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도(帝都) 한성 (1)
삭막한 도시에 내리는 차가운 가을비.
금테가 둘러진 유리창을 빗줄기가 세차게 두들겼다.
석조와 콘크리트로 빼곡히 채워진 도시.
제국 행정, 교통, 군사의 중심지인 한성.
뾰족히 솟아오른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동시백력에서 벌어진 한러전쟁도, 동남방의 비율빈(필리핀)과 버마(미얀마) 식민지에서 거둬들이는 막대한 물자들도 모두 이곳의 영화를 위해 쓰여졌다.
자욱한 운무가 낀 거리거리를 회색빛 비가 질척하니 적시었다.
한성 남부의 중추공업지역에서 뿜어낸 연기가 근 십여년간 제국의 하늘을 조금씩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흘흘흘... 참으로 장관이로구나."
제국 전쟁성 본청의 최상층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대로 위에는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인력거꾼들이 미끄러운 빗길을 잽싸게 내달리고 있었다.
"태자전하께서 깨어나셨다 하였느냐."
형형한 안광 뿜어내는 노인이 조용히 물었다.
한손에 들고 있던 잔에 들어있던 커피가 찰랑였다.
흑색 한성복 정장차림이 잘 어울리는 그는 챙이 좁은 전립을 쓰고 있었다.
"예. 오늘 아침, 근 보름만에 깊은 오수(午睡)에서 깨어나셨다 하옵니다."
"다행이로구나."
얇은 금테가 둘러진 고급스러운 도자기 잔.
금색 오얏꽃이 정교하게 새겨져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제국의 인니(인도네시아)총독부에서 공공기관 진상품으로 특별히 공급한 최상급의 커피원두였다.
'향이 좋군.'
황제가 친정을 떠난 직전, 연이은 전쟁준비로 과로에 시달리던 황태자가 정신을 잃은 것은 행정부 고위관료들 사이에선 이미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가 어찌나 높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었는지 바라보던 넓찍한 길 건너편의 재무성 건물은 그의 발 아래에도 한참 못미치는 높이였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스모그 회색비로도 감히 그 위용과 빛을 가릴수 없는 드높은 황궁이 있는 곳이다.
황궁 뒤편 북악산 중턱에 늘 주둔중이던 근위함대의 어른어른한 실루엣이 오늘따라 텅 비어 허전해보였다. 틀림없었다. 최소한의 지상경비대를 남기고 모두 끌고 나간 것이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이제 없으실텐데.'
물론 이유는 확고한 승리를 위함일 것이다. 그 간사한 영길리. 아니 자칭 대영제국의 인도양 함대는 우리의 해군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도 황제가 근위함대를 모조리 끌고나와 전략 예비대로 쓸거라고는 아마도 감히 예측하진 못할 것이다.
황제가 제국대학에서 연설대를 내리치며 뱉은 문장은 대한제국의 주권의식을 지닌 모든 신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아주는 마땅히 대한의 것이다. 아주의 한 귀퉁이에서 제 탐욕을 취하는 모든 자들은 우리의 땅에서 떠나라."
주어는 없었지만 '탐욕을 취하는 모든 자'들이 서구의 다른 두 열강국을 의미한다는것을 모르는 자들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본격적인 전쟁의 시기가 도래했다고는 양국의 정치인과 국민, 언론을 포함한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대영제국과 본격적인 이권다툼이 시작된지 3년도 채 되지 않았고 대한제국은 아직까지 동남방에 신설한 총독부의 안정화가 끝나지 않았다.
"참.. 그녀석도 극성이시구만."
상념에 잠겨있던 차에 문득 머리속에서 밖으로 내뱉어버린 말이었다.
흠칫 놀란 노인이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고 실내를 훑었다.
이내 살짝 흔들린 잔을 고쳐잡아 따뜻한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 * *
제국의 수도인 제도 한성의 중심부에는 북에서 남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광활한 도로가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확장과 포장공사 끝에 왕복 20차선의 이 도로가 탄생했다.
대로는 육조거리의 모든 관청과 정부부처의 담장과 대문, 앞뜰까지 가볍게 집어삼켰다. 공사기간만 삼년이 족히 걸려 완성된 것이다.
대한제국이 근대화에 기수가 된지 수년이 흐르자, 제국의 공업생산력은 날로 확대되어 토목, 건설자재의 수급이 서서히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충청동도 단양에 설립한 제국 시멘트공사의 생산력이 유라시아대륙 전체에서 가장 높은 생산력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 쯤이었다.
지표를 점검하던 황제는 문득 지금이 자신이 꿈꿔왔던 한성의 개벽을 시작할 때임을 확신했다.
재위 7년차부터 시작된 이 공사는 왜 이렇게까지 한성의 중앙에 거대한 길을 지어야 하는지, 또 왜 이름을 반드시 '세종대로'로 지으라는 지엄하신 황명까지 내려야만 했는지 온통 이해할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황제의 업무 방식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보통은 유능한 자를 찾아 마땅한 자리에 앉히고 모든 업무를 일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황..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이 미천한 자를 이렇게 눈여겨 주시다니요. 교통성대신 어윤중! 전하의 믿음에 기필코 보답하겠나이다!! 황제폐하 만만세! 대한제국 만만세!"
이 경우에 그 대상자는 보통 입조하여 한 부서를 관리하는 중책을 맡곤 했는데, 황제의 제위 전과 비교해 넉넉해진 식민지 경제를 바탕으로 확보한 안정적인 조정의 세수를 통해 황제는 녹봉이라는 당근을 먼저 제시했다.
수십배가 오른 녹봉과 고위공직자의 혜택에 감동하는것은 잠시 뿐.
곧이어 쏟아지는 살인적인 업무량과 꼼꼼한 성과, 실적 보고에 치여 순식간에 집에 갈 수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안들에 관해 황제는 집요할 만큼 세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세종대로의 확장공사는 그 결정판이었다. 최초 기획단계에서부터 끝없이 설계수정과 추가적인 요구사항을 뽑아내던 황제는 결국 비극적이게도 열띤 회의중이던 교통성 기획토목국의 대회의실에까지 불쑥 나타나고야 말았다.
그날 교통성의 모든 공무원들은 현세에 열린 지옥을 맛보았다.
"허.. 허억! 황.. 황제폐하! "
"•••."
"충무공 입상을 도로 가운데에 설치하라.. 는 말씀이십니까?"
그중 압권은 대로위에 우뚝 선 충무공의 동상이었다. 발과 발 사이에 왕복 8차선 도로가 지날 수 있도록 하며 동상의 크기는 대한의 위세가 결코 왜소해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상세한 황명이 뒤따랐다. 물론 동상은 3년간의 세종대로 건설기간 동안 최종, 최후의 난공사로 끝까지 공사책임자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충무공의 동상은 한성의 랜드마크로 모든 방문객을 짓누르는 힘과 위엄을 뿜어냈다. 묵직한 조선환도를 뽑아 남쪽으로 겨눈 충무공의 동상은 마치 황제의 거처를 보호하는 수호신처럼 보였다.
"이제야 좀 제국의 수도 같구나. 그렇지 않은가?"
세종대로 개통일은 대한제국 선포일로 정해졌다.
광활한 도로로 제국 육군 정병들의 군기서린 총칼이 오와 열을 맞춰 이동했다.
뒤이어 육중한 지상함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다.
광화문 앞 초대형 연단의 상석에서 경례를 받던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얇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내 세종대로 양옆에 거대한 공공기관 청사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로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교통성 기획토목국의 전직원은 집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태양제 고종 이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