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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188
추천수 :
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5.10.04 09:28
조회
933
추천
24
글자
22쪽

10화 - 5

DUMMY

“아핳, 아하하!”

“하하하.”

천진난만하게 웃는 리유. 키도 몸매도 얼굴도 리유보다 월등히 언니 같지만 리유 못지 않게 순수한 웃음을 보이는 실리아. 나는 그 두 소녀를 쳐다보며 훈훈하게, 아빠미소를 짓는다. 좋구나. 낙원일까, 이곳은. 동양에서 제일 귀여운 리유와, 서양에서 제일 귀여운 실리아. 양쪽에 끼고 같이 걸으니 더는 부러울 게 없다. 천하를 얻었구나.

가까운 공원.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이니 나는 그냥 리유랑만 있고 싶고 밖에 나가고 싶지 않지만 리유가 나가 놀자고 해 나왔다. 아 뭐 이제는 리유 만났으니까. 말 걸어와도 리유에게 맡기면 되겠지. ……살다살다 내가 리유한테 의지하는 날도 오는구나. 그게, 어쩔 수가 없잖아. 언어적인 문제는.

“그러면, 진짜 나 만나러만 왔어? 사과하러?”

“아아니. 사실은 그런 건 아닌데,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뭔데? 아, 언제까지 있어? 어디서 잘 거야?”

“아…… 일단은 일요일까지는 가야하는데.”

실리아는 천진난만하게 그네를 타고, 나와 리유는 벤치에 앉았다. 안 그래도 말을 꺼내려 했는데, 리유가 질문을 해주니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겠다. 리유 데리러 왔다고. 하지만 역시 정리유야, 가차없지. 자기가 궁금한 것만,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 물어보는 건 리유의 특기지. 거기에 맞춰 또 대답해주는 건 늘 있는 일이고.

“뭐야, 그렇게 무책임하게 왔어? 거짓말 치지 마, 비행기가 버스도 아니고, 가는 날 오는 날 다 예약해서 왔을 텐데. 우리집에서 자려고 한 거야?”

“너가 그렇게 야무지게 똑 부러지게 말하면 적응이 안 되잖아! 아무 생각 없이 온 거 맞아! 그냥 너 보고! 너 데리러 오려고!”

“어?! 나, 데리러?!”

리유는 리유답지 않게 반쯤 눈을 뜨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따지는 투로 말한다. 적응 안 돼! 리유가 이런 투로 말하는 거! 희세도 아니고, 성빈이도 아니고! 변해도 너무 변했잖아! 단순히 영어만 배운 게 아니야, 리유! 벌컥 성을 내듯이 본심을 말하는 나. 이 더럽고 타락한(?) 세상, 적어도 리유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마음이니까. 리유는 내 말을 듣고 흠칫 놀란다. 나도 모르게 ‘데리고 간다’는 말을 해 버렸다.

“어어. 데리러 왔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온 지 몇 개월도 안 됐는데.”

“……힘들다며.”

“…….”

말 나온 김에 확실하게 말 해야지. 리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가만히 리유를 보고 한 마디 꺼내는 나. 활기찬 분위기는 잠시 접어두고. 리유는 입을 다물고 내 눈을 피한다. 다시금 어색한 공기로 전환.

“힘들다고, 희세한테 말했다며. 나한테는 그런 내색 전혀 안 했잖아. 알지, 알아. 어쨌든 만날 수 없는데 힘들다고 하면, 내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모두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그만큼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배려한 거, 잘 알아. 엄청 대단하고. 그치만, 그래도. 나, 남자친구잖아. 남자친구였잖아.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아? 나도, 너보다 산만큼 커도 너한테 의지하고 응석부리는데.”

“…….”

바람피운 내가, 리유에게 ‘남자친구’로서 말할 자격이 있을까 싶지만. 적어도, 리유가 유학가고 헤어지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말할 기회가 있었잖아. 평소에는 그렇게나 어린애처럼 응석부리고 전부 말해줬으면서, 제일 중요한 그 때에 왜. 말해주지 않은 거야. 남자친구 역할을 다 못한 것 같아서 자꾸 눈에 밟히잖아. 그래서 추궁하듯 리유에게 묻는다. 리유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나도 말을 아낀다.

“……그건, 웅이니까 못 말한거야.”

“그러니까 왜, 내가 남자친구인데 대체 왜!”

“남자친구니까! 더, 더 그랬어!”

“……!”

겨우 말을 떼는 리유. 화를 낼 건 아니지만 괜히 화를 내게 되는 나. 답답한 마음에 그런 것 같다. 리유는 떨쳐내듯 소리치며 나를 쳐다본다. 처음 보는, 화난 모습의 리유. 어느새 리유의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흠칫 놀라 가만히 리유를 쳐다본다.

“히이한테 그랬어, 나도! 히이나 비니처럼 멋지고 어른스러운 여자애 되고 싶다고! 늘 아이처럼 하면 웅도 네가 떠날까봐 무서웠으니까! 나는 뭐 맨날 웃기만 하는 바보야? 안다구, 나도! 히이도 비니도 모두! 웅이 좋아하는 걸,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데!”

“…….”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런 사진까지 보내면,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잖아. 어떻게 말하라고.”

“……미안.”

“하아. 됐어, 됐어. 이제 됐어.”

늘 웃으며 천진난만하게만 지내고, 긍정적으로, 나쁘게 말하면 별 생각 없이 눈치 없이 지내는 리유인 줄 알았는데. 변한 게 아니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리유의 불안감에 불을 지핀 게 다른 게 아니라 나랑 희세가 찍은 사진. 결국엔 사필귀정, 모든 잘못의 시발점으로 도달하는 걸까.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다. 리유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말이 없는 나를 보고 짜증스럽게 ‘왜 또 이 얘기로 빠지는데! 에이, 이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끝났다니까, 이 얘기!’ 하고 말한다.

“……리유야.”

“응.”

“다시…… 사귈 수는 없을까.”

“…….”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유는 심통이 난 목소리다. 애써 진지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려고 톤을 일부러 높인 것 같은 느낌.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떨어지지 않은 입을 억지로 놀려 말을 꺼냈다. 다시 사귀는 거. 차마, 면목이 없어서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는 리유를 보고 있자니.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리유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본다. 살짝 놀란 것 같은 모습. 입술을 깨물며,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조그맣게 한숨을 쉰다. 그동안 나는 안절부절, 눈을 부릅뜨고 리유를 바라본다.

“안 돼.”

“……안 돼.”

“솔직히 지금은…… 못 받아들이겠어. 아무리, 아무리 히이라고 해도…… 그런 것까지 헤실대면서 바보처럼 받아줄 멍청이는 아니니까, 나.”

“그, 그런 말이 아니라.”

“응, 알아. 나 멍청이로 보고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웅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한테? 나도 웅이 엄청 좋아하고, 웅이도 나 엄청 좋아하는 거 알지만, 잘 알지만.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싫어.”

“……그래.”

“……먼저 갈게.”

리유의 단호한 대답. 두 글자의 그 대답에 만감이 교차한다. 착찹한 표정으로 리유가 한 말 그대로 말하니 리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화난 건 아니고, 심통이 난 것도 아니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리유인데 그게 더 이상하다. 그게 더 무섭다. 그게 더…… 확실하게 관계를 끊으려는 것 같다. ‘지금은, 싫어’라는 마지막 말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수백, 수천, 수억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왔다갔다 하지만 간신히, ‘그래.’ 하고 대답했다. 리유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고 뒤돌아 걷는다.

“…….”

“Um…….”

“아. 오케이. 땡큐.”

“Ha?”

“아아, 아니에요.”

리유는 떠나고, 나는 그대로 벤치에 앉아 있다. 혼자서. 다리는 쭉 벌리고, 허벅지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등이 이마에 향하게, 검지로 양 눈썹을 누르며 고개를 팍,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계속 한숨밖에 안 나온다. 심장은 두근두근,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정말로, 진짜로 리유랑 헤어졌구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던진 말이었는데.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실리아의 목소리. 얼른 고개를 들고 대답한다. ‘옆에 앉아도 되요.’ 하는 말을 영어로 할 수 없다. 이런 복잡하고 갑갑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영어울렁증에 시달려야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나쁘네. 왜 세계 모든 민족들을 다른 말을 쓰게 하셨을까. 하늘에 닿으면 좀 어떻다고. 하나님 귀여운 자식들인데. 이래서 기독교가 싫다. 실없는 개드립이다.

“Fine?”

“Fine, thank you. and you?”

“……HUHU.”

“푸흡. 하아.”

꾸준글처럼 계속 파인 땡큐 앤드 유를 밀어 붙였는데, 지금에야말로 대화 맥락에 맞는 쓰임새를 찾았다. 물론 정말은 전혀 안 괜찮지만. 안 괜찮은 분위기를 아는지 실리아도 피식 웃는다. 나도 웃음 지었다가 한숨을 팍 쉬었다.

“Lee-you is crying. um…… something wrong?”

“아아. 예스. 어…….”

실리아는 굉장히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해준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인이 말하는 영어 같지는 않지만. 단어의 구성도 충분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일부러 쉬운 단어로 말해주는 것 같다. 배려해주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 아임 낫 스피크 잉그리시. 벗…… 아이 원트 텔 유.”

“OK. tell me.”

“음…….”

나의 저질 발음에도 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는다. 지금은 그냥, 못 알아들어도 내 얘기를 들어만 줬으면 좋겠다. 아니, 차라리 못 알아듣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푹푹 쉬며 실리아를 쳐다본다. 실리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엄…… 아임 리유’s 보이프랜드. 인…… 라스트 month. 아이 해브 어나더 걸프랜드. 소, 리유 이즈 베리 엥그리. 앤…… 위 엔드. 나우, 낫 보이 프렌드, 낫 걸프렌드.”

“ooh…… well.”

잘 알아들었으려나 모르겠는데. 정확한 사정을 전하기엔 내 영어실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도 얼추 알아들었는지 실리아는 굉장한 리액션을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쨌든 ‘어나더 걸프랜드’를 잘 알아들은 모양이다. ……물론 희세가 두 번째 여자친구나 그런 건 아니지만. 여자친구도 아닌데 왜 그런 사진을 찍었냐고 말하자면, 그…… 젊은 시절 한 때의 불장난이라고…… 아몰랑.

“벗…… 아임 스틸 러브 리유. 소, 아임 텔 허. 아임 스틸 러브 유. 벗…… 리유 이스 베리 엥그리. 아직…… 아, 음…… 모어 타임 리콰이어. 아임 베리…… 복잡? 아. 베리 업셋 앤드 세드. 원트 크라잉. 벗 맨 이스 낫 크라잉. 인 이스트 랜드. 인 코리아.”

“Uuh, cheer up!”

“하아.”

아직 나는 리유를 좋아한다. 리유도 아직 나를 좋아한단다. 하지만, 안 된다. 한 번 상처를 입은 게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다. 아니, 그런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처는 나을 수 있겠지만, 이건.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게 있지. 쇠로 무엇을 만들면, 다시 쇳물로 녹였다가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고기를, 불에 익혔다가. 냉동실에 넣는다고 다시 생고기로 돌아오진 않잖아. 이미, 나는 리유에게 신뢰를 잃었지. 한 번 바람피운 애가 두 번 바람피우지 말란 법 없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으니 예전처럼 돌아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였지.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 내가 너무, 리유를 무시했어. 내가…… 개X끼다.

“Woong-do. you bad guy.”

“……예스.”

“bad boy. 변태?”

“아니아니! 노! 변태 노!”

“HAHAHA!”

“휴우.”

‘배드 가이’나 ‘배드 보이’ 같은 거, 한국에서는 되게 좋은 이미지로 쓰이는 단어인데. 지금 실리아가 말하는 건 정말, ‘나쁜 놈’이라는 뜻인 것 같다. 일천한 영어 솜씨로 얼토당토않은 말로 설명해도, 그 부족한 설명만으로도 실리아가 느끼기에 내가 나쁜놈으로 느껴지나보다. 맞다. 나쁜놈. ……변태는 아니라니까! 리유는 왜 얘한테 이런 말 가르쳐서! 실리아는 깔깔 웃는다. 장난기 가득한 눈. 어휴. 외국에 와서까지 이렇게 변태 소리 들을 줄이야. 그것도 외국인한테.

”Well, #!^@%#&@$&@. @#$*!@&%*$@^@?? !@$^!#61!$!!”

“……아이 돈 스피크 잉글리시. 쏘리.”

“HAHAHAHA! wait!”

실리아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거두고,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뭐라고 한다. 물론 나는 못 알아듣고. 천천히 말해주지만 영, 못 알아듣겠다. 아까의 단순한 영어와는 질적으로 다른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어서. 솔직하게 못 알아먹겠다고 말하니 특유의 깔깔대는 웃음을 보이는 실리아. ‘잠깐만’ 하더니 휴대폰을 꺼낸다. 번역 어플이라도 쓰려나.

“hmm…… ah. him…… 내?”

“힘 내?”

“yes! yes, 힘 내!”

“아아, 땡큐땡큐.

“HUHUHUHU. umm…… 여, 여…… 여자 많아!”

“아니 그런 건 어디서 찾는…… 세상에 반은 여자지! 근데 리유는 한 명이잖아! 우어어어엌!!”

“HAHAHAHAHA!!”

번역기는 아니고, 사전 같은 걸 뒤지며 더듬거리며 말하는 실리아. ‘힘 내’라는 한국말을 해 준다. 아, 되게 고맙네. 마음 울컥 할 것 같아. 이어서 실리아는 더 찾다가 더듬거리며 또 말한다. ‘여자 많아!’라니, 그런 위로의 말은 대체 어디서 찾는 거야?! 말도 안 통하고, 짜증을 낼 수도 없고 해서 무턱대고 한국말로 태클을 걸며 소리 질렀다. 실리아는 내가 화내는 게 마냥 즐거운 지 깔깔 웃는다. 답이 없다. 별 수 없이 실리아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잘 자.”

“응. 고마워.”

“잘 데도 안 구하고, 웅이 너무 무모해.”

“아하하. 리유 덕분에 이런데서 자잖아?”

“흐응~”

리유의 말에 너스레를 떨며 대답한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심통이 난 표정으로 얄밉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리유. 그것도 귀엽다.

실리아 부모님께 먼저 말씀을 드린 리유. 두 사람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잘 곳이 마땅치 않아 거실 소파에 누워서 잔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하룻밤만 신세져도 되게 민폐인데 이틀 밤이나 신세지게 생겼다. 죄송스럽네. 그래도, 평생 겪지 못할 추억이지. 호주까지 와서 소파에서 자고.

“……나, 돌아가는 거.”

“응.”

“확실히, 고마워. 정말 힘들 때 왔으면, 나도 모르게 진짜 간다고 했을 것 같애. 그치만, 지금은 괜찮아. 정말. 실리아랑도 친하고, 이제 말도 어느 정도 알아듣고. 데이브랑 셀리도 잘 대해주고. 무엇보다, 아빠가 유학보낸 건데 무턱대고 가기에는.”

“아무래도…… 그렇지.”

“응. 적어도, 이번 여름방학 전까지는. 솔직히 그렇잖아! 6개월은 채워야지!”

“그치?”

잠자리 인사까지 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리유. 다시금 내쪽으로 걸어와 돌아가는 문제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 리유의 말을 듣는 나. 의외로 현실적인 리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래도. 무슨 만화도 아니고, 무턱대고 ‘정리유! 너 유학 그만해. 이런 데에 있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동료가 있잖아! 가자, 한국으로!’ 하고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유학 수속이라던가, 이런저런 어른의 절차가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돈이 걸린 일이잖아. 단순히 비행기값 140만원을 지불하는 것만으로 벌써 어른의 사정을 몇 퍼센트 정도는 이해하게 된 것 같은 나다.

“어쨌든, 확실하게 해 둘 거. 나, 웅이 싫어하는 거 아니야. 지금도 엄청엄청 좋아. 그치만, 싫어. 다시 사귀고 싶지 않아. 그런 거 가지고 또 삐치거나 그러지 말구. 때 되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 아이구, 우리 리유 어른 다 됐네.”

“우씨! 영어도 못 하는게!”

“너는 유학을 왔으니까 잘 하지! 살기 위해서 배웠겠지, 나는 한국사람인데!”

“나도 한국사람이야! 말 못 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멍충이가!”

“영어 좀 배웠다고 이게!”

리유는 야무진 목소리로 말한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린애가 ‘이제 나 다 컸어요!’ 하고 조목조목 얘기하는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으로 말하니 리유는 영어 가지고 나를 도발한다. 그래 나 영어 못 한다! 안 그래도 실비아처럼 예쁜 여자애 만나도 말 한 마디 못 해서 짜증나는데! 이전에는 없던 방식으로 리유와 티격댄다. 그만큼 나도 리유도 바뀐 탓일까. 끝에는 둘 다 피식 웃는다. ‘잘 자’ 하고 서로에게 말하고 리유는 2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누웠다.

뭐, 이런 관계도 나쁘지는 않으려나.


“잘 가!”

“응! 여름방학 때 보는거다?”

“어어. 돌아오면 웅이 영어는 확실히 이기겠다! 히히.”

“하하하. 그 때 보자구! 내가 죽어도 영어는 열심히 해야겠네.”

“히힛. 잘 가!”

짧은 며칠, 리유랑 실비아랑 잘 놀았다. 본의 아니게 호주 관광으로 변질돼 버린 내 여정. 희세 말이 맞네. 애들 덕분에 외국 관광을 갔다와버렸어. 공항까지 리유와 실리아가 마중 나왔다. 계속 영어 가지고 도발하는 리유에게 나 또한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솔직히 영어로 리유 이길 자신이 없는데. 얘는 원어민이랑 얘기하는 레벨인데. 실리아는 ‘bye bye~’ 하며 인사하고, 나도 마찬가지로 ‘바이바이’ 하고 대답했다. 그 정도 영어는 알아들으니까.

비행기에 타고, 잠자코 눈을 감는다. 다시, 리유랑 헤어지는구나.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비행기가 뜬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더는, 만날 수 없는 거리가 되는 것처럼.

비행기가 내린다. 먹먹한 기분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려서, 짐을 찾고 공항 바깥으로 내린다. 택시를 타고, 집까지 왔다. 조금 걷고 싶어서 일부러 멀리서 내렸다. 터덜터덜 걸으며, 리유를 생각한다. 이젠 싫댔지.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 실리아가 얘기 들어줄 때, 혼자 말하면서 깨달은 거. 나와 리유 사이는, 이제 변할 수 없는 게 되어버렸구나.

『여보세요? 왔어? 리유는?』

“……잠깐 볼 수 있을까.”

『뭐? 어딘데 너?』

“……너희 집 앞.”

『뭐?!』

걷다가 걷다보니 희세네 집 앞.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멍한 기분에 걷고 싶어서 걷다보니 그렇게 됐다. 미친놈처럼 멍한 목소리로 희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깜짝 놀라는 목소리의 희세. 전화를 끊고, 금방 문을 열고 나온다. 한데 묶은 머리와 편안한 트레이닝복. 희세랑은 뭐, 그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니까. 화장이야 원래 안 하는 희세고.

“뭐야. 지금 왔어?”

“……어.”

“리유는? 데리고 왔어, 확실히?”

“……아니.”

“뭐? 안 데려왔어?”

“……하아.”

내 꼴을 위아래로 살피며, 희세는 묻는다. 캐리어랑 짐 그대로 들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겠지.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이어지는 희세의 질문에, 먹먹하던 머리가 울컥 슬픔과 분노로 돌아선다. 데려오지 못 했어. 돌이키지도 못 했어.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어. 질책은 아니지만 희세의 말이 내 마음에는 큰 질타처럼 들려 고개를 푹 숙이게 되었다.

“……흐읏. 후아.”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흑! 흐윽, 흑, 흣…… 크흡! 웁웁!”

“뭐, 뭐야?! 미친……! 야, 야!”

울음이 다가온다. 안 돼, 희세 앞이야. 안 돼, 이런 찌질한 것 가지고 울지 마. 이성은 명령을 내리지만 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희세의 걱정스런 말에 감정이 더욱 울컥 솟아오른다. 그대로, 왼팔에 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떨구고, 희세 품에 달려들 듯 머리를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희세 품에 안겨 울다니. 희세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밀치려 한다. 그러다 잔뜩 우는 나를 그대로 둔다. 나는 희세의 품에 안겨 그대로, 쓰러질 듯 희세에게 기대 한동안 울었다. 한참을, 울고 싶어서. 그냥, 울고 싶어서. 더는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

“……미안. 그…… 못 데리고 와서.”

“못 데리고 왔는데 그 정도로 울어?”

“아니. 그…… 답답해서. 영어를 못 해서, 3일동안.”

“말도 안 되는 변명 좀 작작해. 리유한테 한 소리 들었어?”

“아니…… 흐윽……! 리유가……!”

“그만 울어! 찌질이야?!”

겨우 진정하고, 침묵이 오가는 사이 먼저 사과하고 말을 꺼냈다. 울음 때문이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희세도 희세대로 상당히 난처했는지 얼굴이 상기돼 있다. 희세 가슴팍이 잔뜩 내 눈물에 젖어 있는 게 보인다.

희세는 따지듯이 묻는다. 고개를 저으며 변명하는 나. 그런 개수작에 속아 넘어갈 희세가 아니지. 계속해서 따지니 나는 어린아이처럼 또 울음이 차올라 우는 목소리로 말한다. 희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잔뜩 나를 다그친다.

“그냥 헤어지면 헤어진 거잖아! 구질구질하게 왜 그래! 너는 나 차 놓고서, 너는 정식으로 차이니까 그렇게 못 참겠어?!”

“그치만, 그치만……! 끄흑, 히끅, 후으, 후으읏.”

“하유…… 지지리 궁상이다 너두. 에효. 가.”

“흐윽, 흑…… 응?”

“저녁 먹어야지! 그러고 집 가서 그냥 게임이나 할 거 아냐. 가, 밥 차려줄 테니까.”

“……희세야.”

“됐거든?! 하여튼, 개찌질해서.”

희세는 잔뜩 퉁명스럽게 말한다. 괜히 희세가 고마워져서 울먹이며 말하니 희세는 질색인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장서 걷는다. 내가 떨어뜨린 짐을 들고 가는 건 덤이다. 희세의 뒷모습이 굉장히 대장부처럼 다부지게 보인다. 얼른 캐리어를 끌고 따라간다.



그래, 뭐 완전히 결단난 건 아니니까. ‘지금은’ 싫어 였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세월이 지나면. 또, 모르겠지. 내 마음도 변하고, 리유 마음도 변하고. 어쨌든, 큰 상처구나. 나한테나 리유한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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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10화 - 2 +8 15.09.29 1,050 16 21쪽
181 10화. 약속했어, 기다려 줘. +12 15.09.24 1,022 18 16쪽
180 09화 - 4 +12 15.09.22 951 25 17쪽
179 09화 - 3 +8 15.09.21 1,033 26 21쪽
178 09화 - 2 +9 15.09.20 891 21 17쪽
177 09화. 힘들지만 안녕, 하고 말하기 +8 15.09.19 1,232 16 19쪽
176 08화 - 4 +12 15.09.16 937 18 19쪽
175 08화 - 3 +10 15.09.15 1,063 19 21쪽
174 08화 - 2 +12 15.09.13 1,003 20 19쪽
173 08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16 15.09.11 959 20 19쪽
172 07화 - 3 +10 15.09.09 1,096 17 20쪽
171 07화 - 2 +16 15.09.08 935 17 19쪽
170 07화. 말했을 텐데. +10 15.09.06 1,035 20 18쪽
169 06화 - 4 +6 15.09.04 998 18 23쪽
168 06화 - 3 +10 15.09.01 1,046 20 21쪽
167 06화 - 2 +8 15.08.30 1,005 19 19쪽
166 06화. 일장춘몽 +12 15.08.27 1,219 68 20쪽
165 05화 - 4 +18 15.08.24 1,213 25 18쪽
164 05화 - 3 +14 15.08.22 1,104 21 19쪽
163 05화 - 2 +8 15.08.20 942 27 19쪽
162 05화. 너를 내 것으로 하겠어 +12 15.08.18 1,173 16 19쪽
161 04화 - 2 +10 15.08.15 918 27 17쪽
160 04화. 마음만큼은 나도. +10 15.08.11 1,120 2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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