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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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모들
루리프를 만나고 오는 길은 기분이 좋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벼움이랄까. 늘 못마땅한 기분과,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들로 채워졌던 마음이 이렇게 한없이 가볍게 들썩이는 느낌은 아주 오래전 꼬마였을 때를 빼곤 처음인 거 같았다. 알렉은 뭔가 달라진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오늘 밤은 잠을 잘 잘 수 있을 거 같다. 아주 오랜만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방안엔 묘한 기운이 서려있다. 달큰하지만 뭔가 역겨운 느낌의 향이 고루 퍼져있다. 가벼워졌던 기분이 다시 어둡게 가라앉는다. 방해꾼을 보는 순간 더더욱 바닥을 치는 기분탓에 자칫하면 칼을 빼들뻔했다. 확~ 모조리 두 동강이 내고픈 마음으로 방해꾼을 쳐다본다.
- 또 그 꼬맹이한테 다녀오는 길이야?
칼멘이 도발적인 차림으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그를 반긴다.
- 룬이 그렇게 목메던데 이참에 꼬맹이들끼리 놀라 하고 우린 우리 일을 하는 게 어때?
칼멘의 능수능란함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욕망으로 들떴던 때 칼멘은 그의 여신이었다. 칼멘 없인 하루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칼멘의 말에 동요하고, 칼멘의 품에서 분노하고, 칼멘의 행동에 자극받았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다. 하지만 이제 칼멘은 그 무엇으로도 알렉을 흥분시키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를 파악하고 있을 때 조차도 알렉은 칼멘을 거부하지 못했다. 칼멘은 그에게 모든 것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피워놓은 향과 그녀의 자태가 그를 화나게 했다. 그것보다 더 그녀의 말투가 그를 열 받게 했다.
- 사람 눈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군.
침대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술잔을 채우며 알렉이 내뱉는다.
- 호호호~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새신랑이 되려니 몸 사리는 거야? 결혼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넌 내꺼니까. 알렉. 너의 영원한 동지는 바로 나야. 우리의 계획을 잊은 건 아니겠지?
말을 하면서 칼멘이 뒤에서 그를 안았다. 훈련으로 단련된 그녀의 몸이 그에게 밀착되어왔다. 우리의 계획...
그 계획 때문에 알렉은 성가셔졌다. 알렉은 누군가에게 지시받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칼멘은 어느 순간부터 알렉을 조정하려 했다. 어린 알렉은 그녀에게 고분고분했었지만 이제 남자가된 알렉은 그런 칼멘에게 싫증이 나던 참이다.
- 루리프는 희생양이라는 걸 잊진 않았겠지? 뭐 여동생 같은 맘으로 안됐다 싶음 룬에게 보내버리던지. 골칫거리를 룬이.. 헉!
칼멘의 목에 알렉의 칼이 닿았다. 표정 없는 알렉의 얼굴이 잔인하게 노려보고 있다.
- 두 번 다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잊어버리고 있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데. 난 뮤리엔의 왕자고, 얼마 안 있음 왕이 될 사람이야. 그러니 자신의 처지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론 내가 부르기 전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맛보기를 봤으니 잘 처신하도록해!
칼멘의 목덜미에 빨간 선 하나가 생겼다.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알렉의 표정은 사신처럼 차가웠다. 칼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온 칼멘은 자기방에 도착해서야 숨을 내쉬었다. 목덜미에 난 상처는 그대로 그녀 가슴에 새겨졌다. 갑자기 변한 알렉을 칼멘은 이해할 수 없었다.
- 알렉이 변했어요. 나를 거부했다고요! 계획을 변경 해야 겠어요.
씩씩대는 칼멘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쳐다보던 남자가 대답했다.
- 네 욕망으로 일을 그르칠 작정이냐?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 알렉은 날 좋아해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게 다 그 계집애 때문이에요! 그 계집만 없어지면..
찰싹~ 말을 하던 칼멘의 눈에 번쩍하고 불이 번득였다. 하루에 이런 모욕을 두 번씩이나 받다니. 칼멘은 눈을 부릅뜨고 따귀를 때린 남자를 쳐다봤다.
- 다된 밥에 코 빠뜨리는 짓은 그만둬라. 정신 차리라는 뜻이야! 내 너에게 애초에 한 약속이 뭐지?
그가 처음에 한 약속. 열일곱 칼멘에게 임무를 주며 그는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널 여왕으로 만들어주겠다.]
칼멘은 그날 처음 알렉을 보았다. 그녀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알렉은 건장한 소년이었다. 미래의 왕이 될 미소년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날부터 칼멘은 알렉의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알렉이 그녀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 돌아가 있거라. 따로 전갈을 넣을 때까지. 지금 이 행동이 자칫 수년에 걸친 계획을 모조리 망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빨갛게 부은 볼을 하고 칼멘은 조용히 빠져나갔다. 불같은 성미를 이기지 못해서 앞뒤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이었는데 누군가가 봤더라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방금 만난 그 남자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는 그녀에게 한 약속은 지킬 것이다.
오늘 밤은 뮤리엔의 여왕이 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는 걸로 칼멘은 만족해야 했다. 어차피 알렉은 루리프 따위에겐 만족할 수 없을 테니까.
- 알렉의 대답은 들으셨나요?
헬렌 왕비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녀를 돌아보는 왕의 얼굴이 갑자기 더 늙어 보인다.
- 내가 두 녀석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나 보오. 둘 다 만만치 않아요.
왕비는 왕의 눈을 들여다본다. 진지하지만 굳건하지 못한 왕의 눈에서 그녀는 초조함을 보았다.
- 알렉과 룬은 서로 많이 다르지만, 서로 많이 닮은 데가 있어요. 둘 다 포기하지 않을거에요.
- 알고 있소.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오. 룬은 좀 어떻소?
- 그 아이의 마음은 지옥에 있지요...
- 루리프와 룬이 혹시라도...
- 그런 일은 없는 거 같아요. 그 만찬 이전까진 룬도 루리프도 오누이 같았으니까.. 뭔가 달라졌다면 제가 알아챘을 거예요.
- 룬의 마음을 돌릴 수 없겠소? 자칫 룬이 다칠지도 모르오.
- 제게 그럴 힘이 있다면 저도 그러고 싶어요... 전 룬의 계획이 일리 있는 거 같아요. 어쨌든 로리엔에 우리 사람이 있는 게 로리엔을 안정시키는데 더 좋을 거 같거든요. 알렉 보다는 룬이 루리프의 배필이 되는 게 뮤리엔에게도 로리엔에게도 더 좋은 일일 거 같은데... 결혼식을 미루고 로리엔의 입장을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왕의 눈빛을 살폈다.
초조해하던 왕의 눈빛에 생기가 돈다.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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