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고려 출신 황제 이소영 일지 - 2002[징기스칸4 패러디][미완]
1319년 가을
빅마마에서 내 아우 이순신이 찾아와 등용하기를 청한다는 보고가 입수되었다. 이순신은 상당한 능력자다(정치97, 전투72, 지모99). 잘 못 싸우는 게 흠이나 혈육의 정은 인정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곳곳에서 여러 인재가 등용되었다는 보고가 들린다.
빅마마에서 농장의 건설을 일제히 명했다. 빅마마를 세계에서 가장 많은 농작물이 나는 도시로 만들어 볼 계획이다. 데칸 고원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 빅마마를 난 인도, 동남아시아, 페르시아에 식량을 공급하는 도시로 만들 계획인 것이다.
1319년 겨울
타브리즈에 한 때 추방했던 페셜팔 형님이 찾아와 등용을 청해 들어주었다. 이제 나의 지배는 튼튼해 졌으니 등용을 하여도 무리 없을 것이라 여겨져 황실의 분위기를 다독이기 위해 허용하였다.
빅마마에서 고판도쿨 형님으로 하여금 아우 이순신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게 했다.
장국영과 오삼계 두 형님이 바그다드 근방에서 맘루크 왕조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지모 99인 호제다이 형님에게 9500의 금을 주어 오삼계 형님에게 반란을 권유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폴란드 사신 오루친이 대도 근방을 지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웬 대도람. 나는 지금 카라코룸으로 향해 가고 있는데 왜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진흥도가 죽었다. 한때 진조의 맹장으로 여러 차례 원군을 격파했으며 50대 후반엔 원에서 복무하기 시작해 수많은 공을 세웠던 사람이다. 국장으로 후히 장사지내라 명하고, 시신은 부식되지 않도록 잘 처리하여 고향인 하노이에 묻으라고 지시했다. 부식제가 엄청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타브리즈에서 하노이까진 꽤 머니까.
1320년 초봄
이제 나도 15살이다.
몽고 초원에서 200명의 궁녀들을 홀딱 벗긴 다음 말 타기 시합을 시켰다. 말 타는 데 서투른 애들이 많아서 꽤 재미있다.
친이가이와 아밀 호슬로에게 명해 힌두 제왕조가 닦고 있던, 빅마마에서 마드라스를 거쳐 캘리컷에 이르는 가도를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투퍼다이 형님을 한 번 더 캘리컷에 파견키로 했다. 쿠빌라이 칸께서는 수많은 정복 활동을 통해 1500만의 사람을 학살했다고 한다. 나도 이미 힌두 제왕조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70만 명 이상을 죽였다. 이토록 많은 피를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한 지모99의 내 아우 이순신에게 7800 상당의 금을 주어 첩보 활동을 하도록 내보냈다.
나의 네 형제가 맘루크 왕조군을 거느리고 폴란드의 다마스커스를 수복하기 위해 진군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호제다이 형님이 바그다드의 영주 알 울을 암살하는데 성공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제 바그다드는 텅 비게 되었지만 지금 군대를 내어 바그다드를 접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밀약에 바그다드는 폴란드에게 넘기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점점 성욕이 땡긴다. 이제 14살이 된 리리안이 가르쳐준 유럽의 풍습 중 재미있는 게 하나 있다.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인간 탑을 만든다는 것이다. 300여 명의 궁녀들로 전라 인간 탑을 여러 개 만들도록 하고 이를 구경하면서 놀았다. 우승한 팀 전원에게 비단 10필 씩 돌린다고 하니까 기를 쓰고 한다. 약속은 지켰다. 황후들은 아예 나와보지도 않는다.-_-++
함양에 돌아가면 도로 궁녀를 3000명 이상으로 만들어야겠다. 800여명 밖에 안 되니까 뭘 시켜도 큰 흥이 안 난다.
카라코룸에 입성했다. 카라코룸은 몽고의 발상지로 몽고인의 토착 세력이 가장 강력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수십만의 몽고인이 몽고 각지에서 모여들어 엄청난 장관을 이루었다.
폴란드 최고의 명장 월레스가 이끄는 몽고 기병대가 내 친척인 마이너의 맘루크 왕조군을 기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이너군은 곧 혼란에 빠져 궤멸하고 마이너는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월레스는 마이너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1320년 봄
내 아우 오광진이 빅마마에서 등용을 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광진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다(정치100, 전투96, 지모97). 다른 나라에 빼앗기면 화가 되겠다 싶어 등용하였다.
투퍼다이 형님이 힌두 제왕조를 협박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역시 전쟁 뿐인 것일까. 아우 이순신은 하르지에게 배반을 권유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호제다이 형님이 타브리즈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는 루키올팔에게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루키올팔은 걸려들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루키올팔은 형님이셨다. 호제다이 형님이 실패하셔서 정말 다행이다. 루키올팔 형님을 잡아들이라는 령을 내렸다.
페설팔 형님이 몽고기병대를 이끌고 루키올팔 형님의 군대를 기습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루키올팔 형님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루키올팔 형님이 등용되었다.
이곳 카라코룸에서 나는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사실 몽고 대귀족들은 쿠빌라이 칸이 나를 후계자로 정할 때 쿠릴타이를 개최하지 않아 불만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쿠빌라이 칸께서는 나를 후계자로 정하시기 위해 쿠릴타이를 무시하는 행위를 저지르셨다. 거대한 영토가 정복되어 세력이 다원화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결정이었다. 원을 지지한 수많은 세력들에겐 너그럽게 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반란자에겐 가차없다.
폴란드 사신 오루친이 함양 중심가의 마을에서 놀고 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회춘하라고 아랍 미녀 10여 명을 보내줬다.
1320년 여름
이슬람상인이 빅마마에서 말을 찾아주었다. 인도 정복이 더더욱 쉬워졌다.
호제다이 형님이 토라베자스에서 맘루크 왕조 국왕 아마크 반에게 암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간첩단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는 소식이다. 어쩔 수 없이 타브리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가 추방한 친척들 중 상당수가 맘루크 왕조에 귀의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월레스가 정소영 형님의 군대를 기습했다는 소식이다. 정소영 형님이 사로잡혀 폴란드에 등용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과연 월레스는 명장이다.
한 몽고 대귀족이 서고진 형님이나 토곤 형님이 몽골 대칸이 되어야 했다는 망발을 감히 내 앞에서 서슴없이 하였다. 사석에서 했다면 모르지만 이런 공식석장 그것도 대원제국 황제인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니. 친위대에 명령해 끌어내 목을 치게 했다. 그런 다음 그 목을 창 끝에 꽂아 쿠릴타이 회의장 한가운데에 놓아 두었다.
"짐이 나이 어리나 몽골 대칸이자 중국 황제이며 고려의 국왕이자 일본의 천황이자 투르케스탄과 중앙아시아와 델리의 술탄이다. 이런 짐에게 거역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몽골의 전통은 정복자에게만 정통을 인정한다. 징기스칸께서는 위대한 정복자셨기에 모든 몽골의 대칸은 그의 후예였다. 짐을 후계자로 세우신 쿠빌라이 칸 또한 위대한 정복자셨기에 앞으로 모든 몽골의 대칸은 그로부터 나올 것이다. 나 또한 데칸 고원의 정복자다! 나는 곧 풍요로운 인도를 정복할 것이다. 인도의 4000만 백성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짐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를 거스르지 말라"
몽골 대귀족들은 일제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몽골 전통의 막사에서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카라코룸은 목동, 무기, 전술의 도시에 빛나는 매우 잘 발달된 곳이다. 풍요로운 카라코룸에서 나는 한동안 책을 놓고 군사훈련, 격구, 씨름에 주력했다. 그 모습이말로 몽골인들이 대칸에게 바라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은 화남에 이어 나의 정권에 있어 2번째로 중요한 곳. 소흘히 할 수는 없다.
1320년 성하
다마스커스의 영주인 폴란드의 왕족 뮤루친이 정소영 형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첩보가 들려왔다.
이순신 형님으로 하여금 마드라스에서 항구 건설 중인 힌두 제왕조의 하르즈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먹혀들어간 것 같다. 투퍼다이 형님이 힌두 제왕조를 협박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마드라스를 정복한 다음 검토해야 할 것 같다.
몽골의 순수 혈통이신 서고진 형님을 빅마마에 보내려 했으나 서고진 형님은 병을 핑계로 동남아시아의 도시 빛고을에서 움직이지 않으려 하신다. 아마도 자신이 공을 세울 경우 자신의 혈통이 좀 더 몽골의 정통에 가깝기에 그 점이 부담이 되시는 듯 했다. 계속 빛고을에 머물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봉록을 올려주었다. 서고진 형님의 경우 만만찮은 야심가로 몽골 고원 한복판에 자신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 울란바토르를 여러 친척들과 함께 건설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주의 문왕이나 당국공 이연처럼 몸을 웅크려 실력을 숨기면서 힘을 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원이 위험해지지만 않는다면 안전할테니 안심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원의 지배는 나날이 튼튼해지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동서무역의 거점으로서 번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 사마르칸트로 출발했다. 리리안은 점점 자신의 나라가 가까워져 간다는 생각에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딴 황후들은 반대였다.
1320년 가을
각지에서 흉작이 들었다는 보고다.
흉작 때면 의례히 하는 일들을 하라고 지시했다. 수백만의 식량을 싼 값에 시장에 풀고 구휼미를 나누어 주는 일 말이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라마교단에게 이런 흉작에도 사치스러운 제사 의식을 하는 것은 낭비라는 일침을 가했다. 그리하여 제사 의식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불교, 이슬람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유교 등등 여러 종교들에도 마찬가지 서신을 보내 약속을 받아냈다.
폴란드가 사라이 교외에서 서허무 형님에게 군대를 주어 안정환 형님의 맘루크 왕조군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형제 싸움이라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형제들을 추방한 것은 나의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안정환 형님이 폴란드에 등용되었다는 소식이다. 폴란드의 왕족 이바루코프가 사라이 근교에서 인민랄쿨 형님의 군대를 격멸했으나 인민랄쿨 형님은 놓쳤다고 한다.
폴란드의 대군이 맘루크 왕조의 수도 토라베자스로 진군 중이다. 다마스커스의 폐허에서 월레스가 이끄는 폴란드 몽고기병대가 맘루크의 타이미야 군을 궤멸시켰으나 타이미야는 달아났다고 한다.
내 아우 김소월이 폴란드 군을 이끌고 장국영 형님의 맘루크 군을 궤멸시킨 뒤 장국영 형님을 사로잡아 등용했다고 한다. 폴란드의 사신 오루친이 함양에 있는 구리 광산을 시찰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마도 기술을 배워 폴란드에 파발로 보낼 계획인 듯 했다.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순신 아우가 하르지에게 배반을 권유했으나 오히려 첩보단만 해산당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빅마마로의 귀환을 명했다. 나까무라 겐이치로 형님이 힌두 제왕조의 작업장을 급습해 적 장수의 목을 쳤다. 진회 형님은 이미 완성된 마드라스의 항구에서 귀환 준비를 하던 하르지의 건설단을 급습해 인부들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기도 하였으나 하르지는 혼란한 틈을 타 달아나고 말았다.
투퍼다이 형님에게 명해 힌두 제왕조에 조영방식의 기술을 전파케했다. 힌두 제왕조는 거의 원을 신뢰하지 않는다.
내정을 중시하도록 영주에게 전권을 맡겨 운영하던 샤안과 에미르를 직할로 하였다.
1320년 겨울
맘루크의 도시 바그다드의 영주 오삼계 형님이 맘루크를 배반하여 바그다드와 함께 우리나라에 귀의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크게 기뻐하며 오삼계 형님에게 다량의 상금을 보내는 한편 후한 녹봉을 약속했다. 나를 반대하여 추방했던 친척들이 다시 모여들고 있어 기분이 몹시 좋다. 오삼계 형님은 유능한 분이니 원의 좋은 신하가 될 수 있을 것이다(오삼계 수치 : 정치87, 전투99, 지모98).
페설팔 형님의 몽고기병대로 마이너 형님이 이끄는 건설단을 급습했으나 마이너 형님을 사로잡는데엔 실패하고 말았다.
다마스커스가 폴란드, 바그다드가 원에 제압됨으로서 맘루크는 국토의 허리를 끊기게끔 되어버렸다. 맘루크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지금 나는 에미르 근방의 실크 로드를 지나고 있다. 실크 로드의 가도에 가로수가 무성한 모습을 보니 보기 좋다. 이곳은 쿠빌라이 칸 말기부터 평화로웠던 곳이다. 이 평화를 오래도록 지켜주고픈 마음이다.
투퍼다이 형님에게 명해 신학대전을 힌두 제왕조에 증정하였다.
원에게 멸망당한 여러 나라의 사서를 편찬하는 사관들에게 명하여 춘추필법(중국에 유리한 것은 크게 부풀리고 불리한 것은 숨기거나 축소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엄벌하겠다고 했다. 또한 이전의 모든 사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춘추필법에 의해 기록된 것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전 사서들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사서를 편찬하는 사업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대규모의 사서 편찬 사업을 명하였다. 막대한 예산과 긴 기간을 책정하고 그 과정에서의 분서갱유를 엄단하도록 조치했다. 중국의 경우 삼황오제에서 남송까지, 일본의 경우 쇼토쿠 태자 시대에서 가마쿠라 막부까지, 고려의 경우 단군 왕검에서 고려까지, 몽골의 경우 스키티아에서 금까지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편찬 작업을 명한 것이다. 유학자들이 에미르 근교까지 달려 와 이 결정을 제고해 달라고 떼를 썼다. 송만이 정통이니 다른 모든 나라 역사는 송의 방계로서 열전이나 세가에 집필해달라는 요구였다. 중화의식이 상처 받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는 것인가.
가소로울 뿐이다.
예로부터 중국의 중심 종족인 한족이 제국(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한 적은 한 번도 없다. 5호 16국 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한족의 중화의식은 남북조시대, 요나라 때 또 상처를 받았으며 금에게 화북을 빼앗긴 뒤 더욱 망가졌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께서는 남송을 정복하셨으니 이제 한족의 중화의식 따위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한족들은 떼를 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몽골 출신이 많은 무신들의 지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몽골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여러 형님들이 충성을 바치고 있기 때문에 내 군사적 지배가 굳건한 것이지 몽골인들은 나의 잇다른 중국 문화 우대 정책으로 불만이 많아고 들었다. 물론 이들의 충성은 견제 효과가 나도록 용의주도하게 안배해놓은 나의 식견 탓이겠지만. 나는 한족 관료가 필요한 영역에는 고려인, 색목인, 여진족, 거란족을 더 많이 등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말은 그렇지만 한족 관료가 필요한 영역들엔 고려인이 한족 다음으로 능력들이 좋으니 고려인이 많이 등용될 것은 뻔했다. 몽골인들은 한족 보다는 고려인을 더 좋아하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였다. 몽골인들의 불만이 좀 더 수그러들었다는 소식이다. 거기에 내 어머니의 백성인 고려인의 세력이 커질테니 일석이조였다.
빅마마에서 한 번에 들어오는 군량 수확량이 양양(201512), 카라코룸(190049)에 이어 세계 3위(빅마마 : 173891)가 되었다는 소식이다. 카라코룸에서는 가을에만 수확이 있지만, 빅마마에는 참마피도 키워 식량 수확이 성하 가을에 2번이니 사실상 카라코룸은 이미 능가한 셈이다. 아직 논밭을 지을 땅도 넉넉하여 곧 양양도 능가할 것이라 하니 기분이 좋다. 더욱 논밭 건설에 박차를 가하도록 명하였다.
폴란드의 대군이 맘루크의 수도 토라베자스 시내에 입성했다는 소문이다. 이제 곧 성을 공격할 수 있게 될 것이라 한다.
1321년 초봄
이제 나도 16살이다.
마이너 형님이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폴란드의 1만 2천 대군이 맘루크의 수도 토라베자스를 공격했다는 소식이다. 맘루크의 술탄 아마크 반이 맞서싸우러 나섰다. 맘루크에도 몽고기병과 투석기는 있기 때문에 상당한 접전이 예상된다. 폴란드가 토라베자스를 점령했다는 소식이다.
폴란드가 맘루크의 술탄 아마크 반의 목을 베었다. 아리 피라크가 새로이 맘루크의 술탄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리 피라크는 지금 흑해의 바다 위에 있다.
67세의 폴란드 국왕 무쪼가 새로 빼앗은 맘루크의 옛 왕비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징기스칸께서는 "진정한 즐거움이란 패배한 적을 쫓아보내며, 울부짓는 적의 부인과 딸을 품 안에 안는 것이다"(진짜로 이 말 했음)라고 말씀하셨는데 나 또한 그런 즐거움을 알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힌두 제왕조를 빼앗는다면 그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알마리크 부근을 지나고 있다. 아랍 무희들 수십 여명을 불러 무대를 설치한 다음 알몸으로 배꼽춤을 추게 했다.
투퍼다이 형님에게 명해 힌두제왕조에 바스바 문자를 전하게 했다.
중국 문화권 도시들의 장수들에게 명해 일제히 등용을 위한 인재 수색을 하도록 했다. 이미 내 두 딸이 7살이 되었다. 좋은 사윗감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1321년 봄
사마르칸트 근교에 이르렀다.
인재 2명이 새로이 등용되었다. 인재는 더 많이 천거되었었으나 수치가 하나 이상 90 이상인 인재만을 등용토록 했기에 이렇듯 적다.
모케므불 형님의 몽고기병대로 맘루크의 국왕 아리 피라크의 군대를 급습하였다. 아리 피라크는 아직 평장수일 때 가졌던 3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을 뿐이다. 아리 피라크군을 격멸시켰으나 아리 피라크는 샛길로 도주하였다. 아쉬운 노릇이다.
투퍼다이 형님에게 명해 힌두 제왕조에 목판 인쇄술을 전수했다.
중국 문화권 도시 뿐아니라 전 도시에서의 인재 등용을 명하였다. 바그다드를 뺀 전 도시에서 인재 등용 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사마르칸트에 입성했다. 과연 동서무역으로 돈을 많이 번 부강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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