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182
추천수 :
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5.09.04 20:18
조회
997
추천
18
글자
23쪽

06화 - 4

DUMMY

“…….”

눈을 뜨면 어두운 방 안, 칙칙한 지붕. 얼마만일까, 이렇게 일어나는 게. 이제는 원래 그랬던 것 같은 희세의 목소리 없이 일어났다. 의외로 지각할만한 시간은 아니고 충분히 여유 있게 일어났다. ……어제 아무것도 할 의욕이 없어 게임도 안 하고 일찍 잔 탓인 것 같은데. 커튼을 치고 밝게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한다.

휴대폰을 쳐다본다. 혹시나 리유에게 연락 온 게 있을까 쳐다보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는 내 휴대폰. ……오래간만이네, 남중 이후로. 어지간하면 늘 톡이라던가 문자라던가 와 있었는데. 한숨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희세가 없으니 아침도 먹고 싶지 않다. 짜증스런 희세의 목소리가 없는 아침은 상당히 허전하다. 적응 해야겠지.

대충 씻고 나와 혼자 걷는다. 벌써부터 외톨이가 된 것처럼 외롭다. 여자친구였던 리유는 이별통보, 여자친구 역할을 대신 해주던 희세는 내 손으로 관계를 끊어버렸고. 선생님 조언으로 확실하게 했는데 어째 선생님이 하지 말라던 두 마리 토끼 다 놓치는 꼴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짜르르 하다. ……아직 리유에게 사과를 하지 못 했으니까.

바람 피운 거 미안해, 다시 사귀어 줘 같은 뻔뻔하고 염치없는 말은 감히 꺼낼 수도 없다. 그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도 꺼낼 용기가 없다. 한참이나 찌질한 내 배포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의 능력은 위기 상황에 대처할 때 빛을 발한다는데, 나의 능력은 한참 꽝인 것 같다.

“안녕.”

“……어어.”

“……?”

학교에 가까워지며 점차적으로 만나게 되는 우리 학교 애들. 그 중에 우리반 애들도 있다. 그리 친하진 않지만 얼굴 정도는 알고 인사 정도는 하는 애들. 먼저 인사를 해보인다. 이래보여도 남자라는 희소성 덕분에 인지도는 조금 있는 편이니까. 하지만 여자애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대답만 하고 슥 나를 피하는 눈치. 뭔가 익숙한 기분이다. 기분 탓이겠지 하지만 여전히 조금 이상한 느낌. 교실로 들어간다.



───“…….”

딱히 그렇게 활달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실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 인사도 하고 인사도 받는 나다. ‘인기가 좋다’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에서 모르는 애는 없는 정도의 인지도. 하지만 지금의 반응은. ‘쌩’ 하고 찬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이다. 음, 이런 거 데자뷰라고 하지. 한국말로는 ‘기시감’이라고 하던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거. 예전에 느껴본 적 있는 그 기분. 그러니까, 이거는.



「따돌림.」


원인은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다. ‘소문’이겠지. 엄청난 속도의 소문에 역시 정보화 사회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긴, 그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만한 좋은(?) 소식이 있는데 빨리 퍼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마침 내가 희세 붙들고 교실에서 뛰쳐나온 명백한 증거도 있겠다. 누군가 소문을 주동한 걸까. 그런 걸 생각해서 무엇하겠어. 이미 이렇게 됐는데.

상황을 대충 파악한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이것도 한 번 겪으니 그렇게 큰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딱 작년 이 맘 때 즈음, 똑같았나. 이것보단 조금 일렀지. 완전 학기 초였으니까. 그 때에도 훌륭한 헛소문 덕분에 잔뜩 곤혹을 치렀었는데. 그 때도 리유와 관련된 소문이었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헛소문은 아니고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이 전부, 내 잘못이다.

“힘 세고 강한 아침!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미래! 음, 내 생각엔 좀 자극적인 것 같군, 안 그래 고든?”

“……크흠.”

“왜 그래요! 되게 심각한 표정인데??”

“……잠깐 나와봐.”

“어멋♡ 저는 플래그에서 벗어났는데 왜 미천한 저를…… 마다하진 않겠지만요♡”

“시끄럽고.”

가만히 정적이 감도는 교실에서 사소한 따돌림을 음미하고 있는 아침, 미래가 큰 소리로 나에게 말하며 자기 자리에 앉는다. 미래만은 여전히 같은 태도다. 처음 따돌림 당할 때에도 이랬다면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텐데. 그 때엔 미래랑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 헛기침을 하다 미래를 불러내 밖으로 나섰다. 미래는 방긋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대답을 하며 따라 나온다.

“무슨 일이에요?”

“……그, 뭐부터 말해야 하나. 너는 소문 같은 거 못 들었어?”

“소문? 무슨 소문이요?”

“하긴, 너한테 그런 걸 바라는 나도 참 이상하네.”

“에에? 난닷테? 뭔 말이에요?”

“그게…….”

복도 구석, 애들이 별로 나다니지 않는 계단 위에서 미래에게 말을 꺼냈다. 미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한다. 그럴만하다. 미래는 프로드리퍼(?)에 중증 오타쿠, 평상시 나와 하는 대화를 봐도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녀석이다. 거기다 우리 밥 패밀리 외에는 교류하는 애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사교성이 떨어지는 녀석이니. 소문이 나도 그걸 알려줄 친구가 없으니 알 턱이 없겠지. 묘하게 씁쓸한데. 미래에게 조금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으에에. 쓰레기. 인간쓰레기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제 오빠랑 안 놀아야겠네요. 역겨워, 정웅도.”

“야야야─! 너까지 그러면 나 진짜 어떡하라고!”

“흥! 몰라요! 평소엔 그렇게 제가 드립쳐도 모르는 척 고고한 척 선비질 하더니 자기 급하니까 이렇게 매달리기에요? 염치도 없어요? 흥흥!”

“……하아.”

어차피 소문이 나기도 했고, 계속 생각하고 말하다보니 이제는 숨기고자 하는 의지도 없어졌다. 미래, 성빈이, 유진이 같은 내 제일 친한 친구들에겐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그 다짐이 깨지는구나.

미래는 내 얘기를 듣더니 대뜸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나를 대한다. 게다가 존댓말도 안 쓰고 ‘정웅도’라고 이름을 부른다. 미래의 행동은 정말 심각한 게 아니면 숫제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하니 매달리게 된다. 미래는 피식 웃으며 사뭇 진지한 척 과장된 연기톤으로 말한다. 장난이지만 은근 찔려서 한숨 쉬며 대답하지 못하는 나. 그래, 사필귀정이구나. 아니, 인과응보인가.

“에~ 어쨌든 그런 소문이 났다, 그래서 왕따가 된 것 같다, 그런 말이잖아요?”

“……그렇지.”

“아직 확실히는 모르잖아요? 그냥 오빠가 인사했을 때 그 애가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하기엔 반 분위기가. 너무 익숙한 그 공기였거든. 1년 전에 겪었던.”

“흐음. 유경험자의 경험을 무시하기도 좀 그렇구. 뭐 저한테는 늘 쌀쌀맞은 애들이니까, 익숙해서 잘 모르겠는데.”

“……그것도 그것대로 슬픈데.”

결론을 내리는 미래에게 대답하는 나. 확실히 익숙한 느낌이었으니까, 그 분위기는. 이어지는 미래의 대답에 더욱 씁쓸한 기분이 된다.

“근데, 저는 왜 불렀어요? 뭐 해결해야 할 문제 같은 거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복도 밖으로 부른 목적을 묻는 미래. 미래의 질문대로, 이 따돌림은 정당한 것이다. 아니, 따돌림이 ‘정당’하다는 건 상당히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적어도 작년에 당했던, 주동자가 명확히 있고 사소한 오해가 부풀어 헛소문이 된 오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전부 내 잘못이니. 잠시 심호흡을 하고 진지한 눈으로 미래를 바라본다.

“너가 나한테 말 걸면 너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까일 수 있으니까. 조금…… 진정될 때까지는, 말 걸지 말고 모르는 척 해 줘. 그것 때문에 불렀어.”

“에? 왜 그런 짓을……? 오빠 되게 권력에 타협하는 소시민 잘 할 것 같네요.”

“뭔 소리야…….”

“그렇잖아요! 사고방식이 완~전 꼰대 스타일이잖아요! 저는 노예입니다! 국가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뭐 이런 거에요?”

“……그 말이 그 말이 아니잖아.”

예전에도, 성빈이와 리유에게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성빈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했다가 이내 생각을 고치고 나와 얘기하고, 리유는 처음부터 그딴 거 신경 쓰지 않고 말했던 것 같은데. 미래도 비슷한 반응.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성빈이나 리유와는 판이하게 다른 개념이긴 한데. 잔뜩 놀리는 미래의 말투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어쨌든, 저는 그런 대세에는 안 따를 거에요. 사람이 살다보면 사귀다 헤어지고 다른 여자랑 좋아할 수도 있지! 무슨 역성혁명 해요? 명분과 정통성이 필요해? 그럼 오빠는 세조네요! 비열한 변절자, 배신자! 그래봤자 세상은 승자만 기억해요! 세조를 부정하면 조선왕조 반절 넘게 부정되는데!”

“너는 참 그럴 듯하게 삼천포에 잘 빠지네. 뭐…… 그렇게까지 말해주면 내가 더 거절할 명분이 없는데.”

“그러다 오빠 자살하면, 이야기 재미없잖아요? 뭐, 그 정도에 자살할 오빠 멘탈은 아니지만.”

“그럼. 한 번 겪은 일이니 그냥그냥 그런데. 그래도 씁쓸한 건 마찬가지지.”

갑자기 어려운 역사 얘기를 하며 조곤조곤 따지듯이 말하는 미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르는 척 하지 않겠다는 말 같다. 미래라면 그럴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미래의 짓궂은 말에 피식 웃으며 너스레를 떤다. 그 정도로 멘탈이 단단해졌구나. 사람은 경험으로 성장하니까. 적당하게 교실로 돌아온다.

“…….”

역시, 내 예상은 맞았다.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적절하게 나를 무시하는 여자애들. 몇몇은 수군수군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유진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안녕’ 하고 기운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평소 같은 활기찬 목소리가 아닌 걸 보니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싱긋 웃으며 손만 들어 대꾸했다. 섭섭하거나 하지 않다. 충분히 이해하니까. 이런 상태에서 말 걸면 유진이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으니까, 도리어 내 쪽에서 말 거는 걸 거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렇지 않게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듣는다.


“아아아~ 하하하. 아아아~ 후후후. 흐헣. 하허허하후흐하하!”

미친놈처럼 정신줄을 놓고 웃는 나. 그런 나를 피하는 여자애들. 나는 즐거운 미친 사람처럼 복도를 비틀비틀 걷는다. 점심시간. 늘 밥 패밀리 애들과 밥을 먹었던 나는 오래간만에 고독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미친놈처럼 흥겹게 웃으며 복도를 나온 것. 아서라, 너희들이 나를 그런 취급 한다면 나도 제대로 미친놈이 돼야지. 건물을 벗어나 학교 바깥으로 나온다.

얼마만의 편의점 도시락인가. 그 때 이후로 애들하고 밥 패밀리를 형성하고부터, 그 이후로는 편의점에 갈 일이 없었지. 늘 같이 밥 먹었으니까. 그 때 생각나서 씁쓸하구먼.

희세는, 굳이 소문 때문이 아니라 나와 잔뜩 감정이 상했기에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 또한 내가 뿌린 이유의 결과. 성빈이가 연락이 없는 것은 조금 서운한 기분도 들지만. 뭐, 충분히 그럴만하지. 어쨌든 성빈이도 미래처럼 모든 걸 버리고 나하고만 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른 애들하고도 적절히 많이 친한 성빈이니까. 정작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 같던 미래는 아까 전 근엄한 표정을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나왔지만.

“모든 여자애들은 밥을 먹고 있었고…… 그 중에는 왕따닦이도 있었다.”

“뭐라는 거야.”

“에에~ 벤소메시~? 키모이! 벤소메시가 허락되는 건 초등학생까지잖아!”

“계속 당연하게 일본어로 말하는데 나 일본말 몰라.”

“거짓말. 오타쿠면서.”

“오타쿠는 아니지! 네가 오덕이라고 나까지 오덕이냐?!”

장난기 가득한 근엄한 낮은 톤의 여자애 목소리. 뒤쪽에서부터 들려오는, 근본도 없고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 듣는 미래의 드립이 들려온다. 피식 웃으며 태클을 걸어준다. 미래는 깔깔 웃으며 내 옆으로 와 같이 걷는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미래구나. 어려운 때에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던데. 새삼 색다른 기분으로 미래를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아, 안 되옵니다! 소녀, 이미 공자님과는 플래그를 실패한 패전병이기에…… 더는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저는 이미 설명충으로 전환한 지 오래이옵니다! 이런 새로운 플래그는…… 모 야메룽다입니다!”

“뭐라는 거야 진짜! 그냥 좋아서 봤다, 좋아서! 착하잖아! 어려운 때 곁에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히익! 저는 딱히 그런 걸 의도하고 옆에 있어주는 게 아닌데! 오빠는 오로지 그런 생각 뿐이군요! 귀축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너겠지!”

정말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는데 미래 혼자 호들갑이다. 이미 미래에 대한 감정은 다 접고 중립적으로 보고 있는데. 물론 미래 또한 장난이고 호들갑이다. TV 예능쇼가 대본도 있고 설정도 있는데 그냥 속고 봐 주는 것처럼, 이것 또한 서로 다 알지만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드립과 태클이지. 서로 쳐다보고 하하 웃으며 걷는다. 이런 와중에도 유쾌할 수 있구나, 미래 덕분에.

“아─ 맛없어. 오빠 덕분에 이렇게 맛없는 편의점 도시락도 먹네요. 비싸고.”

“미안하네요─ 그래도 이렇게 밖에서 먹으니까 운치 있지 않아.”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구입. 덜렁덜렁 봉투에 넣어 다시금 학교로 복귀. 운동장 옆 구석의 언덕에서, 미래와 나란히 쪼그리고 앉는다. 바람이 분다. 도시락을 꺼내 먹으며 학교 건물과 경치를 바라보며 먹는다. 미래는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한다.

“운치는 개뿔요. 운치라는 건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 가서 스테이크 같은 거 사주는 남자보고 운치 있다고 하는 거죠.”

“……너, 된장녀니?”

“헐…… 오빠 여혐이세요? 헐 대박…… 오빠 일X하세요?”

“왜 그런 걸로 몰아가는데! 전혀 아니거든!? 오히려 그 쪽은 네 쪽 계통이잖아!”

“뭔 소리노! 내가 그런 거 하는 것처럼 보이노! 그런 거 안 한다 이기야!”

“그…… 말을 말자.”

드립을 치면 끝까지 치는 미래. 차마 더 이어서 할 말이 없다. 웃기기 위해서라면 금단의 영역까지 서슴치 않고 손을 대는 미래의 드립력에 감탄하고 입을 다문다.

가만히, 한 알 한 알 고슬고슬하게 씹히는, 찰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양질의(?) 편의점 도시락 쌀밥을 씹으며 언덕을 본다. 이 쪽 풀숲에서 처음, 리유와 만났지. 아, 정확히 처음 만난 건 입학식 끝나고 교실에서였구나. 뭐 어쨌든. 처음으로 친구가 되었던 건 그 때였지. 토끼마냥 귀엽게 깡총 나오는 리유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에? 운다 운다. 눈물이 글썽글썽……! 울↘지↘ 마↗! 울↘지↘ 마↗! 으아아아앙 ㅠ 너무 슬퍼여 ㅠㅠ”

“하지마! 진짜.”

“에에! 진짜 우네! 오빠 남자가 그러면 거기 떨어져요? 왜 울어요, 칠칠치 못하게!”

“……하아.”

감정이 북받쳐올라 눈물이 고인다. 흐려지는 시야에 애써 꾸욱 눈물을 참는다. 하지만 그런 좋은 꼴을 옆에서 그냥 두고 볼 미래가 아니다. 보통 친구가 침울해져서 울 것 같으면 말없이 지켜본다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않아?! 저렇게 놀리니까 결국엔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잖아! 벌컥 화를 내니 미래는 한심하다는 듯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리유가 그리 좋아요?”

“……어.”

“근데 왜 그랬어요.”

“그러게.”

“참회해도 늦었어요. 엎지른 물 담을 수 없다는 말, 인생으로 배우네요?”

“그렇지.”

“그럼, 뭣 때문에 계속 그래요? 남자가 찌질하게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만큼 좋아했나보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거죠. 남자라는 생물이. 멍청해서.”

미래의 말에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여전히 리유와 처음 만났던 풀숲을 보면서. 지금은, 다시는 말할 수 없는 리유를 떠올리며. 미래와의 대화에 이제는 더는, 찌질대면서 있을 공간조차 찾지 못할 것 같다. 여기저기 너무 곳곳에 리유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그래도 오히려 이게 나은 것 같다. 마음은 상쾌해지는 것 같으니까.

“…….”

“?”

“으아아아아아아아─!!”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학교 무너지겠어요, 두 번만 더 바람피우면.”

자리에서 일어나 언덕 끝 가장자리로 갔다. 미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학교 쪽을 바라본다. 점심시간이라 몇몇 학생들은 교실에 있을텐데.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소리 지른다. 미래는 ‘흐흣’ 하고 웃으며 드립으로 이어 받는다. 마음에 응어리진 게 조금은 풀어진 것 같다.

“자자, 이어지는 김에 바로 리유한테 전화!”

“야, 야 미친! 뭐 하는 거야 끊어!”

“어허이~ 제 전화 가지고 제가 전화하는데 왜 뭐라 그래요! 사과하세요 사과! 돌이킬 순 없어도 적어도 사과는 해야죠!”

“그, 그래도오……! 아무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왜!”

“어머! 그렇게 당당하게 가슴 만지면 아무리 저라도 창피한데! 와, 진짜 대놓고 만지네요?! 오! 받았다! 여보세요? 어 리유야~ 잘 지냈어?”

“…….”

미래의 활기찬 목소리에 나는 덜컥 놀라 식겁하며 얼른 미래 쪽으로 뛰어갔다. 미래는 킬킬 웃으며 휴대폰을 높이 들어 올린다. 다행히 내가 미래보다 키가 커서 휴대폰에 손이 닿긴 하지만 미래는 요리조리 평소답지 않게 몸을 놀리며 나를 피한다. 어떻게든 리유에게 신호가 가고 있는 미래의 휴대폰을 뺏으려 거의 미래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끙끙댄다. 그 와중에 본의 아닌 스킨십(?)을 하게 됐지만 야릇한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 지금 리유한테 전화라니! 도저히, 어떻게 말도 못 꺼낼 것 같은데 전화는 무슨 전화!

“잠깐만~ 받아봐! 절대 끊지 말고!”

『뭔데?』

“…….”

미래는 적당히 둘러대다 얼른, 내 귀에 전화를 들이댄다. 어마어마한 억겁의 시간을 지나 겨우 듣는 것 같은 리유의 목소리. 그것도, 묵직하고 낮은 톤의 어른스러운 진지한 목소리가 아니라, 평소의 밝은 톤의 귀엽디 귀여운 그 목소리. ……이렇게 생각이 들지만 사실 이별 통보 받은 게 어제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낮긴 하지만 여전히 활기찬 리유의 목소리. 그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식은땀이 절로 나는 것 같다. 입은 바짝바짝 타고 목이 멘다. 말이 안 나온다. 도저히.

“……저…… 리유야.”

『…….』

겨우 한 마디, 바보처럼 운을 뗀다. 대답이 없는 리유. 조급함이 온 마음과 뇌 안을 장악한다. 이대로 끊으면 어떡하지? 얼른 사과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리유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제대로 사과하고 싶은데. 얼른 말해야 하는데 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 정신은 잔뜩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만 실제 내 몸은 빳빳하게 굳은 석고처럼 움직여지질 않는다. 입도, 혀도, 생각도.

“……미안해.”

『…….』

“……내가…… 흣. 그…… 하아. 희세랑 바람 피워서…… 큿. 후우. 미안, 겁나 나쁜 새X지! 미친 여자친구 내버려두고, 이렇게 귀여운 여자친구 유학 가서 힘들 텐데! 다른 여자애랑 히히덕대고! 흑! 이딴 개X끼가…… 미안해, 미안해…… 진짜, 미안해…….”

천천히 열리는 입. 그와 동시에 올라오는 감정. 꾹꾹 눌러 참으며 말을 잇는다. 말을 이으며 더욱 감정은 격정적으로 변한다. 끓어오르는 용광로처럼 폭발하듯 화내며 말한다. 지금 누가 화내야 하는 건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푸욱, 식어버린 쇳덩어리처럼 눈물과 함께 미안하단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데, 미안한 감정을 전하고 싶은데. 말로, 전화로, 얼굴을 보지 못하고, 눈을 보지 못하고 내 감정을 다 전할 수 없어 억울할 정도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런 사과는 싫어.』

“……어?”

『웅도 나빠. 엄청 싫어. 사과도 받기 싫어. 목소리도 듣기 싫어. 그치만 이런 사과는 싫어. 직접 사과하지 않으면, 끝까지 꽁해져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건 없던 거야.』

“어…… 어?”

『바보 멍충이야! 너 싫다고!』

‘툭! 뚜…… 뚜…….’

나지막이 말하는 리유. 흠칫 놀라 대답했다. 여전히 꽁한 목소리로 말하는 리유. 하지만 어제 이별을 통보할 때와는 또 다른 목소리다. 평소처럼 귀엽고 활기찬 목소리지만 마치 ‘삐친’ 것처럼 꽁한 투이다. 얼떨떨해서 되물으니 리유는 새침하게 그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어버린다. 멍청하게 끊긴 전화를 그대로 귀에 대고 허공을 쳐다본다.

“뭐래요? 뭐래요? 꺼지래요? 죽어버리래요? 평생 너를 저주하겠데요? 복수할 거야…… 정웅도! 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 거, 절대 용서 못해에에엣~!!”

“……그러길 바라는 사람같다 너.”

“데헷☆ 들켰나.”

얼떨떨한 감각이 옆에서 잔뜩 개드립을 치는 미래 덕분에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다. 입술을 깨물며 일단 미래에게 휴대폰을 돌려준다. 곰곰이 리유가 한 말을 곱씹어본다. 사과하라고…… 직접 와서? 호주까지……?!

“아~ 뭐, 다 먹었으니까 이제 가죠. 오빠는 또 숨 죽여야겠네요. 왕따의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그렇게 현실 상기시키지 마. 가뜩이나 심란한데.”

“리유가 뭐라고 했길래 그래요~ 좀 알려줘요오~!”

“알려줄 이유는 없잖아.”

“제가 연결해준 건데! 치사해! 엄청 치사해!”

밥 먹는 내내 리유의 말이 신경 쓰인다. 교실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계속. 미래의 생떼에도 묵묵히 대답하며 리유의 말을 상기한다. 직접 사과하라니. 리유라면 말의 속뜻을 담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직접적으로 하는 말일 텐데. 아아. 모르겠다. 일단은 지금 당하는 따돌림도 해결 못 하겠는데.

일단은,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 어떻게 해결할지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작년 이 맘 때에도 어떻게는 넘겼던 나 아닌가. 따돌림 당하는 건 익숙하다. 리유에 대한 사과도, 지금은 일단 마음에만 담아두자. 지금 해결할 건, 왕따를 해결하는 거. 그것만 생각하자.


……근데 내가 바람 피워서 애들 사이에서 쓰레기로 소문나서 따돌림 당하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해결하지. 순전히 ‘이미지’ 싸움인데. 잘은 모르겠고, 낮잠이나 잡시다. 어차피 나한테 말 걸어주는 여자애도 없는데.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97 연필유령
    작성일
    15.09.04 22:09
    No. 1

    작가님. 아무래도 문피아에서 그런 쪽 댓글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특정 커뮤니티 사이트는 언급만으로도 위험합니다. 온갖 해악의 사이트들..ㄷㄷ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9.05 22:30
    No. 2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잠깐 넘어가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니......
    ......아 저는 안 합니다?? 진짜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9.05 08:02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9.05 22:30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16 진주곰탱이
    작성일
    15.09.29 12:35
    No. 5

    그냥 제대로 리유랑 마무리하고 이쯤에서 희세랑 꾸준히 진도 나가면 갑자기 19금으로 바뀔려나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10.01 20:57
    No. 6

    19금..... 생각해봤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 쪽 데이터가 없어서 형상화할 수가 없습니다! ㅠㅠㅠ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89 쉬는 날. +10 15.10.09 762 16 19쪽
188 11화 - 3 +9 15.10.08 927 23 18쪽
187 11화 - 2 +8 15.10.07 805 20 20쪽
186 11화. 고난의 행군 +12 15.10.06 874 17 19쪽
185 10화 - 5 +8 15.10.04 933 24 22쪽
184 10화 - 4 +8 15.10.03 826 24 18쪽
183 10화 - 3 +16 15.10.01 1,006 18 20쪽
182 10화 - 2 +8 15.09.29 1,050 16 21쪽
181 10화. 약속했어, 기다려 줘. +12 15.09.24 1,022 18 16쪽
180 09화 - 4 +12 15.09.22 951 25 17쪽
179 09화 - 3 +8 15.09.21 1,033 26 21쪽
178 09화 - 2 +9 15.09.20 891 21 17쪽
177 09화. 힘들지만 안녕, 하고 말하기 +8 15.09.19 1,232 16 19쪽
176 08화 - 4 +12 15.09.16 937 18 19쪽
175 08화 - 3 +10 15.09.15 1,063 19 21쪽
174 08화 - 2 +12 15.09.13 1,003 20 19쪽
173 08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16 15.09.11 959 20 19쪽
172 07화 - 3 +10 15.09.09 1,096 17 20쪽
171 07화 - 2 +16 15.09.08 935 17 19쪽
170 07화. 말했을 텐데. +10 15.09.06 1,035 20 18쪽
» 06화 - 4 +6 15.09.04 998 18 23쪽
168 06화 - 3 +10 15.09.01 1,046 20 21쪽
167 06화 - 2 +8 15.08.30 1,004 19 19쪽
166 06화. 일장춘몽 +12 15.08.27 1,219 68 20쪽
165 05화 - 4 +18 15.08.24 1,213 25 18쪽
164 05화 - 3 +14 15.08.22 1,104 21 19쪽
163 05화 - 2 +8 15.08.20 942 27 19쪽
162 05화. 너를 내 것으로 하겠어 +12 15.08.18 1,173 16 19쪽
161 04화 - 2 +10 15.08.15 917 27 17쪽
160 04화. 마음만큼은 나도. +10 15.08.11 1,120 21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