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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402
추천수 :
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5.11.21 23:15
조회
719
추천
21
글자
21쪽

13화 - 3

DUMMY

“수학은 역시, 포기하는 게 낫겠지.”

“포기하지 마. 뭐 모르는데.”

“아…… 전반적으로 몰라서 포기하려는 건데.”

“어디. 못 푸는 거 보여줘 봐.”



벼락치기에 어울리지 않는 과목은 바로 기초학문이지. 특히 수학은. 수학은 평소에 잘 해야 되는 과목이니까. 설령 벼락치기로 공식 몇 개 외운다고 해도, 많은 문제 유형을 풀어보지 못 했기 때문에 빨리 문제를 풀 수 없고, 결과는 파멸이다. 노력에 비해 별다른 효율이 나질 않는다. 애초에 벼락치기를 하는 이유가 ‘효율’인데. ……이 추억 만들기용 밤샘공부에서 효율을 따지는 것도 좀 에러이긴 한데.


희세는 내 말에 대뜸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손짓하며 오라고 눈치를 주는 희세. 그렇게까지 하는데 또 안 갈 수가 없다. 희세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수학 문제집을 펼친다.



“이거랑 이거랑 이건데. 아무리, 지금 공식을 알게 되도. 숙달되는 데 시간도 있고, 수학은 평소에 잘 해야 하는 거잖아.”

“시끄러. 한 번 풀어봐. 어디서 막히는지 보게.”

“……뭔가 쑥스러운데.”

“그럼 평소에 공부를 했어야지. 풀어 봐.”



희세는 냉정한 과외 선생님 같은 투로 말한다. 과외 선생님 만나본 적도 없는데. 희세 앞에서 미천한 수학 실력을 뽐내려니 묘하게 부끄럽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곧 주눅든 채 연필을 들고 연습장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왜 못 해.”

“으으……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 개념정리를 봐도.”

“이거는 여기서 이렇게 대입한다는 말이야. 모르겠어?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응?”

“어, 어?? 잠깐만요,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세요.”

“아니…… 핳, 자. 다시.”



풀다가 곧 멈춘다. 막혔던 부분. 교재 앞의 개념정리를 봐도, 간단한 연습문제는 풀리지만 조금이라도 꼬아 놓으면 영 못 풀겠다. 희세는 내 공책에 샤프를 올려놓고 술술 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지나가서 풀이과정을 전혀 못 봤다. 마치 마술사가 눈앞에서 슈륵 현란한 손재주로 마술을 보여줘 미처 트릭을 못 보고 지나가는 것처럼. 다급한 나의 반응에 희세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천천히 풀이과정을 보여준다. ‘이거가 이렇게 들어가는 거야. 알겠어?’ 하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희세. 과연, 직접적으로 풀이과정을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간다. 혼자서 공부할 때엔 도통 못 알아먹는 꼴통인 나인데. 괜히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있는 게 아니구나! ……수업시간에 잘 들을걸.



“이제 알겠어?”

“응. 그럼 이건…… 음…… 이래서…… 이렇게 푸는 거?”

“음, 완벽하네.”



금세 과외 선생님과 가르침 받는 학생과 같은 구도가 된 나와 희세. 의욕충만하게 막혔던 문제 다음의 문제를 풀어봤다. 처음 풀려던 문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 임에도, 희세의 설명을 들으니 금방 풀 수 있다. 이거 이거, 원리만 알면 금방 풀 수 있는 거구만! 수학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하핳! 희세의 칭찬을 들으니 더욱 의기양양해지는 기분.



“오오. 역시, 전교 1등 나희세인가.”

“뭐. 누구 씨처럼 문과 계열만 특화돼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나, 나도 풀 수 있어 그 정도는!”

“그럼 이거는. 풀 수 있겠어?”

“으윽…… 서술형 싫은데……!”



나의 치켜세움에 샐쭉 새침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리는 희세.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 성빈이를 쳐다보며 말한다. 대뜸 성빈이는 고개를 들고 더듬거리며 말한다. 성빈이, 수학이 약했지. 그래도 희세의 도발에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오며 말한다. 싱긋 웃으며 문제를 제시하는 희세. 성빈이는 샤프를 부들부들 떨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제를 풀려 한다. 어째 나를 사이에 두고 문제 대결이 펼쳐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여기서 화자의 마음은, 본문에 다 나와있어! 사실 독해력이 중요한 건데, 평소에 책을 많이 읽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화자의 마음이 왜 이러냐면, 이러니까 이런 거야.”

“??? 왜?! 합리적인 이유를 알려 줘!”

“그냥, 그렇다고 하더라고. 화자의 마음이 그런 거래.”

“뭔데?!”



국어에 대한 의문점은 성빈이에게 묻는다. 사실 이번에도 희세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성빈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기가 알려주겠다고 해서. 하지만 별달리 신통치 않은 설명에 나는 혼돈에 빠졌다. 화자의 마음을 뭔데 이렇게 정해져 있는 건데?! 문학은 사람 마음 가는 데로 해석하는 거 아니었어!? 몰라 뭐야 이거 이상해.



“단어 많이 외우고, 주로 나오는 문법 암기하고, 그러면 100점은 무리여도 80점 이상은 맞을 거야. 선생님 시험 쉽게 내시니까.”

“개어렵던데! 영어 선생님 사감 선생님으로 바뀌었잖아, 2학년 올라와서!”

“그냥 네가 영어실력이 낮아서 그래. 쉽게 내시는 편이야.”

“아아…… 그렇군요.”



영어는 다시 희세에게 가르침. 어째 희세─성빈이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배우는 것 같다. 사실 별다른 가르침이 있는 건 아니다. 공부는 원래 자신과의 싸움이다. 다만 희세나 성빈이가 가르쳐주면 훨씬 괜찮을 뿐. 계속 공부만 하고 있으니 목도 허리도 뻐근하다. 그렇게 안 보이지만 벌써 4시간이 넘도록 공부하고 있다. 중간중간 10분씩 쉬는시간도 가지고 점심도 먹었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이제 쉴 껀덕지가 없잖아. 괴롭구나.



“자, 잠깐 많이 쉴래?”

“음?”

“많이 공부 했으니까, 대휴식.”

“점심 먹으면서 쉬었잖아.”

“그, 그치만.”

“음~ 좋지. 쉬자.”



괴로워하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문득 말하는 민서. 고개를 돌려 민서를 쳐다보니 민서는 조금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는다. 희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 대답에 금세 기가 죽는 민서. 어쨌든 공부하러 온 거니 희세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유진이는 잠시 애들을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희세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 하고. 쉴 사람만 잠깐 쉬면 되지.”

“……조금만 쉬고 공부해. 놀러 온 거 아니니까.”

“응,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원하게 말한다. 안 그래도 쉴 명분을 찾고 있었는데, 민서 쪽에서 먼저 제안하고 유진이가 받아줬으니, 과반수는 허락한 셈이잖아? 희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잔소리하듯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한다. 성빈이도 모처럼만에 제대로 집중했는지 미동도 않고 노트에 무엇인가 끄적이고 있다. ‘쉴래?’ 하고 묻기가 애매할 정도로.



“밖에 나가서 뭐 사먹자.”

“으, 응.”

“헤에. 웅도가 사 주는 거?”

“좀 봐 주라. 있는 돈 없는 돈 쪼개서 자취하느라 거지인데.”

“아핳. 쪼잔해!”



희세와 성빈이, 두 사람을 두고 나머지 나와 민서, 유진이만 일어나 움직인다. 공부하는 희세와 성빈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작게 말한다. 유진이는 장난기 넘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잠깐, 뭔가 허전한데. 무엇인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

“……후으, ……후으.”

“두고 가자.”



좋은 기세로 엎드려 자고 있는 미래. 기어이 이렇게 퍼질러 자고 있구나. 공부시간이니 드립 못 치게 하고 말도 못 하게 하고 가만히 앉아 있게 하니 굉장히 괴로워하며 안절부절 못 하던 녀석인데. 결국엔 이렇게 되었구나. 너무도 곤히 자고 있어, 녀석을 깨우지는 못 하고 조용히 나왔다.




--




“민서 요즘 살 많이 빠진 것 같아.”

“저, 정말? 헤헷.”

“응. 훨씬 예뻐진 것 같여.”

“그럼 예전에는 안 예뻤단 소리? 헤에, 웅도 나쁘네. 사람 외모로 평가하고.”

“아니, 외모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예뻐졌다고 해도 뭐라고 해?!”

“나, 나는 전혀! 고, 고마워, 칭찬해줘서.”



와플을 사 먹기로 하고 걸어가며 대화. 민서를 쳐다보며 말하는 나. 싱긋 웃으며 말하니 민서는 어쩔 줄 몰라한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민서 요즈음 살이 많이 빠졌다. 특히 볼살이 많이 빠져서 이목구비가 도드라져 보인다. 그렇게 되니 예전보다 훨씬 예쁘고 훨씬 귀엽다. 예전에도 통통하면서도 귀여운 상이었지만, 이제는 어딜 가도 미소녀라 불릴만큼 예뻐진 모양새. 좀 더 살 빼면 ‘환골탈태’라고 불리어도 될 지경이다.


유진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장난인 걸 알지만 미래와는 다르게 유진이는 장난인지 진짜인지 아직 구분을 못 하겠어서 당황하게 된다. 변명을 하려다 벌컥 유진이에게 화를 냈는데 민서가 당황하며 손을 흔든다. 여러모로 혼돈인 대화구나.



“맛있어. 헤헷.”

“단 거 거의 안 먹었지, 요즈음?”

“응. 그치만, 지금은 괜찮아. 한 달 만이지만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어.”

“원래 공부 하려면 단 거 먹어 줘야 하니까. 머리 쓰니까. 그치?”

“음, 먹는 데에 핑계는 무궁무진하니까. 그냥 먹어.”



행복한 표정으로 와플을 먹는 민서. 귀엽다. 다이어트 때문에 단 것을 자제하고 있던 민서. 어째서인지 내 허락을 맡고 와플을 사 먹는다. 공부하다가 하나 먹는 건데 이 정도는 어떠겠어. 내 말에 유진이는 싱긋 웃으며 냉소적인 말을 내뱉는다. 미래랑은 묘하게 다르단 말이지, 유진이 태클. 묘하게…… 더 기분 안 좋아.


희세와 성빈이, 미래의 와플까지 사서 학원으로 돌아간다. 우리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단 게 더 필요하겠지. 미래는 빼고. 그래도, 퍼질러 자고 있다고 안 사주는 건 또 그러니까. 하아, 오늘도 지출이…… 상당하구나.





“…….”

“…….”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두 사람. 희세도, 성빈이도 딱히 입을 열지 않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한동안 정적 속에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려오는 교실.



“……제대로 하네, 이젠?”

“……뭐?”

“웅도한테 말야. 귀여워 죽을라 그러던데? 헤벌래, 해서 아주.”



먼저 말의 포문을 연 희세. 성빈이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공책에 끄적이며 단 한 글자로 답한다. 희세도 마찬가지로 딱히 성빈이를 보지는 않고 말을 잇는다. 두 사람 모두 냉정한 말투라서, 교실은 찬 바람이 휭휭 불 것만 같다.



“그러면 너는. 웅도네 자취방, 비밀번호도 아는 것 같던데. 매일 찾아가?”

“그럼. 상관없잖아, 너하곤? 그 정도 노력도 안 하는 애한테, 핀잔 듣고 싶진 않은데.”

“……지지 않으니까.”



성빈이의 가시 돋힌 대답에 희세는 이제 책에서 눈을 뗀다. 팔짱을 끼고 상당히 거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성빈이는 꾸욱 샤프를 눌러 공책에 쓰다 툭 하고 샤프심이 부러진다. 눈을 들어 희세를 마주본다.



“흐흥. 그래야지. 같이 바보 같은 애 좋아하는 처지지만. 같이 답답해하는 처지지만.”

“희세 너한테는, 솔직히 부족한 면이 많지만. 그래도, 웅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으니까.”

“나한테 그런 거 말해봐야 소용없잖아? 같이 좋아하면, 경쟁자 아니야? 뭐, 너도 유진이 건 겪으면서 느꼈겠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소용 없다는 거, 알잖아? 너나, 나나. 한 번 리유한테 뺏겼으면, 두 번째는 그러지 말아야지?”

“……리, 리유는.”

“리유는 내 친구인데 리유가 사귀었던 웅도하고 사귈 수는 없어.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런 양심 있었으면 그렇게 끼 부리면 안 되죠, 임성빈 양?”

“…….”



희세는 여유 있는 태도로 성빈이에게 말한다. 성빈이도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지만 태세를 전환한 희세에게는 엄두를 못 낸다. 리유에 대한 얘기가 나오니 조금 눈을 떠는 성빈이. 희세의 말에 대답하지 못 한다.



“뭐, 나는 채유진처럼 비겁하게 협박하거나 그러진 않아. 네가 웅도한테 환심 사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누가 더 웅도한테 어울리는 지, 정정당당하게 해 보자구. 난 자신 있으니까.”

“나도 자신 있어!”

“그럼, 해 봐. 정정당당하게.”

“응! 알았어!”



희세의 말에 성빈이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흥분한 채 대답한다. 희세는 씨익 웃는다. 여유 있어 보이는 희세의 미소가, 성빈이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친구에게 이런 마음 품으면 안 되는데’ 하고 덜컥 겁을 먹었을 텐데, 웅도를 두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도리어 더욱,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 희세는, 그저 당당하다. 웅도는 이미 반쯤 넘어온 것 같은 뉘앙스로.



--



“……인간적으로 이건 추억이 안 될 것 같은데.”

“시, 시끄러. 나도 죽을 것 같단 말야. 집중해서 공부 해.”

“……천하의 나희세까지 저러고 있는데 일개 잡졸인 내가 어찌.”

“다, 닥쳐. 추억에 남을 만한 공부를 하라니까.”



나와 유진이는 만담을 나누고 있다. 실은 둘 다 공부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말 한 마디 나누려는 것이다. 벌써 시간은 9시. 공부를 시작한 지 12시간 근접. 노동법에도 인간이 8시간 근무하도록 보장하고 있는데. 물론 선진국인 대한민국은 12시간 노동이 일상이라고 들었지만, 진짜 이렇게 12시간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공부만 하려니 죽을 것만 같다.

물론 중간에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와플도 먹고, 꽤 쉬곤 했지만. 우리나라 발전기의 노동자 여러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해야겠다. 놀며 앉아서 공부하는데도 12시간 하니 이렇게나 질린데.


내 말대로, 희세조차 멍하니 휴대폰을 보고 있다. 성빈이는 엎드려 숨을 쉬고 있다. 안정적인 들숨날숨은 깊은 수면을 의미하는 것 같다. 민서도 지친 표정으로 나와 유진이를 보고 있고, 미래는 이제 아예 다른 사람이 돼 버린 듯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다. 좀 무서울 정도인데, 미래는.



“미래야. 죽었어?”

“……네?”

“아니. 너무 기가 죽어 있으니까.”

“……하하. 방학이에요. 신나는 방학. 저 보충수업 신청도 안 했어요. 35일동안 막 놀 거에요. 바다다! 신난다! 에헤헤.”

“야야 정신차려! 빙의했어?! 근미래! 정신 차려!”



하루종일 아무 말도 드립도 못 치고 그저 책만 보라고 하는 건 미래에겐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는지 모른다. 단 12시간만에 폐인이 된 미래. 초점없는 무서운 눈으로, 동공이 활짝 열린 채 말하는 미래는 진짜 무섭다. 컨셉이 아니라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아 나는 놀라서 황급히 미래의 어깨를 흔들어댄다.



“진짜, 괜히 공부 잘 하는 게 아니구나, 희세나 성빈이나. 엉덩이 엄청 무겁네, 도통 나처럼 돌아다니질 않아.”

“우흥♡ 성빈이는 좀 그렇지만, 희세는 확실히 엉덩이 무겁겠지. 몸매가 육덕지니까.”

“무, 무슨 말을……!”

“그렇잖아? 성빈이는 좀 슬랜더한 타입이지만. 아, 그런 주제에 가슴은 나보다 큰 것 같은데.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짜증나.”

“……뭐, 너는 예전 다이어트 때문에 빠졌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나 작다 어쩔래?! A컵이다 뭐!”



애들 정신도 차리게 할 겸 음료수를 뽑으려 계단으로 내려왔다. 학원임에도 자판기가 있다. 유진이와 함께 내려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나는 잔뜩 공부하기 싫어서 자꾸 일어나 돌아다니지만, 희세나 성빈이는 전혀 안 움직이고 공부만 하니까.

유진이는 싱긋 웃으며 섹드립을 친다. 뭐랄까, 유진이의 장난은…… 사감 선생님의 섹드립 조금 약하게 한 것에, 특유의 비꼬는 듯한 묘하게 기분 나쁜 얘기에 미래의 드립력 조금 약하게 한 것, 세 가지를 합친 것이랄까. 세 가지가 미묘한 시너지 효과를 내서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대화의 흐름대로 가니 유진이는 잔뜩 성을 내며 가슴을 쭉 편다. ……A컵이라고 하기엔 되게 도드라져 보이는데. 충분히 괜찮아 보이는데.



‘드르륵, 덜컹.’

“애들은 됐고. 유진이 너는 뭐 먹을래?”

“민서는, 어떻게 할 거야?”

“응?”



애들 음료수를 뽑고, 민서의 취향을 물어보는데 유진이는 눈을 그윽하게 뜨며 묻는다. 민서는 따뜻한 캔커피 뽑아달래서 그걸로 뽑았는데. 뭘 어떡하라는 거지.



“나는, 어차피 끝났으니까, 웅도 좋아해도 소용이 없지. 미래는, 예전에 고백했다 차였다니까 나랑 비슷하고. 그럼, 민서는. 민서한테는 아무 감정도 없어?”

“아, 아, 아니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그냥, 너무 둔감하다고 해야 하나. 웅도 보면, 좀 답답하거든. 뭐, 어지간히 둔해도 희세나 성빈이가 좋아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아무리 바보라도?”

“……뭐, 그건. 알고 있는데.”

“알고만 있으라고. 민서도, 있다고. 좋아하고.”

“…….”



유진이의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 얼굴이 빨개진다. 체념한 듯 달관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말하는 유진이. 괜히 심장이 더 두근거린다. 가뜩이나 희세나 성빈이 생각만으로도 복잡한데, 거기에 민서까지……?! 아니, 민서가 내가 뭐가 좋다고. 다이어트는 그냥 도와준 건데. 딱히 내가 호감 살만한 짓을 했나, 민서한테? 도리어 멋대로 굴고 버릇없게 군 게 더 많은 것 같은데. 민서 기분 나쁠 만한 짓도 많이 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 민서는 정말 모르겠는데. 유진이의 뼈 있는 말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



밤 깊은 때. 나 혼자 깨 있다. 결국엔 전멸인가, 싶은데. 나도, 엄청 피곤하지만, 도통 잘 수가 있어야지. 아까 유진이의 그 말 때문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런 생각만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지만, 어쩌겠어. 자꾸 생각나는데.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인공적인 형광등의 불빛 아래 혼자 일어나 애들을 쳐다본다. 다 엎드려서 자고 있다. 시간은 새벽 3시. 이럴 거면 정말, 그냥 밤까지만 공부하고 집에 가서 푹 쉬는 게 좋을 텐데. 추억일까, 이런 게. 천천히 거닐며 민서를 바라본다.

볼이 포동포동하다. 쌔근쌔근 잘도 자고 있다. ……귀엽네. 아씨, 유진이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괜히 더 신경 쓰이잖아. 어째 살도 많이 빠져서 되게 예뻐 보이고. 으으, 안 돼 안 돼.


문득 희세를 보니 되게 추워 보인다. 다른 애들은 적당히 두꺼운 옷이나 가디건이나 얇은 점퍼가 있어 괜찮아 보이는데, 희세는 얇은 면 티 하나 뿐이니. 책상에 웅크리고 가녀리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 원래 잠들면 체온이 내려가잖아. 벗어뒀던 내 얇은 남방을 희세에게 덮어주려 한다. 나는 안 추우니까.



“……!”



마악 옷을 덮어주고 희세의 얼굴을 보러 앞으로 왔는데. 엎드려 있는 바람에 꾸욱 눌린 희세의 가슴. 가뜩이나 크고 아름다운데, 그렇게 눌리니까…… 잠깐만, 무슨 이상한 생각 하는 건데?!


잘도 자고 있는 희세. 탱글탱글한 볼살을 꾸욱 찔러보고 싶다. 볼살 보다는 더 탱글탱글할 것 같은 다른 부위가…… 끄악! 안 돼!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으음.”

“아. 일어났네.”

“……몇 시야?”

“3시.”

“……아, 안 잤어야 했는데. 기어이 잤네. 아후.”

“좀 자면 괜찮잖아.”

“다른 애들도 깨워줘. 이러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

“으응.”



숨을 죽이고, 천천히 희세를 쳐다보며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가는 나. 점차 손은 검지만 내밀고, 꾸욱 찔러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찰나. 희세가 몸을 움직이며 부스스 일어난다. 흠칫 놀라 얼른 자세를 바로하고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희세는 별달리 이상한 기분을 받지 않는 모양이다. 하아. 죽을 것 같다. 사람은 역시,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면 안 돼. 으으…… 희세가 조금만 늦게 일어났더라면…… 완전범죄(?)였을 텐데……!




“아아~ 미친 X나 졸려~!”

“아, 너무 지쳤어. 집에 가서 얼른 씻고 자고 싶어.”

“다들 폐인 됐네. 이런 게 추억일까.”

“……가서 자자. 고생했어. 나 집 갈게.”



결국, 아침 7시. 해가 뜨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기지개를 쭉 켜며 몹시 졸려하는 미래. 제일 많이 잔 게 미래인데. 성빈이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몰골들이 말이 아니다. 그 예쁜 여자애들이 머리는 머리대로 떡지고, 얼굴도 기름이…… 근데 그래도 예쁘네. 헤헷.


유진이는 인사불성이 돼서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혼자 훌쩍 가 버린다. 민서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희세조차도 피곤해서 눈을 반 정도밖에 못 떴다. 그래도, 어떻게 밤새 공부를 했다. 머리에 들어왔나 어쨌나 모르겠지만. 여러분, 시험공부는 밤세서 하지 맙시다. 차라리 일찍 자고 아침 일찍 개운한 상태로 일어나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직접 밤 새 보니까. 나는 혼잣말을 누구한테 하는 거지.



“잘 가.”

“응~”

“또 하루종일 자지 말고. 조금만 자야 밤에 자니까 다들.”

“네네~ 어머님~”

“……누가 어머님이야!”

“아하핳! 잔소리 너무 하잖아~!”



끝까지 아이들을 챙기는 말을 하는 희세. 어른스럽다. 끝까지 그런 희세를 놀리는 미래. 10몇시간 만에 드립을 치는 미래의 표정은 무척 밝다. 나도 웃음이 지어진다. 아, 피곤하다. 집에 가서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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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10화. 약속했어, 기다려 줘. +12 15.09.24 1,023 18 16쪽
180 09화 - 4 +12 15.09.22 952 25 17쪽
179 09화 - 3 +8 15.09.21 1,034 26 21쪽
178 09화 - 2 +9 15.09.20 894 21 17쪽
177 09화. 힘들지만 안녕, 하고 말하기 +8 15.09.19 1,233 16 19쪽
176 08화 - 4 +12 15.09.16 939 18 19쪽
175 08화 - 3 +10 15.09.15 1,065 19 21쪽
174 08화 - 2 +12 15.09.13 1,005 20 19쪽
173 08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16 15.09.11 960 20 19쪽
172 07화 - 3 +10 15.09.09 1,098 17 20쪽
171 07화 - 2 +16 15.09.08 937 17 19쪽
170 07화. 말했을 텐데. +10 15.09.06 1,037 20 18쪽
169 06화 - 4 +6 15.09.04 999 18 23쪽
168 06화 - 3 +10 15.09.01 1,048 20 21쪽
167 06화 - 2 +8 15.08.30 1,006 19 19쪽
166 06화. 일장춘몽 +12 15.08.27 1,221 68 20쪽
165 05화 - 4 +18 15.08.24 1,215 25 18쪽
164 05화 - 3 +14 15.08.22 1,108 21 19쪽
163 05화 - 2 +8 15.08.20 945 27 19쪽
162 05화. 너를 내 것으로 하겠어 +12 15.08.18 1,175 16 19쪽
161 04화 - 2 +10 15.08.15 919 27 17쪽
160 04화. 마음만큼은 나도. +10 15.08.11 1,121 2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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