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함대의 선두에서 대열을 이루던 중폭격함.
한척당 네곳의 폭탄창이 느리게 열린다.
손가락을 들어올린 황제가 무심히 아래를 겨누었다.
"전량, 투하하라."
대한이 만들어낸 첫번째 부양함대.
고작 세척의 중폭격함을 만들기 위해 갓 태어난 제국의 모든 공업력을 쥐어 짜냈다.
굶주린 제국의 백성을 구휼하고 돌보기 앞서 강철병기를 만들어내는데 열중한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그것이 한낱 문제인가.
이국의 무주지에서 몰래 파낸 깨운 악마의 심장을 달고, 구름위를 헤짓는 괴수는 아무도 막지 못했다.
함대가 쓰시마를 거쳐 기타쿠슈에서 동경으로 향했던 오일 동안, 사백만이 넘는 일본제국의 신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구구궁... 쿠구구구궁.."
어두운 새벽 하늘, 구름 아래로 검붉은 빛과 무거운 충격파들이 끝없이 터져나왔다.
젊디 젊은 황제의 무표정한 얼굴을 뒤로하고, 좌에 늘어선 노대신들과 장군들은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아무말도 감히 하지 못한다.
이곳에 도달하기 전, 동경을 목전에 둔 마지막 밤에 메이지 내각은 대한제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동경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함대.
그것을 막기 위한 대일본국의 항복 선언이 여러 경로로 기함을 향해 전달되었다.
그것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황제는 정확히 동경의 황거, 교쿄위에 함대를 정지시켰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명령이 내려졌다.
마지막 이벤트를 위해 남겨둔 전량의 폭탄이 일왕 덴노의 거처위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쏟아졌다.
다음날 아침, 대한제국 원정함대는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
회색 지대가 되어버린 폐허의 고쿄 위로 그 잔해를 부수고 으깨며 내려앉았다.
분명 폐허 어딘가에는 한때 1억명의 신민들에게 존경을 받던 왕이 화장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날이 일본제국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그렇게 피 위에 세워졌다.
* * *
[프롤로그]
황제는 무료하다는 듯 하품하며 반대쪽으로 다리를 꼬았다.
가끔 떨리는 진동이 금빛 어좌의 팔걸이를 통해 느껴졌다.
거대한 제국의 수장인 그는 제도 한성의 안락한 황궁만큼이나 전장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곳을 좋아했다.
중앙에 펼쳐진 거대한 작전도를 중심으로, 몇명의 장성들이 긴 막대기를 들어 아군과 적군의 표식을 이리저리 옮기는 중이었다.
그 뒤편으로 선임 정보무관들이 능숙한 움직임으로 압력계통과 무장을 점검했다.
제국 해군정복을 입은 지긋한 나이의 황제가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제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흰머리가 잘 정돈해 단정하게 위로 올려졌다.
기함의 지휘실, 가장 높은 상석에 앉은 그의 머리 뒤로 거대한 꽃모양 장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의 상징이자 대한제국군의 어기인 오얏꽃.
정가운데 암술머리를 15개 수꽃술이 감싸고, 그 바깥에 다섯개의 꽃잎이 자리한다.
오대양을 의미하는 다섯개의 꽃잎은 암술머리인 대한으로부터 아주를 넘어 열방으로 뻗어가는 기세를 의미했다.
'세상의 반은 이 꽃을 칭송하고 나머지 반은 두려워하지.'
황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또 한번의 친정.
어쩌면 이번이 그의 마지막 친정이 될지도 몰랐다.
서방에서 피에 굶주린 전귀(戰鬼)로 불린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한러전쟁 이후 아직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고, 제국의 신민들이 전쟁보다는 안정을 원한다는 사실 또한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우리 대한의 편이 아니니.'
겉으로 보이는 강대한 국력과 정병들.
그러나 속은 아직도 미진하기 그지없다.
한러전쟁에서 대한이 거둔 압승은 대한의 양쪽을 막아선 두 거인들의 눈초리에 경계와 의심, 적대감을 가득히 심어주었다.
수 년간 고민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전통적인 서구 백인국가들 사이에서 대한이 살아남는 것은 먼저 공격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또한 더더욱 망설이면 안될 일이었다.
영민한 태자에게 물려줘야 할 제국에 그들을 위협할 적들이 있어선 안되었기에.
황제는 그렇게 근위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폐하. 이제 곧 맹가랍국(방글라데시)의 영공에 진입합니다. "
절도있게 기립한 전쟁성대신 유지량 대원수가 보고를 올렸다.
순백의 제국해군 군복위에 수놓아진 금실, 대원수를 상징하는 황금색 오얏꽃 다섯송이가 어깨에서 어른거리며 빛났다.
그는 대한제국 제1근위함대장을 역임하는 황제의 최측근이자 군부의 수족과 같은 인물로, 이번 정벌의 원정지휘관으로 선택을 받아 황제의 검 끝에 또한번 서게 된 것이다.
지난 이십여년 간 유지량은 땅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황제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왔다.
"으음... 그 개자식들은 아직 못찾았나?"
"현재까지 정찰함을 정북면 광각으로 투사하여 전력으로 수색중입니다. 중첩된 첩보에 따라 다방면으로 찾는 중이니 두시진 내로는 적의 전위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원수는 보고를 올렸고, 황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것은 전적인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더 부강하고 강대한 국가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미칠듯 질주해온 그간의 세월동안, 그 주변에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절대복종했고, 저항하거나 그를 의심하는 간사한 자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캄차카 반도에서 파낸 '반저항기관'과 그것에서 비롯된 '이중압축-반저항이론'은 아주의 동쪽 하늘 전역을 대한의 마땅한 영토로 만드는 힘이 되었다.
버마해의 초입에 다다른 근위함대의 기함.
만재배수량 5만톤을 훌쩍 넘는 충무공급 제공전함이 층층이 쌓인 구름층 사이로 슬며시 파고들었다.
황태자를 포함한 전쟁성의 수뇌부들이 수립한 제공압도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괴물.
끝없는 예산을 빨아먹은 결과물이 다시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사십척의 함대에 둘러쌓인 기함이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조용히 나아갔다.
우우우웅....
모든 조명을 끈 채로 무선침묵을 유지하는 함대가 미끄러지듯 공중을 유영했다.
대한제국이 벌이는 마지막 도박이 곧 시작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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