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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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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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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92,898

작성
15.10.1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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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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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
18쪽

12화 - 3

DUMMY

“잠깐.”

“네?”

“할 말.”

“에에? 아, 저 잠깐만 오줌 좀……!”

영어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수준별 수업인지라 다들 우리반으로 돌아온다. 나는 편하게 우리 반에 그대로 남아있으면 된다. 소변이 마려워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오는데, 선생님이 복도 창가에서 창밖을 보다 몸을 돌려 나를 보고 말씀하신다. 내 대답은 제대로 듣지도 않으시고 뒤돌아 걷는다. 아 씨, 오줌 마려운데……!

“화장실 갔다오던가, 교무실에 있을 테니까. 잠깐만 와 봐.”

“네, 감사합니다!”

뒤돌아 쿨하게 걸으며 하는 선생님에 말에 넙죽, 고개를 숙이고 깍듯이 인사하곤 얼른 화장실로 간다. 잠깐만, 나는 자유롭게 쉬는 시간을 만끽할 자유가 있는데, 왜 내가 선생님한테 이렇게 감사표시를 해야 하지. 역시, 사람이 노예근성에 익숙해지면 안 돼. 선생님이 자꾸 나 위압하고 때리니까 본능적으로 이러잖아. 화장실에 간다.

“무슨 일 때문에……?”

“앉아봐.”

“넵.”

교복 바지에 손의 물을 닦으며 선생님 앞에서 작게 말했다. 아무리 선생님과 친하고 격의 없는 사이라고 해도, 교무실에선 조용히 하게 되지. 모르는 선생님도 몇 분 계신데. 선생님은 잠자코 선생님 뒤편에 있는 작은 의자를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얼른 의자를 빼서 선생님 앞에 앉는다.

“……무슨 말이요?”

“……흠.”

“네?”

얌전히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본다. 일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그런데 왜 나를 부르셨지. 이렇게 일 하는 모습 지켜보라고. 그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가만히 선생님께 여쭤보니 선생님은 별 대답을 안 하신다. 뭔가 살짝 당혹스러워하는 모습.

“……가까이 와 봐.”

“에? 무, 무슨 얘기 하시려고……?”

선생님은 잠깐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무슨 진지한 얘기 하시려고. 뭐랄까, 진로 같은 것에 대한 얘기? 하긴, 나도 이제 2학년이니. 좀 있으면 2학기 되니까, 좀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까. 선생님, 꼭 선생님 아니더라도 사촌누나처럼 개인적으로 친하니까.

긴 기간 나를 빤히 쳐다만 보시던 선생님. 가까이 오라고 하신다. 정말, 의외로 뜸 들이시는구나. 대체 무슨 엄중한 비밀 대화를 하려고 이러시는 건지, 미심쩍은 표정으로 선생님 가까이 다가간다.

“……연애상담, 같은 거 하고 싶은데.”

“……네에엑?!”

“소, 소리 크게 내지 마 멍청아!”

수줍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선생님. 잠시 동안 그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굳은 표정이 되었던 나. 곧 깜짝 놀라 대답과 함께 기이한 괴성을 질렀다. 선생님은 흠칫 놀라서 얼른 손짓하며 몸을 숙인다. 교무실에는 선생님 자리자리마다 기이한 칸막이 같은 게 있어 몸을 숨길 수 있다. 순간적으로 쫄아 얼른 선생님을 따라 몸을 숙였다.

“미쳤어?!”

“아, 아뇨. 죄송합니다. 너무 의외라서.”

“하여튼. 암만 꼬꼬마라도 그렇지.”

“아니, 연애상담이라뇨.”

“그…… 그건.”

선생님의 다그침에 얼른 사죄하며 말을 잇는다. 선생님은 대번에 다시금 의기소침한 표정이 되신다.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러기 싫지만. 나, 연애에는 정말 젬병이라. 너는, 여자애 여럿 후리고 다니면서 잘 하고 있잖아. 열여덟살 주제에 문란하게.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야.”

“잠깐만요, 누구를 그렇게 불건전한 이미지로 보고 계신 건데요?! 제가 얼마나 건전하고 똑부러지고 착한 고등학생인데요!”

“자기 입으로 그런 식으로 말해? 엄청나네, 꼬꼬마 너도.”

선생님은 부끄러운 듯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디스가 잔뜩 담긴 말을 하신다. 잠깐만요, 제가 그런 애라구요?! 전혀, 전혀 아닌데! 어디의 누구 얘기에요, 그 방탕한 탕아(蕩兒)는?! 내 대답에 선생님은 다시금 평정심을 찾고 정웅도 디스에 들어간다.

“아뇨! 선생님 저 그런 눈으로 보고 계셨어요?!”

“그러지 않아? 엄청 즐겁게 아라비아 생수왕처럼 하렘 라이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안 그래요! 생수왕이 뭐에요 생수왕이!”

내가 비록 여자애들 여러명하고 놀긴 하지만, 여기 여고잖아! 그냥 친구라고 사귈만한 애가 전부 여자인데 어떡하라고 진짜!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면 그냥 왕따로 있으라는 얘기잖아! 가뜩이나 1학년 초기 때 왕따 당해서, 이번에도 그렇게 당해서 얼마나 서러웠는데! 게다가 생수왕은 또 뭐야?! 서, 설마 생수, 생, 세…… 아니이! 그건 절대 안 했는데요?!!

“어쨌든. 지금은 쉬는 시간 다 끝났으니까, 이따 점심 먹고 다시 여기로.”

“제가 왜 그런 걸…… 애초에 저도 연애 쪽은 그다지 무슨 경험이 있는 건 아니에요.”

“호오. 여자친구 사귀고, 바람 피우고, 한 명은 아예 병적으로 좋아하고, 헤어지고. 이런 경력들이 연애경험이 없는 거면 대체 어떤 게 연애경험……? 역시, 관계를 맺어야 경험으로 치는 건가? 첫 경험?”

“아뇨아뇨! 무슨 관계요!”

“relationship.”

“갑자기 영어 가르치지 마요!”

태세가 바뀐 선생님의 일침은 날카롭다. 뒷머리를 긁으며 언짢게 말하는 나에게, 과거의 죄목을 낱낱이 말씀하시는 선생님. 자기 불리할 땐 ‘작게 말해 멍충아!’ 이런 말이나 하면서! 어른이 왜 이렇게 비겁해?! 논점 흐리게 왜 여기서 과거 얘기를 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런 항변들은 어디까지나 마음속에서만. 실제로 그렇게 했다간 얼마나 털리려고.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개드립으로 나서서, 결국엔 벌컥 화내고 끝내는 수밖에는 없다. 쉬는 시간이 10분밖에 안 돼서 다행이지.


“아무래도 조금, 걱정되지 않나요.”

“뭐가 걱정돼.”

“……그냥, 그렇잖아요.”

걱정스러운 말투로 먼저 말을 꺼낸 나. 선생님은 심드렁하게 물어본다. 눈치를 채셨는데 일부러 내색하지 않으시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시는 건지. 조금 주위 눈치를 살피며 선생님을 바라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지만. 선생님은 꽤나 정적인 모양새로 걷고 계신다.

“왜, 혹시라도 다른 애들이 ‘정웅도랑 혜라쌤이랑 사귄데!’, ‘어쩐지……’ 이런 소문 낼까봐?”

“늘 전부 알면서 모르는 척 하시는 거죠? 어쩐지.”

“후후.”

선생님은 넌지시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신다. 역시, 알고 계셨나. 그렇잖아, 솔직히. 말만한 남자 고등학생과 여선생님, 둘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같이 밥도 먹고 이렇게 점심시간에 돌아다니면. 누가 봐도 그림이 이상하잖아.

사람들은 뭇 소문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여자애들은. 아니 이건 꼭 여성차별 같은 게 아니라, 그, 계층화에 대한 변명이랄까. 뭐라는 거야.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처럼 계급을 이루는 성향이 적으니까, 대신에 자신들 집단의 결속을 다질 어떤 얘깃거리, 즉 ‘소문’을 유지시키려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 소문이 진실이던 거짓이던 꼭 필요한 거고, 그러니까─ ……그냥 개똥철학이다. 1년 동안 여고에서 겪은 바로 생각해 본 가설.

“전혀 아닌 건 너희들이 더 잘 알잖아? 남자친구 뻔히 있는 나랑, 여자친구 4명은 있는 너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아, 그럼 난 네 다섯 번째인가?”

“아뇨아뇨! 누가 그렇게 3처 4첩을 들여요 부럽게!”

“너. 현대사회임에도 그러고 있잖아.”

“아니라니까요?! 제가 제대로 사귀었던 건 리유 뿐이에요!”

“뿐이‘었’구나. 과거형. ed 붙이면 되겠구나.”

“……후우.”

선생님은 자꾸 나를 의자왕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다. 격렬하게 부정해도 이어지는 선생님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의도치않게 리유 얘기를 꺼냈다가 내가 크리티컬 힛을 맞았다. 리유는, 리유는. 뭐, 예전처럼 전화하고 잘 지내고 있다만은. 선생님 말대로, 과거형이니까. 돌이킬 수 없지. 엎지른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선생님이야말로, 나이 30 먹고 뭔데요 이게! 사귄 지 꽤 되시지 않으셨어요?!”

“……지금 내 앞에서 나이 얘기 하는 거야?! 그래 너 잘났다! 18살 밖에 안 된 게 여자나 옆에 잔뜩 끼고 음탕하게 노는 주제에! 그게 학생의 신분에 맞는 것 같아?!”

“아니라니까요! 왜 자꾸 그쪽으로 몰아가는데요! 제가 얼마나 순수한 고등학생인데!”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딴 개소리 지껄이지?!”

나는 참지 못하고 결국 선생님의 역린을 건드린다. ‘나이’라는 주제는 선생님의 크나큰 아킬레스건. 평소라면 무섭고 위압감이 느껴지게, 품위있게 나를 갈구시겠지만 거기에 ‘연애’라는 주제까지 섞으니 선생님은 다시금 정신연령이 10살은 낮아져 잔뜩 나에게 소리친다.

원래 선생님이면 결코 이렇게 소리지르며 티격태격 싸우거나 하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정민 씨 덕분에, 내가 알고 있는 선생님의 캐릭터가 하나 둘 무너져버리는 것 같다. 정민 씨, 얼른 구제해주세요. 이 구제불능 선생님을.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선생님, 남자친구 분이랑 진도 어디까지 나가셨어요?”

“……그걸 내가 왜 너한테 보고해야 하는데.”

“아뇨, 그래야 뭘 얘기가 되죠. 연애상담이라고 어쨌든 건 건 선생님이 먼저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어제 여러 실패작 요리들을 먹었던 벤치에 앉아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자 한다. 여기라면 다른 여자애들이 올 일이 없는 한적한 곳이니까. 내 물음에 선생님은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꼭 초창기 희세 보는 느낌이네. 희세는 지금은 저런 표정 잘 안 짓지. ‘경멸’ 쪽에 가까운 표정을 보여주지, 요즈음은. 뭐, 그만큼 친해졌다는 반증이겠지. ……그렇겠지.

“키스?”

“…….”

‘키스’라는 내 질문에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으신다. 잠시 땅바닥을 쳐다보다 살짝 고개를 저으신다. 아니라는 뜻. 헌데 어째서인지 살짝 얼굴이 상기된다.

“헉, 설마 그럼…… 음?”

“아니거든?! 내가 무슨 그런 여자로 보여?!”

“그런 여자로 보여요.”

“야! 진짜 너,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 그럼 평소의 그 행실은 뭔데요? 맨날 우후훗♡ 이런 짓이나 하시면서 저한테!”

‘음?’의 의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든지 이 맥락에선 알아들으리라. 선생님은 대번에 벌컥 화를 내며 거의 나를 때릴 기세로 쳐다보신다. 나도 할 말은 많다. 1학년 때 선생님이 나에게 보이던 만행(?)들을 생각하면, 어휴. ……내 기억에, 분명 선생님, 한 번 내 소중한 그 곳(??)을 만졌었어. 수치스러워서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아.

“……아, 아직 손잡는 것 정도밖에는…….”

“에엑?! 선생님 30살 맞아요? 그 팜므파탈 사감 선생님 맞아요? 쓸쓸하고 못 참겠으면 사감 선생님 방으로 와서 같이 자♡라고 하던 그 선생님 맞, 아악! 그만 때려요, 폭행이에요 폭행!”

“……시끄러.”

선생님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는다. 흠칫 놀란 나. 분명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은 야하니까, 이런 저런 짓 잔뜩 하셨을 줄 알았는데 정민 씨 농락(?)할 줄 알았는데. 이런 것을 또 물어뜯지 않으면 정웅도가 아니지. 하이에나처럼 비꼬는 목소리로 말하다 선생님의 정의의 주먹을 또 정수리에 쳐맞는 나. 요즘 말빨로 안 되니까 선생님이 폭력을 많이 쓰신다. 미국에서 이랬으면 감옥 가요 선생님?!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하지 않아요? 사귄지 6개월 넘지 않았어요? 60년대에 빵집에서 만나서 연애하시던 어머니 세대도 그것보단 빠를 것 같은데, 진도.”

“……나라고 딱히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치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정민 씨도 나 처음 사귀는 거라는데 어떡해!”

“헤에. 모태솔로와 모태솔로의 만남인가.”

“나 모태솔로는 아니거든?! 대학교 때 사귀었었어!”

“근데 왜 그래요.”

“그, 그건…….”

선생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민 씨, 안 그렇게 생겨서 여자친구 한 번도 안 사귄 천연기념물이구나. 한 번 밖에 안 봤지만, 잘 생기고 키도 적절하게 크고 양복이 잘 어울리는 미남이자 쾌남이었는데. 어우,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아저씨 같네.

선생님은 내 말에 반박하신다. 그렇다고 하기엔 반박의 근거가 너무 미약하지만. 대학교 때 남자친구 사귀어봤었다면 지금 이렇게 버벅댈 리가 없잖아. ‘그 땐, 공부하느라 얼마 만나지도 않고 헤어져서……’ 하고 말끝을 흐리는 선생님. 뭔가 상상이 되네. 선생님 외모만 보고 혹한 어느 대학생이 고백했겠지. 하지만 막상 선생님, 연애쑥맥인데다 공부만 하는 타입이니까. 생긴 건 잔뜩 놀게 생겼지만.

정민 씨보다도 외모로 봤을 때 더 반전인 건 선생님이지. 솔직히 선생님, 엄청 예쁘고 무엇보다 야하니까(?).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 중 하나인 「안경제복여선생」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현실에서 구현하고 계신 선생님이니까. 본인 의사와는 상관 없이.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내 성적 판타지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내 성적 판타지는 올 2등급이다! 야하!

“그래요, 뭐 그렇다고 해요. 저한테 요구하는 게 대체 뭡니까?”

“시뮬레이션.”

“네?”

“s─i─m─”

“아뇨, 철자를 모르겠다는 게 아니라!”

대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연애상담’이 무언데. 내가 태클 거는 것에 맛들린 것처럼 선생님도 개드립에 맛들리신 것 같다. 하나하나 정성껏 영어 철자를 말씀해주시는 참선생의 자세.

“그…… 정민 씨하고 도시락 먹는 거, 시뮬레이션 해달라고.”

“음─ 아, 그러니까, 가상으로 역할극마냥 해보자는 거네요? 리허설처럼?”

“응, 그래 그거.”

선생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신다. 보통 이런 걸 남자 제자에게 부탁하나. 아니지, 보통은. 너무 떨리니까, 미리 예행연습이라도 해보고 싶은 쑥맥의 수줍은 마음이겠지. 완벽하기만 할 것 같은 선생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그럼 해보죠. 상황이 어떻게 되죠? 공원?”

“아, 영화 보고, 그 근처 공원에서 도시락 먹고, 이후로는 정민 씨 집 가서─”

“아뇨, 굳이 그렇게 계획을 다 말할 건 없는데. 선생님 진짜 긴장하셨나보네요?”

“……! 으으…….”

단순히 도시락 먹는 상황을 물어본 건데 선생님은 자신의 데이트 일정을 쭉 나열하신다.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절대, 절~대 평소의 그 근엄한 선생님이 아니다, 지금 이 선생님은. 그저 하염없이 허둥지둥, 연애초보인 소녀일 뿐. ……비록 30살이지만. 아무리 어른이라도, 연애 쪽은 역시 연륜으로 찍어 누를 수 없는 것일까.

“내일모래 공휴일에 가는 거에요?”

“……어.”

“좋아요, 한 번 해보죠.”

“……응.”

내 물음에 선생님은 여전히 빨간 얼굴로 대답하신다. 바로 리허설에 들어간다. ‘정민 씨 못 따라한다고 뭐라 하지 마요~’ 하고 넉살좋게 말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신다.

“여기서 도시락 먹는 건가요, 혜라 씨?”

“……정민 씨는 그런 말 안 해”

“뭐 어떡하라구요! 첫 대목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공원에 들어온 것처럼 상황극을 개시하는 나와 선생님. 좀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인데. 한 마디 꺼내자마자 선생님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방금 앞에서 분명 안 똑같아도 이해해달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꼭 아이처럼, ‘그치만 너무 다르잖아. 정민 씨 그렇게 느끼한 제비처럼 말하지 않는걸.’ 하고 말씀하신다. ‘그냥 대충 해요! 제가 뭐 연기자도 아니고! 그보다 누가 제비에요?!’하고 항변하는 나. 전혀 의외의 부분에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선생님이다. ‘됐어요, 그냥 대충 해요.’ 하고 다시금 진행한다.

“도시락 싸오셨어요?”

“……네.”

“어디어디. 우와, 이거 직접 다 만드신 거에요?”

“……네.”

실제로 도시락이 있지는 않고, 가상으로 있다고 가정하고 진행되는 상황극. 별로 부담스럽지 않게, 일상적인 어떤 가상의 남자를 연기하는 나. 빳빳하게 굳어서, 조신한 양갓집 조선 처녀가 되어 잠자코 대답만 하는 선생님. 꼭 로봇 같다. 쿡쿡 웃음이 나오는 걸 꾹꾹 참는다.

“와, 진짜 맛있어요! 혜라 씨 요리 잘 하시네요?”

“……제, 제자들이 도와줘서.”

“거기서 그 말을 왜 해요! 그냥 ‘오호홋♪’ 하면서 넘기면 되잖아요!”

“그, 그치만 정민 씨한테 거짓말 하라고?! 그, 그런 거는!”

“왜 그런 것만 지고지순한 청순파가 되는데요?! 어쨌든 선생님이 다 만든 거잖아요, 이 도시락은!”

괜히 이상한 데에서 솔직한 선생님. 물론 그렇게 말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뭐랄까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제자들한테 도움 받아서 도시락을 싼다니, 느낌이 이상하잖아. 그럴 때엔 그냥 본인이 만들었다고 하면 될 것 가지고. ‘요리 잘 하시네요’ 라는 말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신 걸까. 열심히 항변하지만 내 대답에 ‘그, 그야……’ 하고 말을 줄이시는 선생님. 가정이라고 해도 정민 씨 앞이면 그렇게나 떨릴까.

“정민 씨인가, 선생님 남친은 참 좋겠네요. 이렇게나 솔직하고 이렇게나 예쁜 여자친구 있으니. 게다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고.”

“……시끄러, 꼬꼬마 주제에.”

“이런 모습 보여주면서 꼬꼬마라고 놀리는 건 설득력이 없죠, 선생님?”

“……씨.”

대강의 리허설이 끝나고,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한다. 그렇잖아? 선생님, 얼굴 예뻐, 몸매 죽여, 성격 호쾌해, 직장 좋아, 거기다 연애에 있어서 전혀 쑥맥인 건 도리어 플러스 요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실실 웃으며 말하니 선생님은 짜증스럽게 말씀하신다. 이미 효력을 다한 꼬꼬마 드립이지만.

“그러면 어디, 한 번 더 해 봐요, 리허설.”

“이제 됐어, 괜찮아.”

“왜요오! 좀 더 선생님 부끄러워하는 모습 보고 싶은데! 데헷☆”

“……이게 죽을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니 선생님은 불퉁한 태도로 대답하신다. 이제 부끄러운 소녀 모드는 끝났나보다. 괜히 더 성화를 부리니 선생님은 또 나를 때릴 기세로 주먹을 꽈악 쥔다. 죄, 죄송합니다! 벌컥 무서운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생님. 이제 벤치에서 나와 교실로 들어간다.


작가의말

유진이가 이런 걸 노려서 소문을 냈으면...... 작살이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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