은 조심스럽게 속삭인다.


“.......지나.”


“지나? 성은 따로 없나?”


여인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전투모를 벗었고, 구속당했던 거칠고 찬란한 금발이 겨울밤바람에 어지러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어두운 달빛도 그 금빛만큼은 완벽히 거두어들일 수가 없었던 탓에, 짙은 밤중이었음에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남자가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 것은,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여인의 태양 같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녀는 새빨간 혀끝을 살짝 깨물며, 귀여운 미소를 품은 채로 에페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아뮤르 지나~.”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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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43 슈크림빵이
    작성일
    15.03.04 23:23
    No. 1

    결국은 율국의 계획대로. 모든게 흘러 가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04 23:25
    No. 2

    오오 슈크림빵님 빠른감상 감사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3.05 01:03
    No. 3

    흐 변수의굴레는 한화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서 보면서 이상황 저상황 매치해봐야되서 머리가 못따라갈때도 있네요.. 한 두세번 읽을때도 ㅎㅎ 잘보고갑니당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05 01:48
    No. 4

    동결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중구난방이라도 좀 더 부드럽게 이끌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3.05 14:27
    No. 5

    오늘 글 중 뒷이야기가 제일 궁금한건 로빈이야기. 저 왕이란 넘(?) 은 참 무대뽀네요. ~~~~
    총리입장에선 골치아프겠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05 17:57
    No. 6

    불의검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
    무대뽀에 노답왕이라 마누앙만 고생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3.14 01:07
    No. 7

    로빈슨이거 지나고 왜 이 커플는 여기저기 깜짝 등장을 좋아하는거야? 분명 둘다 즐기고 있을꺼야 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14 01:32
    No. 8

    서프라이즈! 마더파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2 배고파요
    작성일
    16.08.20 11:28
    No. 9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는 그럴수밖에 없겟다 싶은데....
    국가들의 전체 크기가 엄청 작은거 같아요....
    대충 5개국 합쳐도 한반도 정도... 그래도 하루,겨울,여름 생각하면 별의 크기는 일정수준은 될껀데... 다른땅도 많을껀데 싸우지말고 살지.
    라는 잡생각이 갑자기 나네요
    잘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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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8.22 18:27
    No. 10

    배고파님 진중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셨듯이, 배경 자체가 '반도'인지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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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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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41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43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78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63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75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8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203 26 19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76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8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73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7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74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7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7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7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8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10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9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85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71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91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5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16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8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43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25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31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53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47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8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84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22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9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62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303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6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80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8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93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33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301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46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22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64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43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24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74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35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9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35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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