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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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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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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5.09.2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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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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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21쪽

10화 - 2

DUMMY

“저…… 선생님, 이젠……!”

“뭐. 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겠다? 나한테 빚진 것도 있는데?”

“아, 아닙니다.”

조심스럽게 선생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낸 나. 선생님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얼른 눈을 땅으로 향한다. 나는 풀을 뽑는 기계다. 나는 예초기인 것이다. 태고의 예전부터, 나는 풀뽑기만을 위해 존재한 것이다.

……군대 가면 여름에 풀 많이 뽑는다는데, 어째 고2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그것에 대한 예행연습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봄날이 한창 무르익은 이 시기, 꽤 덥다. 목장갑은 벌써 흙빛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으아아아!”

“어머. 뭐야? 로봇의 반란이야? 로봇은 3원칙에 따라서 얌전히 일이나 해야지?”

“로봇 아니에요! 이럴 거면 애초에 저번에 약조했던 부탁 한 가지 소모하는 걸로 하시던가! 아니면 정당한 대가를!”

“후후후. 말이 많으시네. 정말, 내가 돈을 줄 거라고 생각하고 풀 뽑고 있었던 거야?”

“노동법 위반이에요! 사기에요 사기! 에이씨!”

‘툭.’

가만히 풀을 뽑다가 생각한다. 나는 로봇이 아니니까. 내가 지금 여기서 왜 풀을 뽑고 있지. 한 번 든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내 합리적이고 조리 있는 사고를 하게 된다. 괴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렇잖아! 일은 하는데, 돈은 못 받는다니! ‘너는 그냥 왔다갔다만 했으니까 일의 총량은 0J이야, 그러니까 돈을 줄 수 없어’ 이런 논리도 아니고!

“애초에 말야. 네 쪽에서 제대로 네 사정도 안 얘기해주고 대뜸 ‘일자리를 주세요’ 하고 말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일을 시켜달라는데 일을 시킬 수밖에 없지. 어린 나이 임에도 벌써 노동의 가치를 깨우치다니, 꼬꼬마 나중에 커서 대한민국을 지탱할 훌륭한 노예가 되겠구나.”

“그런 게 아니라! 돈! 돈이 필요하다구요!”

“아하. 벌써부터 자본주의의 끝판왕까지. 훌륭해. 늘 돈이 문제지. 육시를 할 돈. 배웠지? 운수 좋은 날, 김첨지?”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안 좋더라니! 아니 이게 아니라!”

선생님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건 늘 같은 패턴이다. 꼭 섹드립이 아니더라도, 선생님은 순수한 말만으로 얼마든지 나를 농락할 수 있다. 그게 문제인데. 선생님의 말장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나. 애써 대화의 주제를 이탈시키지 않으려 애쓴다.

“아 됐어요. 이럴 거면 그냥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말지. 고생하셨습니다─”

“……너말야.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

어차피 장갑은 방금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 땅바닥에 내던졌다. 풀 뽑는 걸 왜 내가 하고 있어야 하나. 다른 애들 시키면 되잖아! ……그래봤자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시켜서 내가 하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쉬는 시간까지 이렇게 하고 싶진 않다고! 호쾌하게 말하고 홀가분하게 걸어가려 하니 선생님은 샐쭉 웃으며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신다. 움찔 자리에 멈추게 되는 나.

“우선,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정상적인 일일까요?”

“버, 법 체계 상으로는 전혀 문제될 게 없잖아요?! 고등학생도 아르바이트 하고 그러잖아요!”

“부모님 동의가 필요할 텐데. 그리고,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 지도. 네가 소년가장도 아니고, 꼭 필요한 돈도 아닐 텐데. 자칫 범죄 같은 거라도 저지르면. 업주들이 그런 네 사정까지 따져주며 굳이 청소년 알바생을 쓸 것 같진 않은데.”

“그, 그건…….”

어떻게든 항거해보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선생님의 말빨에 말릴 수밖에 없다. 내가 말재주가 없는 것보다는, 숨기는 게 있기 때문에 설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게, ‘리유한테 직접 사과하고 리유를 데리러 가러 호주에 갈 건데 그 비행기값을 벌러 가겠다!’는 걸 어떻게 말해. 너무 무모하고 절대 안 들어줄 것 같은 일이잖아. 게다가 한두푼이면 모르겠지만 140만원은. 내 7달 치 용돈인데 한 순간에 단순히 비행기값으로 없어지는 거잖아. 어떤 부모님이라도 들어주지 않겠다, 이런 얘기는. 하물며 선생님한테 말할 수도 없는 노릇. 감추는 게 있으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말에 약점이 많을 수밖에.

“뭐, 너도 너대로 사정이 있을 테니 캐묻지는 않을게. 하지만, 적어도 알기는 알아야겠는데. 담임으로서. 뭣 때문에, 부모님한테도 선생님한테도 말 못하고 돈이 필요한지.”

“…….”

진지한 표정이 되어,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시는 선생님. 나름대로 내 자존심을 지켜주시며 말하시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말을 할 수는 없다. 리유에 대한 일은, 솔직히 더 떠벌리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해결해야 할, 나의 일이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려니 선생님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말을 이어 나간다.

“너희 또래 애들이 돈 필요한 건 뻔하지. 특히나 너 같은 난봉꾼은. 그래도, 마지막 의리는 있구나. 그…… 누구야? 누구 임신 시켰어?”

“……무, 무슨 소리에요?!”

“아아. 불장난 뒤처리 아니었어? 낙태.”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함부로! 아니 그보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하는데요!”

“아하하. 오해라니 다행이네. 그렇잖아. 부모님, 선생님한테도 말 못 하는데 남자 고등학생이 갑자기 돈이 필요해서 알바를 한다면. 게다가 여자애도 잔뜩 꼬인 너 같은 꼬꼬마라면 틀림없이 ‘그거’ 아니겠어.”

“아니에요, 전혀, 전혀!!”

선생님 섹드립 안 치고도 내 말 이긴다는 거 취소! 이건 섹드립의 수준을 넘어섰잖아! 내가 누구를 임신 시킨다는 거야! 그렇고 그런 건 아직 근처에도 못 갔는데! ……사귀었던 리유조차도! 아니 그 쬐끄만 애랑 뭘 해!! 범죄라고, 범죄! 아니, 리유 나랑 동갑이긴 한데…… 사회도덕적으로, 관습법상으로…… 어쨌든! 안 했어, 안 했다고!

선생님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피식 웃으며 다행이라는 투로 말한다. 뭐가 다행인데! 정말 끔찍한 생각 하고 계셨잖아! 선생님은 내 등을 툭툭 치며 ‘그래도 아직까진 젠틀하네. 그렇게 수능 끝날 때까지만 버텨. 뭐, 선생님 추천은 고등학생 때 아다 떼는 거지만.’ 하고 말씀하신다. 선생이 학생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불순한 말일수도 있다구요, 그거!!

“음. 그럼 뭐야. 설마 네가 지지배도 아니고, 새로 나온 휴대폰 사고 싶다고 돈 모으고 그런 것은 아닐테고.”

“그런 거 아니에요! 하아.”

“그치? 안 그렇게 생겼어, 너는.”

“……리유 때문에요.”

더는 참지 못하고 실토한다. 어쨌든 지금은 제대로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이 선생님 뿐이니까. 부모님한테 말하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나마 선생님이, 어른이지만 어른 같지 않게, 친척누나 같은 느낌으로 잘 대해줘서 말을 꺼내는 것이다.

“허어. 아주 지극정성이네. 음. 너희 헤어지지 않았나?”

“……알면서 왜 그렇게 상처를 불로 지지시나요.”

“이런 건 원래 자주 언급해서 액땜을 해 줘야 하는 거지. 헤어졌지. 더 괴로워해. 술이라도 사줄까?”

“선, 생, 님!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

“흐응? 우리 사이에 무슨 선생님은.”

“무슨 사이인데요, 우리 사이!”

내가 아는 선생님은 공과 사가 분명한, 공명정대한 분 같았는데. 지금은 ‘원래 그런 거 아니여!’ 하면서 부정을 일삼는 시골 촌로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숫제 장난이신 것 같지만, 빙글빙긋 웃고 계신 모습을 보면.

“뭐, 더는 묻지 않을게. 이미 헤어졌는데 걔 있는 호주까지 가서 울며불며 붙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데려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호주가 어디 제주도도 아니고, 비행기값이 그렇게 싸지는 않지?”

“……그렇죠.”

“너도 네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얘기는 그쯤하고.”

“……이미 다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응?”

“아닙니다.”

이쯤 되면 무섭다. 선생님은 정말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넘겨짚기 식으로 대충 말하는 투로 말씀하시지만 그게 정확한 진실인데. 대충 넘겨짚은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무섭다.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 그거잖아?”

“넵!”

“……솔직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는 학생, 나는 선생인데.”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죽을래?”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건 아무래도 그거겠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 해도 선생이 학생한테 일자리를 알려줘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당당하게 어디서 말할만한 일은 아니지. 선생님의 입에서 ‘안 돼’ 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개드립을 쳐보지만 도리어 역효과만 났다. 정색하고 나를 노려보는 선생님의 눈초리에 얼른 꼬리를 내리고 사죄한다.

“어디서 내가 해줬다고 하지 마.”

“넵!”

“일 열심히 하고. 내 체면도 있으니까.”

“넵!! 당연하죠!!”

이제야 선생님은 나에게 해결책을 내려주시려나보다. 아, 드디어. 질질 끌면서 희망고문만 당했는데 간신히 일자리를 구하게 됐다. 대학 졸업 후에 느낄 실업난을 벌써부터 느낀 기분이다.


“이모! 여기 불판 좀 갈아줘요!”

“네~”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아주머니지만 ‘이모’를 부르는 말에 얼른 달려간다. 우리나라 식당에서는 종업원을 부르는 말이 암묵적으로 ‘저기요’나 ‘이모’로 통일돼 있으니까.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꽤 능숙하게 고기판을 가는 나. 사뭇 뿌듯하다. 뿌듯해할 시간이 없다. 아르바이트는 신속·정확한 게 중요하니까.

선생님이 알아봐 준 일자리는 고깃집 아르바이트. 학생인지라 몇 달 장기간 일 할 수 없는데다, 단기간에 돈 몇 푼 버는 게 목적인 나에게 적절한 일자리다. 거기다 일 자체도 그리 뭘 가르칠만한 게 없는 단순노동이고, 학생이 한다고 해서 시선이 나쁘다거나 할 것도 없는 일이기에. 무엇보다 주말 같은 때에 손님 많을 때에만 필요한 용도로 아르바이트생 고용해서 쓰기 딱 좋은 구조니까.


”희라네 반 녀석이라고! 자식, 일 못하게 생겼는데. 잘 못 하면 얄짤없어이?? 일 열심히 해!”

“넵! 시켜만 주십시요!”

주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소개받은 가게에 가 설명을 하니 걸걸하게 생긴 사장 아저씨가 호쾌하게 말씀하신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나도 의지를 불태우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멀뚱히 서 있다가 ‘저, 무슨 일을 하면 되죠?’ 하고 물어본다. 아저씨가 이것저것 어떤 일을 하고 여기엔 뭐가 있고, 이런 것을 채 다 알려주기도 전에 손님들이 몰려온다. 이 집 고기가 맛있나보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얼른 일을 시작한다.

“앗뜨뜨! 아유, 죄송합니다.”

공기밥을 들다가 깜짝 놀랐다. 식당에 가면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은 보통 밥공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는데. 생각보다 엄청 뜨겁잖아. 꾸욱 참고 밥공기를 들어 놓는다. 일하는 알바생이 뜨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면 손님들이 뭐라 할 게 뻔하잖아. 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른다.

“여기요! 주문이요!”

“네~”

손님이 많아서 쉴 틈은 없지만, 정말 가끔 기적처럼 아무도 주문을 시키지 않아 남는 시간이 있다. 그런 때엔 휴대폰을 잠깐 보며 쉬지만 지금처럼 다시금 주문이 오면 바람처럼 달려가야 한다. 톡방에 ‘알바중 힘들어 ㅠ’ 하고 엄살을 부리려다 손님의 주문에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간다. 에이, 남자가 이 정도에 힘들다고 징징댈 수 있나. 그냥 하자.

“후우.”

“짜식, 일 잘 하네. 안 힘들어?”

“넵,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허허. 군생활 잘 허겄네. 몇 학년?”

“2학년이요.”

이어지는 고기 주문에 부엌의 사장님께 5인분 요청을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고기를 옮겨 담으며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벌써부터 군대 얘기는 좀. 실감도 안 나는데. 그래도 칭찬이니 방긋 웃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일은 힘들지만 그래도 사장 아저씨의 칭찬으로 기운이 난다.

“담배 피우냐?”

“아아뇨, 전혀.”

“허허. 그럼 10분만 쉬고 와. 바람이라도 쐬던지.”

“네?”

“쉬는 시간이라고. 손님 내가 받을 턴게.”

“괘, 괜찮은데……요.”

“허허이, 쉬라니깨 안 쉬고그려. 그런 건 회사에서나 그렇게 하고, 여기선 널널하게. 아 나 같은 사장이 어디 있어! 쉬라니까!”

“네, 네!”

몇 시간이나 일했을까. 처음 일해봐서 꽤나 지친 몸. 손님은 끊이질 않는다.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으로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일하려 하는데 문득 사장님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쉬는 시간이라는 말에 마음은 덜컥 얼른 쉬고 싶다고, 대답하라고 하지만 얼른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벌써 나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구나. 허허, 아르바이트 하루 한 것 가지고 사회생활은 무슨. 사장님의 너스레에 나는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좋으신 분이다, 사장님.


“하아…….”

괜히 한숨을 깊게 쉰다.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면 정말 피워보고 싶다고, 저번부터 늘 생각만 했는데. 실제로 담배를 배울 생각은 전혀 없다. 일단 비싸잖아. 그거 피운다고 답답한 마음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10분이라는 쉬는 시간, 딱히 할 건 없다. 무의미하게 휴대폰을 살펴보지만 별다른 할 것은 없다. 애들한테 톡으로 알바한다고 광고하려다 그냥 보내지 않기도 했고.

“…….”

‘뚜─ 뚜─’

침을 꿀꺽. 마음을 굳게 먹고, 전화를 건다. 이어지는 신호음. 신호음이 한 번 한 번 울릴 때마다 내 마음은 더욱 철렁 가라앉는다. 리유에게, 전화하고 있다. 그 때 마지막, 미안하다는 말 하고는 단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았는데.

미래 말마따나 애들과 히히덕대느라 전화를 안 한 건 아니다.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유진이 고백도 받지 않고, 희세에게도 끝낸다는 말을 암시적으로 한 나인데. 솔직히, 아직까지도 리유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하지 못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전화를 할 수가 없었고. 전화하면 더욱, 생각나고 살아날 것만 같아서.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없고 할 자격도 없고 더 할 수 없는 현실이.

‘달칵.’

『……여보세요.』

“어! 어! 그! 정웅도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응.』

상념에 젖은 상태로, 무슨 만화주인공이라 된 듯 피식 패배감에 젖은 미소를 띠는 찰나. 신호음이 끝나고 리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이런 건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아니 그럼 리유가 안 받을 걸로 여기고 전화를 건 거야?! 그게 뭐야, 술 취한 전 남자친구가 술주정 부리는 것도 아니고! ……전 남자친구는 맞는데. 아니 지금 3초 이상 말 안 한 것 같은데?! 방송사고(?)야 방송사고 이러면!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고자 나오는대로 말을 꺼내니 존댓말이 나온다. 볼멘소리로 대답하는 리유. 단순한 대답만 들었는데도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뛴다.

“……어!”

『왜 전화했어.』

“……그게!”

나지막한 리유의 목소리. 내가 알던 리유 목소리가 7~10세 정도라면 지금은 20살 이상은 먹은 것 같은 낮고 조숙한 목소리다. 리유도 이런 목소리 낼 수 있구나 싶다. 사실 그 귀여운 모습은 컨셉(?)이었다던지. 아니, 나랑 전화하니까 이런 잠긴 목소리 내는거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잔뜩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입밖으로 나오진 않는다.

『할 말 없어?』

“……으으! 데리러 갈 테니까! 거기 딱 기다려!”

『에에? 뭐……라는 거야?』

“그렇게만 알아! 끊는다!”

『엥? 뭐야 뭐?? 데리러 온다ㄱ……』

‘툭!’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여전히 어른 같은 목소리의 리유. 그 목소리를 듣자하니 다시금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다. 내뱉듯이, 수줍은 소년이 고백하고 도망치는 양 얼른 말했다. 금세 높은 톤으로 목소리가 올라가는 리유. ‘뭐라는 거야?’ 하는 부분에서 원래 리유의 톤과 비슷한 목소리가 되었다. 아아. 얼마만에 듣는 활기찬 목소리야.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더욱 활기차게, 활기참에서 지지 않겠다는 느낌으로 패기 있게 말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는다. 리유의 의아함 가득한 물음까지 같이 끊어버린 채.

전화를 끊고 한참 숨을 헐떡거린다. 혹시 다시 전화가 오지 않을까? 아니, 그럴 일은 없겠지. 이미 끝난 일 가지고 집착하고 찌질대는 건 내 쪽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하기로 정했으니까, 그런 거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힘차게 든다. 좋아, 다시 일 하러 가자. 이런 찝찝한 기분, 잊으려면 일하는 게 제일이겠지. 가게에 들어가 ‘사장님, 일 시켜주세요!’ 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사장님은 ‘아직 5분밖에 안 지났는디?’ 하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얼른, 주문을 찾는 다른 테이블로 빠르게 달려간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아르바이트 해서 돈을 모았는데.”

“오, 역시. 오빠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군요!”

“역시, 역부족이랄까. 140만원은.”

월요일, 점심시간. 같이 점심을 먹으며 주말 간 있었던 일을 말한다. 물론 선생님이 일을 소개해줬다던가 하는 말은 하지 않고. 뭐, 솔직히 생각해보면 고깃집 알바 같은 건 내 스스로도 구할 수 있는 일이니. 미래는 싱긋 웃으며 내 치킨너겟을 집어 먹으려 젓가락을 내밀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운다. 전혀 보지 않는 척 하며 얼른 미래의 젓가락을 막으며 대답했다.

“토요일 일요일 빡세게 일해서 겨우 14만원인데. 하하, 10주 후면 갈 수 있겠네.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싶데.”

“그래도, 뭔가 뿌듯하지 않아요? 힘들여서 돈 버니까?”

“그렇지. 그렇기야 하지. 사장님한테 일 잘한다고 칭찬 받고.”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번 돈을 오빠가 원하는 데에 쓰지도 못하고 꼴랑 비행기 왕복값에 꼴아박고. 사장님은 장사가 잘 돼서 배가 불러오고. 손님들은 점점 더 진상짓이 심해지고. 그런 거죠, 인생이.”

“……넌 나한테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 거냐.”

하루에 7만원 씩 이틀. 14만원씩 x10 하면 140만원 되겠다. 그런데, 10주 후면…… 그냥 방학이 돼서 리유가 한국에 오지 않을까 싶은데.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겠지만, 역시 현실적인 면은 힘들구나. 미래의 장난스런 조롱도 쉽게 넘기기 힘들다. 진짜 힘들게 돈 벌었는데, 이런 식으로 농담하면 입맛이 싹 사라지지.

“……10주는 안 걸려.”

“응?”

“나도, 도와줄 테니까.”

“어? 뭔 말이야?”

잠자코 말을 꺼내는 희세. 고개를 돌려 희세를 보니 내 시선을 피하며 도시락을 먹으면서 말한다. 약간 상기된 볼은 무언가 말하기 겸연쩍을 때 나타나는 희세의 버릇. 확실히, 목적어나 주어를 빼놓고 돌려 말하고 있다. 딱 부러지는 희세의 성격상 저런 말투는 분명, 뭔가 말하기 껄끄러워서 그런 걸 텐데. 짐짓 모르는 척 물어본다.

“주말동안, 나도 알바 했어. 비행기값, 보태 쓰라고.”

“에엑─?! 그, 그런 건……! 네 돈이잖아, 그건!”

“그럼 너는 뭐 네 돈 아니야. 너 대표로 보내는 거야, 미안한 마음 담아서. 제대로 가서 리유나 데리고 와.”

“……어어, 고마워.”

그러니까, 주말간 희세가 알바해서 번 돈을 나한테 주겠다는…… 그런 말?! 너무 갑작스러워 더듬거리며 대답하니 희세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희세도, 리유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 모양이다. ……뭐 굳이 말하자면 나와 바람을 피운 당사자니까. 굳은 표정으로 희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말이 좋아 ‘준다’지, 자기가 주말 내내 알바한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기가 어디 쉽겠어.

“그럼, 나도 다음주에 알바해서 보탤게.”

“어, 그러면 나도!”

“다들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빠질 수 없죠! 오빠 저도 추가요!”

“그, 그, 그러면 나, 나도.”

희세의 말에 유진이도 성빈이도 미래도 민서도 모두 알바를 하겠다고 말한다. 감격에 찬 눈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애들을 쳐다본다. 싱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성빈이. 미래가 장사꾼 같은 목소리로 ‘그러면 지금 있는 돈이 14 x 2니까 28만원. 다음 주에 6명이 일하니까 14 x 2 x 6 해서 168! 오, 넘어가요 돈!’ 하고 계산을 마친다. 유진이는 ‘와, 그럼 남는 돈으로 회식? 고기 먹자 고기!’ 하고 말한다.

“다들, 고마워.”

“뭐, 어쩌겠어. 다른 애도 아니고, 리유 때문인데.”

“……미안합니다. 다 저 때문이에요. 원래는 제가 140만원을 지불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진지한 목소리로 모두를 보며 말하니 성빈이가 싱긋 웃으며 눈을 찡긋 한다. 유진이는 다시금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쓴웃음을 지으며 유진이를 위로한다. 희세를 쳐다보니 희세는 ‘흥’ 하는 투로 나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참 복 받았네, 나란 녀석도. 병X 찌질이인데 친구들이 이렇게나 도와줘서 사과하러 갈 수 있다니. 뿌듯한 마음으로 마저 점심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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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09화 - 3 +8 15.09.21 1,033 26 21쪽
178 09화 - 2 +9 15.09.20 892 21 17쪽
177 09화. 힘들지만 안녕, 하고 말하기 +8 15.09.19 1,232 16 19쪽
176 08화 - 4 +12 15.09.16 938 18 19쪽
175 08화 - 3 +10 15.09.15 1,064 19 21쪽
174 08화 - 2 +12 15.09.13 1,004 20 19쪽
173 08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16 15.09.11 959 20 19쪽
172 07화 - 3 +10 15.09.09 1,097 17 20쪽
171 07화 - 2 +16 15.09.08 936 17 19쪽
170 07화. 말했을 텐데. +10 15.09.06 1,036 20 18쪽
169 06화 - 4 +6 15.09.04 998 18 23쪽
168 06화 - 3 +10 15.09.01 1,046 20 21쪽
167 06화 - 2 +8 15.08.30 1,005 19 19쪽
166 06화. 일장춘몽 +12 15.08.27 1,220 68 20쪽
165 05화 - 4 +18 15.08.24 1,213 25 18쪽
164 05화 - 3 +14 15.08.22 1,104 21 19쪽
163 05화 - 2 +8 15.08.20 943 27 19쪽
162 05화. 너를 내 것으로 하겠어 +12 15.08.18 1,174 16 19쪽
161 04화 - 2 +10 15.08.15 918 27 17쪽
160 04화. 마음만큼은 나도. +10 15.08.11 1,120 2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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