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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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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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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01.23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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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DUMMY

천막이 순식간에 침묵에 짓눌린다. 벤의 입에서 튀어나온 ‘반역’과 ‘신성모독’이란 단어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로빈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 나도?”


“왕은 반역하지 말라는 법 있냐?”


“아니, 뭐, 그렇긴 한데....... 도대체 뭐길래 나까지 반역으로 잡혀 들어간다는 거야?”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기보다는, 형제님들의 국가를 아우르는 사상과 미트라블루스 일족에 대한 반역과 모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답은 다이어에게서 들려온다. 그의 멋들어진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지나가 숨과 웃음을 살짝 내뱉었고, 곧바로 로빈에게 코끝을 맞아야 했다.


“공화국의 종교와 붉은 나무의 일족인 미트라블루스에 대한 반역과 모독이라....... 그건 세뮈엘에 관한 이야기인가?”


크라트의 무심한 어투. 벤은 과연 날카롭다는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세뮈엘에게 ‘님’이라는 호칭을 과감히 생략해버리는 그의 한결같음에 카논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예. 카나반이 받드는 사도이자, 건국이념과 국가기틀을 내려준 존재. 자신의 수액을 뽑아 미트라블루스라는 일족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죠.”


“세뮈엘님을 통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애초에 그녀와는 교회의 황금대야가 없으면 대화도 불가능한데.”


반역이라는 단어엔 민감하게 치를 떠는 드렌턴이 불안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은 장본인이 벤이라는 사실이 더욱 그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벤은 그런 그의 표정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


“뭐, 간단해. 세뮈엘님을 이용할 거야.”


“........이용?”


결국 드렌턴의 입술이 뒤틀린다. 과연 반역과 모독이라는 표현을 빌릴만한 ‘이용’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와버렸으니까.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 발언만으로도 교회에선 방방 날뛸 텐데요.”

온건한 얼굴 근육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그 표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오캄푸스의 말끝에는 분명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의도인 줄은 알겠지만, 교회를 적으로 돌리는 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네요.”


손바닥으로 자신의 전신을 가리키는 오캄푸스의 말은 그의 역사를 아는 자들에겐 충분한 설득력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여기서 물러나면 숲이고 세뮈엘이고 교회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태평한 말씀이에요 그건. 애초에 전 여러분을 생각해서 비공개로 일을 진행시키자는 거지, 예배당에 앉아있는 인간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세뮈엘을 이용하겠다는 건가?”


크라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답을 원하는 눈빛으로 벤을 바라보았다. 그라고 모독이나 반역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대로 베르달 숲의 전역이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세뮈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이미 그는 벤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생각과, 같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벤에게 집중된다.


“.......이곳, 베르달의 숲에, 세뮈엘님을 강림시킬 겁니다.”


“.......뭐어?”

여기저기서 숨소리가 새어나오고, 드렌턴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아......., 그래 다 양보해서 그 이유는 그렇다 치고, 이곳엔 황금대야도 없고, 대사제의 축복도 없다. 도대체 무슨 수로 세뮈엘님과 영접하겠다는 거야?”


“그녀가 부름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찾아가 뵙기를 요청할 겁니다. 그리고 그녀를 설득하여 이 땅에 강림토록 해야지요.”

다이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인치고는 위압적인 몸집이 아니었지만, 드렌턴은 어째선지 그의 존재감에 억눌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드렌턴을 자리에 되앉힌 후에, 다이어의 시선이 천천히 로빈을 향한다.

“우리에겐 가장 훌륭한 매개체가 될 피가 있으니까요.”


“......엉?”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로빈은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다이어의 인자한 미소와 끄덕임뿐이었다.




================




“칸시온 델 보스케의 엘더 드루이드들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용인했는지는 몰라도, 이건 공화국 내부는 물론이고 숲의 비인간 종족들에게도 파장이 클 수 있어요. 위험부담이 있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이유로 특무대를 해산시킨 로빈이 천막에 남겨 놓은 인원은 지나와 벤, 오캄푸스와 고도였다. 벤이 이미 협의를 마치고 복귀한 상태이니만큼, 처음엔 그대로 그 의견을 수용하려 했으나 오캄푸스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기에 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정한 것이다.

“국가가 모시는 사도라 하여 멋대로 영접하고 강림케 만드는 것이 쉽게 허용되는 일이었으면 상관이 없겠죠. 하지만 반도와 인간들 사이의 역사에는 절대로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게 사도와 악마들이 스스로 묶어둔 원칙입니다. 지금 아펜타우스가 멋대로 반도를 헤집고 있다 비난하기는 하지만, 그 또한 어디까지나 계약자들과 자신을 모시는 국가를 통한 간접적인 영향. 지금 폐하와 검성께서 하려는 일은 세뮈엘님에게 직접 그 원칙을 깨고 질서를 어지럽혀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녀의 분노를 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붉은 시선을 옮겨 벤을 바라본다.


“하지만 세뮈엘님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고 그녀와 몸을 섞고 있는 엘더 드루이드들이 허용한 일입니다. 이미 그녀의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요?”


오캄푸스는 자신의 너덜너덜한 턱살을,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공허한 눈빛으로 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검성님, 검성님은 그들을 설득하면서 세뮈엘님의 강림이 제국군과 대적하기 위한 힘을 빌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죠? 단지 무분별하게 파괴되고 있는 숲의 수호를 위한 조치라고, 그렇게 돌려 말하지 않으셨나요?”

벤은 대답하지 못한다.

“얼핏 들으면 같은 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 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뮈엘님을 ‘위한’ 것으로 위장한, 세뮈엘님을 ‘통한’ 것이니까요. 아까 그 다이어라는 드루이드와 함께 데려온 숲의 군대는 아마 파괴된 카모라 숲의 출신들이겠죠? 기본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그들이지만 복수라는 감정을 통해 부추기신 거겠죠. 제 말이 틀렸나요?”


이번에도, 벤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의 표정은 건조했지만 입술 안으로 ‘귀찮은 그랜드마스터일세’라는 말을 씹는 중이었다. 그는 답을 원하는 로빈의 표정을 살짝 확인하고는, 푸석한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연다.


“예, 말씀대로예요. 오캄푸스님의 말처럼 그녀가 우리의 도를 넘은 만용에 분노를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세뮈엘님이 베르달의 숲 전체가 불타고 있는 상황을 그냥 지켜보지는 않으리라 확신해요. 저는 그 가능성에라도 걸어봐야 할 만큼 지금 상황이 급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벤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오캄푸스를 바라봐야 했다. 갑자기 그의 턱에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하하하하하, 그 말씀엔 동의합니다. 저도 사실 의견에 반대한다기보다는, 폐하께서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검성님을 맹신하는 방향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뭐야, 갑자기.......’


그의 웃음소리가 이어지지만 벤은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전환에 당황스러울 뿐.


“결정은 폐화와 지휘관들이 하시는 겁니다. 특무대를 그에 맞춰서 따르겠죠. 저는 더 이상 카나반공화국의 그랜드마스터가 아니라, 한 명의 망자이자 한 명의 특무대 대원일 뿐. 제 가벼운 혀에 크게 휘둘리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아.......예.”


로빈도 갑작스럽게 뒤바뀌는 그의 태도가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으로 저지할 듯 달려들더니 갑자기 발을 쏙 빼버린다. 그게 순간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착각했기 때문이 아님은 벤과 로빈 둘 다 알고 있다. 그런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오캄푸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막 밖을 향해 가볍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결정이 되면 알려주세요. 저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모두가 어벙한 와중에, 고도가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아 천막을 나선다. 숲을 향해 사라지려는 그의 질척한 팔을 잡아채며, 고도는 의문과 짜증이 동시에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운다.


“마스터, 뭐에요, 방금? 왜 신나게 설명하다가 갑자기 꼬리를 내려요?”


그에게 혈마법을 과외받기 시작한 이후로 고도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마스터로 고정되어 있었다. 오캄푸스는 얇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를 돌아보았다.


“검성님의 말씀처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어쩔 수 없는’ 상태를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고.”


“어쩔 수 없는.......? 그녀라니, 그녀가 누군데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질색하는 그녀로서는 되묻는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숲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오캄푸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하고 얇았다.


“고도, 지금 우리는 그들에게 거대한 계기를 던져주고 있는 겁니다.”






“뭐야 저거? 그랜드마스터는 다 저렇게 괴상한 사람들인가?”

벤은 뻘쭘한 듯 볼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튼, 일단 해보는 걸로 결정 난거지?”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당장 우리한테 선택권이 없으니까.”


“그래, 그럼 다이어에게 말해 놓을게.”


선택권이 없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하게 일을 매듭짓는 마법의 단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동시에 가장 위태한 상황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최대한의 병력을 모았고, 철저하게 훈련했으며 전력분석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특무대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 모든 현상을 뛰어넘는 벽에 가로막힌 지금, 결국 친구가 가져온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매달려야 하는 자신의 무력감.


“왜 그래?”


어느새 둘만이 남은 천막. 지나는 로빈의 손가락에 깍지를 껴오며 그의 얼굴에 다가간다. 굳었던 그의 얼굴도, 이 태양 같은 눈동자 앞에서는 풀릴 수밖에 없었다.


“아냐, 아무것도. 너는 좀 어때?”


로빈이 조심스럽게 지나의 배를 쓰다듬는다. 붕대로 덮인 이 상처보다도, 가슴 속에 응어리진 상처가 더욱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이 원정에 그녀를 데려온 것 자체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괜찮아, 이제.”


빛나는 금발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로빈의 어깨에 기대며, 지나는 로빈의 입술이 이마와 코끝을 훔치는 것을 허용한다.

둘에게 그 순간만큼은, 피 냄새가 짙게 깔린 전장에서 맞이하는 작은 축복이었다.


“아.”


키스 중에 문득 고개를 드는 로빈 덕분에 지나는 누군가가 천막으로 들어선 줄로만 알고 황급히 몸을 빼지만, 지휘천막엔 여전히 둘의 그림자뿐이었다.


“왜?”


달콤한 시간을 날려버린 얼굴을 향해 지나가 잔뜩 뿔난 표정으로 노려본다. 그러나 천천히 되돌아오는 그의 표정엔 읽기 힘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지나, 혹시.......”

지나의 두 손을 맞잡고,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로빈. 그녀가 뭐냐고 물을 틈도 없이 그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기집을 이식한다는 말....... 들어봤어.......?”




======================




영창이라고는 해도, 본인이 직접 천막 안의 모든 기물을 치우고 그 가운데에서 정좌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제복을 벗지도 않은 채로, 물도, 음식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오즈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주변의 공기를 지우고 있었다.


“.......들어갈게.”


그 경건한 모습에 로빈은 잠시 고민을 했으나, 결국 천막 안으로 들어서 오즈카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물이나 와인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가 입을 대지도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로빈. 기사로서의, 그리고 근위대로서의 본분과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특무대 전원을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부디 면직과 군사재판을-”


“오즈카.”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오즈카는 깊은 눈을 뜨고 왕의 얼굴을 바라본다.

“우리 중에서 널 욕할 사람은 없어. 네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공화국에 남아서, 그 온갖 멸시와 굴욕의 시선을 견디고 여기까지 올라온 너야. 처음부터 내 곁에 있어준 너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곁에 남아있는 너라고. 네가 설사 전장에서 이성을 잃고 내 팔을 자른다고 해도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그러니까 스스로 짓누르는 건 그만해.”


오즈카는 가만히 로빈의 얇은 미소를 바라본다. 그 검붉은 눈동자와,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모든 것을 품으려 하는 입술을 바라본다.


“.......로빈. 훈련소 시절, 파이튼 성으로 첫 출격을 나갔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그때 저한테 물으셨던 것도, 기억하십니까?”


기억을 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다는 듯, 로빈은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왜 이 나라를 위해 검을 들었냐고 내가 물었었지.”


오즈카는 마주 웃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입가에만 걸려있었을 뿐, 오즈카의 눈과 표정은 그대로 굳어있었다.


“.......제가 이 나라를 위해 검을 든 것은, 아버지를 위한 분노도, 저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제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고, 오즈카는 다시금 무겁게 검푸른 입술을 움직인다.


“제 아버지는 제국에 귀화하기 전, 어머니께 함께 하자고 말했습니다. 보장된 신분, 보장된 보상, 그리고 보장된 저의 미래로 말이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고발한 것도 아니었지요. 그녀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


짧은 침묵. 오즈카는 천막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끌려가 고문을 받을 때에도, 저를 향해 비난과 돌멩이가 날아든 후에도, 초임기사 대상자에 제 이름이 올라갔을 때에도 어머니께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답을 듣는다고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제 생각과, 제가 가야할 길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입대 전날, 그러니까 당신과 지나를 만나기 하루 전에-”

그의 눈동자가 로빈의 얼굴로 돌아온다.

“제 어머니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셨습니다.”


“.......!”


금시초문이다.

로빈은 스파인 가문이 몰락에 가까운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불과 입대 전날 오즈카가 그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유서엔 짤막한 한줄 뿐이었습니다.”

자조적인, 차마 똑바로 마주할 수 없는 그의 웃음.

“‘나는 네 아버지를 너보다 더 사랑한다. 나를 묶어둔 너를 증오한다.’ 라고요.”


“........”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요. 왜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나에게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는 커다란 손으로,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근위대의 제복을 입은 자로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검을 들기로 했습니다. 검을 들고, 기사로서 그를 만나서 묻기 위해 검을 들었습니다. 이건 그에 대한 분노보다도, 제 자신의 납득보다도,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사랑은 배신당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 누구도 사랑하거나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거, 지나 얘기지?”


오즈카는 놀란 눈으로 로빈을 내려다보았다. 그답지 않은, 당황한 빛이 역력한 표정. 하지만 막상 로빈은 얇은 미소로 그를 마주하고 있을 뿐.


“.......알고 계셨습니까?”


“대충.”


“그런데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던 겁니까?”


“내가 왜?”

이런 되물음엔 답할 수 없다.

오즈카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모든 걸 가졌다고, 내가 모든 것을 삼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로빈의 웃음이 섞인 질문에, 오즈카는 차마 답하지 못한다. 설사 그것이 눈앞의 왕에게 긍정의 의미로 해석된다 하더라도.

로빈은 웃음의 농도를 짙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뒤에 감추었던 한 쌍의 단검을 그의 앞에 던져준다.


“오즈카 스파인. 근신을 끝내고 복귀해라. 언젠가 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다음, 다시 나를 찾아와.”

절친한 친구이자 방패, 그리고 누구보다도 듬직한 근위대를 향해 왕은 이를 내보이며 웃는다.

“그럼 나도 답을 들려줄게.”





======================





군영 전체를 드리운 숲의 그림자. 달빛조차 들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소수의 인원들에게만 허락된 풍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숲의 일족, 붉은 나무를 맞이합니다.”


다이어를 비롯한 드루이드들이, 얇고 하얀 천으로만 이루어진 옷을 입은 채로 로빈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얇은 옷만 걸친 로빈은 어색한 몸짓으로 그들에게 예를 올리고는, 평평한 돌을 쌓아 만든 신단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뒤에는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표정의 벤과,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드렌턴이 함께였다. 의식 중에 단 한마디의 말도 허락되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느긋한 벤에 비해서 드렌턴은 당장이라도 멈추라고 소리를 지를 기세였다.


“돌과 주변의 꽃잎을 일족의 피로 적신 뒤, 편안한 마음으로 신단에 누워주십시오.”


다이어의 안내에 따라, 로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어금니로 만든 단검을 받아 그대로 자신의 팔뚝을 긋는다. 그의 눈동자보다도 붉은 선혈이 손가락 끝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로빈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흘리며 돌의 주변을 한 바퀴 휘감았다. 단검을 내려놓고서 그는 조심스럽게 다이어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고갯짓과 함께 로빈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신단에 몸을 뉘었고, 잔뜩 찡그린 표정의 드렌턴을 향해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드루이드들이 그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는다. 신비함과 불길함이 동시에 스며드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숲을 간질이기 시작하고, 숲의 언어가 밤하늘을 품고 나뭇잎을 흔들고 있었다.


“!”


드렌턴은 벤의 제지가 없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신단으로 서서히 뻗어오는 나무의 줄기들. 그 굵은 줄기들은 저마다 신단 근처를 적시고 있던 로빈의 피를 빨아들이고는, 더욱 많은 향을 탐하듯 순식간에 로빈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로빈이 당황할 틈도 없었다. 작은 손톱 하나도 공기 중에 노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줄기들은 빼곡하게 로빈의 몸을 뒤덮었다. 동시에 입과 코를 통해 침투해오는 거친 줄기. 로빈의 신음이 흐르자, 다이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안심시킨다.


“숲에 몸을 맡기십시오. 그들은 형제님을 대신하여 호흡을 할 것이고, 형제님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편안히 의식을 놓고, 모든 것을 나무의 생명에 맡기십시오.”


로빈의 움직임이 잦아든다. 오르내리는 가슴은 평온을 되찾았고, 편안한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의 의식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이제 세뮈엘님의 그림자를 찾는 것은 그의 몫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그의 숨결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다이어의 말이 끝나기 직전, 드렌턴은 인기척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허락되지 않은,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었기에 그의 손은 환도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밤하늘 아래 떠오른 얼굴은 카논의 다급한 표정이었다.


“적의 야습입니다.”




‘하필 지금.’


드렌턴과 벤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말이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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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10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9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5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7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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