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강제 퇴거(Forced eviction) - 2
* * * * *
5일 뒤 오후 5시 30분, 뉴욕시 타임스 스퀘어 인근.
"삼초오오오온!"
어느 유명한 카페 앞에서 서성이던 제노는, 총총총 뛰어와 폴짝 안겨든 알리시아를 반가이 맞이했다.
"어이구구구~, 우리 조카님 오셨습니까~!"
"히히, 진짜 보고 싶었어요!"
"옹야, 옹야~. 나두, 나두~."
알리시아는 낄낄낄 웃는 제노의 옆구리를 새침하게 쿡쿡 찔렀다.
"치~, 새빨간 거짓말 마세요! 여자친구 생긴 뒤론 저한텐 얼굴 코빼기도 안 비치셨잖아요!"
"하하하~, 이런, 이런~. 내가 그랬었나? 미안, 미안~. 하지만 이젠 그럴 일 없으니까 용서해줘라."
"...네?"
"크크크, 한 달도 못 채우고 보기 좋게 차였어~."
"......"
"달달한 꿈에서 반짝 깨어난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단다."
알리시아는 엄지까지 척하고 드리운 제노의 해맑은 태도가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괘, 괜찮으신 거죠?"
"어, 지금은 아주 덤덤해~. 한동안 죽어라 출장 다니면서 전부 털어냈쥐비~."
"힝... 미리 말씀해주시지. 전 그것도 모르고 삼촌한테 쪼르기나 하궁..."
"에이~, 뭘 이 정도로~! 괜찮아, 괜찮아. 나한테 애정 없는 여자 때문에 허구헌날 꿍해봤자 나만 손해잖냐. 그치?"
"이욜~. 이게 어른의 품격인가요?"
"이왕이면 인생의 깨달음라고 표현해줄랴? 크크크."
"치이~."
피식 웃던 그녀는 허세부리는 제노의 오른쪽 대각선 뒤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앗! 에밀리! 여기야, 여기!"
그녀는 둘도 없는 자신의 절친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노 삼촌, 인사해."
"안녕하세요, '에밀리 스미스(Emily Smith)'에요."
"반갑다. 제노 장이야."
본인을 에밀리라고 소개한 백인 여자아이는 175cm인 알리시아보다 키는 조금 작았다. 그러나 그 외에는 똑같은 금발인 데다가 길쭉한 얼굴형까지 미묘하게 닮아서, 누군가에게 알리시아와 둘이 자매라고 소개해도 괴리감이 없을 정도었다.
"햐아~, 끼리끼리 논다더니만~! 우리 조카의 절친도 미모가 엄청나구나?"
"감사합니다, 미스터 장!"
"에잉~, 호칭이 너무 딱딱하다~. 그냥 제노 아저씨라고 불러. 나도 에밀리라고 편하게 부를 테니까. 어때? 불만 없지?"
"네, 좋아요! 알리시아가 이야기해줬던 것보다 성격이 훨씬 더 시원시원하세요.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위압감이랑은 완전 딴판이에요."
제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칭찬이지?"
"그럼요! 무서운데 호탕한, 완전 반전매력이잖아요~."
"흐흐, 뭔가 아리까리하지만 넘어가자. 오늘은 널 위한 날이니까."
"히히."
이어서 제노는 그녀들에게 허리를 살짝 숙이며 사뭇 점잖은 태도를 취했다.
"그럼 가실까요, 아가씨들? 미리 예고드렸던 대로 아침부터 쫄쫄 굶고 오셨겠지요?"
"힛, 네!"
이때 알리시아가 제노의 팔짱을 자연스럽게 끼면서 말했다.
"삼촌, 근데 우리 어디로 가요?"
"여기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 잡아놨어. 실제 예약은 6시이지만 조금 일찍 도착해도 별 문제 없을 거야."
"이예에~!"
"아참, 에밀리는 조심해야할 알레르기 같은 건 없지?"
"네! 그런 거 없어요! 전 뭐든지 주는대로 잘 먹어요!"
"굿굿, 바람직하다."
그렇게 장소를 옮겨간 고급 레스토랑. 종업원의 친절한 안내에 이끌리던 에밀리가 알리시아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여기 알아. 미쉐린 가이드에서 본 적 있어."
"어? 정말?"
"무려 3스타 레스토랑이야! 별이 3개!"
에밀리는 고풍스런 식당 인테리어와 내부 분위기 때문에 차마 큰 소리를 지르지 못했고, 한편 친구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획득한 알리시아는 제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사, 삼촌.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허~, 우리 조카가 절친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데, 요 정도는 셋팅해줘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비싼 걸 바라지는..."
"흐흐, 됐어. 신경쓰지 마. 내가 감당할 수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래도..."
"걱정도 팔자다. 이거 지금 다 너한테 빚 지우는 거야. 나중에 내 사업이 힘들어지면 네가 내 형편을 꼼꼼히 챙겨줘야 해, 알았지? 행여라도 까먹으면 배신이다, 배신? 오케이?"
"...네에."
몹시 부담스러워하는 알리시아에게서 가까스로 긍정의 대답을 뽑아내는 그는, 시선을 곧장 옮겨 그녀의 친구에게도 한 마디 했다.
"그리고 에밀리도 나랑 초면이라고 막 부담 갖거나 어려워 하지마. 이거 진심으로 빈 말 아니다?"
"넵~! 그럼 사양 않고, 야무지게 얻어 먹겠습니다~."
"굿굿. 우리 조카 친구의 성격이 활기차고 참 좋네."
"저도 아저씨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알리시아가 그토록 자랑하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네요."
"크어흠! 내가 쪼매 잘나긴 했지~."
"파하하하, 초면인데도 이렇게 대화가 편한 사람은 제 개인적으로도 처음이에요!"
이후 모두의 혀를 즐겁게 해주는 코스 요리들이 줄지어 나왔고, 덩달아 그들의 행복수치 또한 대폭 상승했다.
"나한텐 딱인데, 너희들 입맛에도 잘 맞니?"
"정말 맛있어요, 삼촌!"
"아웅, 입에서 살살 녹아요!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음식과 더불어 훈훈한 분위기까지 양껏 포식한 제노는, 그녀들이 디저트 삼매경에 빠지기 전에 하얀 봉투를 쓰윽 내밀었다.
"자, 받으렴."
"이게 뭐에요?"
"요게 바로 내가 준비한 진짜 선물이란다~."
""???""
"흐흐, 미리 생일 축하한다, 에밀리."
흰 봉투 속엔 미국 여고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팝스타 1위, '미한나 스위프트(Mihanna Swift)'의 뉴욕시 공연티켓이 6장이나 들어있었다.
""꺄아... 합!""
심지어 공연장의 VIP석. 기쁨의 함성을 가까스로 참아낸 소녀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했다.
"삼촌! 이건 돈 주고도 못 산다는 티켓인데, 이걸 어떻게 구하신 거에요?"
"어휴, 정말이지 진짜 쉽지 않더라~. 온갖 인맥을 총동원해서 아주 어렵게 구했어~."
제노는 정부와의 '미지급 수수료 조정' 관련 미팅에서 계약금조로 뜯어냈다는 사실을 두루뭉술하게 표현했고, 이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알리시아는 너스레 떨기 바쁜 그를 향해 두 팔을 쭉 펼쳤다.
"사랑해요, 삼촌! 제가 뽀뽀해 드릴까요?"
"어이쿠, 기껏 좋은 일 했는데, 날 감옥으로 보내버릴 작정이냐?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니~?"
"치, 저 이제 18살까지 몇 달 안 남았는데요?"
"응~, 암만 그래봤자 지금은 미성년자~. 99센트랑 1달러는 가치가 엄연히 달라요. 게다가 난 25살 미만은 여자로 인식 안 하는 거 알지?"
"피이~."
"흐흐, 어쨌거나 둘 다 마음에 든다니까 다행이다. 내가 무지성으로 땡깡 부린... 아차차, 부단히 애쓴 보람이 있었네~. 프핫핫핫!"
이번엔 흡족하게 방긋 웃는 제노에게 에밀리가 물었다.
"아저씨, 그런데 왜 6장이에요?"
"당연하지. 공연 끝나면 밤 10시가 훌쩍 넘잖아?"
"근데요?"
"위험하니까 친구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녀야 하지 않겠어? 화장실 갈 때도 3명씩 같이 가고 그래야 안전하잖냐."
"아..."
"내 욕심엔 10장 정도 구하고 싶었는데, 6장이 최선이더라고~."
"헤헷, 정말 감사해요. 아저씨 덕분에 친한 친구들이랑 졸업하기 전에 멋진 추억이 생기겠어요!"
"그래, 그러니까 그 귀한 뇌물 받고, 우리 알리시아랑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주렴. 잘 부탁한다."
"히이~, 맡겨만 주세요!"
기쁨에 흠뻑 젖은 알리시아와 에밀리는 내일 당장 학교에서 제비뽑기를 하네마네 떠들며 재잘거림을 쉬지 않았고, 제노는 그런 그녀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도 이런 딸내미들을 키워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떻게 쫌 안 되겠니~?!'
주어진 운명을 극렬히 부정하는 그를 알리시아가 현실로 인도해냈다.
"삼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아아, 별 거 아냐."
"힛, 별 거 아닌 그게 대체 뭔데요?"
솔직하게 대답하려던 그는, 언젠가 '너무 애취급하는 게 싫다.'던 그녀의 투정을 떠올리곤 생각나는대로 대충 둘러댔다.
"하하, 이 자리에 내가 아닌 크리스를 앉혔어야 옳지 않았나 싶어서."
"이쒸, 그 바람둥이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오잉? 그새 또 싸웠니?"
화제가 어물쩍 돌아간 것까진 좋았으되, 알리시아의 불평 트리거를 실수로 건드린 게 문제였다. 그래도 에밀리가 바로 그녀 곁에 있었던 지라 재빠른 수습이 이뤄졌다.
"어후~, 아저씨, 말도 마세요! 꿈이 아닌 현실에선 사기적인 꽃미남이 마냥 좋지 않다는 걸, 제가 얘 덕분에 알게 됐다니까요?"
"흠... 하긴 여자들이 크리스를 한시도 가만 놔두지 않긴 해."
"아웅, 장난 아니에요! 옆에서 간접체험하는 제가 다 불안하다니까요! 역시 미남보단 훈남이 최고에요!"
"에이~, 크리스는 바람 피고 그런 놈이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 그 녀석은 천성이 해바라기여, 해바라기. 뚝심이 원체 대단해서 배신이란 단어를 몰러요, 몰라~."
"그거야 진짜 모르죠~. 솔직히 남친을 철썩 같이 믿어도, 불여우 같은 기집애들을 어떻게 믿어요?"
남녀의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마찬가지였기에, 제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어... 음... 그것도 그런가?"
"오죽하면 알리시아가 예전에 이런 말까지 했어요."
"뭐라고?"
"차라리 허구헌날 속 썩이는 남친 보단, 몇 달동안 얼굴 못 봐도 아무런 걱정 없고 마음까지도 편한 제노 삼촌이 훨씬 좋다고요."
옆에 앉은 알리시아가 얼굴 붉히며 친구의 등짝을 찰싹 때린 반면, 뒷머리를 벅벅 긁는 제노의 눈매는 한껏 얄쌍해졌다.
"......그거 칭찬 맞지?"
"당연하죠!"
"이상하네. 근데 왜 내 속이 엄청 쓰라린 걸까?"
"히이~, 기분탓이에요, 기분 탓!"
"캬~, 에밀리는 오늘 처음 만나는 친구라 그런지, 얼굴표정만으론 참인지 거짓인지 도통 분간 못하겠다야~."
"히히히! 사람에 대한 믿음이 많이 부족하시네요?"
"응, 맞아. 요즘 하루가 멀하다고 인류애가 바짝바짝 메말라가는 중ㅇ..."
어느 불청객의 난입으로 제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하하호호했던 식탁 분위기도 뚝하니 그쳤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뉘신지?"
회색 트렌치코드를 걸친, 50대 내외로 보이는 흑인 남성은 제노에게 자신의 뱃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NCIS(해군 범죄수사국)의 '조셉 브라운(Joseph Brown)'입니다. 제노 장, 본인 되십니까?"
- 작가의말
▶ 흔해 빠진 포맷의 글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준비한 이야기는 독자들의 니즈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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