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백 내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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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예카테리나, 안드레이는 어둠 속에서 허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순서대로 걸어갔다. 저 멀리 백군 참호의 불빛들이 보였다. 백군이 점거한 지대는 현재 적군이 점거한 마을보다 고지대에 위치했다.
그렇기에 삼인방이 정찰하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모조리 기관총의 사정권에 놓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백군 참호의 불빛 속에서 놈들은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지금 이 곳을 조준경으로 면밀히 살펴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권총이 없기 때문에 셋 다 착검된 무거운 소총을 들고 가야했다. 하필 오늘은 보름달이 떴다. 안드레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삼인방은 마을의 불빛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상태였다. 삼인방은 백군이 쓰다가 버렸다는 빈 참호를 정찰하면서 물건을 노획할 생각을 포기했고, 정찰 임무에 자원한 것을 벌써부터 후회하기 시작했다.
'시..시발!! 그냥 총 손질이나 할걸!!'
'좆같네!!'
'괜히 한다고 나섰어!'
셋은 후각, 시각, 촉각 모든 것을 곤두세웠다. 꽤나 쌀쌀했다. 하지만 옷을 두껍게 입었다가는 몸이 둔해지고, 옷소리가 날까봐 외투를 입지 않고 왔다. 손이 조금씩 곱기 시작했다.
'대충 보고 돌아가자!'
맨 앞에서 일행을 이끄는 블라디미르는 손을 이리저리 앞으로 휘저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시커먼 바위, 커다란 나무를 볼때마다 적이 그 쪽에 숨어있을 것 같았다.
뒤에서는 예카테리나와 안드레이의 발소리와 인기척이 사각사각 들렸다.
'조용히 좀 따라오지!!'
저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적이 숨어있다면, 한 방에 수류탄으로 이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덧, 삼인방은 백군이 설치해두었던 이중 철조망에 도착했다.
'이 쪽에 진입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는데...'
삼인방은 철조망이 뚫린 곳을 찾기 위해서 왼쪽으로 천천히 기어갔다. 달빛에 철조망이 반짝였다. 현재 삼인방은 적군이 점거한 마을과 백군의 참호의 중간 정도 위치에 있었다.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리서 작게 보이던 백군 참호의 불빛은 이제 어느 정도 가까워져 있었다.
날씨는 제법 추웠기에 손가락만 곱은게 아니라 얼굴도 차가웠다. 안드레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뚫어놓은거 맞긴 맞는거야?'
그 때, 예카테리나가 구멍 뚫린 곳을 발견하고는 손짓했다.
'이 쪽이야!!'
지난 번 정찰을 갔던 녀석들이 조심스럽게 가위로 잘라놓은 틈으로 그 셋은 기어들어갔다. 철조망 사이 틈은 비좁았기 때문에, 철사에 스치지 않으려면 조심스럽게 기어가야 했다. 안드레이는 기어가면서 신발로 철조망을 조금 건드렸다.
철조망이 저 멀리까지 진동했다.
'!!!'
셋은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드레이가 블라디미르를 세번 쿡 쿡 쿡 찔렀다.
'이제 그만 우측으로 우회해서 돌아가자!'
하지만 블라디미르의 시선은 앞에 있는 시커먼 참호에 머물렀다.
'저..저기서 뭔가 구할 수 있을지도!'
블라디미르가 참호를 가리켰다. 안드레이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미쳤냐!! 빨리 돌아가자!!'
예카테리나는 블라디미르의 말에 동의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어!!'
안드레이는 자신의 두 친구한테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블라디미르는 조심스럽게 참호 안으로 들어갔다.
탁!
발이 흙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시발!!'
그렇게 삼인방은 참호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소총을 들고 참호 속을 정찰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팠던 것 보다 훨씬 잘 만들었잖아?'
이 참호는 그냥 일직선으로 판 것도 아니고 지그재그로 파여 있었고, 심지어 기관총을 설치해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도 있었다. 나름 모래 주머니도 쌓아두었고, 그 사이로 저격총을 거치해두었을 것 같은 총안구도 있었다.
이제 삼인방은 이 참호에 확실히 백군이 없을거라고 단정을 짓고 있었다.
"뭐 없냐?"
그 때, 예카테리나가 무언가를 주웠다.
"이..이거!"
예카테리나가 주운 것은 조준경이었다.
'좋았어! 이거만 있으면 저격할 수 있어!'
안드레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그 때, 백군 참호 쪽에서 무언가 발사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퍼엉!
그것은 초록색 조명탄이었다. 어두컴컴하던 무인지대는 순식간에 대낮처럼 환하게 되었다.
'으악!!'
삼인방은 자신도 모르게 참호 속에 허리를 숙였다.
'시발!!'
블라디미르가 속삭였다.
"조명탄 꺼지면 돌아가자!"
그렇게 셋은 참호 속에 앉아서 조명탄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밝은 조명탄은 하늘에 꼬리를 남기며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존나 안 꺼지네...'
날이 추웠기에 삼인방은 손을 비비며 빨리 조명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 때 인기척이 들렸다.
스스슥
'!!!'
안드레이는 조심스럽게 소총을 주워들었다.
'헉...허억...'
안드레이는 적이 오면 바로 그 쪽으로 소총을 발사하기 위해 참호 모서리 쪽을 겨냥했다. 그 때, 하얀 생쥐가 기어갔다.
"허억..."
'뒤지는 줄 알았네..'
삼인방은 다시 안심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저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
이번에는 누군가가 수근거리는 소리까지 분명히 들렸다.
"잘 좀 찾으라고.."
"쉿!"
참호 내부에는 백군이 수류탄과 기타 무기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파둔 작은 방이 있었다. 삼인방은 잽싸게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드레이는 겁에 질려서 오줌을 지린 채로 벌벌 떨었다.
'으...으아아!!'
이 작은 방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소총을 겨눌 수도 없었다. 만약 여기서 소총을 겨누었다가는 참호 통로로 삐죽 튀어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서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헉...허억...'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백군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배나 성냥 없나 잘 찾아봐!"
"목소리 좀 낮춰 병신새끼야!"
그 백군 녀석들은 여기저기를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 분명했다.
"야! 이거 뭐냐!!"
저벅 저벅
군화발에 깡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이제 조명탄이 꺼졌고 다시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시발 하나도 안 보이네..."
"아가리 좀 닥쳐 새꺄.."
저벅 저벅
두 백군 병사의 군화발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1년 같은 10분이 흘렀다. 블라디미르가 손짓했다.
'가자!!'
'허업!!'
예카테리나와 안드레이는 오줌을 지린 채로 그제서야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내고는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흉벽을 딛고는 천천히 참호 밖으로 차례로 기어나갔다.
'빨리 가자! 너무 늦었어!!'
순간, 하늘에 다시 초록색 조명탄이 솟아올려졌다.
타앙!
그리고 시커멓고 텅 비어있는 지그재그 참호는 환하게 비추어졌다. 그리고, 안드레이는 참호 저 멀리 가고 있는 아까 전에 지나쳤던 두 백군 병사를 보았다.
'흐..흐어억!!'
삼인방은 엎드리고는 재빨리 기어갔다.
'헉..허억...'
그 때, 저 쪽에서 갑자기 불꽃을 뿜었다.
타앙!
삼인방의 위치가 발각된 것 이었다. 총알은 블라디미르의 머리로부터 50센치 정도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쉬잇!
"뛰어!!"
블라디미르, 예카테리나, 안드레이 삼인방은 팬티에 똥오줌을 지리며 미친듯이 철조망을 뛰어넘어 앞으로 달렸다. 이젠 소총이 아니라 백군의 기관총까지 이들을 향해 불꽃을 뿜고 있었다.
드르륵 드륵 드르륵
귀청을 찢는 듯한 기관총 소리와 함께 하늘에는 붉은색 조명탄이 시커멓던 무인지대를 붉게 비추었다. 삼인방은 암호도 까먹고 미친듯이 마을을 향해 달렸다.
'으아아악!!!!'
그 때, 갑자기 느닷없이 검은 바위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아까 전부터 매복해있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던 백군이 이제야 깨어난 것 이었다. 이 백군은 맨 뒤에서 달리던 예카테리나를 향해 소총을 발사했다.
타앙!!
불꽃이 번쩍거렸지만 총알은 빗나갔다. 그 백군은 예카테리나를 향해 총검을 휘두르며 미친듯이 달려왔다. 예카테리나는 원래도 달리기가 빨랐지만 지금은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릴 정도로 미친듯이 달렸다.
'꺄악!!! 엄마!!!!!!!!!!!!!!!'
그 뒤따라오던 백군은 예카테리나에게 총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순간, 뒤따라오던 백군은 미끄러운 진흙을 밟고는 자빠졌다.
우당탕!!
"으악!!"
예카테리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서가는 친구들을 따라 미친듯이 달렸다. 안드레이가 외쳤다.
"암호!! 이스크라(불꽃)!!! 이스크라!!!"
셋은 미친듯이 달려서 마을 앞에 있는 참호 속으로 몸을 던졌다.
퍽! 퍼억! 퍽!!
니콜라이가 외쳤다.
"고개 숙여!!"
백군의 기관총이 이 쪽을 향해 번쩍거렸다.
드륵 드르륵 드륵
이제 백군 녀석들은 총류탄까지 발사했다.
펑!! 콰광!!
펑!! 쿠궁!!
블라디미르는 아까 전에 챙겨온 자신의 소총과 조준경을 들고는 똥오줌을 지리며 완전히 굳어 버렸다.
'으헉...으헉...'
삼인방은 똥오줌을 지린 채로는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이가 이들에게 말했다.
"수고했네. 좀 쉬고 있게."
블라디미르는 조준경을 소총에 장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어 있었다. 삼인방은 모두 똑같은걸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야 해!'
'오지 말았어야 했어!'
'엄마!!'
블라디미르는 친구들과 함께 조만간 탈영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젠 집에서 아버지가 비웃던 말던 그건 알바 아니었다.
'다음에 경계 설때 몰래 튀자..'
예카테리나가 아직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 목 말라!"
삼인방은 우물에 물을 뜨러 마구간 밖으로 나갔다. 보리스가 적군을 모아두고 자신의 소총을 흔들며 외쳤다.
"최근에 비겁한 녀석이 탈영했다! 만약 탈영하다가 걸리는 새끼가 있으면!!"
보리스는 하늘을 향해 소총을 쏘았다.
타앙!
"내가 직접 그 새끼를 사살하겠다!!"
다른 적군들이 술렁거렸다.
"비겁한 놈 같으니라고!!"
"변절자는 가만 안 둔다!!"
"그런 놈들은 모두 찢어 죽여야 한다!!"
삼인방은 겁에 질린 상태로 이들을 지나쳐 우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한 6살 정도 되는 소녀가 혼자 우물 물을 떠서 마시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 소녀에게 인사했다.
"안녕?"
그 소녀는 예카테리나가 말을 걸자 두레박을 땅에 던지고 달아났다. 블라디미르가 중얼거렸다.
"뭐지?"
안드레이가 말했다.
"우리가 무서운거겠지.."
예카테리나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혁명, 사회주의, 레닌주의를 전혀 모를테니까...그들도 공부를 한다면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텐데.."
셋은 마구간으로 돌아갔고, 블라디미르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우리, 돌아가자."
안드레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돌아가야한다는걸 이제 알았냐 멍청한 새끼야!!'
예카테리나가 고민하다가 말했다.
"하..하지만 저 사람들은 우리 도움이 필요해. 변절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쉬이!!! 조용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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