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아.
'탕!!'
마른 가을 밤 하늘을 뚫고 총 소리가 울렸다.
어둠 속 치솟은 불꽃은 매캐한 화약 연기를 허공에 남겼다.
"모두 움직이지 마!"
한 반장 이었다. 어느새 경찰들과 형사들이 총을 겨누고 그들을 둘러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 도망 못 가고 얼이 빠져 손 든 채 순순히 체포되었다.
강건은 이미 글러 먹었다고 판단했다. 일단 피해야 했다. 현행범으로 잡히는 걸 피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아버지의 돈이 마술을 부려줄 터였다. 슬금 슬금 눈치 보던 그는 어수선한 틈을 타 산비탈을 뛰어 올라 도망치려 했다.
"탕!"
어둠을 가르고 또 한번의 총성이 울렸다. 한 반장의 총구는 이번엔 허공을 겨누지 않았다. 총성이 울린 것과 동시 강건이 허벅지를 붙잡고 쓰러졌다.
모두 투항하고 진압된 상태였다. 도주한다고 발포한 것은 과잉 대응의 소지가 있었다. 총기 수칙을 모르는 한 반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처참함과 발가벗겨진 유리의 모습은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에 힘 주기를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뒤로 피투성이가 된 경용과 그를 부축한 현주가 나타났다. 둘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혜성에게 달려갔다.
"혜성아. 미안해........나 때문이야."
그녀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혜성은 그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한 반장이 어떻게 알고?"
"경용이가 번호를 줬어. 혹시 모르니 전화 하라고."
"그랬구나. 자식."
피투성이가 되어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입술을 억지로 말아 올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경용의 어깨를 두드렸다.
경용이 독수리 오 형제를 탈퇴하기 직전이었다. 맥도날드에서 유리와 만나고 있는 중년 남자를 목격한 그들은 무작정 막다른 골목까지 남자를 쫓아 시비를 걸었다. 혹시 그녀가 원조 교제라도 한다든 지 아니면 협잡꾼에 걸려 협박 당하지 않는지 걱정에 앞뒤 재지도 못하고 한 반장 뒤를 쫓았다..
그는 보이는 것과는 달랐다. 빠르고 강했다. 세 녀석이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혜성과 경용만 남자 그는 그제야 정체를 밝혔다.
"그걸 왜 이제 말씀하는 겁니까? 처음부터 말씀 하셨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겁니다."
"유리를 지키는 독수리 오형제라며? 하하하. 얼마나 센지 알고 싶어서 그랬지."
한 반장은 무작정 덤벼든 그들이 밉지 않았었는지 다정하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길이었다.
"아구구!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십칠 대 일 정도는 가뿐했는데."
사실 방금 전 일련의 공방과 오랜 현장 경험으로 비록 고등학생이기는 해도 혜성을 맨 주먹으로 이기기는 쉽지 않겠다 생각하던 한 반장이었다. 약해 보이는 세 녀석 먼저 쓰러뜨려 자존심 지켜 놓고 신분을 밝힌 것이었다.
"유리를 지킨다니, 우린 동지나 마찬가지야. 나도 사실 그 애를 지켜보는 중이었거든. 여기 내 연락처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그는 믿음직스러운 눈빛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명함을 내밀었다.
혜성은 형사가 유리를 지켜본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는지 명함을 받지 않았지만 경용은 혹시나 해서 받아 두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 경용은 현주에게 명함을 건 냈다. 한 반장에게 연락을 해 달라 부탁했다.
"자식 간만에 똘똘한 짓 한번 했네."
혜성과 경용은 서로 부축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현주는 경용의 허리를 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제법 잘 어울렸다. 혜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더럽혀진 옷을 털며 유리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그녀 가슴을 향해 짐승의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혀를 깨 물은 유리의 이빨 사이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젠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다문 턱에 힘을 더 주려는 순간 총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뛰어다니며 놈들을 체포하는 경찰들, 총 소리에 놀라 반항할 의지를 잃어버린 채 체포되는 짐승들, 도망치려는 놈, 그리고 울리는 총 소리.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났다.
유리를 붙잡고 있던 두 놈이 그녀를 놓아두고는 도망쳐버렸다.
몸은 자유로워 졌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두 팔을 땅에 짚고 의식을 잃지 않으려 버텼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아직 상황 파악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땅에 쥐어 박고 있는 기훈이 보였다.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연신 땅에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던 기훈은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이마를 가로막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유, 유리야!"
믿을 수 없었다. 눈물과 흙이 뒤범벅 되고 입가 핏자국이 지저분하게 말라 붙은 흉한 몰골이었지만 틀림없는 유리였다.
그녀는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이마를 받치고 있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다치게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괜찮은 거야? 정말?"
젖은 눈으로 끄덕이는 그녀 팔과 다리를 허둥지둥 살폈다. 그녀가 이상 없음을 확인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엉~엉~ 유리야 미안해 엉~엉~"
"우앙! 아니에요. 당신 잘못 아니에요. 울지 마요. 엉~엉"
"내가, 내가 잘못했어. 엉~엉"
"나도 잘못 했어요 엉~엉"
"아니야 내가 미안해 엉~엉 잘못 했어 엉~엉"
큰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훈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유리도 흙과 낙엽 그리고 눈물 범벅 된 얼굴로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지 그를 껴안고 하염 없이 울었다.
한 반장은 부둥켜 안고 우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코트를 벗어 슬며시 유리를 감싸주었다. 보기만 해도 허전하고 아릿한 감정이 피어 올랐다.
말없이 지켜보던 한 반장은 더 이상 두 사람을 지켜볼 필요 없이 그대로 놔두어도 괜찮지 않겠느냐며 마음 속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감동 받았죠? 그럼 한마디 남기는 센스는 기본이죠 ^^
- 작가의말
프롤로그가 끝났습니다. 작가 망상은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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