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 1998[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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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많은 픽션들이 실화인 양 꾸미는 것이 유행으로 번진 지금이지만 이 이야기는 참된 실화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다.
난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난 나라는, 절대 진리이기에 아무 쓸모 없는 낱말의 조합만이 유일한 논리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운명의 그날에 그녀는 화분 위에 물뿌리개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랑 머리는 아마도 염색한 것일테지만, 날 때부터 그런 것이라 해도 아무런 시비거리가 되지 않을만치 자연스럽고 건전해보인다. 빨강빛이 주조를 이룬 옷은 너무 고전적이어서 신선해보인다.
지금껏 그려낸 모습들은 확실히 떠오르는 이미지들이지만 다른 쪽에서 바라본 그녀의 모습들은 잘 떠올려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녀에겐 그런 모습 따위는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밝고 윤기 나는 갸름한 얼굴을 지닌 그녀가 보기 좋은 미소를 보냈다. 나는 다소 도발적인 태도를 취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데이트 약속을 할 수 있었다.
그녀와 내가 같은 고등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는 건 아마도 믿음의 문제일 것이다. 국가니 유러화니 하는 유령들이 있는 상황에서 같은 반 따위의 사소하면서도 국소적인 일도 믿기에 달린 것으로 치부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여겨준다면 고맙겠다.
하제 아니면 모레, 그도 아니면 글피나 그글피. 틀림없는 건 약속한 날에서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
내가 조금 늦게 간 덕에 먼저 와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시간이 확실치 않은 것은 내가 보통 알고 지내던 시간 관념과는 다른 시간 관념을 담고 있는 시계가 극장 어딘가에 걸려 있어서일까.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무슨 빛깔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짧은 치마 아래 미끈한 다리가 귀여웠던 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나는 내 돈으로 두 사람의 표를 끊었다. 영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난 그녀 몸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데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그녀는 나에게 혀를 쏘옥 내밀고는,
-너 싫어.
가 요지였을 말을 하며 극장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못 생기고 안경 낀 같은 반 녀석과 함께 다니는 그녀와 마주친 적이 있다.
나는 그리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때엔 그 순간의 느낌을 다시는 지닐 수 없으리란 점을 깨닫지 못했었다. 그 기억만을 말살한 다음 같은 경험을 거듭하거나, 무의식으로부터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등의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방법들을 쓸 수 있게 되더라도 그때의 느낌을 오롯히 되찾기란 무리일 거라 여겨진다. 순간 순간은 아쉬운 것이리라. 누구도 완전한 이해력을 갖지 못한 게 현실일지라도. 누구든 이해한만큼 밖에 느낄 수 없다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소중한 추억들인 것이다.
그것이 흉악한 것일지라도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며, 지금도 전적으로 그렇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실체로서의 그녀는 조금도 중요치 않다. 어디까지나 내 마음 속 아니마에 맞아 떨어지는 이미지의 하나로서 나에게 필요할 뿐이다.
거울을 보며 잠깐 중얼댄다. 보르헤스의 소설을 몇 편 읽고 감명받아 머리 속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가 하나의 글을 이루게 되었는데 제대로 된 예술성을 이룰 수 있을까. 평소 버릇대로 손거울을 뒤짚어 책상 위에 엎어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거울을 보며 중얼거리지 않았다. 그건 그저 이미지일 뿐이었다.
한 순간에 떠오른 일들을 생각 나는 대로 적고 있는 즉흥적인 글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솔직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바로 윗 문장이 정당화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답답했었다. 답답함이 이 글을 쓰게 했지만 쓰고 난 다음에도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에서 멀지 않은 날짜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보다 훨씬 좋은 컴퓨터 시스템을 갖춘 친구에게 가기로 마음 굳힌다. 가면 버튼 몇 개를 누르는 것만으로 미호를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금은 풀릴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으로선 그렇다.
결국 한동안 가지 못했고, 기껏 갔지만 그녀를 만날 길은 지워져 있었으나 후회는 없다. '동급생 2' 게임을 조금 할 수는 있었다. 가능하다면 나중에라도 내 미래의 컴퓨터에 카피하고 싶다.
@1998년 6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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