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의 정석, 수풀 속에는 구덩이가 있는 법
테베가 아는 곳을 피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숲길을 헤치며 걷게 되었다.
이러면 흔적이 남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는데···.
“···힉.”
오우.
거의 내 키만 한 풀들이 가득한지라 흔적이랄 만한 건 남지 않았다.
바닥도 단단해서 발자국이 쉬이 남지 않고···.
문제가 있다면,
“윽, 따가워.”
이 풀은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매우 따갑다.
얇은 잠옷 하나 입은 내 지금의 차림새로는 꽤 버티기가 힘들다.
오두막에 두었던 옷들을 가져왔다면 좋겠지만···.
아니, 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발이 맨발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자.
“윽.”
그래도 따가운 건 따가운 거다.
아픈 건 참겠는데, 이상하게 따가운 건 참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상상도 못 했다.
이 빌어먹게 긴 수풀 사이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으아아아악!”
푹, 하고 발이 내려앉는 기분과 동시에 몸이 빨려 들어갔다.
다른 쪽 발로 지지해 보려 했지만···.
한쪽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이미 허공에 띄워버렸기에 나는 꼼짝없이 구덩이 안으로 빠져들어 갔다.
어째서일까.
추락 직전 일순 테베의 얼굴이 떠올랐다.
퍽, 퍽, 퍽.
몸이 구덩이 벽에 부딪히면서 빠르게 추락한다.
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
머리부터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감싸 안았다.
“윽!”
퉁, 하고 어깨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진 후 몸이 어디론가 처박혔다.
나는 눈을 꽉 감은 채 충격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몸이 멈춰 서자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다.
이건···.
진짜 아픈데.
부러졌나?
새삼스럽게 느낀다.
나, 이 세계에 와서 되게 귀하게 지냈구나.
어렸을 때는 다치는 게 일상다반사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커서는 다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다쳐도 담담했다.
어차피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아프다.
많이.
일부러 내가 상처 낸 게 아니라 정말로 다친 거라서일까.
“흐윽···!”
혹시나 해서 살짝 오른팔을 들자 격통이 내달렸다.
와, 이런 아픔은 오랜만이다.
나는 직감했다.
부러졌다.
“아, 미치겠네···.”
이런 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는데.
하지만 움직이면···.
틀림없이 다시 격통이 습격해 오겠지.
나는 얌전히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보았다.
파랗다.
문제는 너무 멀다는 것 정도?
공간지각력이 약한 나로서는 정확한 깊이는 추측할 수 없지만···.
못해도 3~4미터는 될 것 같다.
아니, 대체 왜 이런 걸 길 한 가운데에 파둔 거지?
여기는 금기의 숲 방향도 아닌데···?
“윽.”
아주 살짝만 몸에 힘이 들어가도 어깨가 아프다.
망했다.
이대로 여기서 아사당하는 걸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과연 저번처럼 쉽게 아사당할 수 있을까?
지난번 아사 엔딩을 봤을 때는 아마 10분인가···.
그 정도 움직이지 않으니까 아사 엔딩이 떴었다.
연신이가 옆에 있었으니,
연신이가 더 있어봤자 얜 안 움직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엔딩이 떴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은?
연신이가 없는 지금은 그런 판단을 할 존재가 없다.
그럼 난 진짜 여기서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와.
미쳤네.
예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세상에 수많은 죽음이 있지만,
아마 아사는 가장 비참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죽음일 것이라고.
자살 방법으로 아사를 고르는 사람은 없다.
첫째로 너무 오래 걸린다.
둘째로 너무 고통스럽다.
셋째로 인간의 본능이 아사할 때까지 음식을 거부하는 것을 견뎌내질 못한다.
근데 나는 강제적으로 굶주려 죽는 죽음을 경험해야만 한다.
하하.
미쳤네.
사나흘 굶는 거 아무것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도 굶어본 적이 없다.
그 사람들도, 일단은 사람인지라 일주일에 몇 번은 먹을 걸 제대로 줬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굶으면 죽을까.
일 주?
이 주?
삼 주?
사람의 몸은 보통 음식 없이 삼 주를 버틴다고 한다.
그럼 나는 삼 주 동안 여기 있어야 하는 걸까.
금기의 숲이 아닌 건 천만다행이지만···.
이런 수풀 속을 지나갈 사람이 있을까?
설령 있다고 해도 멀쩡한 사람일까?
살아있는 것보다 못한 상태가 되면 어쩌지?
두서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흐른다.
뭐,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없다.
생각하는 것 외에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으면 생각도 원활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배고픔에 잠식당한 인간은, 동족포식까지도 할 수 있게 된다.
즉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는 듯.
그때가 되면 이 어깨도 좀 덜 아파지겠지.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제 살을 떼어먹으며 배고픔을 견뎌낸.
어쩌면 이 아픈 어깨를 떼어내서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르지, 나도.
살고 싶다.
나는 그 감정을 알아버렸다.
살아서 좋은 점이 생겨버렸다.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감각인지를.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는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그게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게 되는 일이라도.
하지만···.
회귀할 것이라는 확증만 있다면 분명 이대로 자살하는 게 편하다.
굳이 고통을 견디며 버틸 이유가 없으니까.
아마 그 고통을 모두 거쳐 간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될 것이다.
어쩌면···.
원래의 나보다 더 심한 정신상태가 될지도 모르지.
“후···.”
깊게 심호흡을 한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아프다.
숨을 좀 깊게 쉬었다고 아프다니.
거지 같은 곳을 다쳤다.
살살 다리를 흔들어보니 다행히 다리 쪽은 멀쩡한 것 같다.
그러면 뭐해.
못 움직이는 건 같은데.
그동안의 경험으로 생각했을 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와 팔이 붓기 시작할 것이다.
아프겠지···.
엄청 아프겠지···.
그냥 숨 쉬려고, 몸을 뒤척이려고 움직이는 것조차 아플 것이다.
아주 많이.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굶주림이 더해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테베···.”
나는 피식 웃었다.
대체 누구를 부르려 하는 것인지.
이 세계에서 지금 나를 알고 있는 건 테베와 디리, 마리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건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언제나처럼.
처음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왜 더 아픈 걸까.
있었다가 없어진 것과 처음부터 없었던 것.
지금 당장 없다는 것은 다르지 않은데.
“바보 같아.”
처음부터 이런 내기 따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몰라도 되는 걸 이토록 많이 알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
“하···.”
사흘째.
나는 이제 거의 생각조차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내가 착각한 게 하나 있었다.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삼 주가 맞다.
하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사흘이었다.
지금 내가 물을 마실 수 있는 방법이라곤 비가 내려 주는 것 외엔 없다.
하지만 하늘은 사흘 내내 쾌청.
비가 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뭐, 다행인가.
덕분에 편하게 죽을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소설은 죄다 허구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흘이나 물도 못 마시고 꼼짝없이 갇혀 있어 보니 알겠다.
정말 죄다 허구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변도 안 본 걸까.
전에도 사나흘 굶은 적은 있지만 그래도 화장실은 꽤 꼬박꼬박 갔다.
물은 일단 마셨으니까, 계속.
근데 지금은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없는데···.
이전에 먹고 마신 것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
으음.
역시 내가 소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지, 응.
목이 너무 마르니까 슬슬 이상한 것도 보인다.
어떤 때는 이사가 작은 캐릭터가 되어 통통 튀어 다니는 게 보이고,
어떤 때는 테베가 말 위에 앉아 어디론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
마리가 나올 때도 있고, 디리가 나올 때도 있었다.
하하.
재밌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서.
아직 그래도 정신은 말짱한 건지 환각이라는 건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조차 못하겠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때가.
까놓고 말해 일이 이렇게 되자 이사의 걱정 따위 거의 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 같은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 괴물 같은 여자랑 사는 것보단,
차라리 시설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애초에 그런 인간들 아래에서 자란 내가 이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하.”
그 인간들은 최소한 나보다 행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어떻게 아냐면,
그 인간들이 자랑스럽다는 듯 나한테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복한 어린 시절.
그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나로 인해 깨졌다는 것도.
그런 인간들조차 그런 식으로밖에 육아를 못 했는데,
그런 인간들의 육아 같지도 않은 육아 속에서 큰 나는?
이사를 학대하지 않을 수 있나?
어머니는 딸의 성장한 모습이라고 하는 말.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 인간처럼 되고 싶지 않은걸.
아.
젠장.
생각했더니 환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캐릭터 두 개가 어른어른하더니 그 인간들의 모습으로 모양을 잡아간다.
나오지 마, 나오지 마.
죽기 전에 당신들을 보고 싶진 않아.
그래서 눈을 꽉 감아버렸다.
차라리 테베가 좋다.
그 따스한 눈으로 나를 지켜봐 준다면 차라리 마음 기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하, 하하···.”
쉬어버린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나온다.
웃기다.
뭐가 차라리야.
어차피 죽음이 가깝다.
스스로를 속일 이유도 더는 없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거늘.
솔직히 말하자.
나는, 처음부터 테베에게 반하지 않았던가?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그에게 설레지 않았나?
그의 약혼녀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가슴이 서늘하지 않았나?
그가 내 곁에서 죽었을 때, 나는···.
나는···.
그래.
나는 테베를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 계속 제약을 걸었다.
두려웠다.
너무,
너무 두려웠다.
거짓된 계기.
거짓된 감정.
나는 한 번도 테베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하지 못했다.
그토록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테베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당신을 싫어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냐고?
아니니까.
나는 사실은 그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두렵다.
이 속성이 사라지면 나는 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거 아닐까?
지나가다 만난 길가의 돌멩이.
그 정도의 의미 아닐까?
내 속성이 없어도 그는 나를 사랑해주었을까?
저토록 열렬하게?
절대 아니다.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나는 사랑받는 걸 모르는 것 이전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
비인가.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파랗던 하늘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비다.
“···싫어···.”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삼 주 넘게 이렇게 있어야 할 바엔 차라리 빨리···.
아니, 기다릴 건 없다.
나는 혀를 쭉 내밀었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려면 최대한 혀를 길게 빼문 채 깨물어야 한다.
“···, ···아···! 아···ㅅ···!”
아.
환청인가.
나는 피식 웃었다.
인정한다는 건 이토록 속이 편안한 거였나.
테베.
마지막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로···.
어느덧 얼굴을 두드리는 비가 강해졌다.
내가 구덩이 아래에 있으니까 더 그런가?
아무려면 어때.
나는 버석버석 말라버린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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