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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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불씨
루리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살짝 움직여도 통증이 느껴지는 입술과 시퍼렇게 멍든 팔만 아니었음 꿈을 꿨다고 생각했을 거다.
알렉과의 그 일은 루리프가 상상했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첫 키스가 그렇게 살벌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첫 키스는 아주 달콤하고, 흥분되는 것일거라 짐작만 했었다.
그 첫 키스의 상대도 부드럽고 다정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모든 게 헛된 거였다. 키스라는 게 그렇게 무자비한 건지 몰랐다.. 생각만 해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은 수치스러움에 소리를 지르고 싶어 졌다. 공포와 분노가 겹친 감정을 루리프는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알렉과 결혼을 해야 한다니...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루리프는 눈물만 흘렸다.
이젠 룬에게 달려갈 수도 없었다. 더더욱 이런 꼴을 하고는... 그녀의 모든 게 사라져버린 하루였다. 이제부턴 고통만 남을 거 같았다...
- 물에 빠졌다면서?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본 곳엔 룬이 서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룬도 변했다.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변했다.
- 왜 이래?
룬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더듬는다.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렸다.
그런 나를 룬이 안아준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가만히 나를 안고만 있다. 가만가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자상한 손길 때문에 감정이 더 복받쳤다.
- 나랑 결혼하자. 알렉은 네 짝이 될 수 없어.
룬을 본다. 밤사이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거 같다. 장난기는 다 사라진 진지한 남자가 내 앞에 서 있다. 늘 빛나게 웃던 그의 웃음 대신 고뇌가 섞인 그의 눈빛만 있다.
- 어떻게.. 어떻게 그래..?
- 나만 믿어. 나만 따라와.
말을 마치고 룬이 나를 지긋이 본다. 그의 손가락이 눈가의 눈물을 훔친다. 그 손가락이 내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살짝.. 아주 살짝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 호오~ 이건 불륜인데. 돌이킬 수 없는!
알렉이 우릴 보고 있다. 그 앞에서 우리 둘은 꼼짝도 못 하고 그를 바라 볼뿐이다.
룬이 나를 가로막고 섰다.
- 형. 루리프를 사랑하는 건 나야. 나에게 양보해줘. 형은 루리프를 사랑하지 않잖아!
- 싫다면? 룬. 이게 그렇게 간단한 거 같니? 너흰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랑 나부랭이만 찾고 있지.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나라 간의 공약이지.
- 동맹을 위해서라면 꼭 형 이어야 할 필욘 없잖아!
- 쯧쯧... 루리프. 잘 들어. 당신은 알 거야. 왜 나랑 결혼해야 하는지. 괜하게 룬에게 상처 주지 말고 본분을 다하라고.
살벌한 눈빛으로 알렉이 말한다. 본분을 다 하라.. 이 말이 가슴에 못처럼 박혀왔다. 내 본분. 내가 이곳에서 치러내야 하는 내 본분...
- 루리프를 협박하는 거야? 형은 나라를 가질 거잖아. 난 루리프만 필요해. 난 루리프만 있음 된다구!
- 그 말은. 내가 루리프를 포기 안 하면 나랑 대결이라도 하겠단 소린가?
- 그럴 거야. 난 평생 후회하면서 살기 싫으니까.
-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 지나 아는 거냐 동생?
- 알아. 난 루리프를 그냥 형한테 보내지는 않을 거야.
룬의 표정이 어떤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알렉의 표정은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거 같다. 그의 강철 같은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 도전으로 받아들이마. 일이 네덕에 더 쉬워지겠군. 철없는 것들 같으니라구. 후후.. 오늘 그 말을 언젠간 후회하게 될 거다. 룬. 내.동.생.아.
씹어 뱉듯이 말하고 돌아서는 알렉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만큼 점점 커진다. 그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진 다음에도 그의 형상은 남아있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룬의 몸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돌아선 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그래도 그의 눈빛은 결연해 보인다.
- 힘들 거야.. 그래도 내 손 놓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힘들 거야... 나 때문에 룬이 힘들어질 거야... 이건 아니야..]
- 사랑해..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너랑 결혼할 거란 꿈을 꿔왔어.. 좀 더 일찍 내 감정을 표현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 룬.. 나는.. 잘 모르겠어.. 이 모든 게 나는.. 잘 모르겠어.. 한 번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나는.. 나는 로리엔의 공주야.. 공주로서 뮤리엔에 왔고, 그건 공주로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 알아. 하지만 그 일이 로리엔을 지키기 위한 공약이라면 그게 꼭 알렉일 필욘 없잖아? 나도 뮤리엔의 왕자야!
뮤리엔엔 두 왕자가 있다.
엄마가 다른 두 왕자는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운명을 타고났다.
그 다르지만 비슷한 운명이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불씨는 지펴졌다. 아무도 가늠하지 못할 운명의 불씨가 소리 없이 다가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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