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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199
추천수 :
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5.09.1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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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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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글자
21쪽

08화 - 3

DUMMY

“한 가지, 맹점이 있네요. 제 계획에.”

“음? 맹점? 뭔데?”

“……저흰 B반이잖아요! 선생님은 A반 가르치고! 이래선 어떻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아, 그렇네.”

다섯 명이서 점심을 먹으며, 미래의 얘기를 등고 있다. 등나무가 뒤덮고 있는 벤치에서 도시락 점심. 나름대로 운치 있다. 어차피 다 왕따가 되었으니 다른 애들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롭게 다같이 밥을 먹는다. 미래의 말에 민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 미래 민서는 B반. 희세, 성빈이는 A반.

“이 똥멍청이! 왜 떡밥을 물어와도 듣지를 못 하니!”

“같은 똥멍청이끼리 디스는 하지 맙시다. 영어 B반이면 중간은 가는 건데.”

“그, 그럼 어떡해? 우리는 못 듣는 거야?”

“뭐, 어쩔 수 없지.”

미래의 디스에 나는 잠자코 튀김을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미래의 성격이라면 당장이라도 ‘몰래 난입해요!’ 하고 말할 것 같지, 그건 도저히 못할 짓이지. 멋대로 선생님 수업에 영향을 끼친 것도 죄송한데, 거기에 수업 난입까지 하다니. 죄송한 건 둘째고 잔뜩 혼날걸. 민서의 걱정스런 물음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희세와 성빈이에게 맡길 수밖에.

“이렇게 된 이상 강행 돌파한다.”

“안 돼.”

“아아앙! 그럼 어떡하게요!”

“선생님한테 그런 부탁 한 것도 민폐인데, 그런 짓까지 할 순 없잖아.”

“지금 상도덕이고 나발이고 지킬 게 아니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쨌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여. 안 돼.”

내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대답을 하는 미래. 완강하게 거부한다. 생각해보면 그렇잖아. 우리가 못 본다고 딱히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희세와 성빈이가 잘만 해주면 되는 거니까, 둘에게 맡기면 되잖아. 미래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열심히 팝콘 팔면서 구경할 생각인 것 같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선생님한테 죄송하잖아. 미래는 어린애처럼 생떼를 부리지만 나는 바윗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정웅도. 잠깐 볼까.”

“어? 어…… 지금?”

“밥 다 먹고.”

“응, 알았어.”

문득 희세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굳이 성을 붙여가며 ‘정웅도’라고 부르는 걸 듣고 있자니 상당히 어색하다. 희세와 나의 사이가 멀어졌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구나. 씁쓸한 기분이 몰아친다. 그래도 뭐, 어쩔 도리가 있나. 내가 뿌린 씨앗을 내가 거두는 건데. 밥은 거의 다 먹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희세를 따라간다. 다른 애들은 힐끔 내 눈치를 본다.


“할 말 있어서.”

“응.”

보안(?)을 요구하는 말은 보통 구교사 뒤편이나 그런 으슥한 곳에 가서 한다. 주위에 애들이 없는 곳에서 해야 마음이 놓이니까. 하지만 희세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자판기 앞 쉼터. 그리 보안을 요하는 대화는 아닌 것 같다.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도도한 말투로 입을 여는 희세. 잘 빠진 희세의 각선미를 멍청하게 쳐다보다 얼른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리유……랑 헤어졌잖아. 너.”

“……응. 그렇지.”

애써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 애쓰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상처를 희세가 다시 건드린다. 삽시간에 내 얼굴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리유에 대한 얘기는 정말, 어지간하면 꺼내지 않았으면 했는데. 희세 또한 꽤나 엄숙한 표정이다.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금 입을 연다.

“리유, 어떤 상태인지 알아?”

“어떤 상태…… 라니?”

설마. 리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저번 이후로 리유에게는 거의 전화 못 했는데. 사과도 간신히 했는데. 병이라도 걸렸다던가, 아파서 누워있다던가?! 아니, 그보다 그런 걸 희세가 알고 있어? 희세도 리유랑은 연락하기 굉장히 껄끄러울 텐데?! 긴장된 얼굴로 희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희세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나를 쳐다본다.

“지금까지는 늘, 리유 거기서 잘 지낸다고만 알고 있었지.”

“어…… 응, 그렇지. 목소리도 밝고, 잘 지낸다고 말했으니까.”

“그게, 거짓말이야. 실은 힘들데. 적응도 영 못하겠고. 게다가 너랑 내가…… 그런 식으로 한 사진을 보냈으니. 멘탈 터져도 한참 터졌겠지?”

“……아?”

희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나. 아닌 게 아니라 리유의 밝은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귓전에 울리는 것 같은데. 리유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아서, 거짓말을 절대 못 하니까. 거짓말 하려고 하면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나서 대번에 들키는 타입이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희세의 말에 나는 굉장히 얼빵한 표정이 되었다. 뭐……라고? 거짓말이라고……? 리유가, 잘 지낸다고 하던 게, 전부……?

“그럴 리가 없는데. 리유는 거짓말 못 해. 분명히 잘 지낸다고, 친구도 사귀고 잘 지낸다고 했는데……?”

“전화, 했었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어떻게든 풀었는데. 차마 너한테, 나한테, 우리한테 보고 싶다고, 힘들다고 어린애처럼 징징댈 수는 없으니까. 꾹 참고 거짓말했다고 하더라. 리유도,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니까.”

“……아아.”

내가 아는 대로의 리유를 한정시켜서 희세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리유는 결코 그렇지 않으니까. 하지만 희세의 말에 다시금 멍청한 얼굴이 된 나. 리유는 새장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갔고, 그만큼 성장했다. 내가 아는 그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리유는 아닌 것이다. 기뻐해야 할 일인데 나는, 뭔가 굉장히 기분이…… 안 좋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바보처럼 난.

“뭐, 지금은 지금 일에 집중해야겠지만. 어쨌든,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고마워.”

희세의 볼멘소리에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런저런 신세만 지는 것 같다, 희세에게. 마음도 헤아려주지 못해 상처만 잔뜩 줬는데. 그러면서도 어색해서 말도 잘 못하는 못난 녀석이 바로 나다. 희세는 나에 대한 용무가 끝났는지 잠자코 자리를 뜬다.


리유에게 전화를 할까말까, 수십, 수백, 수억번 고민을 하다 결국 하지 않았다.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괴롭고 미안하고,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떠올라서. 리유 이름만 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아, 이따 야자 끝나고 저희 집 오실래요?”

“음? 그 밤중에 왜.”

“후후후…… 그거 말이에요 그거. 라면 먹고 갈래요?”

“밤에 라면 먹으면 살 쪄.”

“아 쫌! 알아 들었으면 받아 줘야죠!”

“알아 들어도 그건 싫다.”

“무슨 얘기?”

“민서 너는 몰라도 돼.”

“히잉…….”

미래는 힐끔 유진이의 눈치를 살피더니 나에게 말을 건다. 다른 애들과 얘기하고 있어 멀리 떨어져 있는 유진이. 난데없는 섹드립을 간파한 나는 미래의 드립을 받아주지 않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생떼 부리듯 짜증을 내는 미래. 고개를 저으며 완강하게 대답한다. 이렇게 나가지 않으면 미래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까지 나가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민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순수한 민서에게 이런 것(?)을 알려줄 순 없기에 대충 넘긴다. 시무룩한 표정이 되는 민서.

“근데, 밤에 왜? 가는 거야 상관없는데.”

“그…… 탑 시크릿 기밀엄수 그거…… 이름을 말해선 안 되는 그거…… 쉿! 절대 그것의 이름을 말해선 안 돼…….”

“아, 녹음본?”

“미쳤어요?! 말하지 마요! 정말, 애써 비밀로 하는 보람이 없잖아요.”

“너한테만 들리게 말했잖아.”

“그게 다 들린다니까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귓말 하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생 중 드물게 자취를 하고 있는 나이니, 사실 밤에 어딜 싸돌아다녀도 전혀 지장이 없는 몸이다. 뭐, 집에서 학교 다녔다고 해도 우리 엄마는 자식에 대한 방침이 방목형이어서 마찬가지였겠지만. 미래는 첩보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위 눈치를 잔뜩 살피며 목소리를 급격히 낮추고 말한다. 물론 미래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는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 요즈음은 이렇게 엇박으로 미래 놀려먹는 것에 재미가 붙었다.

“어쨌든, 밤에 그거 작업하려고 하는데 오빠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그런 거 전혀 할 줄 모르는데.”

“그냥 옆에만 있어 줘요. 혼자 하면 심심하니까.”

“그래. 내가 응원해줄게, 옆에서.”

“……다른 방면으로 응원해주시면 더 힘이 날 수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그그그…… 아, 제 입으로 어떻게 말하라구욧~~!”

“말 해 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 진짜!”

눈을 샐쭉 뜨고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섹드립을 치려는 미래. 예전 같으면 당황한 기색이 되어 ‘어버버’ 얼빠진 표정을 지었을 나지만, 지금은 미래자격증(?) 1급인 나이기에,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미래는 역정을 내듯 짜증을 부린다. 피식 얼굴에 웃음이 걸린다. 뭐, 그래도 미래 덕분에 이런저런 일 할 수 있으니까.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꽤나 유쾌한 장난이지. 어쨌든 알았다고 대답하고 가는 것으로 했다.

“음료수 사주라.”

“어…… 물을 마시면 되지 않을까?”

“돈 아까워서?”

“아니, 농담이지. 가자.”

“응, 나도 농담이야. 내가 살게.”

“아아니, 남자가 말을 꺼냈으면 지켜야지. 내가 산다!”

“흐흣.”

먼저 다가와 말하는 성빈이. 장난스런 웃음이 가득하다. 피식 웃으며 대답하니 싱긋 웃으며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성빈이. 어디까지나 장난이다. 좋은 분위기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한다.

‘치익, 탁.’

“먹고 살기 힘드네. 수업도 힘든데 이런 일까지 당하려니.”

“하핫. 무슨 회사 부장님 같애.”

“부장님은 본 적도 없는데. 취업 하려면 10년 뒤에나 할 수 있을 텐데.”

자판기 앞 쉼터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성빈이와 간단히 담소를 나눈다. 원래 그러라고 마련된 쉼터니까.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니 숨이 트이는 것 같다. 어쨌든 따돌림은 따돌림이다. 아무리 단련되었다 해도 군중 속의 고독을 버티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지. 실질적으로 보면 세 번째 같기도 하고. 맨 처음 여고 왔을 때 기묘한 생명체 보듯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당한 것까지 합친다면.

“조금…… 이해가 안 돼.”

“음. 유진이?”

“응.”

음료를 마시며 넌지시 말을 꺼내는 성빈이. 잠자코 대답하는 나. 대답하고 말이 없는 성빈이. 손가락으로 책상에 선을 긋다 문득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고 입을 연다.

“그렇게까지 해서, 웅도를 가진다면 의미가 있을까.”

“음…… 글쎄. 그 웅도라는 애가 참, 매력 있나 보네.”

“……푸흡. 웅도도 많이 변했네. 성격 되게 능글맞아.”

성빈이의 말은 묘하게 의미가 갈린다. ‘그런 짓까지 해서 가진다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뜻과, ‘그렇게까지 해서 가지는 「웅도」가 의미가 있을까’ 하는 뜻. 전자면 흐뭇한 의미지만 후자라면. 근데 뭔가 후자 같기도 하고. 잠자코 엄청난 자화자찬이 담긴 개드립을 친다. 피식 웃는 성빈이. 그래, 이 자연스런 웃음을 의도한 장난이지. 내가 나를 아는데. 그렇게 잘 생기지도, 매력이 있지도 않은 걸 나 자신도 잘 알아. 이 개그 쳤는데 안 웃고 정색하면 엄청 어색했을 텐데. 그래도 성빈이가 잘 웃어줘서 다행이다.

“충분히, 매력 있긴 하지만.”

“어…… 그런가.”

“응. 잘 생겼잖아.”

“아…… 누구 얘기?”

“너.”

“아니아니, 전혀 아닌데. 전 세계의 거울과 사람들이 내 정신을 조작한 게 아니라면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는데.”

문득 손으로 턱을 괴고 지그시 나를 보며 말하는 성빈이. 자, 잠깐만. 약간 얼굴에 홍조를 띄고, 그렇게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그런 말 하면 나는 어떡하라고. 당황스러워서 시선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갈 곳 잃은 눈길은 성빈이의 음료수만을 쳐다보게 되고, 말 또한 더듬더듬 횡설수설 하게 된다.

“그리고 착하구, 배려심 많고, 행동력 있고. 멘탈도 강하고.”

“뭔가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것 같은데. 분명하게 그것과 정반대인 사람이 바로 정웅도인데요.”

“아니야. 웅도 너는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 하는 경향 있으니까. 충분히, 그만큼 할 정도로 매력 있어.”

“……그렇게까지 칭찬하면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는데.”

“그것도 귀여워, 히힛.”

“……!”

연신 이어지는 성빈이의 칭찬에 껄끄러워진 나. 적극적으로 나를 깎아내리기 위한 변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빈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굉장히 부끄러워져 얼굴이 빨개진다. 꽤나 오래 알고 지낸 성빈이지만, 이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는데.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었지 이렇게 대놓고 칭찬해주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솔직하게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니 성빈이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말한다. ‘귀엽다’라니……! 도저히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얼굴만 잔뜩 빨개져서 입을 다물었다. 성빈이도 자기가 말 해놓고 부끄러운지 혀를 쭉 내밀고 고개를 돌려 음료수를 마신다.

“아, 왠지 덥네!”

“으, 응! 이제 여름 다 돼 가니까!”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당황한 느낌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하는 성빈이. 나도 마찬가지로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진짜, 엄청, 왜 이러는 지 모르겠지만 당혹스럽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성빈이가 아닌 것 같으니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성빈이는!

……그게 싫냐면, 뭐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까.

“음, 아, 어쨌든.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유진이.”

“그렇지. 그래도, 그…… 나쁜 마음은 아니었을 거야. 너무 과하게 나간 걸 거야.”

“음. 역시, 웅도 단점. 너무 착하다는 거? 착한 정도가 아닌 것 같애. 사람이 바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아니. 그렇다고 범죄자 낙인찍고 그 범죄자는 평생토록 다른 사람들하고 놀지도 말도 못 하고 낙오시켜버리는 그런 시스템이야? 갱생의 기회 정도는 줘야 하잖아. 아무리 죄인이라도. ‘죄인’까지는 아니지만, 유진이가.”

“당사자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그래도 맘에 안 들어. 희세나 미래가 방금 웅도 한 말 들었으면 엄청 뭐라 했을걸?”

“그렇겠지. 특히 미래는 X랄발광을 했겠지.”

“흐흐흣.”

내 말에 성빈이는 눈을 흘기며 말한다. 그 착한 성빈이조차 이런 말을 할 정도면, 과연 유진이가 애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실제로 본 건 희세와의 대화뿐이지만.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닐 테니까. 침착하게 논리를 설명하니 성빈이는 그래도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내 대답에 입을 가리며 웃는 성빈이. ……괜히 더 예뻐 보이네.


“……어떻게 됐든 진흙탕 싸움 아닐까.”

“갑자기 도덕적 반성인가요? 왜요?”

“아니, 그냥.”

밤 10시 30분. 원래 학생들은 일찍 자야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데. 구미의 애들은 10시, 11시면 잔다던데. 그래서 키도 크고 다 큰 건가. 미래네 집에 왔다.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미래 방에 들어가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말을 꺼냈다. 미래는 컴퓨터에 앉아서 애들에게 받은 녹음 파일을 정리하고 있다 힐끔 나를 보며 말한다.

“어쨌든 바람피운 건 사실이고. 리유하고 헤어진 것도 사실이잖아. 유진이는 단지 그걸 소문을 냈을 뿐이고. 뭐, 과장하고 두 얼굴을 가진 가면을 만든 것도 있지만 어쨌든. 누구 하나 겨 묻은 거 없지는 않잖아.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자격이 있나 싶어서.”

“흐흥. 과연, 그 정웅도다운 생각이군요. 오빠 같은 사람은 정치 하면 안 되겠어요. 그대로 휩쓸려서 공천 말아먹고 탈당 당하겠죠.”

“……뭔 말이야.”

“아뇨, 우유부단한 오빠답다는 거죠. 이걸 들어봐요.”

“?”

「뭐! 늬들끼리 작당하고 뭐라도 하게? 해볼테면 해 봐!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이미 끝난 게임이야! 뭘 한다고 대세가 바뀔 것 같애?! 어!」

“……무섭네.”

“그쵸? 저쪽에서 이토록 호전적으로 나오는데, 가만히 있는 게 어디 예의인가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미래. 피식 웃으며 어물쩍 넘어간다. 그리고는 컴퓨터에 옮긴 녹음 파일 중 하나를 재생한다. 발악하듯 격앙된 목소리. ……도저히 유진이 목소리라고는 상상이 안 되는데. 표정도 잘 연상이 안 된다. 미래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여간 재미있지 않은 모양이다.

“진흙탕 싸움이죠. 괴벨스의 이런 말도 있잖아요. 전부 거짓보다는, 99%의 거짓과 1%의 진실이 더욱 속이기 쉽다고. 하물며 이건 꽤 많은 부분은 사실이니까. 그치만, 저는 또 이런 격언도 알고 있어요. 잘 들어요.”

“……뭐?”

“이겨도 X신, 져도 병X이라면. 승리한 XX가 돼라. 어때요. 좀 의욕이 생기나요?”

“하아. 하하하. 허탈한데.”

“당당히 앞으로 나가야 할 사람이 그러면 어떡합니까! 힘 내요! 저는 열심히 작업을 할 테니, 오빠는 누워서 잉여 때리고 계세요!”

“아아. 고생이 많네.”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미래. 허탈한 결론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위로가 된다. 그래,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자는 대로 하자. 이제 와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그런 것보다 내가 하는 건 전혀 없기도 하고. 지금도 파일 정리하고 만드는 건 미래고. 그걸 재생하는 건 희세와 성빈이니까. 나는 뭐, 당사자 정도일까.

“음. 그럼 그건.”

“에에. 나니? 난노 코토바?”

“그…… 애들이 나 좋아하는 거.”

“뭐가 문제죠?”

“그럴 자격이 있나 싶어서.”

“음? 이미 정웅도 하렘 정식으로 출범한 거 아니었나요? 아라라기 하렘 같은 것처럼.”

“뭔 소리야!”

아까 전 성빈이의 당돌한 태도도 그렇고, 희세도 그렇고, 다 신경 쓰여서 넌지시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 나를 당황케 만든다. ‘정웅도 하렘’이라니, 무슨 개소리야!

“정실부인, 정리유. 아, 이혼했구나. 어쨌든. 전(前) 부인 정리유.”

“너는 날 두 번 죽이냐!”

“거유 츤데레 희세.”

“겨우 그 다섯 글자로 희세를 규정하지 마!”

“소꿉친구 포지션 성빈이.”

“성빈이 내 소꿉친구 아니거든!? 그런 낭만 가득한 미소녀 소꿉친구 같은 거, 현실에 있을 리 없잖아! 고등학교 때 만났다고 성빈이!”

“나머지 기타 등등. 완벽히 정웅도 하렘인데요?”

“아니이…… 하아.”

숫제 장난기 가득한 미래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이 문제는 어떻게 미래에게 답을 구할 수가 없겠다. 한숨을 쉬며 말을 끊었다. 미래는 한참 스페이스 바를 누르며 녹음본을 수정하다 힐끔 시선을 나에게 돌린다. 그러더니 성큼, 침대 쪽으로 다가온다.

“뭐, 뭐, 뭐하는……?”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건, 그렇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누가 누구보다 상위호환이네, 다른 남자애는 너보다 나한테 훨씬 시간도 돈도 많이 투자해줄 수 있는데. 다른 남자애는 너보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그런데. 그럼 그 남자애 좋아하라 그래요. 그럼 그 여자애 좋아하라 그래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좋아해 줄 때 잘 챙겨줘요. 노래 중에 그런 것도 있잖아요. 있을 때 잘하라고.”

미래는 침대에 올라온다. 그러더니 누워있는 내 위에 올라탄다. 흠칫 놀라 피할 겨를도 없이 미래를 쳐다보니 미래는 길게길게 말을 꺼낸다. 그건, 미래의 이성관일까. 맞는 말이긴 하다. 미래는 어깨까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를 내려다본다. 묘하게 섹시한 눈빛으로.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근데 왜 그걸 내 위에 올라와서 말하냐.”

“아니…… 아무리 저라해도, 이런 야밤에 여자애 침대에서 그렇게 도발적으로 있으면……♡ 흥분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야, 야, 야! 뭐하는……! 미친, 떨어져! 야, 야! 잠깐만! 진짜 서(?)!”

“하앗♡ 그럼 더 분발해야죠! 끝까지, 끝가지 간다!”

“야야야야야야아! 미친! 어머니! 제발! 살려주세요!”

“흐응♡ 역시 오빠는, 줘도 못 먹네요. 그치만 이번엔, 푸아그라 만드는 것처럼 목구멍에 관 처박고 멕여버릴 거니까, 빼도박도 못해요, 오빠는♡”

“으아아아아악!!”

……여자애한테 순결을 빼앗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미래는. 나는 미래와 아무 감정도 없다. 하지만 육체는 그런 게 아니니까. 결국 마음대로 반응한 내 신체는, 본능에 따라 어쩔 도리 없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안 되잖아! 필사적으로 미래를 밀쳐내고 일어나 저지했다. 숨을 헐떡이며 구석으로 가 ‘너…… 나 이러려고 만나?!’ 하고 여자애처럼 앙탈을 부렸다. 반 정도는 드립을 가미한 말. 미래는 그런 내 말에 빵 터져서 자지러지듯 웃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미래는 역시, 한 미래 한다.

비상 상황을 대비해서 미래 방문을 열어놓고, 한동안 미래가 음원 만드는 것을 구경하며 두런두런 얘기하다 11시를 훌쩍 넘어 자정이 다 되어갈 때 즈음 집에 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했는데도 미래랑은 어색함이 없다. 과연, 미래랑은 정말 격의없이 친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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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10화. 약속했어, 기다려 줘. +12 15.09.24 1,022 18 16쪽
180 09화 - 4 +12 15.09.22 951 25 17쪽
179 09화 - 3 +8 15.09.21 1,033 26 21쪽
178 09화 - 2 +9 15.09.20 891 21 17쪽
177 09화. 힘들지만 안녕, 하고 말하기 +8 15.09.19 1,232 16 19쪽
176 08화 - 4 +12 15.09.16 938 18 19쪽
» 08화 - 3 +10 15.09.15 1,064 19 21쪽
174 08화 - 2 +12 15.09.13 1,004 20 19쪽
173 08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16 15.09.11 959 20 19쪽
172 07화 - 3 +10 15.09.09 1,097 17 20쪽
171 07화 - 2 +16 15.09.08 936 17 19쪽
170 07화. 말했을 텐데. +10 15.09.06 1,036 20 18쪽
169 06화 - 4 +6 15.09.04 998 18 23쪽
168 06화 - 3 +10 15.09.01 1,046 20 21쪽
167 06화 - 2 +8 15.08.30 1,005 19 19쪽
166 06화. 일장춘몽 +12 15.08.27 1,220 68 20쪽
165 05화 - 4 +18 15.08.24 1,213 25 18쪽
164 05화 - 3 +14 15.08.22 1,104 21 19쪽
163 05화 - 2 +8 15.08.20 943 27 19쪽
162 05화. 너를 내 것으로 하겠어 +12 15.08.18 1,174 16 19쪽
161 04화 - 2 +10 15.08.15 918 27 17쪽
160 04화. 마음만큼은 나도. +10 15.08.11 1,120 2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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