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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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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0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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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자
21쪽

06화 - 3

DUMMY

“…….”

곱씹는다. 되돌리고, 다시 생각하고, 수백, 수천, 수억의 고뇌를 반복한다. 선생님의 꾸중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꾸벅,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 뿐이다.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현실은 이게 아닌데.

“꼬꼬마. 뭔 일 있어?”

“……아니요.”

꾸중을 할 때에는 정확하게 ‘웅도’라고 칭하던 선생님. 이제 혼냄의 영역은 지났는지 평소대로 ‘꼬꼬마’라고 부르신다. 선생님으로 의젓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아닌, 친척 누나 같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런 모습으로. 그것에 울컥, 눈물이 고일 것 같다. 애써 꾸욱 참고 겨우 대답했다.

“근데 왜 애꿎은 여자애를 붙들고 마음대로 나가. 엄한 짓 하는 줄 알고 놀랐잖아.”

“……하아.”

“음…… 뭐, 알았다. 이따 저녁에 좀 볼까.”

“…….”

선생님은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씀하신다. 더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 배려해주고 걱정해주는 선생님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지금은 그냥 어떤 말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리유가 아닌 이상은. 무시한다고 선생님이 오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잠자코 말씀하신다. 고개를 푹 숙이며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까지,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지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리유와 사귀고 있을 때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즐겁고 보람 있는 주체적인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유가 없는 지금은, 지금은. 어떤 의미도 없고 어떤 생각도 없는 그런 시간들이 흘러가고만 있다. 오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는데. 1분 1분이 지옥 같은 시간이다.

“갈까.”

“……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억지로 끌고오다시피 해서 나를 데리고 나오셨다. 저녁 같이 먹자는 명분으로. 다른 애들과 저녁을 먹을 기력도 기분도 아니고, 무엇보다 희세와 반쯤 싸운 것 같은 애매한 상태가 되었기에. 희세도 마찬가지로 저녁 같이 안 먹겠다고 말했고. 성빈이와 미래 둘이서 먹을 것 같다. 잠자코, 선생님의 자동차에 탄다.

“먹어. 탕수육 좋아하잖아.”

“…….”

남자 고등학생 중에 고기 싫어하는 애 있겠냐만은, 또 튀김 싫어하는 애 있을까 싶지만, 둘을 합친 고기튀김은 탕수육 싫어하는 애는 정말 없겠지만, 나는 지금 어떻게 무엇을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물끄러미 탕수육을 바라본다. 탕수육은 그 황금빛 소스의 빛깔을 찬연히 세상에 퍼뜨리고 있다. ……아 소스 부으면 어떡해. 눅눅해지잖아. 그것도 그것대로 맛이 있지만 난 바삭하면서 고소한 탕수육의 식감과 새콤달콤한 소스의 맛을 동시에 느끼고 싶었는데. 이런 와중에도 이런 드립을 생각하는 걸 보니 나는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다.

─리유도, 탕수육 좋아했는데. 단 거 좋아하고 고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리유지만 탕수육만큼은 좋아했는데. 작은 입에 탕수육을 넣고 오물오물 맛나게 먹던 리유의 모습이 눈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탕수육에 왜 당근을 넣는 거야. 거지 같애! 아니 왜 요리에 당근을 넣어 애초에?!’하며 자신의 당근 혐오를 설파하던 리유의 활기찬 목소리도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는 말. 다시 볼 수 없는 모습. 부들부들 떨리는 젓가락을 추슬러 탕수육을 든다.

“……적어도 먹을 때엔 그렇게 울지 마라. 남자새끼가 추하게.”

“……흑……! 선생님……!”

“뭐.”

“……탕수육이…… 너무 맛있어요…… 너무 맛있는데……!”

“…….”

입 안에 퍼지는 달콤새콤한 소스의 첫 맛과 이내 씹히는 탕수육 겉면의 바삭한 식감. 안의 묘하게 딱딱하면서 씹는 맛이 일품인 돼지고기. 모든 것이 잘 조화된 정제된 맛이다. 더 맛보기 위해 허겁지겁 탕수육에 젓가락을 더한다.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탕수육의 맛만 보기 위해. 세상을 다 탕수육으로 잊어버릴 기세로. 한 가득 넣으니 더 이상 씹을 수가 없다. 입에 너무 많이 들어서 씹을 수 없는 거다. 울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선생님은 말없이 짜장면을 드시며 말씀하신다. 나는 추하게 입을 쩍 벌리고 탕수육 씹다 만 덩어리를 온 세상에 보이며 추하게 거지 같이 병1신 같이 소리 없이 울었다. 한동안, 허리하고 목이 아프도록 그렇게 몸을 떨었다.

“다 불었잖아, 짜장면. 짜장면은 불어도 맛있긴 하지만. 남기기만 해 봐. 지옥가서 남긴 거 다 먹는다. 섞어서.”

“……차라리 지옥에 가면 좋겠네요. 지금 심정은.”

“어린 것이 어디서.”

꽤나 시간이 흘렀다. 선생님은 어른이다. 어린아이가 울면 달래주는 게 어른의 미덕일진데 선생님은 내가 혼자 소리 죽여가며 울어도 일언반구 말도 없이 짜장면을 드셨다. 덕분에 혼자 겨우 울음을 그치니 굉장히 무안하고 부끄러워졌다. 황급히 퉁퉁 분 짜장면을 먹으며 대답한다. 한 번 대성통곡을 하니 그나마 너스레를 떨 정도로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됐다. 그렇다고 확 다 풀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무슨 일인데. 뭐 헤어지기라도 했어. 바람 피우다.”

“……저는 쓰레기입니다. 국가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에…… 뭐야. 진짜야. 그 꼬맹이랑 헤어졌어?”

“……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는다고 하던가. 선생님은 딱히 별다른 큰 의미를 두고 저 말을 하신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내 평소 행실을 보고 말씀하신 거겠지. 그리고 그게 너무도 정확하게 현 상황과 맞기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짜장면을 먹었다. 선생님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꼬맹이’는 리유를 가리키는 선생님의 애칭. 잠자코 대답했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고. 그치만 선생님은, 선생님한테는 말해도 될까요. 선생님 어른이니까. 다정하니까. 의지가 되니까.”

“……뭐야 징그럽게. 또 무슨 사고를 쳤길레 남자새끼가 칠칠치 못하게 그런 말을 하는데.”

희세한테 말하긴 했지만 희세는 사건의 당사자니까. 이런 일,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다. 혹여라도 소문이라도 퍼지면 난…… 그 날로 학교 생활 끝이니까. 말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잔뜩 의지하는 목소리로 말하니 선생님은 당혹스러운 듯하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애처롭게 선생님을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선생님은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한숨을 쉬시더니 ‘어어, 그래. 뭔데.’ 하고 말씀하신다.

“……희세랑 바람을 피웠어요. 리유 몰래.”

“쓰레기 새X네. 꼬꼬마가 건방지게.”

“큭…… 그 때 희세랑 같이 셀카를 찍은 게 여러 장 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사진이 리유한테 전송됐어요.”

“야아. 완전불연소 쓰레기인데. 너네 무슨 막장드라마 찍니? 그걸 왜 보내? 동심파괴하게? 안 그래도 꼬맹이면 진짜 애기같이 생겼는데.”

“……네. 제 말이요. 어쨌든 그것 때문에 아까 오후에 전화 와서, 헤어지자고 전화 받고…… 그래서 희세 데리고 뛰쳐나갔던 거에요.”

“흐응.”

최대한 사심이 안 들어가게 중립적으로 사건 자체를 말하려 했다. 어쨌든 사실만 놓고 보자면 나와 희세가 바람피운 게 맞으니까. 여자친구 두고 둘이 데이트 간 거니까. 같이 사진 찍은 것도 명백한 증거물이고. 그 증거물을 리유가 본 게 엄청난 치명타였고.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내 양심에 비수를 던지신다. 전부 사실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정신적 타격을 입으며 겨우 말을 끝냈다. 선생님은 잠자코 나를 쳐다보신다.

“너도 참, 대단하구나. 여자친구 유학 보내고 바람 피워서 차이고. 그러면서 또 찔찔대고.”

“……그런 말을 바란 게 아닌데요, 저는.”

“그럼 무슨 말을 바라는데? 싹싹 빌면 꼬맹이가 다시 받아줄 거라고? 한 번 그렇게 했는데 과연 받아줄까. 아무리 속 좋은 여자라도, 그렇게는 못 할 텐데. 진짜 빠져 있지 않는 한.”

“……그렇죠. 하아.”

조금이라도 위로의 말이 있기를 바랐는데, 선생님의 말은 냉정하고 냉혹하다. 더욱 마음이 쓰려온다. 선생님의 말에 계속해서 현실을 깨닫는다. 뭘 잘 했다고 내가 위로의 말을 듣겠어. 뻔뻔하지, 그런 건.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이게 된다. 조금 생각한 뒤 고개를 드니 빤히 나를 쳐다보고 계신 선생님.

“너는 뭘 하고 싶은 건데. 꼬맹이를 다시 붙잡고 싶어? 그럼 바람은 왜 피웠어? 바람피운 애가 더 좋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걔랑 사귀어. 그럼 될 일이잖아?”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쉽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왜 감당 못 할 짓을 했어. 하룻밤 불장난? 그걸로 피 본 사람 수도 없이 많지. 그렇게 우왕좌왕 우유부단한 짓만 골라서 하니까 네가 꼬꼬마인 거야. 알아?”

“……네.”

나는 뭐랄까, 좀 더 어른스럽고 현명한 대답을 원했지만 선생님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원론적인 대답을 해주신다. ‘하룻밤 불장난’이란 말에 더욱 뜨끔하게 된다. 정말 선생님, 독심술 같은 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말은 더욱 나를 기가 죽게 만든다. 그래, 그게 문제인 건 나도 잘 알고 있는데…… 갈팡질팡 못 하겠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내가 그런 녀석인데.

“좀 더 어른스러운 현명한 대답을 원해? 그런 거 없어. 나이 먹어도 똑같애, 연애관계는. 더 고상하게, 더 어른스럽게 할 것 같아? 치정싸움은 왜 나오고 나이 50 먹어서 산악회 가고 바닷가 가서 바람은 왜 피우는데. 사람은 똑같애. 적어도 사랑 앞에서는.”

“……네.”

……진짜 마음 읽으시는 거야?! 단어까지 명확하게 말씀하시잖아!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또 선생님의 말을 새겨듣는다. 선생님은 잠자코 말을 이으신다.

“「영원한 사랑」 같은 거야말로 허상이야. 그건 한 이성을 속박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든 허울 좋은 신기루지. 특히 남자는, 유전자 레벨로 많은 여자를 만나서 최대한 많은 씨를 뿌리는 생명체로 돼 있는데. 그걸 억지로 막는다고 되겠어. 그런 일이 없으면 간통죄, 불륜죄는 있지도 않겠지.”

“……고등학생 앞에서 ‘씨를 뿌린다’라니…… 표현이 너무 과격─”

“생물시간에 안 배워. 무슨 엄한 생각을 하는데. 하긴, 한참 울끈불끈할 때이니.”

“……후우.”

이번엔 좀 복잡한 말을 하시는 선생님. 요약해서 받아들이자면 내가 바람 피운 것에 조금은 면죄부를 주시려는 말씀이려나. 괜히 태클을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한숨을 쉬게 된다. 선생님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다시 말씀하신다.

“확실하게 해. 바람피울 거면 확실하게 피워서 헤어지고. 잘못했다고 생각했으면 확실하게 정리하고 확실하게 사과하고. 두 마리 토끼 다 놓치지 말고. 어중간하게 있다가.”

“……네.”

리유에 대한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뜻밖에 선생님의 조언은 나에게 더 뜻깊게 다가온다. 확실하게 해라. 확실하게. 지금 닥친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대해 조언을 해준 선생님.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을 올려다본다.

“음─ 그래서, 바람피운 여자애는 누군데?”

“……그것까지 말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헤에. 말 해줄거면 다 말해줘야지. 음, 같이 잘 다니던 그 갈색머리 가슴 큰 여자애인가.”

“……크흠.”

“으흥♡ 빙고네. 하여튼, 남자들은 결국엔 그 쪽으로 붙는구나. 뭐, 그런 면에서는 나는 이득인데. 쳇, 나는 고등학생 때 변태 아저씨나 바바리맨들만 잔뜩 붙었었는데. 운도 좋네, 그 지지배는.”

“뭐가요! 누굴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거든요!”

‘그 쪽’ 이라는 말에 발끈해서 대답했다. 나는! 희세의 가슴에 아무 감정도 없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닌데. 굳이 따지자면 선생님 쪽이 더 크긴 한데. 선생님의 씁쓸한 학창시절 경험을 들으며 나는 씩씩댔다. 그래도 선생님과 얘기하며 드립치며 조금 더 기분이 나아진 기분이다. 여전히 답답하고 찜찜한 기분이지만.


“무, 무슨 일 있어, 웅도야?”

“하아…… 아니야.”

“으, 응?”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한숨을 팍 쉬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면 과연 믿을까. 내가 봐도 속이 뻔히 보이는 대답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한 표정을 짓는 민서. 겉으로 보기에도 딱, 내가 잔뜩 울상인 모양이다. 민서가 먼저 물어볼 정도면.

선생님과 거하게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야자 시작까지 조금 남은 시간. 나는 혼자 고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리유에겐 연락할 엄두가 안 나고 희세는 볼 면목이 없다. 샘각한 게 얼굴에 잘 드러나는 나인지라 되게 진지하고 심각한 모습인가보다. 민서가 찾아와 물어본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

“조금, 안 좋은 일 있긴 한데. 괜찮아. 지금만 이러고 나중엔 풀어지니까. 고마워, 걱정해줘서.”

“어, 응. 도와줄 거 있으면 꼭 도와줄게.”

민서 기분이 상하지 않게, 정중하게 말한다. 기분 안 좋긴 하지만 너에게 말하기는 조금 그런 민감한 문제다,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거지. 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기분 나빠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말이라도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민서도 엄청 착하고 좋은 녀석이라니까. 하아.

“무슨 일 있어?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아아, 아니야. 그냥, 그래.”

“에에? 아무리 봐도 뭔 일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못 말해주는 거? 개인적인 일?”

“어, 조금…… 개인적인 일이라.”

“아하. 그러면 뭐, 캐묻지는 않을게.”

저녁을 먹고 왔는지 다른 친구들과 교실로 들어온 유진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대뜸 내 얼굴을 보고 묻는다. 민서도 그렇고, 다들 내 걱정을 해주는구나. 이 쓰레기 같은 나를. 부정적인 생각을 하니 또 울컥 한다. 꾹 참으며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한다. 유진이에게도 말할 수는 없지. 많이 친해졌긴 했지만, 이런 문제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설령 성빈이나 미래라도 말하지 않을 거라 결심했으니까.

유진이는 포기하지 않고 묻다가 내 안색을 보고 다시 묻지 않는다. 그것 또한 고마워진다. 지금은 무엇이든 죄스럽게 느껴져서, 조그마한 호의에도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유진이도 배려심 많구나.

“……혹시말야.”

“응?”

내가 먼저 말을 끊어놓고, 다시 유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전 희세의 말이 언뜻 생각나서. 결코 유진이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까 전 결백을 주장하는 희세의 눈은 정말 진실되 보여서. 장난치거나 거짓말하는 희세의 눈과, 진짜를 말하는 눈 정도는 구분할 수 있으니까. 희세의 말에 또 그럴듯하게 의심이 되기도 하고. 휴대폰을 주워서 그 사이에 얼마든지 보낼 수는 있잖아. 왜 유진이가 그런 사악한 짓을 하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정공법이다, 유진이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는 거잖아.

“혹시…… 아까 희세 휴대폰 가져다주면서…… 뭐 건드린 거 있어?”

“아이 참. 진짜 안 건드렸어! 아까 희세도 와서 따지던데! 설령 뭘 했다해도 나 희세 휴대폰 비밀번호도 모르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그렇지. 아니, 그냥. 그렇다고.”

“희세도 그렇고, 진짜 무슨 일 있어? 아까 희세도 되게 심각했는데.”

“……아니야, 아니야 후우…….”

“흠…… 말하기 힘들면 안 들을게. 미안.”

“아니야, 미안해할 건.”

넌지시 물어보니 유진이는 약간 발끈하는 귀여운 모습으로 말한다. 희세가 먼저 물어본 건 전혀 몰랐는데. 약간 당황스럽다. 게다가 유진이의 말에 덜컥 정신이 든다. 그렇지, 휴대폰을 가지고 있어도 비밀번호나 패턴을 모르면 어떻게 열 수가 없잖아. 괜히 유진이를 의심해서 내가 다 부끄럽다. 얼버무리며 복잡해진 머리를 감싼다. 유진이는 걱정스런 투로 묻는다. 맘 같아선 전부 말하고 상담 받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유진이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그래도 캐묻지 않아서 정말 고맙다.


리유에게 갑자기 이별 통보, 희세와는 말다툼 후 어색해짐. 선생님에게 ‘영원한 사랑’은 없어 라는 조언 받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잔뜩 머릿속에서 뒤엉키고, 그런 상황 속에 야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초에 야자시간에 제대로 공부 안 하고 늘 딴 짓만 하는 나인데. 딴 짓은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있었기에 딱히 혼나거나 하진 않았다. 공허하게 시간을 보낸 거지.

“……기다렸어?”

“……아니.”

굉장히 천천히 가방을 싸고, 민서와 유진이의 인사까지 듣고 천천히 복도로 나왔다. 애들이 다 나가고 내가 제일 마지막에 교실 불을 끄고 나올 정도로 늦게 나왔으니까. 복도에는 벌써 애들 인기척이 없고 어둑어둑 하다. 그런 우리 교실 앞 복도에, 흰 피부가 눈부시게 보이는 희세가 기다리고 있다. 잠자코 말하니 희세 또한 묵묵하게 대답했다. 말없이 나란히 걷는다. 복도를 지나 건물을 나와 평소와 같이 노란 가로등이 켜 있는 골목을 걷는다.

“…….”

“……선생님이랑 저녁 먹으면서, 생각해 봤거든.”

한참동안 말없이 걷는 나와 희세. 꽤나 많이 걸어 어느새 골목의 끝, 헤어지는 구간. 가로등 앞에서 가만히 멈춰 서는 나. 희세도 마찬가지로 멈춰 섰다. 잠자코 말을 꺼냈다. 희세는 말없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밤이라 희세 얼굴이 더욱 희게 보인다. 창백한 느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 같지만. 그렇다고 외양간도 안 고치고서는 진짜 참회하는 게 아니니까. 나, 리유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

진지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흔들림 없는 희세의 눈빛이 더욱 내 마음에 확고한 부담을 심어준다. 창피하기도, 부담되기도 하지만 억지로 쥐어 짜내듯 생각한 바를 말한다.

“솔직히, 리유 있는데도 너랑 데이트 가고 널 이성적으로 생각한 내가 너무 잘못했어. 네가 잘못한 건 아니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확실하게.”

“……확실하게, 나하고 인연 끊겠다고?”

“─그런 말이 아니라.”

“……어쨌든 이제 나에 대한 건 전부 그만 두겠다, 그런 말이잖아?”

“……어.”

사태의 주된 원인은 결국 나의 우유부단함이다. 선생님의 조언과, 야자시간의 수많은 고뇌를 통해 얻은 결론 하나. 내가 그럴만한 여지를 두는 게 문제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딱 끊어서 아무하고도 놀지 말라는 게 아니다. 리유는 그렇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문제는 나에게 있어 ‘친구’로서의 여자애와 ‘이성’으로서의 여자애의 경계가 참 모호하다는 것.

리유랑 사귀고 있음에도, 희세가 잘해주는 것이 좋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돌변한 희세는 상당히 매력 있었으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끌렸다. 리유와는 전혀 다른 여성적이고 섬세하면서 가정적인 희세의 면에. ……압도적인 어떤 다른 면도 있고.

비단 희세 뿐만 아니라 성빈이도, 유진이도 전부. 다 확실하게 말해야지. 희세에게 말하는 것은 그 처음이다. 이번 사태의 도화선이 된 게, 희세와의 관계니까.

“……그래. 알았어. 네가 불편했다면, 방해됐다면 그만 할게.”

“……응.”

“…….”

희세는 찬찬히 말한다. 뭔가 마음이 씁쓸하다. 그러면 이제, 희세와 아침을 먹는 일은 없는 거구나. 같이 등교하는 것도, 어느 때에 같이 놀러 가는 것도. 희세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쓸쓸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확실히 해야지. 감정을 꾹 참고 대답했다.

“─바보야!”

“!”

“멍청이, 찌질이, 줘도 못 먹는 병X새끼! 후우, 후우, 후우.”

“…….”

외마디 ‘바보야’라고 하고 양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팍 때리는 희세. 아프다기보단 정신이 번쩍 든다. 이어서 초등학생 같은 욕을 연거푸 하며 내 가슴팍을 팍팍 때리는 희세. 훨씬 큰 진동이 쿵쿵 마음을 울리는 것 같다. 희세는 그렇게 하고는 숨을 헐떡인다.

“……희세야.”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라! 살면서 나만큼 완벽한 여자애가 누구 좋아해주나! 흥이다 흥! 이제 다시는, 다시는……!”

“…….”

희세는 잔뜩 화를 낸다. 하지만 그건 허세. 화를 내면서도 점차 목이 멘다. 얼굴이 상기되고 눈물이 고이는 게 보인다. 이내 또르르 눈물이 떨어진다. 창피한지 고개를 홱 돌린다. 마음 같아선 미안해서 어떻게든 해주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가 없다. 희세는 그대로 뒤돌아 뚜벅뚜벅 걸어간다. 더 말하고 싶지만 희세에게도 자존심이 있기에, 더는 말하지 않고 잠시 희세를 쳐다보다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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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08화 - 3 +10 15.09.15 1,064 19 21쪽
174 08화 - 2 +12 15.09.13 1,004 20 19쪽
173 08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16 15.09.11 959 20 19쪽
172 07화 - 3 +10 15.09.09 1,097 17 20쪽
171 07화 - 2 +16 15.09.08 936 17 19쪽
170 07화. 말했을 텐데. +10 15.09.06 1,036 20 18쪽
169 06화 - 4 +6 15.09.04 998 18 23쪽
» 06화 - 3 +10 15.09.01 1,047 20 21쪽
167 06화 - 2 +8 15.08.30 1,005 19 19쪽
166 06화. 일장춘몽 +12 15.08.27 1,220 68 20쪽
165 05화 - 4 +18 15.08.24 1,213 25 18쪽
164 05화 - 3 +14 15.08.22 1,104 21 19쪽
163 05화 - 2 +8 15.08.20 943 27 19쪽
162 05화. 너를 내 것으로 하겠어 +12 15.08.18 1,174 16 19쪽
161 04화 - 2 +10 15.08.15 918 27 17쪽
160 04화. 마음만큼은 나도. +10 15.08.11 1,120 2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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