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8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2.22 22:35
조회
1,164
추천
29
글자
20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DUMMY

미세한 전등의 빛도 식당에 무겁게 내리깔린 침묵과 어둠을 완벽히 걷을 수는 없었다. 카논의 부름을 받고 완벽한 비무장으로 들어선 그들이었지만, 훈련생도라 해도 기사는 기사. 게다가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검붉은 눈동자는 다름 아닌 왕녀다. 둘이 리즈의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카논과 유진, 셰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감각을 다듬고 있었다.


“.......”


그들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모든 상황과 방향을 깨달았다는 듯, 무심한 표정과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녁식사 직전, 식당 뒤에서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나?”


때문에 이런 카논의 물음에도, ‘교관님이었다’라는 불필요한 변명 따윈 늘어놓지 않는다.


“.......모릅니다.”


“몰라?”

먼저 뒤틀린 것은 유진의 표정이었다.

“너희에게 무언가 제안까지 했는데도 누군지 모른다고?”


“거짓말이 아냐. 정말로 누군지 몰라. 애초에 그 제안이라는 것도-.......”


잠시 말을 삼키는 여기사. 무거운 카논의 목소리가 그녀를 재촉한다.


“잘 생각해라. 아직 너희는 그 제안을 ‘들었을 뿐’이다. 만약 훈련소 내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는 것이라면, 너흰 아직 고발자라는 형태로 구원받을 수 있는 거야. 말해봐라, 그 제안이 뭐였지?”


카논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기병도를 허리춤으로 꽂아 넣었다. 위압적인 분위기보다는 부드럽게 이끌어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사의 눈동자는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검의 존재유무와는 상관없이 흐린 빛 아래서도 명백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선을 진정시켜준 것은, 곁에 앉은 남자의 손길이었다.

포개진 손에 용기를 얻은 듯, 여기사는 마침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교관님도 알고 계신대로, 이번 기수의 모집은 지원이 아닌 징집의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대상이 아르다르로 한정되긴 했지만, 철저한 호구조사를 통해 조건에 부합되는 기사의 숫자를 파악하고 통지서를 발부했죠.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불편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편한 결과?”


되묻는 셰르를 향해 여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입소라는 선택 자체를 마치 출세를 위한 필수과정으로 치부하는 너희 귀족들은 모르겠지. 징집이라는 강제성을 부여했음에도 입소한 기사의 숫자는 작년에 비해 고작 1할 정도가 증가했을 뿐이야. 이 결과가 뭘 뜻하는지 알겠어?”

그녀의 언성이 다소 높아지기 시작했지만,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을 짐작하지 못한 셰르와 유진은 침묵할 수밖에.

“애초에 강제징집이 되기 전에도 우리 같이 돈도 배경도 없는 기사들은 입대 외에는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었어. 단순히 힘이 세다는 이유로 할 수 있는 일들로는 가족은커녕 나 혼자서도 먹고살기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곳에서 우릴 환영해줄 거 같아? 입대하지 않는 기사를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쳐다보는지 너희들은 모르겠지. 결국 선택권은 없었어. 충분하지는 않지만 군인연금도 있고, 설사 전사하더라도 보상금으로 가족들은 챙길 수 있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강제성이 부여됐다는 이유로 연금과 보상금은 축소되고,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끌려오게 됐다고.”

여기사는 남자와 맞잡은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나와 이 사람은 미래를 약속한 사이야. 난 어린 동생이 세 명에 죽은 오빠가 남긴 가족들이 있고, 이 사람은 조부모와 장애가 있는 형이 있다고. 기사끼리 결혼하면 나오는 정부보조금과 입대 후 연금을 통해 그들을 부양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덥썩 훈련소로 끌고 들어오면 턱없이 낮아진 급료로 집도 없이 방치된 저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살피라는 거야.......”

셰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난처함을 표했고, 유진은 자신의 금발이 죄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머리칼을 만지작거린다. 그 어떤 표정도 내보이지 않고 있는 건 리즈의 얼굴뿐이었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씹으며, 여기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입대 전날 밤에 어떤 남자가 찾아왔어. 신기하게도 우리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지. 그는 남겨진 가족들은 자신이 책임지고 돌봐줄 테니, 계약서에 서명만 해달라고 했어.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이 아르다르에 집을 구하고 3년은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계약금이랍시고 내놨어.”


“계약금? 계약의 내용은?”


여기사의 사정과, 그녀가 흘린 눈물과는 별개로 카논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정규기사로서 복무하다가, 때가 온다면 자신의 지령에 따라 움직여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때? 때라니? 무슨 일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모릅니다, 저희가 서명한 계약서의 내용은 그뿐이었습니다.”


“즉, 남겨진 가족들을 인질 삼아 카나반의 군 내부에 첩자로 쓸 수 있는 인력을 심어둔다-는 거군.”


카논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적갈색 이마를 감쌌다.

이 여기사의 증언에 따르면, 약화된 중앙군의 전력을 급히 보충하기 위해 개편된 징집제의 틈을 마치 예상했다는 듯 파고드는 정체불명의 세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절대 호의적이라고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그 틈을 파고든 일이 과연 이 두 명이 처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연장선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혹시 밀라 시즈키치도 그 선 위에서 놀아난 희생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

카논은 생각보다 거대하게 앞으로 다가온 그림자에 침을 삼키고 있었다.


“어제 그 남자가 입대 전날에 찾아온 그 사람인가?”


카논의 물음에 여기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는 첫 번째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명령?”


“.......예. 훈련기간 중에, 저희와 비슷한 처지이거나 지금 정부행태에 극심한 반감을 가진 동기가 있다면 명단을 작성해서 넘겨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 얘기는, 놈들이 다른 동기들까지는 너희처럼 훤히 사정을 꿰뚫고 있진 못하다는 말이네.”

가만히 모든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리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순한 감상이 아닌, 가장 날카로운 곳을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에 카논의 시선까지 잡아둘 수 있었다.

“어째서 너희의 사정은 알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 대해선 너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지? 너희가 다른 동기들과 다른 게 뭐야?”


“다른 거라니.......”


여기사는 대답하지 못한다. 평범한 빈민가 출신에, 세상과의 접점이라고는 이번 입대가 처음인 자신과 미래의 남편이다. 어째서 기사의 피가 자신의 대(代)에 이르러 발현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 힘이 특출하거나 주목을 받을만한 정도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 자신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입대하기 전에 네 신상을 조금이라도 노출할만한 행동 한 거 있어? 입대연기신청이라든가, 대출이라든가.”


“.......아.”

셰르의 말에 마침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여기사의 눈동자가 크게 미세한 빛을 빨아들인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대를 할 수가 없어서....... 사채를 조금 알아봤었어.”


“뭐어?”


여기사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곁에 앉아있던 남자였다. 하지만 여기사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당혹을 진정시킨다.


“아니, 알아만 봤고, 진짜로 빌려 쓰진 않았어. 지금 힘들다고 사채에 손을 댔다가는 남긴 가족들이 더 심하게 고통받을 테니까.......”


“사채라.......”


도시국가나 중립국인 욘에 비해선 뒷세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걸로 알려진 카나반이긴 하지만, 그 불결한 돈의 흐름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순 없다. 그러나 국가정책의 틈을 파고들면서까지 이득을 챙기기 위해 움직일 배짱 있는 범죄조직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기사라니?

카논은 복잡하게 확장되는 사고를 정리하고 나서, 어느새 여기사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교관님,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저희는....... 저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교관으로서, 그리고 공화국의 기사로서 카논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을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정의내리고 강탈당한 삶의 권리를 방관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 와서도 분노보다는 걱정과 후회로 눈가를 적시는 이들을, 과감하게 내팽개쳐야 하는가?

그저 이들보다 부유하고 전통 있는 가문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경어를 받고 있는 자신이, 그런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는가?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 폰 미트라블루스. 붉은 나무 혈통의 왕녀이며 공화국의 제3왕위계승자.”



침묵하는 카논을 대신하여 무심한 듯 내뱉은 리즈의 낮은 목소리에, 여기사와 남편은 물론이고 카논, 유진과 셰르마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너흰 아직 미수야. 오히려 역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또 계속 도움을 줄 수 있어. 아직 나도 생도에 불과한 몸이지만, 내 안에 흐르고 있는 피, 내 이름이 가지고 있는 권위, 그 모든 것을 걸고서 맹세할게. 너희가 책임을 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 너희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부디 공화국의 기사로서 직무를 다해줘.”






감정이 복받친 부부기사를 되돌려 보낸 뒤 다시금 식당으로 들어서는 카논.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리즈를 향해 있었다.


“확실히 그들에게 반역의 책임을 물기엔 무리가 있다. 참작을 하더라도, 일단 그들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그게 어떻게 공화국에 대한 반역공작이 될지 알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너그러운 형식으로 그들을 아래에 두어서 차후 이 집단에 대한 변수로 써먹을 수도 있겠지.”


셰르는 리즈가 왕녀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계속해서 교관의 자세를 벗어나지 않은 카논에 대해 잠시 의구심이 들었지만, 곧 그것은 카논이 지닌 군인으로서의 기질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들과 같은 나이임에도 저런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 터.


“이번 일에 대해서는 교관님이 오빠와 벤에게 자세히 정리해서 보고해 주세요. 아, 그리고 너희들. 내가 세상물정엔 모자라서 그런데, 사채라는 거 말야,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 거야?”


“아르다르를 비롯해서 카나반 전체가 체계화된 범죄조직에 대해선 다소 무방비한 게 사실이야. 사채는 그중 작은 부분일 뿐이고. 크게는 산업정보유출이나 암살까지 도맡지.”


“흐응, 꽤나 자세히 알고 있네?”


물음에 답하는 셰르를 향한 유진의 습관적인 비웃음이었지만, 돌아온 셰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당연하지. 귀족가문이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더러운 일들을 누구에게 맡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시즈키치도, 그리고 너희 가슈펠라르도 다르지 않아.”


“뭐, 뭐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버럭하는 유진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는 셰르.


“하아, 이래서 곱게 자란 애들은....... 재작년 가슈펠라르 가문이 군수산업체인 마르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알아? 우린 카니아님이 가주를 맡으신 뒤로는 내부적으로 이런 관계를 청산하기로 합의했지만, 너희는 어떻지? 란다 가슈펠라르야 말로 가주가 되기 전부터 그쪽 분야에서 유명하던 사람인데.”


셰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진이 강하게 식탁을 내리친다. 자신도 모르게 영력이 담겼던 그 일격이 만들어낸 소음은 식당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충분했기 때문에, 카논은 그녀를 만류하려 했지만 격한 소녀의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것만큼은 제지할 수가 없었다.


“감히 가주님께 무슨 말을.......! 네 가문이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다른 가문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야?! 네가 뭔데 그런 억지를-”


“나니까 알고 있는 거다, 멍청아.”

유진의 흥분을 끊는 셰르의 날선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보다 더욱 한기가 서린 눈매와 눈동자.

“시즈키치 가문이라고는 해도 나와 내 아버지의 서열은 말단이나 다름없었어. 그런 우리들에게 가문이 바라는 봉사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경쟁가문의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란다는 이미 우리한텐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서열로는 한참 아래였던 그가 가슈펠라르 본가가 몰락하면서 가주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그런.........”


유진의 새빨간 눈동자가 지닌 분노의 빛이 흐릿해지며, 대신 흔들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긴, 본가와 가까운 곳에서 가문의 밝은 면만 봐온 너 같은 ‘순수귀족’이 뭘 알겠냐만.”


의도가 명백한 조롱에도 유진은 평소처럼 거세게 반발하지 못했다. 그녀는 입술을 움직이지 못한 채, 마치 패배를 인정하는 듯 힘없이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이미 귀족들과는 자연스럽게 결탁해온 조직들이 있다는 거지?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방금 부부와 같은 일반인들에게도 손을 뻗기 시작한 거고? 오빠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리즈가 답을 원하며 바라본 것은 셰르의 날카로운 눈매였고, 셰르는 그런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글쎄, 그건 총리가 얼마나 네 오빠에게 정직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총리?”


이 발언만큼은 잠자코 있을 수 없었는지, 카논이 의자를 끌어당겨 몸을 기울인다.


“예, 마누앙 니바르토 또한 귀족대표의 일원.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그 순기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가, 과연 폐하께 고했을지는.......”


셰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그들의 손길은 귀족가문과 일반인들뿐만이 아니라 중앙정부에까지 침투했을 수도 있는 뜻이다. 물론 총리가 그렇게 허술한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가장 튼튼한 가문의 가장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밀라 시즈키치마저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 제2의 사건이 없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리즈와 카논의 시선이 마주친다. 목소리는 오고가지 않았지만, 카논은 왕녀의 검붉은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화물선에 몸을 숨겼던 덕분에 지독한 멀미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빼고는 평범한 여행과 다름없는 여정이었다. 오히려 이토록 허술하게 왕국에 잠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리스가 불편함을 표할 정도였으니.


“일이 잘 풀린다는 증거 아니겠어? 대리인도 곁에 있는데 너무 그러지 말자고.”


팔루뎀을 품고 있는 대평원의 한가운데에서, 디미르는 그답지 않은 난처한 표정으로 계속 중립국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크리스를 달래는 중이었다.


“아아,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리고 싶네요.”


끝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그륜을 대신하여 잠입에 동행한 대통령경호실장 재규. 그는 여정 내내 그륜을 변호하기는커녕 덩달아 욕설에 동조하며 분위기를 유지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가 신경 쓰고 있는 쪽은 크리스가 아닌 카나반의 대표로서 여정에 동행한 인물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검성께서 이렇게 자리를 비우셔도 되는 겁니까?


“아아, 괜찮아요. 재규도 봤잖아요. 제가 왕궁에서 어떤 존재인지.”


벤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앉아 말갈기를 헤집고 있는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처음 계획이 완성된 후 보조를 함과 동시에 참관인의 자격으로 동행할 인원을 고를 때가 되자 벤이 선뜻 손을 들었던 것이다. 물론 로빈과 마누앙은 그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 미쳤어?! 검성이 왜 그런 자리에 따라가?!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공화국의 검성을 아무렇게나 굴릴 수 있겠냐?!”


“실질적인 위험뿐만이 아닙니다! ‘검성’이라는 존재가 타국에 몰래 침입했다는 사실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국내여론은 물론이고 차후 국가 간 계획까지 무너지는 겁니다!”


그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느긋이 와인을 홀짝이던 벤이 마지막에 내뱉은 말은 오직 하나였다.


“어차피 팔루뎀을 접수하면 너도 나도 가야하잖아. 말해봐, 내가 지금 여기 남아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업무가 뭐가 있는데?”


그런 그의 질문에, 로빈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누앙마저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한 벤이었다.


“하지만 역시 검성이란 직책은 그리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비록 본궁에서 할 일이라곤 없고 명예직에다가 얼굴마저 알려지지 않아 존재감마저 없지만-”


“잠깐, 크리스, 그거 지금 나 욕하는 거-”


“군을 책임지는 자리인 만큼, 그 위엄을 유지하는 것에 특별히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휘두르는 검의 무게가 무겁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장군과 병사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검성으로서의 가장 큰 숙명이자 자격이니까요.”


“.......흐음, 그 말씀대로라면, ‘오열의 검성’은 가장 이상적인 검성이잖아요?”


자연스럽게 벤은 크리스의 푸른 시선을 받는다. 경멸이나 분노가 서려 있지는 않았다. 벤의 말대로, 군인으로서의 블라르는 가장 이상적인 검성이었으니까. 다만, 크리스의 시선으론 ‘오열’에게는 검성으로서가 아닌, 기사로서 가장 거대한 것이 결여되어있었다.


“그는 기사들의 충성을 배신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무뢰한입니다. 아무리 그 이름이 드높다고는 해도 그 방향을 잘못 잡은 이상, ‘오열’은 반역자일 뿐. 불꽃의 이름으로 이 치욕만큼은 반드시 되갚을 것입니다.”


독재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독재를 함에 있어서, 목숨을 담보로 국가에 충성을 해야하는 기사들로서는 결국 가장 합리적인 복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브린타이나의 상황.

그러나 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크리스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동행을 허락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독재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 온 카나반의 왕이라는 직책. 하지만 세뮈엘의 은총 아래 탄생한 붉은 나무의 혈통은 이미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그 존재감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풀었다. 그 사실 자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수에 그친 밀라 시즈키치의 암살시도나, 붉은 장미의 내습은 결국 이 붉은 나무라는 혈통에 대한 견제나 다름없었다.

집중될수록 노출된다.

그것이 지금 로빈의 상황, 그리고 카나반의 상황.


이 방향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상하기엔, 너무도 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다.


“아, 미안.”


자신도 모르게 이리스의 정수리에 턱을 맞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잔뜩 불만으로 부푼 볼과 함께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몽환적인 눈동자를 향해, 벤은 짧은 사과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죄를 갚으려 했다. 그러나 소녀의 불만은 좀처럼 누그러지질 않는다.

벤은 짧게 웃었다. 근래 들어 이리스가 자신의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을 넘어 고차원의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도는 버릇이 나빠지는 게 아니냐며 염려했지만, 벤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일 뿐이다. 그는 후드를 벗겨내어 드러난 이리스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고, 그제야 소녀는 만족했다는 듯이 살짝 달아오른 뺨과 함께 배시시 웃는다.


그런 그녀의 맑은 미소가 사라진 것은, 디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바로 직전이었다.


“아, 팔루뎀이 보입니다. 이제 곧..........응?”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낸 도시.

하지만 그 누구의 얼굴에서도 반가움의 빛은 떠오르지 않는다.




거대한 도시 전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9

  • 작성자
    Lv.43 슈크림빵이
    작성일
    15.02.23 00:16
    No. 1

    잘봤습니다. 머 전글에 답글에 대한거지만. 붉은 장미의 등잔신과 전투신 그리고 복합적 상황에 비해서 뜬금포 죽음이긴했습니다. '조엘'이라는 변수 아닌 변수. 솔직히 조엘이 변수가 된거 자체가 웃긴거였지만. 머랄까. 로빈의 강림의 계기로 삼기위한 장미의 침공과 로반이 강림하기 위한 조건중 하나 벤이 맘에 안든다는(떡밥이겠죠). 등등을 위한 장치로만 보여지고. 또한 강력하게 묘사한 장미를 죽일수 없게 되자 단순한 조엘의 떡밥과 장미의 방심이라는거로 후딱 처리한거로 보여져서요.
    물론 재미있으니 쭉 봐오지만. 어떤 사건이던 주인공인 로빈을 위한 제물로 그냥 넘어 가겠구나. 전처럼 운으로. 이렇게만 생각되어서요. 불편한건 사실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3 04:30
    No. 2

    헠헠 슈크림빵님 오늘도 진중한 감상 감사드립니다!
    많이 부족한 글쟁이입니다. 이런 의견이 많을수록 써온, 그리고 앞으로 쓸 모든 내용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같은 초짜 글쟁이에겐 재미있으셨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2.23 02:40
    No. 3

    전 슈크림님처럼 저런생각 못하는데.... 으아... 부럽다... 전 그냥... 이리스귀엽다 정도밖에 못하는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3 04:30
    No. 4

    동결님 오늘도 감사드려요 ㅠ
    이리스 좋죠. 저도 좋아합니다. 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23 03:22
    No. 5

    장미가 로빈의 강림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음모론(?)을 펼치자면 그냥 감당못하는 장미를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뭔가 짜잔하고 급 등장시킨 것으로 보이는데요 저는?
    // 근데 그렇게 말할수 없는게 조엘 에피소드의 비중을 보면 장미의 죽음의 방식은 이미 정해져있nightboys다고 보는게 맞겠죠 // 1. 이 글의 주인공은 로빈이 아닌거 같은데요? 물론 개인사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의 중심에 있긴 하지만...(그게 주인공이잖아..) 무튼 로빈이야기 이런 로빈의 이야기만이라고 보기엔 너무 나무만 보시는 듯한 느낌이 주인공은 여러명이라고 생각랍니다.
    2. 전에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은 운이 아닌 더 큰 톱니바퀴에 의해 돌아가는 이미 짜여진 판짜기 위에서 진행되는 과정일뿐입니다.
    3. 그리고 그 에피소드에서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건 (물론 로빈의 계약도 중요하지만) 분명 초반에는 벤을 축복했던 붉은 나무가 왜 지금와서는 그를 싫어하게 됐느냐 \'그때의 벤과 지금의 벤은 무언가 다르다\'라는 것 같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3 04:34
    No. 6

    오오 에볼루션님 진중한 감상 정말 감사드립니다 :D
    사실 조엘의 피가 붉은 장미의 꽃잎만 적시는 걸로 끝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의 거대한 수단을 남긴 캐릭터이긴 하지만, 아직 글쟁이가 쏟아부은 것에 비해 해준 역할이 미비했거든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23 03:24
    No. 7

    중간에 nightboys는 아는 사람 톡아이디 복사해놓은건데 언제 붙혀넣기 된거지.. 무시하시길 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2.23 03:25
    No. 8

    어쨋뜬 로빈이 벤에게 공화국에 검성을 아무렇게나 굴릴수 있겠냐는 말에 피식했네요.. 에라이 위선자야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2.23 04:34
    No. 9

    으잌ㅋ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5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