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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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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12.1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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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DUMMY

소심한 침묵은 방치한 채 격렬한 언성이 오고간다. 해는 높게 떠있었지만 모든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놓은 탓에 실내는 커다란 샹들리에와 벽에 매달린 형광등이 그 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좁지 않은 공간이었으나, 원탁을 가득 채운 그림자와 그들 사이를 오고가는 목소리들은 공허함이라고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가득 그곳을 메우고 있었다.


“아르바티앙과도, 아르다르와도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주가 반역을 저지른 가문이 또 멋대로 사병을 움직인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이미 영지병력의 대부분은 중앙군으로 차출되었습니다! 베르달이 함락당한 이런 위태한 순간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게 공화국의 대표귀족가문으로서 마땅한 처사입니까?”


원탁에 둘러앉은 거친 얼굴들은 시즈키치 가문의 원로들. 베르달이 함락 당했다는 소식과, 아르바티앙을 향하는 검은 함대의 보고를 듣자마자 가주인 카니아가 소집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아르다르와 아르바티앙 두 곳 모두와 통신이 끊기는 바람에, 이제부터 시즈키치 가문이 취해야할 행동과 태도에 대해서 자주적인 판단이 필요해짐과 동시에 의견이 갈려버린 참이었다.

카니아는 갈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그 열띤 토론의 풍경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그녀 말고도 또 한 명의 침묵이 있었는데, 당당한 카니아와는 달리 그의 침묵은 소심한 방관에 가까웠다.


“움직인다고 해봤자 남아있는 가문의 사병을 싹 끌어 모아야 2천이 될까 말까 합니다. 영지를 아예 비우면서까지 출병할 가치는 없습니다!”


“그 수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라, 그 행동 자체에 의미를 두자는 것이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의견들. 서로의 목소리에 지친 시선이 침묵을 지키는 카니아에게 향한다. 자신들의 의견은 충분히 들려주었다. 남은 건 가주의 결정뿐.

하지만 카니아의 시선과 미소는,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엉뚱한 얼굴을 향한다.


“당신, 뭔가 하고 싶은 말 있지?”


국왕의 친형이자 현 제1왕위 계승자인 토우칸 폰 미트라블루스는 갑작스러운 부인의 지목에 화들짝 놀라며 더듬더듬 입을 연다.


“아, 아, 아니....... 벼,별로 하고 시,싶은 말은.......”


“뭐가 없어. 아까부터 계속 꾸물꾸물 하고 있었잖아. 밤에는 그렇게 적극적인 인간이 사람들만 앞에 있으면 왜 그래 도대체?”


“카,카니아! 무, 무슨 말을!”


통통하고 붉게 달아오른 토우칸의 얼굴. 시즈키치 가의 장로들은 헛기침을 하며 애써 가주의 발언을 외면한다.


“괜찮으니까 빨리 말해봐. 당신도 일단 가주의 남편이라는 자리잖아. 이런 곳에서 목소리를 낼 줄은 알아야 한다고.”


카니아의 우직한 손이 토우칸의 어깨를 연신 내려쳤고, 그 다정함에 골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토우칸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 남자는 나홀로-라는 느낌보다 자신을 엮으면 훨씬 적극적이게 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카니아였다.

토우칸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들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떨어트렸고, 그러고 나서야 간신히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다.


“제,제국은 아마...도 제 도,동생이 가질 수 있는 가, 가장 화,확실한 거점 두 곳...을 도,동시..에 확보하려..는 새,생각일 겁..니다. 토,통신이 두절..된 지금 같은 사,상황에서 우,우리가 해야 하는 이,일은 다,단순히 의지만을 아,앞세워 병력을 지,지원하는 것이 아,아닙니다.”

토우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의 흔들림은 확연하게 줄어있었다.

“우,우리가 중계소를 자,자처해야 합니다. 부,붉은 모래의 가도에 마력통신이 다,닿을 수 있는 최대한의 가,간격으로 유선중계소를 화,확립합시다. 남은 사,사병들은 일단 가까운 아르바..티앙으로 지원을 가,가고, 아르다르로는 다,다른 병력을 보냅...시다.”


“인력으로 유선 중계소를 확립한다-. 확실히 좋은 의견입니다만, 다른 병력이라뇨? 남아있는 다른 군대가 어디 있습니까?”


장로 중 한 명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지만, 토우칸은 주눅 들지 않고 입을 연다.


“아, 아까 가문의 의,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보여줄 수 이,있는 의지는 단순히 벼,병사 뿐만이 아니잖아..요?”

살며시 두툼한 손가락을 원탁 위에 올려놓는 토우칸. 그런 그를 바라보는 카니아의 얼굴엔 놀라움이 스며든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제, 제가 알기론 시즈키치 가문도 가,가슈펠라르 못지않....게 보유한 현금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





여름의 햇빛아래 활기 넘쳤던 항구는 그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제국 해병대의 상륙지점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새카맣게 뒤덮인 불길한 흑색물결과 곳곳에서 형체를 완성해가고 있는 공성병기들. 하지만 외성벽을 지키는 카나반의 병사들은 그 광경을 눈에 담을 여유조차 없다.


“좌측! 좌측이다! 사다리를 접근시키지 마라!”


아르바티앙 해안경비대장 핀들 오스트부룩은 입이 마르고 목이 찢어질 정도로 영력을 실어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보호막 바로 위에서 폭발하는 마법들과 유탄의 굉음에 삼켜지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명령이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군마법사들은 반격은커녕 점점 얇아지는 보호막과 함께 마력탈진으로 쓰러져간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공성탑과 사다리차를 몰아낼 수단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적의 본대는 공성병기의 조립과 재정비에 바쁘다. 병기의 크기로 미루어보아, 저 묵직한 차량들은 아르바티앙의 내성을 공략하기 위한 것들임을 핀들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외벽 따윈 그저 거쳐 가는 길에 지나지 않을 터. 선발대만으로도 위태한 지금의 상황이 그를 대변해주고 있다. 하지만 핀들과 병사들은 물러날 수 없었다.

외성의 대피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저들이 단순히 상륙의 수월함을 위해 항구에 저질러놓은 짓을 보면, 외성에 남아있는 민간인들에게 ‘코르드 조약’을 지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한걸음 물러나는 순간,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검은 물결에 짓밟힐 것이다. 굉음과 함께 성벽 위를 짓뭉개는 도개교 위로 검은 물결이 쏟아졌고, 그 물결을 향해 핀들은 고민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같이 달려가는 병사들의 얼굴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그리고 같은 각오로 비명 같은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성벽 위였지만, 핀들과 병사들이 다가섰을 땐 이미 제국병사들의 살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핀들은 입술을 깨문다. 그의 검에 실린 것은 영력뿐만이 아니었다. 표정을 지배하던 두려움과 성벽을 적시는 부하들의 피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성벽 안에 남아있는 미련 모두를 끌어 담아 그는 검은 무리를 향해 생명을 뿜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기사의 검은 파도를 가르듯 침략자들의 몸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다. 뒤섞이는 피의 웅덩이와 그 위를 기어가는 신음소리를 들을 여유는 없었다. 핀들은 갑작스러운 자신의 등장에 당황하는 적의 틈을 놓치지 않는다. 적들이 계속 몰려드는 도개교를 눈앞에 두고,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따라오는 부하들을 뒤돌아본다.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남아있는 부하들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순간 스쳐간 핀들의 눈빛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달려드는 적병 몇몇을 베어 넘기며, 핀들은 도개교를 따라 내려간다.

그의 나이 마흔둘. 기사로서 변변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후방 항구도시의 수비대장을 맡고 있는 그였지만, 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기사의 피를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무서운 기세로 도개교를 역주행하는 그를 제국의 기사조차도 저지하지 못한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은 기사의 영력은 검에 닿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갉아먹으며 검은 물결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위에 남은 부관들과 병사들은, 그런 그에게 목소리하나 내주지 못한다. 침투한 제국군을 정리하고 도개교를 박살내는 것엔 성공했지만, 그건 동시에 핀들의 활로를 끊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러나 이 무명의 기사가 도시에 벌어다준 시간은 이대로 깊은 의미도 없이 사그라지는 것일까. 성벽에 다가서는 공성탑과 사다리차는 수없이 많았다. 목숨을 맡겨놓은 성벽을 등지고, 핀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명망 있는 기사와 검을 겨루다 맞이하는 영광스러운 죽음 따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병사들 사이에서 나타난 그림자는, 생명을 다해가는 기사의 눈썹을 뒤틀리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로 이색적인 차림새였다.


“저는 자신의 생명을 과신하는 자들을 좋아하죠.”

밤하늘보다 어두운 후드와 로브. 그리고 그런 깊은 어둠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청년의 싸늘한 눈동자와 미소.

“더없이 빛나고 있는 그 영혼. 아펜타우스께 바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대신 영겁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고동의 덧없음을 상기하며, 심연으로 가라앉으십시오.”


청년의 새하얀 손짓에, 불길함 그 자체로 만들어진 붉은 줄기가 그의 발아래에서 뻗어 나온다. 핀들이 품고 있는 미약한 생명을 먹이로 삼는 혈의 뱀들.

그 소름끼치게 번지는 죽음의 줄기들이 남기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본궁에 외성이 돌파 당했다는 통신이 들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




“아직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이 외성에 남아있다구요! 아버지! 그들에게 시간을 벌어줘야 합니다!”


커다란 창을 통해 여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영주의 집무실. 하지만 창밖은 평소에 가슴을 맑게 해주던 바다의 풍경대신 검은 연기만이 가득 배경을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다급함의 신호와도 같았기 때문에, 아르바티앙의 영주이자 시장, 동시에 아버지인 자히르 드라흐마를 향한 카논의 표정은 바깥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등장식이 눈에 띄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딸의 흥분을 바라보고 있는 자히르의 표정은, 태생부터 어두운 피부색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무심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낭비할 순 없어. 전함을 제외하더라도 상륙한 적의 규모만 팔천이 넘는다. 동요하는 경비대와 사병들을 진정시키는 것도 아슬아슬한 마당에, 병력을 나누고 성문을 계속 열어둘 순 없지.”


카논은 입술을 깨물며, 접대용 의자에 앉아있는 지원군을 향해 돌아본다.


“벤 님! 뭐라고 좀 해주세요! 검성이시잖습니까?”


카논의 구원요청에 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먹색 시선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표정 또한 자히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예직인 저에게 명령권은 없어요. 어디까지나 영주는 드라흐마님이니까. 게다가 저도 그 의견에 찬성합니다.”


“예엣?”


카논의 적갈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든다. 그러나 벤의 무심한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외성의 가장자리, 그러니까 항구를 포함해서 그 근처에 있던 민간인들 대부분은 아르바티앙의 주민들이 아닌 외국의 선원들이나 무역업자, 또는 사업자겠죠. 그들의 안전을 확보해주면 물론 좋긴 하지만, 이쪽의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비난받을만한 선택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제국군이 그들을 해치기하도 하면, 연합의 다른 국가들이 군사개입을 할 수 있는 적절한 명분이자 기회이기도 하고요.”


“지금 민간인들을 인질삼아 구원군을 요청한다는 말씀입니까?”


당혹함이 가득한 카논의 표정. 그에 다시 대답하려는 벤의 입술을 자히르가 가로챈다.


“하지만 항구가 장악당하고, 통신이 불안정하다. 연합은커녕 당장 아르다르에 보고를 올릴 수도 없어.”

고풍스러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자히르는 미중년의 매력적인 미소를 품는다.

“알았니, 사랑스러운 딸아. 지금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거다. 그리고 그건 아르다르도 마찬가지겠지. 아마 적은 마즈다힐에서도 치고 내려왔을 터. 2차 거점을 허용하지 않고 곧바로 우릴 끝내버리겠다는 수가 보이는 구나.”


“제국의 해군이라니. 우리가 너무 안일했네요.”


벤의 말에 자히르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카논은 여전히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럼, 두 분 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세요?”


“말했잖니.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흥분한 딸을 타이르는 아버지의 느긋한 미소. 그 순간 카논은 깨달았다. 벤과 아버지는 무심하다든가 느긋한 것이 아니었다. 저 얕은 미소 뒤에 숨겨져 있던 숨소리는 체념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깨달은 그 순간에도 카논은 도무지 갑자기 다가온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국운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흔들리게 될 줄은, 그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안일했다’는 벤의 짧은 자평이, 너무도 깊숙하게 찔러온다.




“영주님!”

무거운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부관은 영주와 영주의 딸, 그리고 검성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급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본궁의 근처는 물론이고, 찬란했던 내성전체가 이미 피난민들로 절망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무조건 다 죽인다느니, 어서 붉은 모래의 가도를 통해 도망 가야한다느니 하는 목소리들이 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무거운 군상을 스쳐지나가며 그들이 다다른 곳은, 본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하 감옥. 축축한 나선형 돌계단을 따라 얼마나 내려갔을까, 쇠창살 앞에서 영주를 기다리는 또 다른 부관과 병사들이 주인을 향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첩자라도 잡은 건가?”


자히르의 무거운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대답 대신, 그들의 주인이 직접 보기를 바라는 듯 쇠창살 앞에서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쇠창살너머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모두의 상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존재였다.


“.....‘이건’ 뭡니까?”


벤이 눈앞의 존재를 ‘이것’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초점이 없는 눈빛, 창백한 피부. 그리고 계속해서 역겨운 소리를 가래처럼 끓이고 있는 사람의 얼굴. 거기에 카나반 공화국의 남색 정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벤이 그를 사람이라 칭하지 않은 건, 잘려나간 두 팔과 차가운 내장이 쏟아지고 있는 아랫배 때문이었다.

어째서 아직도 움직일 수 있고, 어째서 아직도 고개를 들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참한 몰골.


“척후조가 외성벽을 해체하는 제국군을 정찰하다가 발견해서 생포해왔습니다. 격하게 반항하는 바람에 팔을 잘라냈는데도 보시다시피 이 모양이라......”


“알았다. 물러가라.”

자히르의 짧은 대답. 부관과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이어 경례와 함께 지하 감옥을 빠져나간다. 침묵이 찾아오자, 자히르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벤을 향해 돌아보았다.

“이 자의 이름은 핀들 오스트부룩.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외성벽의 해안경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 ‘있었다’?”


자히르가 과거형을 이용한 이유가, 단순히 직책의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는 벤.


“검성께선 보신 적이 없으시군요. 주어진 생명과 영력을 다 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자들 중에서, 그 고요한 안식을 거부하고 다시금 자유의지를 갖고 무덤에서 일어서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우린 그들을 ‘돌아온 목소리’라고 공식적으로 칭합니다만, 세간에선 ‘망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자유의지’라고요......”


벤의 시선이 다시금 과거 핀들이라 불렸던 육신을 바라본다. 짐승과도 같은 몸짓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인간의 의지는 남아있지 않아보였던 탓이다.


“저것은 일반적인 망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본래 그들은 평범한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고 사회생활도 합니다. 비인간종족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사회적 차별은 존재합니다만, 제국이나 블라고슬로바엔 망자들로만 이루어진 도시도 있다고 하더군요. 즉, ‘저건’ 망자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남은 영력과 생명의 분출을 목적으로 다시 일어난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벤의 눈썹이 뒤틀린다. 자신이 싫어하는 단어가 자히르의 입에서 나온 덕분이었다.


“인위적이라고요? 누군가가 목적을 위해 시체를 일으켰다는 말씀입니까?”


자히르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쇠창살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카논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는 뭉툭한 이빨로 달려드는 ‘시체’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생각보다 커다란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들만의 범주를 벗어나서 말이지요.”

설명을 기다리는 벤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히르. 그는 자신이 꺼낼 무거운 주제에 비해 너무도 가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초부터 ‘탄생’을 다스리는 사도 라이펠과 ‘죽음’을 관장하는 악마 발카지스는 다른 사도와 악마처럼 적대하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도의 주인으로서 인간이라는 일곱 번째 문명이 도래하자, 둘은 서로의 역할을 교환하기로 거대한 합의를 했습니다. 그건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져올 세계, 즉,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미련을 가지고, 산 자는 죽은 자를 부러워하게 되는 피의 역사를 꿰뚫어본 처참한 합의였지요.”

자히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다시 핀들‘이었던’ 육신을 향한다.

“그 과도기에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돌아온 목소리’ 망자. 생명이란 짐과 죽음이란 은총을 모두 갖고 태어난, 어찌 보면 축복받았다고도, 저주받았다고도 할 수 있는 중간의 존재입니다.”


벤의 시선이 자히르를 따라 울부짖는 고깃덩이를 향한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망자의 형태는 아니라고 하셨죠. 그리고 인간이라는 범주를 벗어난 커다란 문제라고도 하셨고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탄생과 죽음 사이의 커다란 공백. 누군가가 그 비어있는 권능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라면, 이미 이 문제는 인간 국가끼리의 분쟁정도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자히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반도의 주인이라는 인간들도 결국엔 하나의 단순한 장기짝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나. 다른 많은 종족들 중에서 인간만이 가지는 특색은 그리 많지 않다. 단지 그 중 사도와 악마 모두가 눈여겨보고 있던 하나.

잔인함.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눈앞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저 버려진 육신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순수한 면을 남겨놓은 형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라고 하면......”


불안을 품은 벤의 먹색 시선, 자히르는 다시 만족스럽게 웃었다.


“피의 군주 아펜타우스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자히르는 천천히 그의 글레이브를 꺼내들었다. 그 날카로운 날의 목적이 어디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의 새로운 권능을 시험해볼 장소로 아르바티앙보다 좋은 곳이 있겠습니까.”



‘고요한 안식’에서 침묵하고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


벤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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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7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4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7 43 18쪽
»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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