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도(帝都) 한성 (2)
"치직.. 이번 정차지점은 재무성 한성본청.. 재무성 한성본청 정문입니다."
기계음 가득한 안내 문구.
차창의 굵은 목소리가 기계음에 섞여 객실에 방송되었다.
덜컹거리는 객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길다란 나무 의자에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중 몇 이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하늘이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는 아직도 그칠 줄 몰랐다.
쏟아지는 비 뒤로 찌를듯이 솟은 건물들이 칸칸마다 불을 가득 밝힌 채였다.
전시가 아니었기에 한성의 통금은 전쟁성 산하의 핵심 군사시설 서너곳과 제국핵심시설 몇 군데에서만 제한적으로 시행중이었다.
곧 한성 전역으로 확대될것이 뻔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비 때문일까.
평소 미끈한 유선형의 자동차들로 잔뜩 막혀 있을 세종대로는 넓디넓은 대로의 반대편 끝을 오가는 노면전차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휑하니 비어있었다.
기백은 족히 되던 인력거꾼들도 찰박거리며 뛰어다니는 서넛이 고작이었다.
한성 노면전차 세종선은 일각에 한 대씩 규칙적으로 정차하며 세종대로를 순환했다.
제국의 가장 중요한 거리를 통과하는 만큼 가급적 신형 차량으로 꾸준히 교체되어왔다.
물론 탑승객들의 신분 역시 한성 내 다른 어떠한 지역의 노면전차 승객들보다 높을 것이다.
'그래도 비오는날 이 퀴퀴한 냄새는.. 도무지 적응이 안된단 말이야.'
객실 천장에 설치된 좁은 환풍구는 최선을 다하고 있건만 지극히 역부족이었다.
말끔한 한성복 차림의 남자는 옆옆자리의 백동 단죽(短竹)에서 피어나오는 연기에 이내 눈을 찌푸렸다.
'거기에 단죽까지.. 정말 환상이구만.'
고급스러운 비단조끼를 덧대 입은 배가 불룩한 신사는 애연가인 모양이었다.
정장에 매달린 회중시계며 작은 알의 안경을 코끝에 걸친 행색까지, 영락없는 애국사업가의 모습.
십여년간 제국이 전쟁을 치뤄오며 폭발적으로 늘어난 군수품 수요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것이었다.
조선 내수사의 자금을 근간으로 제위 초기에 황제는 제국방위사업공사, 그러니까 뭐든 줄여부르기 좋아하는 한성시민들이 애칭하는 제방공을 설립했다.
제방공은 대한제국이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주도하며 정복전을 치뤄 온 지난 수십년간 국제적인 규모의 거대한 군수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방공이 전쟁에 필요한 모든 병기와 군수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내 수백, 수천의 소규모 공장들이 한성 외곽과 경기권역에 들어섰다.
공장들의 생산품은 제국방공전함에 들어가는 작은 조립형 침대부터 러시아총독부를 주 고객으로 납품하는 방한용품까지 수백 수천가지에 달했고 이내 공장의 수만큼 부유한 자본가들을 만들었다.
그들이 소위 '애국사업가'들이었다. 그리고 애국사업가들은 대게 무례하기 그지없는 편이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과로라도 하고 퇴근하는 것인지 꾸벅대며 졸던 어린 소년이 사이에 끼어 앉아있던 탓에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침없이 담배를 피워 댄 까닭일터. 비만 오지 않았더라면 참고 지나갈 일이었다.
덜컹거리던 진동이 잦아들자 인도에 접한 4개의 쇠문이 이내 덜커덕거리며 열렸다.
남자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업가에게 한마디 건넸다.
"전차에서 단죽은 금지요. 한성전차화재, 당신도 호외로 보지 않았소?
교통성에서 고시하고 법이 고쳐진지가 내 기억에.. 아마도.. 한 3년은 족히 더 된걸로 아오만?"
"뭐야? 어디 새파란 놈이..!"
기름기가 흐르던 사업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놀라 꾸벅거리며 졸던 소년이 깨어나 이내 움츠러들었다.
사업가는 곰방대를 휘두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한성에서 힘 좀 쓴다는 작자들은 다 이런식이었다.
남자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마침 도착했으니 같이 내리는건 어떻겠소?
세무범죄조사국이 우리 바로 아래, 35층이오."
"...!"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던 사업가가 경직이라도 일어난 듯 멈췄다. 이제야 남자의 한성복 옷깃에 달린 작은 뱃지를 본 것이다.
네모난 구멍이 뚫린 동그란 원, 전조 조선의 상평통보를 둘러싼 오얏꽃, 거기에 교차하는 만년필 문양까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
재무성 제국재정총괄기획국 문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경범죄 징수는 한성특무경 관할이오만, 우리 쪽에서 어거지를 쓰면 못할 것도 없지. 그리고 당신 꼴을 보아하니 좀 더 털면 세무범죄조사국에서 좋아할 것들도 많이 나올 것 같소."
분수도 모르고 벌떡 일어났던 사업가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곧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사업한다는 작자가 이렇게나 눈치가 없어서야. 전쟁성 군수조달국의 깐깐하기 그지없다는 공개 입찰을 대체 어떻게 뚫었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멈춘 전차가 당최 출발을 안하는군.
고개를 돌려보니 앞칸 끝에 앉은 차장이 차일경 너머로 눈치를 보는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퀴퀴한 객실냄새와 섞여있던 기분나쁜 담배냄새도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찬 공기에 어느새 사라져 버린 이유도 있었다.
남자는 철문으로 걸어나가며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거기 국장이 내 동기인데, 요즘 실적이 영 신통치 않아서 말이오."
"쯧..!"
"미.. 미안하오. 내 경황이 없었소!"
이내 몇 걸음 뒤쫒아와 사과하는 사업가를 뒤로하고, 제재총국의 사내는 전차에서 내렸다.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지붕을 만들어둔 정차지점의 정류장에 선 남자가 잠시 고개를 들어 세종대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솟은 건물의 숲.
그야말로 마천루의 장벽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용의 황궁은 세종대로가 시작하는 지점의 좌측에 하늘을 찢을 기세로 솟구쳐 금빛을 뿜어냈다.
그 오른쪽에 제도 한성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 솟아있었다. 그 높은 건물에 단 하나도 불이 꺼진 방이 없었다. 한성에서 어쩌면 지금 가장 정신이 없는 곳일 것이다.
남자는 건물 최상단의 흐릿하게 보이는 꼭대기층을 노려보았다.
문득 누군가가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기에 비하면.. 재무성이야.. 뭐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말단 공무원이지.'
씁쓸하게 미소 지은 남자가 기름먹힌 한지에 도금한 상아손잡이가 달린 지우산을 펴고 본청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기서 밤낮없이 일하던 형님께선 잘 계시려나 모르겠군.'
일찍이 군문에 들어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형님이었다. 인도양 작전을 준비하며 과로에 과로를 하던 중 쓰러졌다는 소식에 놀랐던 것이 얼마 전이다. 깨어났다는 희소식에도 도통 짬이 나질 않아 찾아가질 못했다.
길 건너편에 있을 뿐인데도, 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피식 웃었다.
'쓰러진지 3일만에 벌떡 일어나 헛소리를 하셨다던데, 당최 상상이 안가는군.'
잡생각에 걷다보니 어느새 쏟아지는 비를 뚫고 앞에 서있던 특무경사가 귀빈용 대형 지우산을 펼쳐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한제국 재무성
최연소 제국재정총괄기획국 국장.
마른체구의 사내,
황위계승서열 5위의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이강이 눈을 빛내며 재무성 건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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