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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 님의 서재입니다.

루니엔의 아이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마이리
작품등록일 :
2016.02.04 14:59
최근연재일 :
2016.12.15 21:36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5,345
추천수 :
18
글자수 :
190,383

작성
16.02.0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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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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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저녁 만찬

DUMMY

만찬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 마음이 고요해질지는 알 수 없었다.

틸리온 경에게서 들은 얘기는 내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내용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 나는 늘 귀를 열어두고 살았다. 모든 게 나에게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하찮은 일들도 그것들의 이면엔 반드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특히나 내 나라에 대해서라면 나는 모든 걸 알아두어야 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라도 그것이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이곳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내 나라 로리엔 왕국은 아버지가 암살당하신 이후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사냥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피투성이 아버지의 모습은 아침에 사냥을 나섰을 때의 그 활기찬 모습은 아니었다.

범인은 그 자리에서 잡혔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엉뚱한 사람이 범인이 되었다는 걸. 밤사이 어른이 되어버린 오빠는 복수를 외쳤고, 졸지에 미망인이 된 나의 어머니는 세 아이를 끌어안고 밤을 지샜다.

그 다음날이 어떻게 진행될지 어머니도, 나도, 오빠도, 남동생도 몰랐다. 그 밤사이 발 빠르게 움직인 건 틸리온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오빠는 왕이 되어야 했다.

나와 세 살 터울인 오빠는 그때 겨우 열두 살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 뮤리엔 왕국으로 보내졌다.

로리엔은 사방으로 적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뮤리엔에 나는 평화의 사절로 보내졌다.

강력한 뮤리엔이 뒷배로 있는 한 주변국이 로리엔으로 쳐들어 올 일은 없었다.

오빠가 왕이 되고 어머니가 섭정을 하는 체제로 왕국은 건재했다. 그 이면에 틸리온 경이 있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오빠가 열아홉이 되던 해 어머니의 섭정은 막을 내렸고, 오빠는 틸리온 경의 딸과 결혼했다.




- 조르쥬 왕께서 위독하십니다..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독이 퍼진 상태라 손을 쓸 수 없었어요..

- 누가 그랬는지 아나요?

- 다들 짐작만 할 뿐입니다. 증거가 없으니 손을 쓸 수 없어요.

- 그게 말이 되나요? 짐작만 할 뿐이라니? 아버지 때도 그대로 넘어가더니 이번에도 그대로 넘어가려구요?

- 증거가 없습니다. 증거 없이 움직였다간 그대로 계략에 넘어갈 수 있어요.

- 누가 알고 있죠?

- 어머님과 왕비님, 저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 제게 원하는 게 뭔가요?

- 뮤리엔과 결혼으로 동맹을 맺을 생각입니다. 왕께서 아직 힘이 계실 때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야 로리엔이 무사할 수 있으니까요..

-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내가 여기 있는 목적은 그거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로 다가온 일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이성은 담담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삶을 살라 하지만 감성은 자꾸 현실에서 도망치라 말한다.



뮤리엔엔 두 왕자가 있다.

알렉과 룬.

알렉이 첫째 룬이 둘째다.

둘은 생긴 모습도 성격도 완전 다르다.

알렉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왕은 룬을 낳은 헬렌을 왕비 자리에 앉혔다.

다행히 헬렌 왕비는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어서 알렉과 룬은 사이좋은 형제로 자랐다.

하지만 알렉은 룬과는 다르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기질을 많이 닮아서 모든 면에서 전사의 기질이 다분했다.

다정하지만 거칠고, 잘생겼지만 웃지 않는다.

늘 한 무리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니며 사냥이나 분쟁이 있는 곳을 다니는걸 좋아했다.

룬이 빛처럼 아름답다면 알렉은 어둠처럼 아름답다.


- 알렉 왕자님과 결혼하게 되실 겁니다. 두 나라 간 합의가 그러했으니까요. 알렉 왕자님이 거느린 군대만으로도 로리엔의 방패가 되어 주실 수 있어요.

틸리온 경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린다.




알렉.

최근 들어 더 볼 수 없었는데.. 그래서 마음이 가벼웠던 것도 사실이다.

알렉이 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숨 막혀했다.

알 수 없는 어둠이 드린 듯 알렉이 머무는 동안의 궁안은 웃음이 가시고 없었다.

오로지 웃는 건 룬뿐이었다. 모두가 알렉을 두려워해도 룬만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 어떤 드레스를 입으시겠어요?

생각에 빠져 있느라 유모의 기척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 어여 준비하셔야죠~ 오늘 좋은 일이 있으실 거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유모는 그저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얘기만 하고 있다.

- 우리 공주님.. 언제 이리 성장하셨는지.. 매일 보면서도 몰랐네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유모가 말끝을 흐린다.

- 금색 드레스로 할게.

알렉과 상대해야 한다면 여린 모습으로는 안된다.



이맘때의 뮤리엔은 밤공기가 기분 좋게 시원하다.

모처럼 열리는 저녁 만찬이 사람들을 들뜨게 하나보다. 모두가 기분 좋은 바람처럼 나풀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곳곳에 불이 밝혀진 궁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들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건 여태 있는 듯 없는 듯 대했던 어떤 여자애가 오늘부로 그들이 넘보지 못하는 신분상승을 한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단 뜻이다.

다들 모른 척하고 있지만 다들 이미 알고 있다. 이 만찬이 무얼 의미하는지. 두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이 될 것이다.

왕과 왕비가 자리를 잡고, 알렉과 룬이 자리했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날리며 룬이 나에게 눈을 찡긋거린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의 장난에 나도 응답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장난마저도 서글프다..

룬의 옆에 앉은 알렉은 지난번보다 더 어른스러워진 거 같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각이 져서 날카롭게 보였다.

그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의 눈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인사는커녕 무심한 표정으로 보는 듯 마는 듯 지나치는 시선 때문에 갑자기 이 자리가 거북해졌다.

알렉의 눈길을 받은 이들의 표정도 알렉처럼 어두워졌다.

그의 시선은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무 죄도 없지만 꼭 죄지은 기분이 드는 눈길이랄까.


-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에게 로리엔의 틸리온 경을 소개하겠소.

마르텔 왕이 틸리온을 소개했다.

- 틸리온 경이 로리엔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하는데 무엇이오?

- 마르텔 폐하. 저희 로리엔과 뮤리엔이 혼약의 동맹을 맺은지 십 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성년이 되신 루리프 공주님과 알렉 왕자님의 성혼을 주선하기 위해 로리엔의 특사로 제가 왔습니다.

사람들의 탄성이 울렸다. 나는 살짝 눈을 들어 알렉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 건 룬이었다.



- 틸리온 경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알렉과 루리프의 결혼은 이미 정해진 바 언제로 날짜를 정하면 되겠소?

- 왜 알렉형이어야만 하죠?

왕의 말끝에 룬이 벌떡 일어나 외친다. 사람들은 모두 번개라도 맞은 듯 멈칫거린다. 틸리온경은 나를 쳐다봤다. 둘이 무슨 사이냐고 묻는 거 같다.

아까 룬을 쳐다보던 틸리온 경의 모습이 떠오른다.

- 룬. 앉거라.

마르텔 왕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왕의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 아버지. 왜 형이어야만 합니까? 제가 루리프랑 보낸 시간이 더 많다고요. 어릴 때부터 루리프를 좋아한 건 나란 말입니다.형은 루리프에겐 관심도 없어요!


룬의 마지막 말이 만찬장에 울려 퍼졌다.

그 말이 마법처럼 모든 사람의 말문을 묶어 놓았다.

그 말을 내뱉은 당사자인 룬조차도 선뜻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고요한 시간이 얼마쯤 흘렀다.

갑자기 이 장소에서 뛰쳐나가고 싶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의 모든 공기가 팽창되어서 숨쉬기도 힘들다.

이대로 있다간 풍선처럼 부풀어서 터져버릴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서 뛰쳐나가려는 순간이었다.


- 결혼하겠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던 일.

알렉의 조용한 음성이 모든 공기를 빨아들이는 거 같다. 갑자기 소리가 사라진 세상에 앉아 있는 거 같다.

룬도 알렉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버렸다.

- 식은 열흘 안으로 치렀으면 합니다. 양국에서 이미 정한 성혼으로 그동안 면면히 준비를 해왔으니 준비기간이 길게 필요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틸리온 경만이 알렉의 말에 반응했다.

- 일개 귀족의 결혼도 준비기간이 필요하거늘 왕국의 결혼이요. 그리 서두르는 이유가 뭡니까?

알렉의 입가에 웃음이 베인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틸리온경은 어떻게 대답을 할까?

- 왕대비께서 루리프 공주님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공주님께서도 성년이 되셨고 하니 식을 올리신 후 두 분께서 로리엔을 방문해주시길 원하십니다.

- 로리엔을 방문하는 건 결혼을 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오. 먼저 인사를 드린 후에 식을 올려도 되는 일 아니오? 아무리 정략결혼이래도 얼굴도 뵙지 않고 식을 올리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군.

알렉의 집요한 질문에 틸리온 경도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 어차피 이곳에서 결혼해서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식을 올리고 친정을 방문하는 게 절차를 줄이는 일이겠지요. 우리가 적게 움직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덜 바쁠 테니까요.

- 하하하. 공주가 마냥 어린 줄만 알았는데 그런 속 깊은데가 있었다니. 왕비감이 따로 없구만.

왕의 말에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틸리온 경도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알렉은 재밌다는 눈빛을 나를 본다.

룬은 기절할 거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를 볼뿐이다.

나도 모르던 내가 갑자기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거 같다. 알 수 없는 곳에 발을 디딘 심정이 이런 걸까?

뛰쳐 도망치려던 내 몸은 어느덧 매무새를 다듬고 우아함을 가장한 채 한껏 도도한 표정으로 서있다.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단 것처럼...


작가의말

룬이 폭탄 발언을 했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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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루니엔 16.02.10 147 1 11쪽
9 로리엔 16.02.10 139 1 6쪽
8 왕의 묘수 16.02.09 188 1 9쪽
7 음모들 16.02.09 81 1 7쪽
6 시작된 감정 16.02.08 190 0 11쪽
5 운명의 불씨 16.02.07 92 0 6쪽
4 첫키스 16.02.05 128 1 6쪽
3 16.02.05 134 1 7쪽
» 저녁 만찬 16.02.04 176 3 10쪽
1 방문객 16.02.04 246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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