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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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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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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2.03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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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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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19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DUMMY

“교역권을......?”


로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륜을 바라본 것은, 그의 요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도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모든 반도의 국가는 물론이고 서쪽과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 중인 욘이다. 그런 그들이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중립이란 위치를 위태하게 할 정도의 위험부담을 안으면서 하나의 도시를, 그것도 교역권만을 원한다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예에. 이전 아실레마의 아르바티앙 급습 이후로 내부에서 말이 많았어요. 여태까지 욘이 해양무역에 집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다른 국가들을 압도할 수 있는 해군력에서 비롯된 거였죠. 아, 여러분의 해군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해군보다는 육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여러분이니까요. 그런데 저번 아르바티앙 상륙작전을 통해 제국이 남몰래 대규모의 해군을 증강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무역협회 내부에서 욘이 아닌 반도 내륙에도 무역거점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거든요.”


“혹시 모를 제국의 변심과 무력충돌에 대비한다는 말씀이시군요.”


크리스의 첨언에 그륜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점에서 팔루뎀이 교두보로서 낙점을 받았습니다. 많은 유동인구, 기업들의 진출상태, 탄탄한 기본자원에 적절한 위치까지. 다만 내륙의 도시 자체를 ‘경영’하는 데엔 제약이 많이 따르니까, 일단 교역권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겁니다. 아, 물론 브린타이나의 해안 도시들과 카나반에서 팔루뎀으로 이어지는 유통로는 저희가 맡아서 개발해드릴 겁니다.”


그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분명한 장사꾼의 얼굴이다. 그 분위기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의심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크리스와 로빈은 좀처럼 그륜의 제안에 더하거나 빼야 할 사항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로서는 현재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아직 브린타이나 국내에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이나 의원들이 다수 남아있을 테지만, 그들이 물리적으로 자신을 복권하는 일에 당장 도움을 줄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이 크리스가 독단적으로 주요도시 하나를 양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후에 이 결정이 어떤 평가를 들을지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왕좌를 되찾기 위해 감내해야 할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팔루뎀을 넘기기로 정한 지금, 도시의 교역권은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로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카나반이 팔루뎀에 기대하고 있는 중심사항은 군사 및 지정학적 역할과 보급문제였으니까.

좀처럼 반응을 내보이지 못하는 그들을 대신하여 입을 연 것은 벤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교역권이라. 도시의 기업이나 생산에 손을 대겠다는 뜻도 아니고, 군권이나 경영에 간섭하겠다는 뜻도 아니고, 단순히 도시를 오고가는 교역에 대한 통제권만 인정해달라는 말씀이신데. 정말로 그게 타국정권에 개입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건가요?”


그륜은 다시금 볼을 긁적이며 끌끌 크게 웃는다.


“물론입니다! 대대적인 투자와 그로 인한 파생효과에 대해선 이미 계산이 끝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엔 절대로 투자하거나 손을 뻗지 않아요.”


벤으로선 지금 당장 팔루뎀의 교역권을 쥔다고 해서 그들이 어떤 형식으로 커다란 이득을 챙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륜의 말대로 확실한 이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일 리가 없는 욘이다.

벤의 표정을 붙들고 있는 것은, 이렇게 크리스와 로빈 둘 모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면서도 그 달콤함에 비해 어떠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는 얕은 불안감이었다.


“.......크리스를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 3자거래에 대해 제가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의회에 통보하여 카나반의 입장을 정리하도록 하죠. 대통령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귀국의사를 묻는 로빈이었지만, 그륜은 길게 하품을 하며 손을 내젓는다.


“아, 저는 그냥 관광이나 하는 셈 치고 아르다르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뭐 귀국해봤자 당장 할 일도 없고.”


한 국가의 수장이자 국제무역기구의 대표인 그가 할 일이 없다?

이 거래가 그와 욘에게 어떤 무게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면서, 벤은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깊은 밤에서 농도를 더한 새벽. 하지만 로빈의 집무실에 모여 있는 얼굴들에서 피곤은 보이지 않는다. 의회에 공개하기 전에 의견을 듣고 싶다는 이유로 새벽 중에 불려온 마누앙이었지만, 로빈의 물음에 답하는 그의 입은 냉정을 머금고 있었다.


“팔루뎀 무혈입성은 표면적으로는 분명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선택으로 인해 제국은 물론이고 현재의 브린타이나와의 전면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 즉-”


“크리스의 복권은 실패하고 국제정세는 악화되는 상황 말이죠.”


소파에 드러누워있던 벤의 말에 마누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나간다.


“물론, 지금 정권을 장악한 ‘오열의 검성’이 곧바로 친제국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우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그때는 우리로서도 선택권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브린타이나의 신정권은 이 태도에 대해서는 침묵 중이지요. 제 의견은, 브린타이나의 신정권이 입장을 표명할 때까지는 일단 우리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지켜보자는 것입니다.”


로빈은 특별한 반응 없이 뒤로 목을 움직여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지만, 속으로는 사실 마누앙의 의견에 동조하는 중이었다. 그의 입에서 확답이 나오는 걸 주저하게 만들고 있는 얼굴은 따로 있었다.


“총리님, 그럼 욘의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 질문에서만큼은 마누앙도 잠시 입을 다물고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판단이 어렵습니다. 욘의 제안을 정리해보자면, 론크리스 복권의 주체는 카나반이 맡아 달라, 우린 용병과 해결사를 고용할 자금을 뒤에서 지원해주겠다. 대신 그 대가로 브린타이나로부터 양도받을 팔루뎀에 대한 교역권을 보장해 달라-. 이것이지요? 제가 경제학자가 아니기에 정확히 팔루뎀의 교역권을 얻는 것이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다른 저의가 있다는 의심이 먼저 듭니다.”


“그렇죠? 거봐,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니까.”


빈 와인병을 이리저리 돌리며 의미 없는 관찰 중이던 벤의 푸념. 그러나 그 의심이 곧 정답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로빈이었기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그의 표정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하아-, 일단 의회뿐만이 아니라 대학에도 의견을 구해야겠어요. 혹시 모르니 크라트 대장에게도 날이 밝는 대로 전문을 보내주세요.”


“그럼 내일 의회에 정식으로 공개하시는 겁니까?”


미묘한 표정으로 되묻는 마누앙의 말이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 로빈은 알 수 있었다.


“예. 브린타이나 신정권의 정확한 입장을 기다려야한다는 총리님의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일단 의회에 공개하고, 되도록 많은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내일-이 아니라 오늘 정기보고 때 먼저 준비해주세요.”


먼저 준비해 달라-?

로빈의 말을 한 번 다시 씹으며 마누앙이 되묻는다.


“오전에 다른 용무가 있으십니까, 폐하?”


“아, 네. 조금 늦을 거 같아요. 근위대 몇몇만 데리고 시찰을 좀 나갔다 올까 해서.”


“.......시찰? 루디로부터 사전에 보고받지 못했습니다만, 어디로 나가십니까?”


사전에 승인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구실이 모자랐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로빈이 시찰에 대해 마누앙에게 미리 말해놓지 않은 건, 총리가 이렇게 물어왔을 때 대답하는 자신의 표정이 얕은 죄책감으로 물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베르메스 평원이요.”




===============




왕의 침실이라고 해도 그 실상은 참으로 빈약하지 그지없다. 본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는 시간마저 자유롭지 못한 왕을 위한 공간. 그러나 왕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숙면의 기능을 제공할 뿐이다.

커다랗고 푹신한 침대와 옷장, 그리고 간단한 샤워실이 딸린 화장실이 침실의 전부. 낭만이라고는 메마른 그곳에 좀처럼 정과 몸을 붙일 수가 없었던 로빈이었기에, 비교적 이르게 퇴근하는 날이면 본궁의 침실 대신 지나의 숙소로 찾아가 몸과 영혼을 치유받기를 선호했다. 하지만 오늘같이 두세 시간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은 때에는 선택권이 없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마찬가지로 피곤해 지쳐 쓰러져있을 지나를 깨우기는 싫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미안함은, 자신의 곁에서 침실까지 동행하고 있는 덩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즈카, 당직도 아닌데 미안해. 아저씨한테 말해서 오전 근무 빼고 오침할 수 있게 해줄게.”


“괜찮습니다.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고, 제가 자원해서 있는 거잖습니까.”


“.......”


이 듬직한 남자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오늘처럼, 로빈이 본궁에 남아있으면 부르지 않아도 어느샌가 집무실 바깥에 조용히 나타나 서있다. 절대로 로빈보다 먼저 잠들지 않고, 절대로 로빈보다 늦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로 로빈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오즈카.”

침실로 향하는 회색의 복도. 부름을 받은 오즈카가 멈춰선 로빈을 향해 깊고 붉은 눈을 움직인다.

“난 아직 내 답을 위한 너의 답을 듣지 못했는데.”


같은 바닥을 딛고 있는 두 남자의 발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머리 또한 동시에 베르달숲의 여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창’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 그리고 버리고 가기에는 무거웠던 표정들.

로빈은 순간 다소 놀라고 말았는데, 느슨하게 벽으로 기대는 오즈카의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피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답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합니다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벽에 기대는 것 외에 로빈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훈련소로 오르는 언덕에서 당신과 지나를 만난 이후로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항상 스스로 다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검을 놓지 못했던 건, 한 번쯤은 남자로서 ‘그’와 만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적이지 못한 첫 만남 뒤에도, 그리고 제 불순한 감정을 알았음에도 당신은 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다시 주었죠.”

조국을 배신한 장군의 아들.

로빈으로선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오즈카의 굴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을, 그의 선택을. 그리고 그로 인해 저와 제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모든 순간들을. 그래서 그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에 단검을 박아 넣었습니다. 그의 얼굴과, 그의 목소리, 그의 눈동자를 보고 답을 얻었으니까요.”

시선은 누런 전등에 고정한 채로 흘리는 낮은 탄식.

“그는 희생자였습니다, 로빈.”


“.......희생자?”


로빈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든다. 그의 머릿속에서 댄 스파인이란 존재는 어디까지나 가해자에 가까웠지 희생자라는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그는 역사라는 괴물이 낳은 찌꺼기이자 희생자입니다. 수천 년에 걸쳐 붉게 물들어버린 기사라는 존재에 그는 뒤틀린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저주받은 색을 떨쳐내기보다는, 더욱 완벽하게 물들고 싶었을 뿐이었던 겁니다. 그것을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기사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와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 단 한순간의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 이후의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고통도, 그의 안중에는 없었죠.”


“.......너는 다르게 생각해?”


“말했잖습니까. 그의 옆구리에 단검을 박았다고.”

오즈카가 다시금 낮게 웃는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오즈카 스파인으로 남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냥’ 오즈카가 저의 이름. 그것이 제가 찾아낸 답입니다.”

목소리는 무거웠지만 오즈카의 표정은 더없이 가벼워 보였다.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그와 눈빛을 마주하며 비슷한 미소를 지었고, 그의 입에서 새로운 질문이 나올 때까지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의 답은 무엇입니까, 로빈.”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 질문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모를 로빈이 아니었다.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를 왕이라는 굴레에 얽매였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참혹한 굴레에서 살아온 저에게는 당신은 그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그리고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영혼입니다.”


“그 중엔 네가 가지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 말이지.”


가지고 싶었던 것.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백했다.


“.......저는 지나를 흠모해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를 곁에 두었지요. 그 이유에 대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로빈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진다. 하지만 오즈카는 가슴이 떨리거나 섬뜩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에서 온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즈카, 내가 막 왕위에 오르고 신문과 의원들이 나에 대해서 떠들 때, 다들 나를 뭐라고 불렀었는지 알아?”

침묵으로 대신하는 대답. 로빈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직접 대답을 내놓는다.

“나보고, 하나의 거대한 ‘변수’라고 했었어. 귀족파와 왕당파의 변수, 카나반의 변수,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에일로피아반도의 역사를 관통할 변수라고. 그런데 말이야....... 변수라는 건, 본래 정해져 있는 흐름을 비틀어버리는 거잖아? 그래서 고민했어. 혹시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이라는 흐름에 떨어트린, 본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한 방울이 아니었을까- 하고.”


“.......”


오즈카의 이성은 ‘아니다’라고 대답하라며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는 흔들림이 없는 로빈의 눈빛과, 다시금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어떠한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생각해봐. 만약 내가 없었으면, 마누앙 경이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즈키치 가문의 비호를 받은 형님이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겠지. 브린타이나와의 전쟁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국의 침략도 없었을 수도 있어. 또한, 지나와 네가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었겠지.”

자신을 향한 얇은 웃음에 오즈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당황하고 만다.

“.......이런 얘기를 벤에게 했던 적이 있었어. 그랬더니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기억을 헤집는 로빈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 ‘역사는 시간이 흐르는 강이지만 모든 것이 가변적인 소용돌이와도 같은 거야. 그런 거센 흐름 속에 떨어지는 단 한방울의 변수일지라도, 충분히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것이 독일지, 아니면 생명의 눈물일지는 흐름의 끝이 닿는 사람들이 평가해. 그들의 역할을 뺏어서 네가 스스로를 단정해버린다면, 그건 이미 네가 말하는 ’변수의 굴레‘가 될 수는 없겠지. 예측하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거.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지만 결국엔 역사의 중심이 되어버리는 거. 변수란 그런 거잖아.’ 라고 하더라.”


“.......그게 당신의 답이군요.”


로빈이 쑥스럽게 웃는다.


“나는 결코 이 자리를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더 이상 나를 옭아매는 굴레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당연한 거’니까. 그리고, 내가 지나를 사랑하는 것, 네가 지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들은 내가 너희 둘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랑 마찬가지로 당연한 거야.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이미 변수로서 당연하다고 인정해버렸는데, 그걸 품고 있는 너희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어?”


로빈은 말을 마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즈카가 벽에서 몸을 떼어내더니, 크게 웃으며 앞서 복도를 걸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로빈은 마침내 그것이 품고 있는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크고 시원한 미소가 로빈의 입가에 떠오른다.

침실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둘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인사를 마치고 뒤돌아가려는 오즈카를 불러 세우는, 로빈의 밝은 목소리.

“너 파이튼 성에서, 친해지면 말 놓겠다고 했잖아. 언제쯤 반말할 건데?”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겁니까.”


“아니 뭐, 버릇이라는 건 알겠으니까, 강요는 안 하겠는데, 한 번쯤은 해보고 싶지 않아?”


“.......”


멋쩍은 웃음만을 남기고 다시 뒤돌아서는 오즈카. 다시 한마디 건네려던 로빈이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문고리를 잡는 순간-




“.......잘 자라, 로빈.”


“푸핫!”


크게 웃으며 복도를 바라봤을 때는 이미 덩치 큰 그림자는 사라진 뒤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가벼워진 가슴을 안고 방바닥을 뒹굴고 싶은 로빈이었지만,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반기는 것은 잊고 있던 피곤과 다가올 태양까지 남아있는 짧은 시간이었다.


‘.......씻는 건 일어나서 하자.’


짧은 합리화를 마치고 그는 외투와 신발을 벗어던지며 푹신한 침대 위에 몸을 던진다. 멋과 낭만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침실이었지만, 짧은 안식에는 더할 나위 없는 적막과 이불, 그리고 익숙한 향기.


.......향기?


“으와아아악!”


이불을 끌어올리는 순간 로빈은 기겁하며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이불 속에서 무언가 물컹한 것이 느껴진 덕분이었다.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이불을 들추자, 그곳엔 반짝거리는 두 개의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헤헤, 놀랐지?”


장난스럽게 새빨간 혀끝을 깨물며 나타난 지나의 얼굴. 로빈의 심장은 아직도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와-나, 기절할 뻔했잖아! 뭐해, 여기서? 언제부터 있었어?”


지나가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로빈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나, 맞닿는 살의 온기와 감촉으로나, 그녀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원래 당직인데, 너랑 있으라고 오즈카가 바꿔줬어. 더 바빠질 것 같다며? 내 쪽으로는 못 올 거 같으니까 이 몸이 대신 와줬다는 말씀. 고마워하시죠?”


“.......하하.”


놀란 가슴이 진정되고,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향기와 감촉이 로빈의 숨결로 스며든다. 따스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로빈은 생기가 넘치는 그녀의 입술에 온기를 탐하던 자신의 입술을 맡긴다. 행복한 신음과 함께 자신의 목을 감싸는 그녀의 팔, 그녀의 미소. 로빈이 가장 원하는 것이 이곳에 있었다.



가장 원하던 것.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인데,


어째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까.




지나의 투명한 눈동자를 향해, 로빈이 속삭인다.






“우리, 결혼하자.”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ㅠ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04 00:24
    No. 1

    이놈의 왕은 왜 자꾸 반지도 없이 침대에서 프러포즈하는거야 ㅋ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04 00:34
    No. 2

    에볼루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ㅋㅋㅋ 그녀 앞에서는 즉흥적인 멍청이가 되나 봅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2.04 02:19
    No. 3

    좋겠다... 여친... 음 자야지 잘보고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04 02:21
    No. 4

    ㅠㅠ 동결님 안녕히 주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래그타임
    작성일
    15.02.04 16:20
    No. 5

    이제야 생각난건데... 작가님 근대의 네덜란드 공화국 같은 정치체계를 묘사하신건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04 16:43
    No. 6

    우왕 래그타임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유럽역사를 특별히 공부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답변은 드릴 수 없겠지만,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주연방개념 대신 귀족의 가문이라는 의회구성을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대전쟁과 독립이라는 특수성을 거치면서 중앙의 왕이란 존재를 중심으로 반강제(?)적 왕국처럼 재편된 형태이긴 합니다만, 말씀처럼 지방분권형태의 공화국 개념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유사하고도 볼 수 있겠네요. 물론 미흡하고 어설픈 지식으로 짜놓은 설정이다보니 현실성과는 거리가 멉니다만 ㅠㅠ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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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0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7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4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1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4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7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7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3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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