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참살 곽성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처음 기고만장하던 송목은 물론 주위의 머슴들도 사석의 매서운 기세에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이건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종놈들은 물러서라! 너희들까지 해할 이유는 없다!”
건녕이 그렇게 소리치며 칼을 높이 빼들자, 머슴들 태반이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석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천천히 송목과 곽성오를 향해 다가갔다.
“이쯤 되면, 대장이 직접 나서야 하는 것 아니오?”
잠깐 사이에 사석의 옷은 송목의 무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송목은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곽성오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린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구나. 네놈은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느냐?”
“곽성오라 하지 않았소? 백인참살. 칼 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있겠소?”
“그것을 알면서도 나와 칼을 맞대려고 하는 것이냐?”
“이 정도면 자격이 되지 않겠소?”
사석은 옆에 나뒹굴어져 있던 조현일의 머리를 발로 툭 차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 어린놈이라 그런지,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는 구나.”
“그렇게 빼지만 마시고, 이 후학에게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시겠소? 어찌되었든 나도 칼 밥 먹고 사는 처지. 대인과 칼을 맞댈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소?”
사석의 도발에 마침내 성오가 칼을 빼어들고 대청마루를 박차 몸을 날렸다. 그 큰 덩치가 마치 한 마리 스라소니처럼 맹렬하게 사석을 향해 덤벼들었다. 사석은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성오의 칼을 막았다.
서로의 칼날이 부딪히는 순간, 번쩍 섬광이 튀었다. 성오의 칼날은 과연 묵직했다. 하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공격이 너무 정직했다.
‘이대로라면 다음 공격은 분명 사선 베기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석은 오른발을 뒤로 반 보 뺀 뒤 다음 공격을 대비하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성오의 다음 공격은 사선 베기였다.
사석은 상체를 뒤로 젖혀 간단히 그의 칼을 피해 버렸다. 이어 칼을 허리에 바짝 붙인 뒤 반동을 이용하여 그대로 성오의 몸통을 향해 칼날을 날렸다.
어리고 왜소한 놈이라 방심했던 것일까. 그렇게 곽성오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네놈, 정말 백 명을 베었다는 게 사실이냐?”
사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슴푸레하게 들려왔다. 성오의 눈앞으로 지나온 날들이 흡사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
남원성에서 군역살이를 하던 시기, 곽성오는 덩치만 클 뿐 요령이 없어 무기를 잘 다루지 못했다. 거기에 머리도 나빠, 진법을 까먹고 헤매다 혼나는 것이 매일의 일상이었다. 언젠가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그저 허드렛일에만 투입될 뿐이었다.
그렇게 군역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하필 그날에 왜적들이 쳐들어왔다. 딴에는 왜적들의 동태를 살펴 다른 길로 돌아가려 했으나, 재수가 없으려니, 그 길이 바로 왜적이 침입로로 삼은 길이었다.
성오는 앞뒤 잴 것 없이 무작정 내빼기 시작했다. 개울이든 가시덤불이든 가리지 않고 왜적들과 떨어질 수만 있다면 일단 뛰어들고 보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남원의 관군들이 그런 왜적을 기습해 왔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성오는 덤불에 몸을 숨기고 양군이 부딪히는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처음 기습에 성공하여 기세를 올렸던 것은 분명 조선의 관군들이었다. 하지만 왜적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한동안 당황한 기색이 보이긴 했으나,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칼을 쓰는 일에는 조선군이 왜구들을 당해낼 수 없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이각이 채 되지 않아 사태는 역전되어 관군들이 모조리 몰살을 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관군의 것으로 보이는 칼이 날아와 성오의 옆으로 떨어졌다. 성오는 몰래 그 칼을 집어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 큰 덩치가 움직이자, 금세 왜적의 눈에 띄고 말았다.
“저기 한 놈 더 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왜적들을 뒤로 하고 성오는 또다시 내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멀리 가지 못했다. 막다른 길목. 더 이상 그들을 막아줄 관군도 없었다. 이대로 죽는 구나 하고 두 눈을 질끈 감으려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멀리서 자욱한 흙먼지가 이는 듯 보이더니, 천둥소리 같은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떼의 군마가 들이닥쳤다. 그리곤 그때껏 기세등등하던 왜적들을 사정없이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기병 한 기 한 기, 정렬되지 않은 움직임이 없었다. 기병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왜적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그들은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왜적들을 베어나갔다. 그렇게 삽시간에 수 백 명의 왜적들이 도륙 당했다. 왜적들의 피가 산을 뒤덮고 강물을 채웠다.
“난 조선군이요! 난 조선군이요!”
성오는 행여 자신도 왜적으로 오인 받아 공격을 당할까, 두 손을 들고 필사적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군마의 움직임이 잦아들며, 그 사이로 말을 탄 장수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혼자 남은 것이냐?”
검은 갑옷에 검은 투구를 쓰고 있던 장수는 선 굵은 외모에 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근엄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성오는 온몸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네, 네. 그러하옵니다.”
“고생하였구나.”
장수는 그렇게 말한 후, 왜적의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말을 몰았다. 훗날 알게 된 바로는 경상도 처치사 이징석의 군대였다.
그리고 그것이 남원 땅, 백인참살 전설의 전모였다.
***
건녕의 무리가 송목의 집에서 약탈을 마친 후, 거처로 돌아오니 이미 해가 뜨고 있었다. 건녕은 무리와 함께 약탈해온 물건들을 배분하기 위하여 바닥에 물건들을 풀어 놓았다.
“이야, 많이도 해 처먹었구나. 이것들을 모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을꼬.”
소문난 탐관오리 집안 아니랄까봐, 모아놓은 재물의 양이며 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붙이들을 보며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건녕이 먼저 말했다.
“지금껏 약탈한 물건들은 다들 공평하게 배분하였으나, 오늘만큼은 예외로 두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흑표(홍사석)에게 5할 정도는 주어야 한다고 보는데,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냐?”
“이견이 있겠소? 오늘 흑표 이놈 아니었으면 다들 황천행이었을 텐데, 5할이 아니라 다 챙겨간대도 난 찬성이오.”
건녕의 말에 종원이 선뜻 그렇게 찬성하며 나섰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수현도 사석을 돌아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들 찬성한 걸로 알고, 일단 이 금거북이부터...”
“됐소. 나는 1할 정도만 챙겨가겠소.”
건녕이 막 장물들을 나누려고 할 때, 사석이 그런 그를 만류하고 나섰다. 그리고는 자신 앞에 놓인 물건들을 대충 손으로 집어 자루에 담아 챙겼다. 1할도 채 되지 않는 분량이었다.
“사양할 것 없다. 나는 이미 예전부터 너만큼은 조금 더 챙겨주어야 겠다고 생각해 왔었다. 다만 다른 이들의 눈도 있고 해서 그간 망설여 왔지만, 오늘 같은 날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건녕은 그렇게 말하며 사석의 자루를 뺏어 물건을 더 담으려했다. 하지만 사석은 기어이 그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정말 이 정도면 충분하오. 대신에 바깥에 내가 타던 말은 가져가야겠소.”
사석은 그렇게 말하며 한손에는 자루를, 다른 한손에는 칼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져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건녕이 그렇게 묻자, 사석은 별 감흥없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이제 이 일을 그만 두려고 하오.”
“그만 두면 뭣을 할 작정인데? 계획은 있고?”
“북쪽으로 가볼까 하오. 국경에 있는 군대에 자원하면 면천(천민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는 것)도 해주고 벼슬도 준다고 하더이다.”
“너 북방 오랑캐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아는 것이냐? 네가 면천되기도 전에 목이 먼저 달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냐?”
사석의 대답에 수현이 나무라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사석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북방 오랑캐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모르니까, 내가 이러는 것 아니겠소. 그놈들이 날 얼마나 즐겁게 해줄까,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소? 형님들은 이 촌구석에서 어쭙잖은 삼류 칼잡이들만 상대하기 지겹지도 않소?”
사석은 자신의 칼을 칼집에서 조금 빼어 그 날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흡사 자신의 칼과 대화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상했던 지 종원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 놈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오늘도 보시오. 백 명 베기 어쩌니 하더니, 내 한칼에 나가떨어지지 않았소. 그런 놈들은 동네에 비루먹은 개새끼 두들겨 패는 것보다도 흥이 나질 않소. 반면 북쪽에선 사람 고기도 썰어먹는다는 악귀들이 즐비하다고 하지 않소. 거기다 그런 놈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벼슬도 높여 준다고 하니, 이보다 더 흥겨운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사석은 진심으로 설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종원은 이런 놈을 상대로 더 이상 설득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오냐, 네가 굳이 죽을 자리 찾으러 가겠다는데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우리 조직에도 나름의 규율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떠나려면 팔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는 거?”
“잘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구나. 네놈 스스로 잘라내겠느냐, 아니면 우리가 할까?”
“이보시오, 말이 되는 소릴 하시오. 내가 팔 병신이 되면 군에서 받아 주겠소? 그리고 그런 말은 내가 칼을 잡기 전에 미리 했어야지.”
사석은 당장이라도 칼을 빼어들 기세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때껏 가만히 지켜만 보던 건녕이 끼어들었다.
“그만 두어라! 아까 금방 네 입으로 흑표 저놈 아니었으면, 오늘 우리 모두 죽었을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냥 이대로 보내주는 것도 그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보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형님! 우리에게도 규율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 그 규율이란 것이 한번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결국엔 누구도 지키지 않게 되고, 또 그렇게 조직이 무너지는 것 아니겠소?!”
“허면, 네가 저놈과 붙어서 이길 자신은 있고? 그만 하자. 우리만 더 비참해 질뿐이다.”
건녕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종원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였다. 그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혼자 화를 삭일뿐이었다.
사석은 장물을 담은 자루와 옷가지를 챙긴 봇짐을 말에 실었다. 그리고 이제는 떠나야할 시간. 비록 더러운 일을 하기 위해 만난 사이이긴 했지만, 지난 3년간 동고동락하며 정도 많이 들었던 사이였다.
‘그런데 혹시 이것들이 내 발목을 잡지는 않을까? 그냥 이참에 깔끔하게 다 죽여 놓고 갈까.’
그런 생각이 든 사석이 엄지손가락으로 칼코등이를 슬며시 밀어보았다. 그러자 그 소리가 들렸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두들 일제히 사석을 향해 칼을 뽑아들 자세를 취하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건녕이 사뭇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이대로 가거라. 우리가 너를 뒤쫓는다거나, 다시 찾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내 약속하마.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그래도 지금껏 네 뒤를 지켜왔던 형으로서의 마지막 부탁이다. 그냥 이대로 가라.”
건녕의 말에 사석은 대답 대신 차가운 웃음을 한번 지어 보였다. 그리곤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아무 말 없이 말에 올랐다.
이른 아침, 인적 없는 황량한 들길 위로 북쪽으로 향하는 말발굽소리가 또각또각 선명하게 묻어났다.
- 작가의말
홍사석의 외모 모델은 레슬링 심권호 선수입니다. :D
심권호 형님 선수 시절 때, 정말 포스 쩔었거든요.
체구가 작더라도 저런 포스의 장군이 있다면, 정말 든든할 것 같아서 그렇게 설정해 보았습니다.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