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북벌

너의 왕을 지켜라!

조금 전, 조선군 진채 뒷산 언덕.

언덕 위에서 여진 기습부대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임금이 윤덕에게 물었다.

“원래 여진의 군대가 이렇게 조심스럽단 말인가?”

“아무래도 대군을 상대하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순몽의 군대가 이들을 조금만 잡아 놓는다면, 작전에 큰 차질은 없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여진의 기습부대는 조선군 진채 초입에서 바로 말머리를 돌려버렸고, 대라 소리와 함께 이순몽의 군대가 곧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이순몽의 오명마군이 일제히 여진 부대를 들이닥치기 시작하니 말발굽의 울림이 임금이 있는 뒷산까지 전해졌다.

그런데 순몽과 마찬가지로 윤덕도 여진 기습부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언뜻 보기엔 그냥 정신없이 사방으로 내빼는 것 같았지만, 순몽의 군대를 의도적으로 흩어버리려는 움직임이 분명했다.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윤덕이 그런 생각이 드는 찰나,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기습이다!”

그 소리에 임금과 윤덕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샌가 한 떼의 여진 병사들이 임금과 윤덕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수백은 되어 보였다.

이때 임금의 주위에는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내금위군 소수와 보병 5백이 전부였다. 전장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이곳에 기습부대가 나타나리라곤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하를 보호하라! 그리고 어서 빨리 징을 울려 병사들을 퇴각 시켜라!”

윤덕이 사태를 파악하고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 명령에 답하는 병사들이 없었다. 여진의 병사들이 이미 징과 북을 치는 병사들부터 죽여 버렸던 탓이었다.

여진의 병사들은 노련했다. 그렇게 연락 수단부터 끊어 놓은 뒤 임금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임금과 윤덕은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나운 여진의 병사들은 흡사 양파 껍질 벗기듯 임금을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을 하나씩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만주가 자랑하는 무패의 칠성기 중 한명, 반달 문신의 임흑노가 이끄는 별동대였다.

***

두 시진 전, 우예성.

호랑위의 장수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 토온이 말했다.

“오늘 밤엔 야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당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받았다.

“최윤덕은 박원무 같은 자가 아니오. 노쇠하였으나 지모가 있는 자요. 행여 역으로 우리 군사들이 꺾이지나 않을까 두렵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전은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저희는 적을 알고 있지만, 적은 저희를 알지 못하니 말이죠.”

토온은 그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지도 한 장을 펼쳐 놓았다. 중강진 일대의 지형을 담아놓은 지도였다.

단순히 산과 길을 구분해 놓은 것이 아닌, 매복이 가능한 장소, 뒤를 돌아칠 수 있는 소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곳, 숙영을 할 수 있는 곳, 강과 면한 곳은 그 물살의 세기까지 - 종합적인 군사 전략 지도였다.

애초에 그 지도는 여느 지도들처럼 압록강 유역의 산과 길 정도를 표시해 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조선의 길거리 화가 최경을 잡아 오면서 의도치 않게 완성될 수 있었다.

“내 조선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 항시 조선의 산천이 그립구려. 최경 자네가 그간 보아온 조선의 산천을 내게 그려줄 수 있겠는가?”

최경이 산수화에도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안 토온이 최경이 불러 그렇게 부탁하였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노역에서도 구제해 주었던 토온의 청이었다. 그랬기에 최경은 별 의심 없이 그간 지나왔던 조선의 산천 풍경을 떠올리며 한 장 한 장 정성을 들여 토온에게 그려주었다.

최경은 한번 본 길과 풍경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토온은 단편적인 풍경들을 조합하여 지형을 읽어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렇게 얻은 지도를 놓고 토온이 호랑위의 장수들에게 말했다.

“우선 적의 진채를 기습하는 부대는 기병 일백으로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진채의 초입에서 요란하게 퇴각을 하셔야 합니다. 퇴각을 할 때는 열 명이 한 조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퇴각을 합니다.”

토온은 그렇게 말하며 각 조의 퇴각 방향에 대해서 손으로 짚어 주었다. 이어 우예성 양쪽으로 매복이 가능한 지점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대군을 매복할 수 있는 곳은 이 두 지점입니다. 규모에 대해서 장담할 수는 없으나, 불의에 들이닥친다면 분명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궁병을 제외한다면, 조선의 병사들은 절대로 우리 기병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일당가 족장님은 2천5백 병력을 이끌고 성의 오른편 매복지역을 들이치십시오. 신호는 제가 내겠습니다. 그러면 갑산에 있는 고천의 1천5백 병력이 바로 왼편 매복지역을 치면서 함께 호응할 것입니다.”

갑산에는 자작리에서 도망쳤던 지휘 고천이 머물고 있었다. 토온은 고천으로 하여금 갑산의 병력을 지휘하여 유사시에 우예성으로 원군을 오게끔 준비시켰다. 토온은 바로 고천에는 전령을 보내어 오늘 밤의 야습에 대한 계획을 알렸다.

“오늘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으실 분은 임흑노 장군님의 부대입니다.”

이만주의 지휘 임흑노가 토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장군께는 2백의 병사를 더 보태어 드리겠습니다. 하여 장군의 원래 병사와 합한 총 3백의 병사를 이끌고 강가를 따라 앞산을 우회하도록 하십시오. 가는 길에 늪지대가 있으니 설신과 볏짚을 챙겨 가십시오.”

토온은 지도에 난 길을 숯으로 따라 그리며 그렇게 설명했다. 여진인은 물론 조선인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소로였다. 그 길을 설명하며 어디에서 매복을 하여야 하는 지, 어디에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지까지도 꼼꼼하게 설명했다.

“이 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조선군 진채에서 대라 소리나 북소리가 나면 바로 이 언덕 위로 들이닥치십시오. 이곳에 조선의 왕이 있을 것입니다. 장군의 역할이 가장 큽니다. 잘만 하면 오늘밤 조선의 왕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떠날 채비를 하십시오. 그래야만 예정된 시간 안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토온이 그렇게 설명하자, 임흑노는 바로 부하들과 병장기를 챙겨 떠날 채비를 하였다. 임흑노의 구리빛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나왔다.

사실 임흑노는 건주위 이만주의 부장이었다. 열흘 여 전 이만주는 임금을 알현한 후 바로 우예성의 일당가를 만나러 왔었다. 조선군에 대항할 의지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토온은 최경을 통하여 완성된 지도를 보여주며, 자신들의 의지를 피력했다.

“선생께서 이리 만반의 준비를 해두셨으니,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강물이 얼면 반드시 원군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주는 토온과 일당가에게 그렇게 약조하며, 동맹의 징표로 만포에서 임금에게 받았던 쌀과 임흑노가 이끄는 100명의 병사들을 우예성에 남겼다. 기마술은 물론 산악지형에도 능숙한 병사들이었다. 토온은 이번 작전에 이들보다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

다시 현재, 조선군 진채 뒷산 언덕.

임흑노가 이끄는 별동대의 사나운 칼부림에 임금을 지키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베어져 나갔다. 매서운 기세였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조선의 왕의 목. 그 하나를 바라고 곧바로 왕이 있는 곳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최윤덕의 병사와 내금위군이 사력을 다해 막고는 있었지만, 점차 임금을 둘러싼 병사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윤덕도 직접 칼을 뽑아들어 엉겨 붙는 적군을 떼어내고 있었다.

“저기 붉은 갑옷을 입고 있는 자가 조선의 왕이다. 모두들 저자를 잡아라!”

“전하부터 피신시켜라! 빨리 원군을 불러라!”

뒷산의 비좁은 언덕이 양측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소리와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내금위군은 임금을 호위하며 조금씩 진채 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역전이 되어버린 병력 차이로 쉽사리 몸을 빼칠 수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여진의 커다란 칼이 임금의 목을 향해 날라 들었다. 방패병 남빈이 그것을 보고 다급하게 방패를 들어 그 칼을 막아냈다. 그러자 적군 한명이 그의 방패를 뺏으려 손으로 방패를 잡아 당겼다.

그렇게 여진 병사와 남빈이 아웅대는 사이,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창이 날라 들었다. 그 역시 정확하게 임금을 노리고 있었다. 방패를 잡혀 있던 남빈은 할 수 없이 몸을 날려 그 창을 막았다.

“내가 살아있는 한 전하의 옥체에는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할 것이다!”

남빈은 복부에 박힌 창을 한손으로 잡고 두 눈을 부라리며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칼과 창이 날라 들고 있었다. 어느 샌가 임금과 내금위가 여진의 병사들에게 두 겹 세 겹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윤덕 역시 임금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윤덕의 병사들과 내금위 사이를 여진의 병사들이 틀어막으며, 오히려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임금마저도 칼을 빼들고 적을 베고 있음에도, 전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때 무휼만 있었더라면... 무휼만 있었더라면...’

무휼을 전장에 투입코자 했을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저 여진의 군세를 얕보고 이 지리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매조지하겠다는 욕심이 앞섰던 것이다.

“무휼! 무휼! 어디 있는가! 전하를 지켜라! 너의 주군을 지켜라!”

윤덕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무휼이 있는 전장까지 닿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다.

***

우예성 앞.

무휼과 효성의 활약으로 조선의 병사들이 조금씩 전열을 되찾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세에 몰려 있었지만, 여진의 기병이 들이닥친다고 바로 창을 거꾸로 잡고 도망치는 일 따윈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최소한 한숨 돌릴만한 여유는 생겼던 것이다.

그 순간, 윤덕의 외침이 닿기라도 한 것일까. 무휼이 문득 임금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장군은 전열을 유지한 채 병사들을 조금씩 뒤로 퇴각시키도록 하시오. 나는 전하께로 가봐야 겠소.”

무휼이 박원무에게 말했다.

“아직 퇴각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퇴각을 하면 어쩌잔 말이오? 도원수 대감의 명이 오기 전까지 이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임금의 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가 백의종군까지 당한 원무가 퉁명스런 어투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무휼이 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시오!”

무휼의 서슬 퍼런 일갈에 원무가 잔뜩 주눅이 들어 답했다.

“아, 알겠소.”

이어 무휼은 내금위 소속 세 명만을 데리고 임금이 있는 뒷산 언덕 쪽으로 황급히 말을 몰았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말을 몰고 가는 도중에 이순몽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순몽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휼에게 말을 건넸다.

“진채에 기습한 병력은 소수일 뿐이었네. 그쪽 근황은 어떠한가? 내 진채를 비우기도 애매해서 이쯤에서 대기하고 있기는 한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전황이 시급합니다. 장군의 병력 절반만 성채 쪽으로 보내주십시오. 그쪽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구원? 효성과 그대의 병력이 있는데 구원군까지 필요하단 말인가?”

“지금 세세하게 설명할 여유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바로 전하께 가야합니다.”

무휼이 다급한 어투로 그렇게 답했다. 그런 무휼의 어투에 순몽이 괜히 심통이 나 대꾸했다.

“근데 이놈아, 니가 가라면 내가 가야하는 것이냐? 도원수의 명도 없는데?”

무휼은 전에 없이 예민해져 있던 상태였다. 별안간 순몽을 향해 호통 치듯 고함을 질렀다.

“내 지금 전하께 가는 중이라 말하지 않았소!”

“어, 어... 그래, 알았네. ... 허어, 그놈의 자식 성질머리하곤...”

전하께 간다는 무휼의 말에 순몽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순몽의 대답을 들은 무휼은 더 이상 지체 없이 곧장 임금이 있는 뒷산 쪽으로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