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국 설계자 (1)
제도 한성, 황궁 근정전.
그곳은 단지 거대하다는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십여층의 건물을 세우더라도 천장에 닿지 못할 층고.
아득히 높은 천장에는 뒤엉킨 거대한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용의 주변을 따라 형형색색의 단청과 금장식이 이어졌다.
고종황제는 이 건물을 지으며 전조 조선의 근정전을 계승하라는 황명을 내렸다.
그렇기에 실내구조의 큰 틀과 장식의 형태, 설계이념을 전조의 그것에서 이어받았다.
그러나 크기는 수십배는 더 거대해졌고, 제국의 국력만큼이나 웅장해졌다.
그 옛날 근정전의 올곧게 높이 선 평주기둥을 도색한 적색안료를 흉내 내듯이, 이곳에 세워진 기둥들 역시 붉은 색이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비율빈(필리핀)의 적색 대리석을 통째로 깎아낸 기둥이었다.
크기 역시 성인 남성 서너명이 팔을 벌려 감싸도 서로의 팔이 닿지 않았다.
마치 피칠갑을 한것같은 붉은색.
제국이 그동안 빨아들인 군인들의 피처럼 선혈색이었다.
이곳의 원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이 위대한 제국은 셀 수 없이 많은 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음을.
그렇기에 질주해야 했다.
멈춰서는 순간 거대한 무게에 깔린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질지도 몰랐다.
* * *
"...따라서 이번 분기의 제국표준환율은 식민지 안정화 정책기조에 따라 현상태를 계속 유지하겠으며 시장의 흐름을 면밀히 주시할 것입니다."
재무성의 어전회의 보고.
재무대신 김자운 공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정례보고를 마무리했다.
대한제국의 국정 전반에 관한 보고가 이루어지는 곳인 만큼 이곳의 참석자들은 쉴새없이 내용을 보고하고 또 다른 부처의 보고를 요약해 정리하기에 바빴다.
재무대신의 보고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이척은 이곳의 강평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주 사치스럽게 꾸민 킨텍스 전시장 같이 생겼군..'
'정말 제대로 돈지랄을 했네.. 이러니 황궁 최종테크를 올리려면 그렇게나 예산이 많이 들었지.'
그의 푸념섞인 비웃음과 달리, 이 공간에 둘러 앉아 모여있는 자들은 이 제국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위인들이었다.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또 발언권이 있는 것은 각 군의 대원수급 장성들, 제국행정부 각 성의 수장급 인물들과 본토에 잠시 들어온 식민지 직례총독, 그리고 소수의 최고위급 관료들 뿐이었다.
"시백력총독부에서 제국교통성에 우선요청한 시백력횡단철도 십삼공구 건설예산이 다음 분기로 지연되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우선 지나 서남총독부와 버마총독부 간 도로확장공사가 우선되어야.. "
교통대신의 보고와 함께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대한제국 황태자라는 자리는 그다지 편한 직업이 아니었다.
특히나 황제의 부재 중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황제는 매주 회의를 직접 주관했다.
그 뿐 아니라 고위직 관료들의 임명, 군의 이동과 배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보고와 수정 등 한없이 산적한 업무가 뒤따랐다.
뒤따르는 수없이 많은 업무들은 황제가 친정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모두 황태자, 이척의 차지였다.
그러나 그 역시 평생을 제왕학에 바쳐온 황태자.
황제가 친정을 나갔던 지난 십수년간, 그가 미성년자였을때부터 이런 어전회의는 늘 그의 몫이었다.
안건을 능숙하게 처리하고, 때로는 미흡한 부분을 냉철하게 지적하면서 황태자 이척은 머릿속으로 회의참석자들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인도양에서의 함정을 피한 것으로 대한제국은 거대한 분기점을 넘은 것이다.'
어제의 목욕을 마친 후, 지금껏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밤새 긴 고민을 마친 이척이었다.
'내가 패배한 이유는 단지 자만했기 때문만은 아니야.'
단순히 영국과 미국의 최상위 랭커들이 기습적으로 밀약을 맺고, 또 함정을 팠다고 해서 그렇게 손쉽게 멸망할 만한 제국은 아니었다.
당시 인도양 해전 직전, 그가 플레이하던 도중에도 제국의 문제는 곳곳에 산적해 있었다.
제국은 결코 외부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 제국의 운명 』에서 아무리 뛰어난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모든 문제를 완벽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이 게임은 너무나 방대했고, 또 세부적이었다.
"전하. 어전회의 정례보고를 이것으로 결착지어 주셔도 감히 문제가 없을 줄로 아뢰옵니다."
황무대신 윤지창 후작이 이척의 오른쪽, 보조의장대에 서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그의 상념을 일깨웠다.
황제의 황명과 황실의 모든 대소사를 처리하는 황무성은 그와 가장 가까운 기관이었다.
윤지창 후작 역시 이척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그와 함께해온 각별한 사이.
안건들을 가벼이 넘기며 상념에 빠져있던 그가 의자의 팔손잡이를 잡으며 등을 곧추세웠다.
"그리 하라."
이어져 예정되어 있던 것은 제국영토방어 상임회의.
각군 수뇌부가 참석하는 가장 높은 군사지휘체였다.
이척은 회의를 반각 미루고 잠시 생각에 집중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모든 걸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제국에서 단 한 명만이 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아직 그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흐름을 서서히 돌릴 수는 있다. 마치 인도양처럼.'
가장 큰 변수는 황제.
그가 보낸 비익조라는 전설의 새가 정말로 세계의 흐름을 바꿔 놓는데 성공했다면, 황제는 지금쯤 그의 정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진 채 한성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그의 기억 저편, 대한제국 황제의 충실한 오른팔이었던 황태자 이척은 결코 그런 오만한 행동을 저지를만한 위인이 되지 못했다.
물론 원래의 이척이었다면 그가 황제에게 보냈던 북경 공성전의 숨겨진 비사에 대해 결코 알아낼 수도, 알아낼 의지도 없는 것은 분명했다.
이척은 문득 그가 처음 이곳에서 눈을 뜨고, 이 세계가 자신이 패배했던 그 세계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생각하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애초에 지금 이순신함에 타고 있는 대한제국의 주인, 황제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 제국의 운명 』 속 황제는 분명 그였다.
그렇다면 그가 플레이했던 세상으로 들어온다면, 마땅히 깃들어야 했을 몸은 지금의 몸이 아닌 것이다.
'나는 사실 황태자 이척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깨어났어야 한 것이 아닌가?'
단언컨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가 플레이 했던 게임 속에서
황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이번 화 부터 본격적인 황태자 이척의 제국 설계가 시작됩니다!
그간 처음 플롯의 설명하는 부분에서 너무 지루하거나 느리게 느껴졌던 분들이 있으셨다면 기대하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ㅎㅎ
표지 디자인을 부분적으로 수정(레터링부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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