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의 정석, 항상 실물보다 미묘하게 더 예쁘거나 잘생겼다
연신이는 밤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더 있어도 되는데.
“그냥 있지, 왜?”
“으음.
그래도 내가 밤에는 널 지켜줘야지.”
“허, 퍽이나?
언제부터 니가 날 지켰다고?”
“농담이고 거긴 침대가 없잖아.
니 기름진 머리카락도 없고.
이제 니 냄새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 냄새가 없으면 잠이 안 와.”
···.
이 새대가리가···.
나는 연신이를 째려보고 이불을 덮었다.
그러자 연신이가 슬금슬금 내 머리맡으로 파고들었다.
“그 그림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응.
완전 짱아니냐?”
“그건 그렇지.
실물이랑 너무 차이가 나서 문제지.”
“뭐야!
난 실물이 더 귀엽거든!?”
···.
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연신이를 보았다.
까만 콩 같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헤엄친다.
지가 생각해도 좀 아니다 싶은 모양이다.
“니가 실물이 더 귀여우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 그건 너무 심하잖아.”
연신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쿡쿡 웃었다.
“너 괜찮아?”
“뭐가?”
“요즘 좀 이상해 보여서.”
“내가 뭐?”
“···으음.
좀 나사 하나 빠진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고장 난 기계 같다고 해야 하나.”
“내가?”
그럴 리가.
요즘처럼 목표에 매진하는 날이 거의 없는데.
“으음.
아무튼, 뭔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굴어.
그러다가 망가질 거 같아.”
“···내가?”
왜일까.
나는 멀쩡한데.
지금까지 없을 정도로 멀쩡한데.
“응.”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흠.
원래 본인이 본인을 제일 모르는 거야.
주변에서 조심하라고 하면 한 번 되짚어 봐.”
되짚어, 보라고···.
그 말만 남기고 연신이는 까만 눈을 감았다.
귀엽다.
가만히만 있으면.
으음.
그건 그렇다고 치고···.
생각해보자.
연신이는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뭔가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그게 뭘까.
알고 있잖아?
내 귓가에서 누군가 키득거린다.
아아.
나는 저 목소리를 알고 있다.
저건 나다.
“···시끄러워.”
생각은 무슨.
쓸데없는 생각 할 거면 내일 어떻게 할지나 생각하자.
1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뜸은 들였다.
이제 뭔가 행동해야 할 때.
연신이를 우려먹는 건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고···.
내일은 또 무슨 핑계를 대볼까.
···.
아.
꽃.
정원.
그쪽으로 가 볼까?
장소를 그 오두막에서 옮길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노릴 수도 있고.
응.
좋았어.
나는 만족스럽게 웃고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
“정원 만드는 걸 배우고 싶으시다니요?”
슈피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후후.
그렇겠지.
여주인공이 정원 일을 배운다고 하면 이런 반응이 나오겠지!
하지만 이것 또한 정석.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꽃 예쁘잖아요.
내 손으로 직접 꽃을 피워보고 싶어서요.”
후후.
어리광쟁이 캐릭터로서 완벽하다.
나는 반짝이는 눈망울··· 을 하려 노력하며 슈피를 바라보았다.
“정원 일은 흙일입니다.”
“알아요!”
“···옷에 흙이 묻게 될 텐데요.”
“아.
폐하가 준 옷이라 좀 그런가요?
그럼 제 옷으로 갈아입고···.”
“아니, 그게 아니라···.”
“엥?
그게 아니면 왜요?”
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솔직히 진짜 모르겠다.
차라리 험한 일이라고 한다거나 힘든 일이라고 한다거나···.
그러면 모를까 흙이 묻으니까 안된다니?
“일도 힘들어요.”
“알아요.
저 이래 봬도 힘쓰는 일 잘해요.”
다음 날 앓아눕긴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계산에 넣은 거니까 괜찮다.
몸이 땡기면 안 움직이면 되는 법.
하지만 내일은 몸이 땡겨도 그 몸을 끌고 슈피를 만나러 와야 한다.
그게 좀 걱정되긴 한다.
“···알겠습니다.”
후후.
만족스러운 결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슈피는 내 부탁을 거의 거절하지 않는다.
나를 그려달라는 거 빼고는.
으음.
이유가 뭘까.
사랑했던 여자 관련 인가?
아니면 아버지 관련?
궁금하네.
“근데 슈펠리에.”
“네, 아샤님.”
“슈펠리에가 예술 분야에서 못하는 건 뭐예요?
혹시 노래도 잘해요?”
슈피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자신감 쩐다.
보통 자기가 자기더러 잘한다고 하나?
“들어보고 싶어요.”
“···.”
슈피는 곤란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슈피를 바라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슈피가 고개를 돌렸다.
“슬슬 나갈까요?”
도망간다.
흠.
너무 압박하는 것도 별로지.
나는 모르는 척 슈피를 따라 발을 옮겼다.
날씨가 좋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부드러운 바람의 소리.
자박자박 흙을 밟는 소리.
날이 서 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아.
이건가?
연신이가 말한 게?
나는 엷게 웃었다.
거의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이건 나에게 불필요한 감정이다.
편안하다.
부드럽다.
따스하다.
그런 걸 느끼기엔 내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슈피가 만약 진 남주인공이면 이걸로 괜찮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다음 공략 때 마음이 또 약해질지도 모른다.
카이델 때의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테베 첫 공략 때의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나는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
“왜 그러세요?”
슈피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내 발이 멈춰 서 있었나 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끈 쥔 주먹을 풀며 웃었다.
“아니에요.
벌레가 보여서요.”
“···.”
슈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으음.
내가 봐도 좀 어이없지.
정원 일을 배우고 싶다던 애가 벌레가 무섭다고 이러다니.
아니, 그치만 순간 변명이 안 떠올랐는걸···.
“···흠흠.
가요.”
슈피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묘하게 오빠 같다.
으음.
생긴 걸로 보면 나랑 비슷할 거 같은데.
카이델이랑 친한 거 보면 나보다 한참 연상 같기도 하고···.
“슈펠리에는 몇 살이에요?”
“저요?
올해 스물일곱이에요.”
“오···.”
오빠네.
···.
그것도 꽤 오빠네.
그럼 카이델도 그 정도 나이인가?
으음.
그 얼굴로 스물일곱···.
그 분위기로 스물일곱···.
“아샤님은요?”
“저는 스물셋이에요.”
슈피가 조금 놀란 얼굴로 날 보았다.
뭐지.
왜 놀라지.
“왜요?”
“아뇨···.
조금 더 어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으음.
내가 좀 철없이 행동하긴 했지···.
“아, 그러고 보니 슈펠리에.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그런 말이 있어요.”
“어떤 말이요?”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
“궁합···?”
아.
여긴 그런 거 없나?
“일종의 점술 같은 건데요.
그게 잘 맞으면 잘 맞는 커플이라고 해요.
네 살 차이면 그걸 볼 필요도 없이 잘 맞는 커플이라고 해요.”
“···.”
슈피의 목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내 쪽을 안 보지만 어차피 목덜미가 새빨가니까 티가 다 난다.
본인은 모르겠지···.
부끄러워지면 목이 저렇게 빨개진다는 거.
“저랑 슈펠리에도 궁합이 좋을 것 같아요.”
“커플이라는 건···.”
“아, 남녀 사이를 말해요!
음, 쉽게 말하면 애인?”
오.
더 빨개진다.
얼굴까지 빨개질 기세다.
이런 거에 약한가?
“저랑 슈펠리에가 연인이 되면 최강이겠네요.”
“···다 왔습니다.”
슈피는 가지고 온 도구들을 땅에 내려놓았다.
으음.
이제 그만 놀릴까.
“와···.”
정원 한구석이 파헤쳐져 있다.
왜지?
설마 내가 꽃을 심어보고 싶다고 말해서?
아니, 설마.
그건 조금 전에 말했던 거고 이건 최소한 어제부터 파헤쳐져 있는 것 같다.
그렇다는 건···.
···.
아니, 설마 내 한 마디가 소설 설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겠지?
“아샤님은 이걸···.”
···.
뭐야, 이 모종삽은.
뭔가 묘하게 어린애가 쓸 것 같은 크기다.
더 슬픈 건 손에 딱 맞다.
···.
어째서지.
“꽃을 심어본 적은 있으신가요?”
“아뇨.”
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심어봤을 리가.
슈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것보단 좀 더 큰 모종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여기에 꽃의 모종을 심을 거예요.”
으앙.
쪼끄맣다.
귀엽다.
으아.
꽃의 모종이라는 건 생각보다 작고 귀여웠다.
그냥 작은 풀떼기 같은데.
여기서 꽃이 피어난다고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다.
내 기분을 눈치챈 것인지 슈피가 씩 웃었다.
“예쁘죠?”
“···네.”
나는 슈피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헤집어진 땅 위로 모종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토닥토닥 흙으로 덮어주었다.
“어렵진 않지만, 흙을 만지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흙 만지는 게 왜요?”
“여성분들은 보통 흙을 만지는 걸 싫어하지 않나요?”
흠.
어머니의 영향인가?
아니면 누나나 여동생이 있나?
이상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뭐, 원래 예술가 캐릭터들은 나사 하나쯤 빠져있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건···.”
대답하기 싫어하는 걸 보니 역시 가족 아니면 옛 연인의 이야기다.
으음.
혹시 초상화를 그리기 싫어하는 것도 옛 연인이 원인일지도···.
“혹시 애인이 싫어해요?”
“···그런 거 없어요.”
슈피가 씁쓸하게 웃는다.
역시.
애인이랄까···.
상급 귀족이면 분명 약혼녀가 있었을 거다.
뭐, 테베도 약혼녀가 있었던 걸 보면 하급귀족도 그런 것 같지만.
보통은 어렸을 때 약혼자가 결정된다.
지금은 그런 게 없다는 건 분명 갈라선 거겠지.
이유는 뻔하다.
집과 의절한 것인지 가출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 때문이겠지.
이 작가에게 딱 하나 감사하는 게 있다.
귀찮은 연적이 없다는 것.
“에이, 맞는 거 같은데요?”
“정말 없습니다.
예전에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은 있었지만요.”
오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소위 말하는 집안끼리의 결혼이라서 딱히 감정은 없었어요.
그래도 내 평생의 반려라고 어릴 때부터 생각해왔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제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예술을 하고 싶고, 정원을 가꾸는 일을 하고 싶다고.”
땅을 파는 손길에는 흔들림이 없다.
이미 담담해진 일인 듯이.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종류의 상처는 절대 무뎌지지 않는다.
그저 세월에 메워질 뿐.
스무 살 때 집을 나왔다고 치면 지금 7년째.
그 세월은 결코 짧지 않지만 길지도 않다.
아마 아직 그 상처는 다 메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었어요.
슈펠리에, 그 어떤 여자도 흙을 만지는 남자를 달가워하지 않아요.
그것이 숙녀라면 더 그럴 거예요.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요.”
빼먹고 말했겠지만, 저기엔 귀족이라는 조건이 붙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농업으로 흥한 나라다.
그런 나라의 일반 서민인 여자가 저런 이야기를 할 리 없다.
슈피는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나 봐요.”
슈피는 웃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착잡하다.
감정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배우자감이라고 거의 세뇌당하듯 이야기 들었을 것이다.
테베가 그랬듯 그 허탈감은 말할 수 없었겠지.
뭐, 이 설정이야 당연히 여주인공인 나와 연결되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
잠깐.
설마 슈피도 내가 첫사랑인 건 아니겠지?
이 작가 진짜 첫사랑에 뭐 있나?
왜 전부 다 내가 첫사랑이야.
“아샤님.”
“에, 네, 에?”
당황한 나머지 말이 헛나왔다.
슈피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왜 웃어요!”
“아뇨, 그냥요.”
···.
왠지 조금 기분이 묘하네.
뭔가 진짜 오빠가 생긴 기분이다.
정신 차려, 화아사.
이건 게임.
소설.
저건 그냥 2D 캐릭터일 뿐이야.
아, 지금 눈앞에 생생하니까 3D라고 해야 하나.
좀 실감 나는 3D.
“자, 이번엔 아샤님이 해보세요.”
으음.
뭐, 어렵진 않으니까.
나는 땅을 팠다.
차가운 흙의 감촉이 좋았다.
나무는 좋아한다.
흙냄새도 좋아한다.
태양의 냄새도, 바람의 냄새도 좋아한다.
다만 처음의 그 숲은 이제 뭐랄까···.
아, 또 시작이구나.
이 망할 놈의 세계가.
이런 느낌이라서 싫어졌을 뿐이지.
나는 판 흙에 모종을 살며시 올렸다.
그리고 흙으로 덮었다.
“너무 많이 덮으시면 안 돼요.”
슈피가 내 손을 잡았다.
아.
그러고 보니 슈피가 덮은 흙에 비해 내가 덮은 흙은 양이 좀 많은 것 같다.
으음.
손이 잡힌 채로 슈피를 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보았다.
슈피가 내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이다가 슬쩍 손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그···.”
“뭐가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흙을 조금 덜어내었다.
음.
완벽해.
흐흐흐흐흐.
만족스럽게 웃는 나를 보며 슈피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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