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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10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1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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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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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글자
18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DUMMY

낮게 깔리는 바람을 따라 타고 들어오는 고함소리와 이어지는 비명소리. 순식간에 광기에 사로잡힌 본궁의 곳곳이 붉게 얼룩진다. 이성을 잃은 게걸스러운 눈동자들이 찾고 있는 얼굴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지키리라 다짐했던 근위대의 기사라면 검을 잡고 일어나 인생 최대의 영력을 내뿜어야하는 순간.

그러나 국왕직속근위대, 루디 리반나 대위는 침실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기사로서의 용기와 의무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품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갓난아이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소리에 이어 거칠게 열리는 침실의 입구. 리반나는 화들짝 놀라며 아기를 끌어안았지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살육에 미친 가슈펠라르의 기사들이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야? 폐하는?”


“.......”


대답대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흔드는 드렌턴. 이미 그의 표정은 반쯤 영혼이 빠져나가 있었다.


“......왕자님들은? 왕녀님은?”


“......모르겠어. 보이질 않아.”


“그럼 막내왕자님은!? 막내왕자님은 아직 왕비님의 침실에-”

리반나는 숨을 멈춘다.

막내왕자라는 단어를 들은 남편의 표정이,

지금 본궁에서 날뛰고 있는 그 어떤 기사의 얼굴보다도 소름끼치게 식어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리반나가 품에 안고 있는 아이에게 흐르고 있었다.

“.......왜 그래, 여보.......?”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주고 아껴주었던 남편.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그는 ‘남편’이 아닌 근위대이자 기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이를.”


천천히 손을 내미는 그를,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치 물건처럼 아기를 부르는 그의 표정을,

리반나는 일찍이 본적이 없었기에 턱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왜......? 뭐 하려고.....?”


“.......”


그는 말없이, 묵직한 손으로 아이를 리반나에게서 떼어놓는다. 아빠의 품을 알아 챈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작은 손가락을 뻗었고, 드렌턴은 그 손가락을 마주잡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고 리반나는 그 순간, 그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안 돼!! 여보, 여보! 진정해, 우리아기야. 지금 뭐하려고 하는 거야?!”


필사적으로 드렌턴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리반나. 그녀가 절규하며 눈물을 흩뿌렸지만, 천천히 검을 빼어드는 드렌턴의 입술은 굳건했다.


“......우리는 근위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폐하와 왕족을 지켜야 해. 하지만 폐하는 이미....... 남은 건......”


“여보! 제발!”


뜨거운 눈물. 그리고 그 우직한 갈색 눈동자로, 드렌턴은 자신의 두 사랑을 내려다본다. 손이 베이고 피가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 자신이 내민 검을 붙잡고 있는 부인과, 말똥말똥한 눈으로 아비를 향해 배시시 웃고 있는 아기.

드렌턴은 이가 뒤틀릴 정도로 절규를 삼킨다.


“.......미안, 리반나. 난 사람이길 포기하겠어.”

우직한 ‘기사’는 검을 휘둘렀고, 리반나는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진다. 칼등으로 얻어맞은 관자놀이의 고통은 아무래도 좋았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문밖으로 사라지는 남편의 작은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으므로.

“.......날 원망해, 리반나. 절대 나를 용서하지 마.”


원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용서할 자격 따위 자신에게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삼키며, 리반나는 의식을 놓았다.





====================





조명조차 흐릿한 무거운 침묵이 천막에 가득 차있다. 그러나 리반나도, 드렌턴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경악하는 지나와 로빈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와 독대를 하게 된 드렌턴이었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눈앞에 있는 존재를 현실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길고 괴로웠던 그 기나긴 시간동안,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수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욱 깊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왔을 그녀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침묵은, 리반나의 가벼운 목소리로 인해 먼저 깨지고 만다.


“.......저분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한 리반나의 검푸른 눈빛. 하지만 그 시선의 끝에 로빈이 있다는 것을 드렌턴은 알 수 있었다.


“.......그래.”


“훌륭하게 자라셨네.”


그 무미건조함에 드렌턴은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방금 그 말이 순수한 감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리반나의 얼굴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있었다.


“.......미안하다.”

결국 드렌턴은 그녀의 시선과 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참고 있었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결코 잘한 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너와, 그리고 내 스스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 난 당신을 용서할 자격이 없어.”

그녀의 굳은 표정과, 그리고 이 대답이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 드렌턴은 단편적으로밖엔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가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른 채로.

“당신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일을 했어. 결과적으로, 그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거야. 나만 괴로웠던 게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린 같은 상처를 안고, 같은 시간을 보냈어.”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제야 드렌턴의 머리에 스치는 작은 생각.


“......그 아이는......”


“리즈말이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드렌턴. 리반나는 팔짱을 낀 채로, 지그시 그를 바라본다.

“.......내가 ‘그 날’ 수도에서 빠져나올 때, 이미 리즈를 임신한 상태였어.”


“......뭐?”

그 자리에서 튀어오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아낸 드렌턴이었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리반나를 향해 입술을 움직이려 애를 썼지만, 그의 목소리가 간신히 튀어나온 것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하, 하지만-”


“응, 맞아. 리즈는 당신 아이가 아냐.”

깊은 한숨. 탁자 위로 턱을 괴며, 리반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남편의 세월을 짓누른다.

“......말했잖아. 난 당신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고.”




==============




“아아- 이 나이에 갑자기 양아버지인가아?”


흐릿한 달빛을 따라 번지는 리즈의 푸념 섞인 목소리. 부부의 재회를 위해 덩달아 내쫒긴 로빈이 죽은 모래 위에 드러누운 리즈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양아버지? 얘기도 안 들어보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냄새가 다르니까.”


“냄새.....?”

로빈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셔츠를 집어 올려 냄새를 맡는다. 옅은 땀 냄새뿐이었지만, 그는 곧 리즈에게서 느껴졌던 ‘야생성’을 기억해내고 납득의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 리즈. 그럼 나한테선 무슨 냄새가 나?”

단순히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옆에 있던 지나가 변태를 보듯이 표정을 일그러트리긴 했지만, 누워있는 리즈는 로빈이 가진 질문의 의도를 평범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잘 모르겠어. 어딘가 좀....... 아니, 그냥 잘 모르겠어.”


“하하, 내 존재감이 그렇게 옅었나......”


실망하는 로빈의 옆구리를 찌르며 다가오는 지나.


“야, 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말을 놓고 있어?”


“아, 그러네. 나도 모르게 편해서....... 아, 혹시 질투하는 거야?”


“........”


왕의 정강이를 걷어차기 위해 다가가는 지나를 멈춰 세운 것은 느긋한 리즈의 목소리였다.


“둘이 그렇고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걱정 마.”


“우와, 냄새로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아니, 그건 딱히 냄새가 아니라도 둘이 마주보는 시선만 봐도 딱 보이는데 뭐.”

리즈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말에 따라 마주보고 있는 남녀를 올려다본다. 쑥스러운 미소가 교차하는 그 시선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달빛마저 무색한 빛의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리즈는 좀처럼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봐왔고, 겪어왔던,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 모든 이들에게 상처만을 남기고 버려졌다.

비틀린 시선으로 눈앞의 둘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니다. 조심스럽게 이들을 축복하고 싶다. 그들 또한 상처를 안고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저, 더는 아델이 흘렸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굳이 말하자면, 아직 지나의 아랫배에서 미세한 피 냄새가 벗겨지지 않았다는 거. 그리고 분명 많은 눈물을 흘렸을 텐데도 아직 둘은 따스하게 남아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정도?”


리즈는 슬쩍 둘의 눈치를 살핀다. 예상대로 그들은 다소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고, 조심스럽게 마주잡은 손과 함께 미소를 되찾는다.

그것으로 리즈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극복해낸 것이다.

자신들을 얽매여오던 굴레들을 그들은 스스로, 그리고 다른 이들의 도움과 희생을 통해 벗어낼 수 있었던 거다.


.......만약 아델과 조엘이 조금 더 일찍 이들을 만났더라면-.



“아, 로빈 지금 발정했다.”


“야 임마!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농담이었는데 부정 안하네.”


깔깔 웃는 리즈와 얼굴을 붉히는 로빈. 결국 지나는 로빈의 정강이를 걷어찼고, 달빛만 흐르던 평원에 왕의 신음이 같이 섞여 들어간다.




=================




좀처럼 지치거나 초조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는 ‘늑대’ 크라트였지만, 베르달이 빠르게 망가져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그에게도 짧은 한숨을 입에 달고 살게 만들었다. 북쪽 숲까지 아펜타우스의 ‘파괴’ 영향권에 들게 됐으니, 이제 중앙군으로서도 가만히 방관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척후가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인 대대적인 반격과 탈환.

자신도 모르게 날이 선 상태로 하루 종일 군영에 있다 보니, 밤늦게 이어진 전술회의를 마치고 천막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셔츠의 단추를 대부분 풀어헤친 뒤였다.


“늦었네에.”

야전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엘라의 미소. 크라트는 순간적으로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의 의중을 읽었는지, 엘라는 새빨갛게 웃으며 책을 덮었다.

“왜에,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좀 의외였을 뿐이다.”

아늑한 조명, 1인용 간이침대. 맨살과 공기 중에 얇은 천하나만 놓고 누워있는 엘라의 희미한 곡선. 크라트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으므로, 그는 침대 옆에서 장비를 벗으며 이렇게 말했다.

“마땅한 상대가 없었나?”


조심스럽게 검을 내려놓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그는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엘라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다.


“.......무슨 상대?”


“전장에 나오기만 하면 강한 기사들과 잠자리를 갖는 것. 네 일종의 버릇 아니었나?”


크라트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엘라는 시선을 흘리고 만다.


“.......그거야 제국에 있었을 땐 무조건 아이를 가졌어야 했으니까....... 엄마에 대한 반항이자 의식 같은 거였고.......”


“그럼 지금은?”


“뭐야, 아내가 남편과 같이 있겠다는 데 문제 있어?”


언제 봐도 싸늘한 크라트의 눈이라고, ‘광기의 꽃잎’은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보다 더욱 차가운 입에서는 항상 고집만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결혼은 어디까지나 네 처우를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일 뿐. 굳이 그 관계에 얽매여서 억지로 그럴 필요-”


“억지로가 아냐.”

거친 자신의 팔목을 낚아챈 엘라의 부드러운 손으로 크라트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리고 천천히 하얀 흐름을 따라, 표정이 지워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하지만 너는-’이라는 말을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지만,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침착하게 빨간 입술을 움직인다.

“내 마지막, 유일했던 온기는, 나한테 거대한 축복 하나만을 남긴 채로 떠나가 버렸어. 알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그런데도....... 견딜 수가 없어. 로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로즈의 웃음을 볼 때마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지금 얼마나 내 가슴이 비어있는지 깨닫게 돼.”


“너는 그저 네 가슴을 채워줄 모조품을 찾고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아니야.......당신까지.......그렇게 말하지 말아줘.......”


엘라가 고개를 떨어트린 것과, 크라트가 자신의 셔츠를 벗어던진 것은 동시였다. 그는 거칠게 엘라의 팔을 붙잡아 그녀를 뒤로 밀어 쓰러트리고는, 그대로 그녀의 얇은 원피스를 찢어발기기 시작한다.

차가운 밤공기에 노출된 하얀 살결. 그 매혹적인 곡선을 시린 입술과 과격한 손짓으로 탐하며, 크라트는 그녀답지 않은 약한 저항을 짓누른다.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나?”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찾아 크라트가 올려다 본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왜 떨고 있는 거냐.”


한손으론 드러난 가슴을 가리고, 다른 한손으론 눈물이 새어나오는 얼굴을 덮고 있는 엘라의 몸은 분명히 평원의 밤이 품은 한기와는 별개로 떨리고 있었다. 미세한 떨림과, 울음을 참고 있는 빨간 입술.


그녀는,

이런 온기에 있어서는 순진한 처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온기를 나눠주었던 존재는,

그 따스함을 속삭여주기도 전에 곁을 떠나고 말았다.

가슴이 비어있다는 그녀의 말은 단순히 ‘몸’이 외롭다는 뜻이 아니었음을, 크라트는 깊은 죄책감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덮고 있는 그녀의 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눈가로 스미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애달픈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는다.


“미안하다.”

짧은 입맞춤 뒤에 이어지는, 그의 따스한 목소리.

“부드럽게, 나의 온기를 나눠주겠다.”


눈물이 멈추고,

떨림도 멎는다.

엘라는 얇은 미소를 지은 채, 결코 차갑지 않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고마워.”




================




“어? 일찍 일어났네.”

아직은 하늘이 붉은 이른 새벽, 지휘막사로 들어서던 로빈은 예상하지 못한 그림자에 놀라며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음에 첫 번째로 놀라고, 인사를 대신하여 돌아본 드렌턴의 얼굴을 보고 두 번째로 놀란다.

“......우와, 아저씨 잠 안 잤어?”

드렌턴의 얼굴은 끔찍했다. 짙은 그림자가 내리깔린 눈 밑과 말라버린 입술. 멍한 시선은 로빈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을 뿐이지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는 것 같았고, 순간 로빈은 그의 얼굴이 단순히 피곤에 찌든 것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드렌턴의 곁으로 의자를 당겨 앉는 로빈. 그러나 드렌턴은 여전히 입술을 닫고 침묵을 지킨다. 로빈의 머리가 스스로 기억을 되짚어가며 원인을 추리해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이름을 꺼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 혹시....... 리즈 때문에 그래.......?”

마침내 움직이는 드렌턴의 굵은 눈썹과 입술. 그 작은 반응에 로빈은 확신에 찬 눈빛을 밝혔지만, 차마 밝은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미안....... 둘이 갈라진 원인은 근본적으로 나였으니까....... 나를 대신해서 희생된 아이, 아저씨와 리반나가 받은 상처를 내가 어떻게 감히 위로하겠어....... 그렇게 엇갈린 시간 속에서 갖은 아이겠지만, 리즈와 리반나를 너무 그렇게 보지 말아줘. 전부 다 나 때문이니까.”

로빈의 죄책감에 거짓은 없었다. 드렌턴이 아무렇지도 않게 납득해왔던 사실이고, 자신도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묻어두었지만, 결코 ‘그 날’ 있었던 일은 바뀌지 않으니까.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드렌턴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

통증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을 쳐낸 드렌턴의 거친 숨결과,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표정에, 로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저씨?”


당황한 건 드렌턴도 마찬가지. 그는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로빈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대로 지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로빈.”

그 무거운 목소리에, 로빈은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희생해야했던 것, 내가 포기해야 했던 모든 것에 여태껏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건 단지 내가 근위대장이라는 기사로서의 도리와 직위에 걸맞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기보다는, 지금 너와 벤처럼, 그저 당연한 순리였다고 여겨왔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리반나에게 용서받기를 포기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나를 용서할 자격이 없다고 하더군. 왜 그랬는지 알겠어?”


“......”


굵직한 손가락 사이로 떠오른 그 눈빛에, 로빈은 고개를 흔드는 것 외에 반응하지 못한다.


“......네 말대로, 리즈는 리반나의 딸이지만, 내 아이는 아니다.”


이어지는 길고 깊은 한숨.

얼굴에서 손을 내려놓으며, 드렌턴은 똑바로 로빈을 바라본다.

괴롭다는 듯이 뒤틀리는 그의 입술도,

흔들리는 눈빛도,

격한 목소리도,


이어지는 한마디로 인해 모두가 로빈의 머릿속에서 증발하고 만다.






“그 아이는 네 동생이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뭔가 길었던 하룻밤이네요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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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70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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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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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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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5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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