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절대군주의 혜안(慧眼) (2)
"후우..."
천천히 심호흡을 반복했다.
곤룡포의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며 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경황없던 즉위식 와중에 내가 켜버린 것.
인터페이스 창은 반대로 끌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정보의 과포화상태가 계속된다면 틈틈히 꺼가며 피로를 보충하기로 했다.
궁극적인 치트키였기에 부작용은 당연한 것.
그렇지만 내 신경을 괴롭히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
'침착하자.. 침착해.'
쌀쌀한 밤 바람이 주변을 돌았다.
고요한 가을밤의 한성에는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다.
다만 이곳의 고도가 너무 높은 탓이다.
인왕산 중턱까지 올라온 드높은 황궁은 그 높이만큼이나 입면적 역시 거대했다.
그 자체로 북악산에서 시작되는 한성의 자연적인 바람길을 파괴하는 수준이다.
정원 좌우, 외벽을 따라 세워진 거대한 대리석 방풍벽이 정원을 둥글게 감싼 형태로 설계되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한제국 황제로써, 황궁의 처소에서 첫 밤을 보내기로 전에 마지막 한 가지 실험을 더 하기로 했다.
즉위식 도중에 해보지 못했던 것.
왼쪽 아래의 동그란 미니맵을 주시했다.
중앙의 황궁과 아래로 뻗은 세종대로.
한성 최중심부 일대 안으로 중앙에 붉은색 화살표가 선명하게 보인다.
분명 내 위치정보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걸 다시 천천히 누르면...'
우선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기에 분수대 중앙의 넓은 산책로로 자리를 옮겼다.
그날, 태양제와 대면하며 선위를 논했던 바로 그곳이다.
천천히 손을 들어 미니맵 한켠을 눌렀다.
멀리서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곳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기이한 광경.
다시 눈앞에 문구가 나타났다.
[3인칭 플레이 시점으로 변경하시겠습니까?]
[YES / NO]
나는 더 망설임 없이 [YES]를 눌렀다.
* * *
근위대장은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 막 즉위한 제국의 새로운 황제는 대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호위하는 내내 정원에서 허공을 가르키며 혼잣말을 이어나가는 모습.
분명 일개 무인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대한 책임감일 것이다.
꾸준히 발생하는 반제국주의자들의 테러.
근위대를 이끄는 그의 책임 역시 적지 않다.
정원 중앙으로 향하던 황제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침소로 들어간 황제가 대기중이던 숙직상궁에게 딱딱한 말투로 명령을 내린다.
"피곤하구나. 내 처소에 들 것이다."
"예. 폐하. 황명을 받드옵니다."
말없이 걸어들어가는 황제와 멀찍이 떨어져 뒤따르는 근위대.
황실 근위대장은 방금 전과 비교해 조금은 달라진 황제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이내 호위에 전념했다.
* * *
처음 나를 놀라게 했던 청명한 음성.
시스템알림음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고유스킬 : 천상의 눈이 시전됩니다]
(현재단계 : 1단계)
- 사용자 : 대한제국 융희황제
- 3인칭 시점으로 변경합니다.
- 패널티로 사용시간이 제한됩니다.
- 유지가능시간 1분/재사용시간 6시간
'고작 1분밖에 안된다고?'
얼마나 대단하기에 미리보기 같은 짧은 시간만 허락된 기능인지 내심 궁금해졌다.
의문이 미처 가시기도 전.
갑자기 환한 빛이 내 몸을 감싼다.
빛의 발판위에 올라선 내가 순식간에 하늘로 떠오른다.
'으아악..!! 뭐, 뭐야! 이게!'
비명이 절로 나왔으나 입 안에서 머물 뿐.
어두운 한성의 밤하늘 위로 쏜살같이 솟구친 몸뚱이가 멈출 줄 몰랐다.
거대한 황궁의 정원에서 전등 불빛이 촘촘히 빛나는 한성의 상공, 더 지나서는 선명한 빛의 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들로 곳곳이 메워진 한반도까지.
어디까지 도달하는지 궁금해질 무렵에야 미칠듯한 상승이 멈췄다.
이내 도달한 것은 광대한 심연.
찰나의 순간에, 나는 우주를 유영하며 푸른빛 행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행성의 땅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목구멍 가득 억눌려있던 환희의 탄식이 터져나온다.
"허..."
마치 푸른색 방어막에 보호를 받는 것처럼.
대한제국의 강역이 선명히 표시된 지구.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오른쪽을 통째로 집어삼킨 푸른 빛의 영역은 삐죽빼죽한 정교한 선을 그리고 있다.
대륙에서 시작된 선은 동남아와 태평양의 광활한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도 모를 수 없는 광경.
『제국의 운명』 초기화면이자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가장 먼 시야의 화면이었다.
시야 주변을 감싼 인터페이스 사이로, 가장 친숙한 화면이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천상의 눈/1단계 적용중]
행성 위쪽으로 떠오른 조그만 글씨.
'1단계라는 건.. 그 윗 단계가 더 있다는 걸까?'
거대한 땅 사이사이를 얇은 선으로 나뉘어진 칸들이 보였다. 대한제국의 식민지와 그 행정경계들이다.
주요 도시들과 함대급 이상의 군 병력들이 제국의 거대한 영토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영토 너머는 짙은 어둠이 덮여있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색 마커들은 잠재적인 적국의 병력과 물자가 이동하는 것일 터.
아군의 정찰유닛들과 스파이, 외교관들이 수집한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그곳에 위치를 반영시키는 중인 것이다.
버마를 향해 천천히 이동중인 대한제국 어전함대와 기함의 표식.
상황제 역시 나 못지않은 특수유닛이었기에 별도의 표시가 된 채 지나식민지를 천천히 순항중이었다.
비록 용상을 내어놓은 이전 시대의 폭군이었지만 다가올 전쟁에서 톡톡히 수행해야 할 역할이 많았다.
대한제국 내지(內地), 한반도는 거의 모든 땅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왜국과 지나, 비율빈과 시백력의 식민지들은 훨씬 어둡고, 약한 불빛을 밝힐 뿐이었다.
대한제국의 경제는 식민지로부터 비롯된다.
결국 제국주의란 그런것이니까.
피와 강철의 시대에서, 그것은 흠이 아니었다.
만일 대한이 모든 것을 취하지 않았다고 해도 모든 세계가 평화로울 순 없다.
'다만 대한이 수탈을 당했을 뿐.'
상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1분의 시간은 순식간에 스쳐갔다.
[천상의 눈이 종료됩니다.]
바닥이 쑥 꺼지는 느낌.
하늘로 치솟던 것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나는 한성의 황궁을 향해 끝없이 내리꽂혔다.
"으.. 으아악!"
하나의 조그만 점에 불과하던 한성이 순식간에 확대되고, 뾰족하게 치솟은 황궁의 금빛 기와 끝자락에 순식간에 꿰뚫릴 듯 커졌다.
번쩍...!
황궁에서 가장 내밀한 황제의 처소.
금빛과 적색으로 어우러진 사치스러운 침대 위에 누워있던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 * *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사용대기시간.
[재사용시간 5시간 58분 45초]
조금씩 줄어드는 시간이 선명했다.
짧은 우주유영에서 느낀 소름 탓일까.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느껴졌다.
"허억!..."
침실 끝자락, 문 근처에서 대기하던 숙직상궁과 궁인 몇이 서둘러 달려온다.
따뜻한 온기가 서린 수건으로 땀을 닦는 그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이곳에 머물던 전주인 역시 비슷한 악몽을 여러차례 꾸었던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마무리 지은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물러갔다.
사기 그 자체인 능력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다.
1분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분명 패널티라는 언급이 있었으니 무언가를 키운다면 늘려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우선은 시간을 늘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1분의 제한시간은 처음 보는 종류의 시스템이었다.
어디에 물어볼 곳도, 검색으로 찾아볼 인터넷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이기에 유일하게 믿고 기댈것은 내 머리 뿐이었다.
'이 세계에 맞춰 시스템이 패치된 건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걸리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정원 한 가운데에 서있던 기억.
세상저편까지 떠오른 사이, 그의 육체는 이곳 침실로 이동해 있었다.
마지막 테스트 후 자러 가기로 생각했던 스스로를 떠올리자 답은 금방 나왔다.
'확실해, NPC모드가 적용된 거다.
직접 통제하지 않는 유닛은 그 위치와 의도에 맞춰 자율적으로 행동한다..!'
사기적인 능력만큼이나, 이것은 양날의 검처럼 쓰일 수 있었다.
친정을 나가 전장의 중심에 있던 황제가 돌발행동을 한다면, 최악의 경우 그의 정신은 돌아올 육신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방금 전, 내가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던가.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다가올 거대한 세계대전에서 나와 대한제국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된 첫번째 밤이 그렇게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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