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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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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92,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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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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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0화 - 3

DUMMY

“…….”

“!@##$@%!#@%@#%”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뭐라고 말하는 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야 당연하지, 중등영어에서 영어를 포기하고 멈춘 정웅도인데. 기껏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곤 'Fine, thank you, and you?' 밖에 없는데. 하지만 그런 말이 쓰이는 경우는 없었다. 거짓말처럼, 이 사람들은 제대로 된 영어를 쓰고 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외국인데!

『말』이란 건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란 예전부터 말만 잘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속담이나 격언이 많이 있는데. 그만큼 말이 ‘겉보기’에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외모와도 같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지식수준이 몹시 높다 한들,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말로 표현한 만큼의 지식밖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외국인이라서, 말을 5~7세의 영아 수준밖에 못한다면, 설령 성인일지라도 그에 대한 취급은 5~7세의 영아 수준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 사나이 정웅도. 5~7세의 영아는커녕 신생아 옹알이 수준의 영어를 알고 있는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건아. ……모르겠다. 무섭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곳은 호주, 오스트리아. 아니 오스트레일리아! 공항에서부터 나는 상당히 의기소침해졌다.

“아, 아노…… 아니아니 이게 아니라. 익스큐즈미 설,”

“pardon?”

“아, 아니 그…… 아 X발 뭐라고 해야 하지?”

“where are you from?”

어떻게든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모르니 말을 할 수 없다. 음, 어디서 주워 듣기로, 그 나라 말이 잘 들리기 위해선 2000시간동안 들으면 된데. 좋아, 지금부터 2000시간동안 공항에 있는 사람들 말을 들으면 되겠구나! 2000시간이면, 24로 나누면 83.3이네. 안 자고 계속 들어도 83.3일이 걸리네. 야, 신난다! 83.3일이면 여름방학도 다 끝나있고 2학기로 넘어갈 것 같은데! 말이나 되는 소리냐!!

리유, 이런 데에서 어떻게 지낸 걸까. ‘잘 지낸다’는 말이 너무도 무색하게 들릴 정도로, 공항 첫 걸음부터 벌써 이렇게 꼬인다. 잘 지낼 리가 없잖아! 말이 안 통하는데! 우워어어어엌! 답답해 죽겠다, 답답해 죽겠어. 리유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으려나.


“다들, 고마워.”

“민나, 아리가또.”

“꼭, 리유 데리고 올 테니까.”

“카나라즈, 리유쨩 데리고 올 테니까.”

“……일본어로 번역하지 마. 게다가 자기가 모르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국일문혼용체로 나오고.”

“데헷☆”

잠자코 애들을 쳐다보며 말한다. 감격에 찬 표정으로 모두를 살펴보며. 미래는 옆에서 나래이션이라도 더빙하듯 일본어로 근엄하게 말을 붙인다. 참다못해 태클을 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일주일 뒤. 단순히 ‘리유를 데리고 오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된 일이 이렇게나 커졌다. 나를 포함한 다른 애들도 전부 아르바이트를 해 비행기값이 모였다. 신청했던 여권도 나왔다. 비행기표까지 예약했다. 다행히 목요일 쉬는 날, 금요일 공휴일 해서 목금토일 쉬는 날이 생겨서.

“잘 다녀와, 또 무턱대고 리유 억지로 데리고 오지 말구.”

“응. 고마워.”

싱긋 웃으며 누나 같은 느낌으로 말하는 성빈이. 나 또한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사근한 미소다. 별 이해관계도 없는데 선뜻 아르바이트한 돈을 내준 성빈이. 역시 마음씨가 착한 성빈이다.

“……어쨌든 갔다 와. 사과 똑바로 하고, 얼버무리지 말고.”

“응. 고마워, 희세야.”

“……흥.”

저번에 차인(?) 이후로 굉장히 새침한 태도를 유지하는 희세. 그러면서도 걱정하는 말은 다 해주는, 새침데기의 표본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확실히, 호주로 리유 데리러 갈 결심을 하게 만든 건 희세니까. 희세가 전화해서, 리유에게 사과할 기회를 만들어 줬으니. 내 대답에 희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린다.

“미안합니다, 미안해. 다 나 때문에…….”

“아아냐 괜찮아~ 다 지난 일인데.”

“……지난 일이면 괜찮아? 꼭 일본 정부 같은 논리네?”

리유 얘기만 나오면 죄인이 되는 유진이. 정작 리유랑 말 한 마디, 직접 대면한 적 한 번 없는 유진이인데. 뭐, 어느 정도 이 ‘죄송함’도 컨셉이다. 나쁜 의미의 컨셉이 아니라. 어쨌든 미안하니까 계속 사과하는 거지. 그게 부담스러워 대답했는데 희세가 삐딱하게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이런 것은 대충 넘어가지 않는 철두철미한 성격의 희세니까.

“아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유진이 너도 그만 하고.”

“넵.”

내 대답에 유진이는 힐끗 희세 눈치를 보더니 더욱 미안하다고 나에게 달라붙어 사죄한다. 희세는 더욱 눈을 치뜨고 나에게 엉겨붙는 유진이를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대뜸 대답하고 부동자세로 차렷하는 유진이. 완전히 천적이 됐구나, 희세. 딱히 사과하는 게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달라붙는 게 싫어서 뭐라 그러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그, 그럼 잘 다녀와.”

“아이, 뭐 이래! 꼭 지금 공항 앞에 있는 것 같잖아! 내일 가는데!”

“그, 그치만.”

민서까지 한 마디 더하니 나는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애들 말하는 분위기는 꼭 공항 앞에서 나를 보내며 한 마디씩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교하는 길. 야자 끝난 밤 교실이다. 뭐, 내일 못 보니까 다들 말해주는 거겠지만. 내일 일찍 떠나니까, 다들 나와서 마중 같은 건 못 하지. 돈 모아서 이렇게 주는 것만으로 감격이다.

“그럼, 가자.”

“응.”

얘기하느라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 교실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불을 끄고 소리지르며 복도를 나선다. 성빈이는 기숙사, 유진이와 민서는 부모님 차, 나머지 걷는 사람은 나, 미래, 희세. 그 중에서 미래는 처음 나온 갈림길에서 헤어진다.

“야. 정웅도.”

“어어.”

가다보면 이렇게 헤어지고 희세와 걷게 된다. 내 자취방하고 가장 가까운 게 희세네 집이니까. 어색한 침묵, 나를 부르는 희세의 말에 정적이 깨진다. ‘정웅도’라고 성을 합쳐 부르는 희세. 나에 대한 불편한 심리를 보여준다. 크윽…… 어색해.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어─ 8시 비행기인데, 뭐라더라. 이거저거 해야될 거 있어서 아싸리 6시에 출발하려고.”

“일찍 가네.”

“뭐, 그렇지.”

희세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외국으로 나가는 게 처음이기도 하고, 비행기는 버스가 아니니까. 미리미리 가 있으려고. 내 대답에 희세는 볼멘소리로 대답한다. 새침한 투이지만 미묘한 걱정스러운 느낌이 느껴진다.

“……리유가, 사과 받아주면. 어쩔거야?”

“그럼 좋은거지.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멍청아, 그 얘기가 아니잖아. 다시…… 사귈 거냐고.”

“어, 그렇지.”

“…….”

능청스러운 내 대답에 희세는 얼른 태클을 걸고 말한다. 껄끄러운 듯 내 눈치를 살피는 희세. 아무래도 그렇지, 조금 어색한 부분이니까, 이 사안은. 망설임 없이 얼른 대답했다. 잠시 입을 다무는 희세. 또다시 작은 침묵이 우리 둘을 감싼다.

“리유가 받아만 준다면. 아직도, 솔직히 잘 안 믿겨. 리유랑 헤어졌다는 게. 리유랑 남이라는 게. 아직까지, 많이 좋아하는데. 아직까지도 설레는데.”

“……그렇게까지 리유가 좋아?”

“……응.”

“……휴우. 너도 참 미련하다.”

“내가 그렇지. 아무래도.”

조곤조곤 내 솔직한 심경을 말한다.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희세는 그래도 리유 다음으로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대상이니까. 그만큼 친한 사이니까.

희세는 잠자코 묻는다. 미묘한 그녀의 감정까지 함께 담아서.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 하고, 조금 뜸들이다 대답했다. 나지막이 한숨 쉬고 대답하는 희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럭저럭 집으로 돌아간다.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서.


‘촤악.’

“……으으.”

“일어나, 멍청아. 내가 안 깨워주면 어떻게 일어나려고.”

“……10분만.”

“일어나아!”

커튼 치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낭랑한 새침한 목소리. 너무나 평화로운 일상과도 같아 이불을 푹 머리까지 덮고 포근한 느낌을 만끽하며 말한다. 엄마처럼 잔소리하며 깨워주는 희세. 이미 잠이 깼고, 희세는 계속 나를 방해하며 깨울 걸 알면서도 장난하듯 이불을 덮는다. 아, 좋다.

“……하아?!”

“깜짝이야. 왜!”

화들짝 놀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며 괴성을 지르는 나. 마찬가지로 화들짝 놀라 선 그대로 굳어서 나를 내려다보는 희세. 편안한 사복 차림이다. 아니, 옷차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저번에 그렇게 끝낸 이후로, 한 번도 내 방에 찾아온 적 없는 희세였는데?! 어째서?

“어…… 어어ㅇ…….”

“왜 찾아왔냐고? 안 오다가.”

“어어. 어.”

“이러고 늦잠 자고 있는데, 안 와? 비행기 놓치면 너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아아, 응.”

멍하니 희세를 보고 어버버 말 못하는 벙어리처럼 벙찐 표정을 짓고 있으니 희세는 내 마음속 질문을 그대로 말해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멍청한 표정을 짓는 나. 희세는 피식 웃으며 ‘뭐해 멍청이처럼. 얼른 씻어, 비행기 놓치기 전에.’ 하고 말한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얼른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간다. 반팔에 팬티 차림이라는, 여고생 앞에서 보이기엔 다소 거북한 패션이지만 희세 앞에서는 워낙 익숙해서 별 감흥도 없다. ……잠깐만, 그러면 안 되지?!

“준비 다 했어?”

“응.”

“뭐 놓고 가는 거 없고?”

“어젯밤에 다 확인 했어.”

“너, 불안하단 말이지. 분명 나사 하나 빠져서 뭐 놓고갈 것 같은데.”

“뭐, 거기 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리유 데리고만 올 텐데 뭐.”

“피이…… 못 미더워.”

씻고 준비하는 건 금세 할 수 있다. 평소 아침이라면 희세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겠지만, 지금은 아침을 먹을 시간도 없는지라. 희세는 꼭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일일이 하나하나 챙긴다. 뭐, 우리 정작 우리 엄마는 엄마가 덜렁이라 나한테 잔소리를 먹는 성격이라 희세와는 정반대지만. 희세는 팔짱을 끼고 나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거, 공항에서 먹어.”

“어…… 도시락?”

“어. 이거 안 싸줬으면 아침부터 라면이랑 삼각김밥 같은 걸로 떼우려고 했을 거 아냐.”

“정확히 맞췄네. 그 조합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육개장에 삼각김밥 하나면 그만인데. 고마워, 이렇게 도시락도 싸 주고.”

흰 봉투를 건네는 희세. 흰 일회용 용기에 담겨 있는 도시락. 희세 성격이라면 예쁜 도시락통에 줬을 텐데, 아마 공항에서 먹고 바로 버리라고 이런 투박한 일회용 용기에 담아준 것 같다. 살짝 열어보니 색색의 김밥. 예쁘다. 고소한 맛있는 냄새가 나 힐긋 보는 것만으로 배가 고파온다.

참, 이런 면은 정말 감동이다, 희세. 새벽부터 김밥 쌌을 거 아니야, 이렇게 만들려면? 고개를 들고 희세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한다. 희세는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어쨌든 잘 하고 와. 부럽기도 한데, 뭐가 어떻든 호주 관광하고 오는 거잖아.”

“아하하, 그런가.”

“여자애 다섯명한테 돈 받아서 여행 다녀오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다, 진짜.”

“여행이라니, 큰 사명을 어깨에 얹고 가는 건데.”

“말은.”

너스레를 떨며 능청스럽게 말한다. 예전의 수줍음 많은 정웅도는 어디로 갔는지. 희세도 이런 나를 충분히 봐 와서 씨익 웃으며 대답한다. ‘잘 가.’ 하고 손을 흔드는 희세.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걷는다. 며칠 뒤면 돌아올 것인데, 꽤 오랫동안 못 볼 것처럼 아쉬운 기분이다. 가야지. 가서, 리유 데리고 와야지.


─그랬던 게 오늘 아침의 일. 그리 큰 시간이 흐르진 않았지만, 나의 멘탈은 이미 갈기갈기 찢긴 채 갈 곳을 잃은 나그네가 돼가고 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내 맨탈은 더욱 파괴되어 고운 가루가 되어 호주에 흩날리겠지. 호주에서 멘탈가루를 날리면 대한민국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 하겠지. 다들, 잘 살고 있겠지…… 나,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아. 미안해, 리유야. 희세야.

안 돼! 여기서부터 이러면 안 되지! 벌써부터 포기하긴 이르다! 내 비행기값 70만원! 내가 번 거면 날려버리는 거 내 책임이겠지만, 이 항공비엔 다른 모두의 노동값이……! 리유를 데리고 오기 위한 수많은 시련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그냥 동양인이 아니야. 대한민국의 정웅도다!

“뭐 때문에 오셨어요?”

“에……에?!”

“아, 한국분 아니에요?”

“아뇨, 맞는데, 맞…… 한국말……?”

“네, 한국말.”

혼자서 의지를 불태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익숙한 언어가 들려온다. 영어로 쏼라쏼라하는 코쟁이들과 외국인들만 잔뜩 봐서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나에게, 들려오는 한국어는 난생처음 이렇게나 아름답고 한 줄기 빛과 같이 성스럽다.

퍼뜩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빙긋 웃으며 내 여권을 들고 있는 항공사 직원. 눈을 의심하게 한다. 전형적인 금발에 백인인데, 한국어를 하고 있다. 명절특집 프로그램에서 외국인이 한국말 하는 것처럼. 아니 근데 여긴 한국이 아니라 호주인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직원을 쳐다보니 직원은 방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대학교 때 배웠어요, 한국어. 잘 못하지만.”

“아뇨아뇨, 엄청 잘해요! 더빙하는 건 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후후훗. 어떤 일 때문에?”

이런 일을 많이 겪었는지 여직원은 방긋 웃는다. 천사처럼 눈부신 미소로 보인다.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든 손짓발짓 해서 험난한 과정을 통해 리유를 찾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높아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괜히 13위 아니구나, 한국 너!

한국말을 잘 하는, 착하게 생긴 여직원에게 해야할 일을 말했다. 리유가 살고 있는 집 주소는, 리유네 아버지께 개인적으로 전화해서 여쭤봤다. 물론 만나고 온다는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편지라도 보내려나, 싶으셨겠지. 설마 찾아가리라곤 상상도 못 하시겠지.

직원의 친절한 설명대로, 공항 앞에서 택시를 잡고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아무리 중등영어라도 ‘플리즈’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공항택시니까 비싸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이 생기지만, 그렇다고 어쩌겠어. 영어 한 마디 못 하는데 버스를 타고 골목골목 다닐 수는 없으니까. 택시를 타고 시드니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한다. 아니, 시드니 아닌데 여기. 호주 아는 도시 이름이 시드니밖에 없으니까.


나는 리유가, 기숙사 같은 곳에 사는 줄 알았다. 룸메이트 어쩌고 하는 얘기 들었던 것 같으니까. 그랬는데 알고 보니, 홈스테이 같은 것 같다. 주소대로 도착해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은 깔끔한 2층집. 마당도 있고, 마당에는 개도 있다. 한적한 교외의 그림 같은 집이라. 과연 호주답다.

“우흐으…… 춥네.”

호주는 한국하고 계절이 반대라고, 말로만 듣고 가벼운 바람막이를 들고 왔는데 웬걸, 상당히 춥다. 그나마 이거라도 챙겨와서 다행이긴 한데. 일단은 주소에 적힌대로 집앞까지는 어떻게 왔다.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하지. 리유한테 전화해서 나오라고 할까. ……아니, 리유한테 전화하는 건 최후의 수단. ‘깜짝파티’ 같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깜짝 놀래켜주고 싶은걸. 그렇다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처음 보는 집 초인종을 누르고 물어볼 자신감은 없다. 초인종 누르고 낯선 이가 나오는 것 자체는 상관없지만, 그 이후로 대화가 전개가 안 되니까. 그게 두려운 거지.

“헥, 헥.”

“어이구, 귀여워라. 짖지도 않네. 아, 영어로 해야겠지. hey, dog. good boy.”

“헥, 헥.”

아까부터 힐끔 나를 쳐다보고 있는, 묶여있지도 않은 개. 리트리버 종류인 것 같은 녀석. 복슬복슬한 털에 선해보이는 눈이 인상적이다. 희세네 집 ‘케이나인’이 떠올라 살며시 다가간다. 짖지도 않고 나에게 선뜻 다가와 내 다리에 자기 앞발을 걸치는 녀석. 귀여워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좋아라 손을 핥는다. 말이 안 통할 때엔 원래 말 안 통하는 녀석하고 노는 게 좋은 것 같다. 개는 인간의 친구니까.

“!@$$%@&$%&#@? !@^T@^#@$^@!”

“아, 저, 그, 그게. 아, 영어로 해야지. ah, uh, um. well.”

춥기도 하고, 개가 귀엽기도 하고, 해서 한참 강아지와 부비고 놀고 있다. 개는 짖지도 않고 나와 한참을 재미있게 논다. 그러다 문득 문이 열리고 서양인(?)이 나온다. 외국이니까 당연한 건가. 짧은 금발에 강렬한 푸른 눈이 인상적인 중년에서 노년 사이의 아저씨. 나를 보고 뭐라고뭐라고 하는데 물론, 그런 고급영어를 내가 알아들을 리 없다. 중간중간 들릴만도 한데 너무 빨리 말해서 모르겠다. 당황스러워서 두 손을 들고 결백(?)하다는 걸 보이며 말한다. ‘아, 저, 그게’를 영어로 한다고 해봐야 무슨 의미인데.

“!%$&@#$&^%@ lee-you’s friend?”

“오! 예스 예스! 리유스 프랜드! 오케이, 땡큐!”

“???”

뭐라고 뭐라고 하는 와중에, ‘lee-you’라는 말이 들린다. 정확히 ‘리유’라는 한국어 발음과는 많이 다른 외국식 발음이지만, ‘friend’라는 간단한 영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기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인 아저씨는 상당히 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2%!@4 she is !#$^#&@6. come in!”

“예…… 예스. 땡큐 설.”

“???”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리유에 관련된 일이다. 두뇌풀가동을 해서라도 알아듣겠다는 집념으로 귀를 활짝 열고 그의 말에 집중한다. 외국인 아저씨의 말은, 전혀 못 알아듣겠지만 대강 단어만 듣고 해석하자면 리유가 이 안에 있다는 얘기 같다.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나도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come in!’ 하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건물 안을 가리켰으니까. 그 정도는 영어 몰라도 알아듣겠다. 내가 아는 표현 중 최상의 감사표현을 아저씨께 표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아저씨. 먼저 들어가신다.

“$6!@$#$^@$?? oh, what?”

“!@#$^@#^!!@$2. lee-you’s friend.”

“……정리유.”

“……!”

따뜻한 실내. 예쁜 바깥 경치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집의 정경. 확실히 문화권이 다르니 집 내부도 다르구나 싶을 정도의 이국적인 모습. 거실에는 아무도 없고, 거실 옆에서 소리가 들린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아마 밥 먹는 중이었나보다. 안쪽에서 중년 아주머니의 목소리로 영어가 들려온다. 대답하는 아저씨.

나는 멀리서부터, 리유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멈춰섰다.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멀거니, 리유를 바라본다. 리유는 아저씨의 말에 특유의 귀여운 표정으로 아저씨를 보다가 문득 시선이 나에게 닿는다.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리며,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쳐다보는 리유. 그대로, 리유의 이름을 부른다.

“리유야!!!”

“에, 엣?! 어떻게, 어떻게?!!”

질질 끌고 있던 캐리어를 그대로 두고, 성큼 리유에게 달려가 소리친다. 실내이고, 처음 보는 외국인 부부로 추정되는 분들도 계신데 예의가 아니겠지만. 그만큼 감정이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게 되었다. 리유는 정말 깜짝 놀라서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며 높은 톤으로 말한다. 이 목소리, 얼마만에 듣는 건지. 이 표정, 이 얼굴. 얼마만에 보는건지 모르겠다. 눈물까지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리유의 손을 덥썩 잡았다. 따뜻하다. 보고 싶었어, 듣고 싶었어, 말하고 싶었어. 수많은 감정들이 폭발할 듯 마음을 가득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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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06화 - 3 +10 15.09.01 1,047 20 21쪽
167 06화 - 2 +8 15.08.30 1,005 19 19쪽
166 06화. 일장춘몽 +12 15.08.27 1,220 68 20쪽
165 05화 - 4 +18 15.08.24 1,213 25 18쪽
164 05화 - 3 +14 15.08.22 1,105 21 19쪽
163 05화 - 2 +8 15.08.20 943 27 19쪽
162 05화. 너를 내 것으로 하겠어 +12 15.08.18 1,174 16 19쪽
161 04화 - 2 +10 15.08.15 918 27 17쪽
160 04화. 마음만큼은 나도. +10 15.08.11 1,120 2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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