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 군대 두 번 간다
이튿날 아침, 길주성 군영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마련된 단 위로 임금과 김종서가 서 있었고, 뒤로는 내금위와 편장들이 시립해 있었다. 이징규의 임관을 위한 예식이었다.
절제사 성달생이 좌중을 향해 외쳤다.
“이징규는 앞으로 나오라.”
달생의 말에 징규가 단 위에 올라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밤에 아버지를 피해 얼마나 뛰어다녔던 지 몹시도 초췌한 모습이었다. 아버지 이전생은 다른 편장들과 함께 옆에 같이 서 있었다.
징규가 임금 앞으로 나오자, 임금은 무휼로부터 고신(임명장)을 전달받아 직접 읽기 시작했다.
“신 이징규는 삼가 받들라. 이징규는 길주 군 내의 병사들로부터 신망이 두텁고, 또한 지난 풍계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과를 올린 바, 금일부로 이징규를 도진무에 제수하니, 그 직책의 무거움을 알고, 성심을 다하여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소임을 다하도록 하라.”
임금은 징규에게 도진무의 고신과 함께 갑옷을 하사하였다. 끝단이 황금색 비단으로 마무리된 아름다운 찰갑이었다. 징규가 두 손으로 고신과 그 갑옷을 공손히 받아드니 길주성 병사들의 함성이 사방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버지 전생은 도진무란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주책없게도 눈물을 글썽였다. 그간 형들과는 달리 나이가 차도록 말썽이나 부리던 천덕꾸러기 막내 녀석이 형들에 버금가는 관직을, 그것도 주상으로부터 직접 제수를 받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다.
반면 징규는 내내 똥 씹은 표정이었다. 조만간 옥부향을 품에 안고 운우지정을 나눌 생각에 들 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전장에서 굴러야 한다니... 도진무고 나발이고 그냥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임금이 징규에게 말했다.
“우리 군은 곧 경성으로 진격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미 겪어봤다시피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이가오하의 군대는 강하다. 우리는 분명히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혹여 그대에게 우리 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경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계략이 있다면, 주저 말고 이 자리에서 짐에게 고하라.”
임금의 말에 징규는 어찌 대답해야할까 잠깐 고민하였다. 고신을 받은 이 순간까지도 어떻게 하면 도망을 갈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임금의 꾀에 외통수에 걸린 신세였다. 징규가 우물쭈물 대고 있자, 편장들의 끝자리에 있던 전생이 그런 아들에게 바로 눈치를 주었다.
“이놈아, 뭐하느냐.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말씀드려야지!”
결국 징규는 체념한 듯 얕은 한숨을 한번 내쉰 뒤, 차근차근 임금에게 고하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장의 좁은 식견으론, 우리 군에게 경성은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땅이라 생각하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경성은 땅이 피폐하여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산악 지형이 많아 기병이 달리기에도 불리합니다. 반면 경성 북쪽의 부령 지방은 너른 평야에 땅이 비옥하고 두만강과 가까워 예전부터 야인들이 노리던 땅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군이 경성으로 쳐들어간다면, 이가오하는 부령으로 병력을 물린 후 수비에 치중하는 한 편, 기습과 교란 작전으로 지속적으로 우리 군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군은 결국 군량 문제로 오랜 기간 경성을 점유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동북면도 우리가 반드시 수복하여야 할 우리 땅이다. 또한 짐의 군대가 이미 압록강을 건넌 이상, 이대로 동북면을 방치하다가는 수륙 양면으로 협공을 당할 수도 있다. 달리 방도가 있겠는가?”
“이곳 길주에는 영북진을 통해 바로 부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사옵니다. 충분히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길입니다. 영북진은 절제사 이징옥이 지키고 있는 땅으로 감히 야인들이 넘보지 못하는 곳이옵니다.
하여 그곳을 통하여 바로 부령 남쪽으로 이른 뒤, 기습으로 성채를 빼앗고 성을 보수하여 그 지역을 완전히 수중에 넣게 된다면, 경성에 남아 있던 야인들은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우리 조선에 귀부하여 올 것이옵니다.
그리하면 작게는 경성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크게는 동북면 전체를 노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징규가 그렇게 자신의 전략을 피력하자, 뒤에 서있던 관찰사 김종서가 불현듯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호통을 쳤다.
“이보게, 도진무. 그런 계책이 있으면서 어찌하여 지금껏 아뢰지 않았나? 원래대로 정직하게 경성으로 진출했다가 큰 낭패를 볼 뻔하지 않았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장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일반 병졸에 불과하였사옵니다. 그것도 곧 군역이 끝나는...”
징규의 어조는 언뜻 항변하는 것 같기도 했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임금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종서를 말렸다.
“관찰사는 그만 진정하시오. 허허허.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장수를 얻었으니 군중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덧붙여 과인의 생각으론 이번 전쟁에 도진무를 선봉으로 삼으면 좋을 듯 한데, 관찰사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종서가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소신의 생각 또한 전하와 같사옵니다.”
“도진무의 생각은 어떠한가?”
임금의 물음에 징규가 또다시 머뭇대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전생이 바로 아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성심을 다하여 명 받잡겠사옵니다.”
다시 한 번 길주성에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전생에게 축하의 말을 전해주고 있었다. 물론 온통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징규만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표정이었다.
‘부향아, 미안하다. 오라버니 군대 두 번 간다.’
그런 징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금은 예의 그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징규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징규는 어린 시절 항상 임금과 무휼의 놀림거리였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 어린 징규가 그들을 놀라게 했던 적도 있었다.
징규가 열 살 되던 해에, 그는 승경도 놀이에서 임금과 무휼을 이기고 승리했던 적이 있었다. 딱 한 번뿐이긴 했지만, 그 상대가 (황희, 맹사성을 포함한) 조정 대신들조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충녕대군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 물론 그때도 임금은 무휼과 짜고 억지로 우겨서 자신이 이긴 걸로 하였었다.
***
[Ep. 09]
[종서] 전하, 풍계 전투에서 공이 큰 판관 손효은도 작록을 올려줌이 온당하다고 보옵니다.
[임금] 손효은? 됐소. 그놈은 그냥 놓아두시오.
[종서] 하오나 전하, 논공행상에 있어 공정함을 잃게 되면, 결국 군의 사기저하로 이어지기 마련이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임금] 관찰사께서는 사정을 모르고 하시는 소리요. 과인이 이곳 길주로 내려오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시오?
왕이 친정 길에 나섰는데, 백성들이 길에 나와 환영을 해주기는커녕, 죄다 조방꾼(기방의 포주)과 기생들만 모여들어 외상값을 갚아 달라 난리더이다.
도대체 길주로 내려오면서 얼마나 퍼마셔 된 것인지, 가지고 온 은자를 다 내밀고도 부족한 지경이었소.
내 손효은 그놈을 때려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그놈은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오.
[종서] ...
[임금] 아, 지금 생각해보니 도저히 안 되겠소. 지금 당장 손효은 그놈을 묶어 오시오! 내 직접 그놈을 매질을 해야 이 분이 풀리겠소. 어서 빨리!
[종서] 전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
먼터무의 본성.
한편 최윤덕과 이양정은 북진을 위해 군사를 점검하는 동시에, 이만주에게 박호문을 사신으로 보내어 군사를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체탐자를 풀어 인근 지형지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여 오도록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렇게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와중에 호랑위의 문귀에게서 사람이 왔다. 문귀는 호랑위 지역을 총괄하며 주기적으로 도원수 윤덕에게 그곳 상황을 보고하여 왔다.
“도원수 나리, 도호부사 문귀가 보내어 왔습니다.”
이번에 문귀의 첩정(보고서)을 들고 온 이는 오십인장 홍사석이었다. 사석은 일행 다섯 명과 함께 윤덕을 뵙고 간략하게 호랑위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별다른 일 없이 무난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였다.
첩정을 다 읽은 윤덕이 첩정을 내려놓은 후 사석에게 물었다.
“이름이 홍사석이라고 했었지?”
“예, 그러하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반갑구나. 자네 같은 용장이 호랑위에 있어 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지난 우예성 전투에서 성문을 열었던 사석의 모습을 떠올리며, 윤덕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 군영에서 하루 쉬고 내일 천천히 떠나도록 하게.”
“배려, 감사하옵니다.”
윤덕은 병사를 시켜 사석 일행에게 좋은 술과 고기를 내어 주도록 했다.
윤덕의 관사에서 빠져나온 후 사석과 함께 왔던 유계문이 말했다. 사석은 오십인장으로 임명되며 계문을 자신의 조의 부장으로 뽑았었다.
“조장, 이제는 도원수 나리께서도 조장을 기억하시는 군요. 하긴 주상전하께서 직접 상도 하사하셨으니.”
“아유, 그만 띄워 주시구려. 그저 안부를 여쭈신 것뿐인데...”
사석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종내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윤덕의 말 한 마디에 흡사 자신이 조선군 전체가 주목하는 장수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윤덕의 병사가 술과 고기를 준비하는 동안 사석 일행은 윤덕의 군영을 둘러보았다. 조선군과 야인 군대가 따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만 명이 넘는 대군이 편장들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자못 장관이었다.
“확실히 도원수의 군대라 다르긴 다르구려. 닷새 만에 성 두 개를 깨뜨렸다고 하기에 아무렴 허풍이 섞였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틀림이 없는 것 같군요.”
현재 호랑위를 관리 중인 문귀와 박원무는 서로 사이가 소원해져 병사 훈련은 뒷전인 날이 많아졌다.
직으로 보아선 도호부사 문귀가 백의종군 중인 원무의 상관이 되는데, 문제는 원무가 원래 도호부사의 상관인 우군절제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훈련 방식이나 주관에 대해서 이견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파벌이 나누어지며 정작 중요한 병사 조련이 등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문귀는 자신을 상관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쌓여 연일 술을 퍼마시며 패악질을 해대었고, 원무는 원무대로 나름 그를 상관 대우 해주고 있음에도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그를 탓하며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그나마 호랑위 부족원들을 관리하고 있는 내이 영감이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주고 있어 최소한의 치안은 유지되고 있던 터였다.
“저 장수는 정말 체구가 당당하구려. 우리 군에 저리 큰 장수가 있었소?”
사석이 한창 훈련을 지도하고 있던 척효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계문이 말했다.
“도진무 나리 아니오, 도진무. 처음 보시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벌써 도진무라고?”
사석이 자못 놀란 투로 그렇게 반문했다.
“무위도 무위지만, 척준경 장군의 후손이라 하더이다. 그래서 주상께서 바로 도진무에 임명했다고 하시더군요.”
사석은 강계에서 늦게 합류한 것도 있었고, 또 합류와 거의 동시에 이양정의 거짓 포로 작전에 투입되며, 그때껏 전장에서 활약하는 효성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사석의 눈에 효성은 그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운 좋게 높은 직책을 얻은 풋내기로 보일 뿐이었다.
“내 저놈이 정말 도진무의 자격이 있는지 한번 시험해 봐야겠소.”
좀 전 윤덕의 칭찬에 기분이 고양되어 있던 탓일까. 사석이 호승심 가득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효성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내려갔다. 마침 효성은 막 훈련을 마무리 지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휴식을 취하도록 명하고 있었다.
“조장, 조장!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오?”
계문을 포함한 같은 조의 병사들이 급하게 그런 사석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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