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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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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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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92,898

작성
15.08.10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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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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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20쪽

03화 - 4

DUMMY

”귀신의 집?”

“어. 왜, 무서워?”

“아니, 무서운 건 아닌데.”

무서운 것이다. 그런 데를 대체 왜 들어가는 건가. 그러다 사람 심장마비로 죽으면 어떡하려고. 평소 무서운 것을 즐기는 정웅도 군. 여자친구와 놀이공원에서 즐거이 귀신의 집에 들어가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데.

정웅도 군이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귀신에게 놀라 급격한 심장발작으로 인하여 발을 헛디뎌 귀신의 집 책상 모서리에 찧여 방치된 채 호흡이 불규칙해 사망에 이른 것!

‘귀신에게 놀라면 호흡이 불규칙해져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럴 수도 있잖아! 위험하다구, 귀신의 집! 심장마비로 죽는건지 뇌진탕으로 죽는지 호흡곤란으로 죽는지도 모르게 죽어버릴 수 있다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죽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지,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지. 죽음을 향해 달리는 레이스인 거야, 인생은.

아까도 말했지만, 놀이기구로 인한 무서움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만 귀신이나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은 내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귀신 쪽엔 상당히 약하고 겁이 많은 나니까. 거기다 희세 앞이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일 정도로 친해졌다지만 그래도 여자애 앞에서 겁먹고 징징대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다. 이건 굳이 희세라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애초에 무서우려고 들어가는 건데 뭐 어때. 내기 걸고 놀리고 안 그럴 테니까, 그냥 한 번만. 응?”

“……네네. 나에게 거부권이 있기나 하나요. 국민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지요.”

“헤헷. 가자!”

희세는 귀여움 모드에서 빠져나와 평소의 어른스러운 투로 말한다. 그렇게까지 설득하면 또 안 갈 수가 없다. 굳이 말투를 귀엽게 하지 않아도 지금의 희세는 머리띠 덕분에 리유 부럽지 않게 귀여우니까. 예쁜 여자에게 약한 게 남자의 이기적인 마음 아니겠는가. 아니, 이건 본능이야. 외모지상주의는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는 거잖아. 애써 정신승리를 하며 대답하니 희세는 방긋 웃으며 앞장서서 걷는다.


“…….”

“……벌써부터 무서운데? 우…… 우어.”

“……후우. 후우.”

어두컴컴한 약한 조명. 음침한 분위기. 귀신의 집은 처음 와 본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게 애초에 귀신을 무서워하니 18 평생 놀이공원을 와도 이런 데를 내 발로 갈 리가 없잖아. 지금도 희세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결코 이 무서운 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입구부터 엄청 무섭다. 희세는 살짝 겁 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말한다. 나는 이미 심장이 엄청 쿵쾅쿵쾅, 마음은 반쯤 패닉상태다. 어린아이처럼 희세의 손을 꼬옥 잡고 라마즈 호흡법으로 가슴을 다스린다. 심호흡, 심호흡. 마음을 안정하고, 좋은 생각을 해. 귀신이 나온들 어떠랴. 귀신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이잖아. 이 세상에 귀신은 없어. 귀신은 없으니까.

“!”

“으아아아악!!”

“꺄아앗!”

덜컥 나오는 흰 물체. 검은 머리칼.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긴 산발의 머리카락에 가려 흰 분칠을 한 얼굴과 흰 소복만 보인다. 그게 더 무섭다. 귀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등장만 하고 잽싸게 어디론가 사라진다.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나. 희세 또한 비명을 지른다.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하다. 무서워, 무섭다고! 왜 나오는 건데 귀신이! 아무 이유도 명분도 없이 왜!

‘덜컥!’

“으아아아아! 아악 아악!”

“어헛, 후우. 이거 진짜 심장 약한 사람들은 못 들어오겠다. ……심장 약한 사람 옆에 있네.”

“아으으으…….”

이번에는 마룻바닥이 푹 꺼지며 손이 나온다. 발목을 덥썩 잡자 온 몸의 털이 잔뜩 곤두서는 듯하다. 발을 동동 굴리며 마음껏 소리를 지른다. 희세도 놀라서 한숨 쉬며 말한다. 그러다 나를 보며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얼른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길 마음 깊숙이 바랄 뿐이다.

‘!!’

“으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오구오구, 우리애기. 무서워쪄요?”

“으흑! 흐으으으, 으으으으…….”

“귀여워♡”

꼭 잡은 희세의 손과 내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그 정도로 긴장한 상태. 좁은 통로에서 간신히 조금 넓어지려는 찰나. 갑자기 허공에서 덜컥 소복 입은 귀신이 거꾸로 내려온다. 사람은 아니고 인형 같은데. 제대로 식별하지도 못한 채 나는 너무 무서워 그대로 희세의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눈물까지 핑 돈다. 너무 무서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리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 같다.

희세 품에, 즉 가슴에 얼굴이 파묻혀 숨을 헐떡이며 앓는 소리를 내는 나. 압도적인 뭉클함과 좋은 냄새에 마음이 안정된다. 희세는 놀라지 않고 아이를 달래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계제가 안 된다. 그저 그 말에 앓는 소리를 내며 더욱 얼굴을 부빌 뿐이다. 희세는 더욱 꼬옥 나를 안아준다.


“무섭다는 거 핑계로 안기는 거. 그거 보통 여자애가 남자애한테 하는 거 아니야? 흐흐흣.”

“……나는 분명히 가지 말자고 했어.”

“아하하하. 그럼 정말 무서워하는 거였으니까 여자애 가슴에 얼굴 파묻은 게 정당방위다? 당장 성희롱으로 신고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웅도 군?”

“……하아.”

이성은 귀신의 집을 나오고 나서야 겨우 돌아왔다. 자꾸만 놀리는 희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귀까지 빨개진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지, 희세 앞에서 그게 무슨 추태야. 추태는 둘째고 대놓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다니. 미쳤지, 미쳤어. 희세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나를 놀린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좋긴 좋았지, 확실히. 그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 들 정도로 포근했으니까.


“그래도 나, 변태인 웅도 싫지 않으니까♡ 그게 남자답잖아.”

“……그냥 놀리는 게 좋은 거 아닐까.”

“으응~? 글쎄. 당황해 하는 거 재미있잖아. 귀엽고.”

“……크흠. 흠.”

잠깐 쉬는 타임. 놀이공원 안에 마련된 생과일주스 가게에서 음료를 마시며 쉬고 있다. 희세는 턱을 괴고 빨대로 음료를 쭉 마시곤 나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한다. 대놓고 ‘재미있다, 귀엽다, 좋다’ 하는 말들을 들으니 상당히 부끄럽다. 절로 헛기침을 하게 된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도리어 마음 안쪽에서 무언가 간질간질 작은 전율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은 기분. 묘하게 기분 좋은 느낌이다.

“웅도 너는, 내가 왜 좋아?”

“……내가 너 좋아하는 포지션이었어?”

“아. 그럼 나 싫어하는구나.”

“아니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무 흑백논리잖아.”

“그럼 좋아하지는 않는 거잖아.”

“……아~ 뭐. 좋아하지. 좋아해.”

“헤헷.”

주스를 마시며 은은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희세. 당황스러워 태클 걸 듯 말하니 순식간에 시무룩, 풀 죽은 표정으로 나에게 시선을 떼며 대답한다. 그 덕에 더욱 당황하게 되는 나. 이래저래 희세 페이스에 휘말리게 된다. 너무 뻔히 보이지만 억지로 ‘좋아한다’고 말하니 희세는 헤헤 웃는다. ……그렇게 좋을까.

“좀 많이 짓궂게 놀리기도 하고, 많이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너랑 같이 놀면 재미있어. 많이 웃게 되고. 착하잖아, 기본적으로.”

“……영악하네, 웅도.”

“응?”

“왜 얼굴 얘기랑 몸매 얘기는 쏙 빼놓고 말해? 실은 그 두 개 때문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추악한 현실의 마음을 입으로라도 다르게 말하는 게 좋잖아. 정말 그렇다고 해도.”

“아핫. 하하하. 솔직해서 좋네.”

일부러 외모에 대한 얘기를 제외한 채 마음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런 측면에 민감한 희세에게 ‘너 예쁘잖아. 가슴도 크고. 너무너무 좋아.’ 하고 말했다간 무슨 사단이 벌어지려나. 「성 상품화」라거나 「성희롱」 같은 적절한 칭호들을 잔뜩 받을 지도 모른다. 그나마 「변태 씨」라는 칭호도 2학년 들어서 간신히 벗어나서 기분 좋은데.

희세는 은밀하게 미소 지으며 넌지시 말을 꺼낸다. 역시, 내 심리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구나. 희세가 두 세 수 앞서 본다고 해도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정면돌파에 희세는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웃는 모습이 마냥 예쁜 희세.

“우유부단하고 더럽게 소심하고 찌질한데. 그건 진짜 싫어. 고쳐주고 싶어 막. 그것만 고치면 완벽할 것 같아.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잘 배려해주고, 얼굴도 잘 생겼고.”

“……아 그래.”

“별로 안 기뻐한다? 기껏 처음으로 칭찬해주는데?”

“겸손이란 게 있잖아 사람이. 대뜸 나는 전혀 안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 잘생겼어’ 이러면 ‘응, 알고 있어. 나 잘생긴 거.’ 하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다른 사람이 칭찬해주는데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되잖아! 놀리려고 한 말도 아니고, 진지하게 칭찬한 건데!”

“그래, 고마워!”

이번엔 희세의 칭찬 퍼레이드. 앞에는 험담이지만 전부 사실이라 0의 피해를 입었다. 칭찬에는 약한 나인지라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한다. 희세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대뜸 불퉁하게 말한다. 얼른 변명하듯 말하니 그래도 희세는 영 짜증난다는 투로 말한다. 나 또한 벌컥 전혀 안 고마운 투로 고맙다는 말을 한다. 별 것도 아닌데 둘 다 자존심 세우면서 언성을 높이게 됐네. 사과하기도 애매하다, 이런 싸움은. 너무 작고 찌질한 거라.

“……으어어!”

‘촤악!’

“아뜨뜨!!”

“헉! 괜찮으세요!”

문득 눈앞에 보이는 광경. 여자남자 한 쌍,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커플.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가다 문득 넘어지려고 휘청 하는 여자. 그 바람에 커피를 놓쳤다. 놓친 위치에 희세가 있다. ……느려! 재빨리 몸을 날려 희세 앞을 가로막는다. 내 등을 맞고 튕겨나간 커피. 엄청 뜨겁다. 천만다행인 건 그나마 종이컵에 뚜껑이 있는 재질이라 뚜껑이 열리면서 쏟아져 그리 많은 양이 내 등에 쏟아지지는 않았다는 점. 그래도 뜨거운 게 어디 가지는 않는다.

넘어질 뻔한 여자는 남자친구의 부축으로 넘어지지 않고 둘 다 식겁한 표정이 되어 말한다. 희세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나를 쳐다본다. 와, 진짜 뜨겁다. 방금 만든 커피였을테니 당연히 뜨겁겠지. 애써 괜찮은 척 ‘안 튀었어?’ 하고 희세에게 묻는다. ‘어…… 어.’ 하고 대답하는 희세. 당연히 안 튀었겠지, 등짝으로 아예 커피잔을 튕겨냈는데. 예~전 리유 구한 것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뭐가 내려오는 건 잘 캐치하는 것 같다. 나는.

“괜찮으세요! 뜨거울 텐데!”

“죄송합니다, 넘어질 뻔해서…….”

“죄송하다는 말로 대충 넘어갈 게 아니잖아요! 화상이라도 입었으면 어떡하려고!!”

“괜찮아, 그렇게까지는.”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와 남자. 웃으며 넘어가려는데 희세가 벌떡 일어나 말한다. 커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말리니 희세는 ‘뭐! 시끄러, 가만히 있어!’ 하고 말한다. 뭔가 엄마 같아서 조금 무섭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아, 괜찮아요. 넘어질 수도 있죠 사람이.”

계속 뭐라 하는 희세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놀란 커플도 진정시켰다.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을 겨우 안정시키고 자리를 뜨게 했다. 희세는 ‘흥!’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다. 커플은 연신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겨우 자리를 떴다. 대충 넘어갈 수 있는 건데 왜 이렇게들 난리인지.

“등 까 봐.”

“어. 여기.”

“……약간 데기만 했네. 그래도 다행이네.”

“응.”

희세의 말에 얌전하게 등을 희세 쪽으로 돌린다. 등을 까고 면밀히 살펴보는 희세. 다행이라는 듯 조금 안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멍청하게 거기서 그냥 보내줘 저 사람들? 진짜 큰일날 뻔 했는데, 단순한 사과로 대충 넘어가다니. 하여튼, 너무 순진하고 너무 멍청해. 너.”

“그럼 어떡해. 저 사람들도 엎고 싶어서 엎은 건 아니잖아.”

“하다못해 옷이라도 물어주던가 해야지! 화상 입었으면 당연히 치료비 내 줘야 하고!”

짜증스럽게 말하는 희세. 옳은 말이긴 한데 나는 딱히 화상을 입은 게 아니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좋게 넘어가는 게 한국의 미덕이잖아. 그런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의 희세니까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지만. 희세는 벌컥벌컥 남은 주스를 다 마셔버리며 크게 숨을 내쉰다.


“잘 어울리네.”

“고마워, 여자애가 옷 사주는 건 처음인데.”

“……하긴, 그런 걸 기대할만한 애가 아니지.”

“응? 뭐라고?”

“아니야─”

말이 나온 김에 행동력이 붙었는지 희세는 옷을 한 벌 사 줬다. 뭐, 간단한 티셔츠지만 그것도 굉장한 감동이다. 내 말대로 여자애가 옷을 사준 건 처음이니까. 선물 받은 것이라고 친다면 그것 또한 처음인 것 같다. 희세는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되뇌인다. 물어봐도 고개를 내저으며 대충 둘러대듯 대답한다.

“─어떡하지.”

“응? 왜?”

“꼭 하지 말아야 하는 건 하고 싶은 건 왜일까. 사람이라 그런 걸까.”

“아, 그 기분 잘 알지. 시험기간에 공부하기 싫고 게임하고 싶고 그러잖아. 하지 말라면 하는 게 사람 심보잖아.”

“그치.”

희세는 내 손을 잡고 걸으며 곤란하다는 듯 말한다. 다시금 되물으니 무엇에 대해 얘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공감가는 주제로 말을 꺼내는 희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딴짓’까지 하면 더 완벽하지. 집에서 그냥 만화책 읽는 것보다 수업시간이나 야자시간에 보면 더 재미있잖아. 리스크가 있어야 희열을 느끼는 것일까, 사람이란 존재는.

“……「하루 연인」인데, 하루만 연인으로 끝내기 싫어. 더, 훨씬 더 좋아지는걸. 웅도 너.”

“……아.”

“뭐가 ‘아’는 ‘아’야. 바보야? 멍청하게.”

“아니이…… 어…… 응.”

“흥.”

희세의 필살기 대사. 말이 그대로 녹음돼서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두 번 세 번 자동으로 되뇌여진다. 그리고 온도계 추가 올라가듯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멍청하게 ‘아’ 하고 말하니 희세는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밀치며 말한다. 부끄럽고 떨린다. 여자애한테 ‘좋아한다’는 말 듣는 게 이렇게나 좋은 일이었다니. 더 듣고 싶다. 더 말하고 싶다. 더…… 후우.


“응, 희세랑…… 놀이공원 놀러갔었어. 희세한테 신세진 게 있어서, 소원 들어주기로 했더니 놀이공원 가자고 해서.”

『우와! 엄청 재미있었겠다! 뭐뭐 타고 놀았어!』

“아틀란티스도 타고, 공중에서 쑥 떨어지는 그…… 이름이 생각 안 나네. 그것도 타고. 귀신의 집 갔다가 기절할 뻔 하고…… 죽는 줄 알았지, 아주.”

『쩔어! 엄청 부러워! 피이, 나랑은 놀이동산 한 번도 안 가봤는데! 히이랑 먼저 가고, 치사해!』

“아아…… 미안.”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인다. 저녁때면 늘 거는 리유에게의 전화. 평소에는 야자 때문에 10시 넘어서 하지만 오늘은 휴일이기에 저녁 먹고 느긋하게 바닥에 누워서 리유와 얘기한다. 리유는 예상한대로의 밝은 반응을 보인다. 활기찬 리유의 귀여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방긋방긋 웃는 리유의 모습이 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근데 리유, 너무 순수하고 착한 거 아닌가 싶은데. 분명 내가 남자친구고 리유가 여자친구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희세랑 놀다왔어’ 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말했지만 그것가지고 뭐라고 안 하고 ‘부럽다!’ 정도의 감상으로 넘어가다니. 그런 반응 보이니까 나란 녀석, 개쓰레기처럼 내가 잘못한 게 아닌 것 같은 기분 들잖아. 그러지 말아줘, 리유야. 좀 더 나를 비난하라고. ‘왜 나 말고 희세랑 놀았어!’ 하고 질투해달라고. 그래야 내가, 그래야……!

『방학 때 가면 나하고도 많이많이 놀자! 다른 애들하고도 같이 가고, 둘이서만도 가고!』

“응, 그래야지.”

『헤헤헷. 오늘 재미있었겠다 진짜. 히이도 재미있데?』

“응, 나 겁 먹는 거 보고 엄청 재미있어 하던데. 놀이기구도 잘 타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히히, 히이는 그럴 것 같아. 나도 귀신의 집은 무서울 것 같은데!』

죄악감을 느끼면서도 그걸 목소리로 티를 낼 수는 없다. 리유와 밝게 즐겁게 통화를 계속한다. 요즈음의 리유는 한층 귀엽고 밝은 목소리. 금세 잘 적응해서 잘 지내는 모양이다. 뭐, ‘힘들다’는 말은 한 마디 안 하고 늘 밝은 목소리인 리유이지만. 그래도 안심이 된다. 꽤나 오랜시간 통화를 계속했다.

『다음에 또 전화해! 잘 자! 아, 자기에는 너무 이른가?』

“미리 인사 받지. 리유 너도 잘 자고.”

『응! 웅이 사랑해~』

“……나도.”

『헤헤헤. 끊을게!』

‘뚝. 뚜─ 뚜─’

“…….”

리유의 마지막 인사에 나는 잠시 머뭇, 침을 꿀꺽 삼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 한 구석이 짜르르 아프다. 그건, 오늘 한 내 행동에 대한 참회일까. 후회일까. 미묘한 감정이 온 몸을 지배한 가운데, 리유의 밝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한동안 멍하니 끊어진 휴대폰을 쳐다본다.

“오래 통화하네? 사이 좋아.”

“…….”

옆에서 불쑥, 방긋 웃으며 말을 꺼내는 희세.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데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희세는 막무가내로 집까지 따라왔다. ‘상관없잖아, 내가 네 집 가는 건 일상인데.’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내친김에 저녁까지 같이 먹고 희세는 컴퓨터, 나는 리유와 통화.

바람…… 그래, 바람이지. 바람을 피운 희세가 옆에 있는데 리유와 통화하려니 상당히 괴롭다. 그냥 희세랑 둘이 다닐 때에도 굉장히 괴로웠는데, 리유와 통화하는데 희세가 떡하니 컴퓨터를 하고 있는 게 눈으로 보이니…… 그렇다고 내색하거나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하루 연인」으로 끝내지 않으면 안 될까. 진짜.”

“……내가 아는 나희세는 그렇게 말 번복하거나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이 아닌데.”

“……알아. 한계라는 거. 안 된다는 거. 그치만, 그치만……”

“…….”

가만히 컴퓨터를 하며 말하는 희세.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런 심각한 말을 하다니. 나 또한 망설이며, 희세를 쳐다보지 않고 대답한다.

의자에서 내려오는 희세. 내 앞에 앉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누워 있는 내 위에, 허벅지 정도에 앉아서. 이게 무슨 기괴한 짓이야?! 뭐하자는 건데! 희세의 말도 말이고, 행동도 행동이라 굉장히 난감해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러면, 나는 네 친구여자…… 너는 내 친구남자…… 정도로 안 될까……?”

“……헛. 후우.”

“……어머♡”

입술을 살짝 깨물며, 검지와 중지를 걸어가듯이 내 허리에서부터 배, 가슴까지 타고 올라오며 느긋하게 말하는 희세. 간지러우면서 이상한 기분에 낮은 신음을 내게 된다. 희세는 피식 웃으며 내 위에서 내려와 옆에 앉는다.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면서 묘하게 아쉽다.

“……안 될까?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는데, 지금하고 똑같이.”

“……후우.”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희세.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떻게 매정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그 자존심 세고 자존감 강한 희세가 이 정도까지 말해버리면. 어떻게 저항할 수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 머릿속이 복잡해 그저 한숨만이 나온다.

“……둘만. 비밀.”

“……응.”

“……이제 가.”

“……싫어.”

굉장히 짧게, 단답형으로 말했다. 그것만으로 희세는 알아들었는지 샐쭉 웃으며 대답한다.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한다. 희세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다 대답한다.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는 희세. 마음에 드는 미소를 띤 채로. 그러니까 더 부끄럽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의 냉정한 태도를 되찾곤 ‘이제 갈래.’ 하고 말한다.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나간다. 우선은 간신히 편해졌다.


마음만은 불편하다. 너무나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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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5

  • 작성자
    Lv.97 연필유령
    작성일
    15.08.10 21:46
    No. 1

    아하 오늘은 제가 1빠! 웅도는 연x훈 같은 놈이군요. '정웅도 개x끼 해봐 정웅도 개x끼'라고 미래가 드립을 날려주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10 22:29
    No. 2

    오, 그거 좋겠네요. 미래라면 충분히 그럴 법 하니까.

    ......전혀 다른 얘기지만, 질질 끈다고 댓글로 욕 먹으니까 기분이 안 좋네요. 다른 곳에서 다른 댓글로 주인공 우유부단하다고 욕 먹었거든요 ㅠㅠ 헤헤헷.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연필유령
    작성일
    15.08.10 22:55
    No. 3

    원래 발암캐릭터는 소설 진행에 큰 도움을 주는 녀석들이랍니다. 주인공이 발암이면 거기에 답답해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러니까 빨랑 주지육림의 하렘을 차리란 말이다!)(농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10 23:15
    No. 4

    네, 그렇죠. 주인공이 현실적이면 당장 붙는 여자애 한 명 잡아서 알콩달콩 사귀겠지만. 아아. 딜레마죠. 그 발암을 잘 조절해서 비교적 원만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게 글 쓰는 이의 사명인데. 잘 안 되네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연필유령
    작성일
    15.08.11 00:27
    No. 5

    발암 캐릭터는 사실 말하자면 치트키죠. 그걸 어떻게 컨트롤하느냐가 문제인거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11 19:57
    No. 6

    전개와 내용을 뽑아먹기 위한 희생양인 것이다...... 정웅도의 우유부단함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8.11 06:08
    No. 7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11 19:59
    No. 8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56 비행병아리
    작성일
    15.08.11 08:57
    No. 9

    항암제가 필요해질꺼 같군요

    리유와 희세가 수라장.... 응?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11 19:59
    No. 10

    꼭 리유와 희세만 있는 것일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널그리워해
    작성일
    15.08.23 02:26
    No. 11

    샤라라라 비밀연인....양다리 꿰차기인가요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23 11:20
    No. 12

    여자친구가 있지만 또 친구여자...... 그게 양다리죠? 아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6 진주곰탱이
    작성일
    15.09.29 01:45
    No. 13

    희세 따봉!!!!!!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10.01 20:54
    No. 14

    허헣, 격하게 희세 팬이시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yu******
    작성일
    20.01.27 02:26
    No. 15

    좋다 좋다 좋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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