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기사는 지키고 싶다
계획대로.
하지만 이대로 수긍하는 것은 좋지 않다.
카이델의 질투에 불을 붙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카이델에게 풍겨야 할 것은 내가 믿을 것은 카이델뿐이라는 듯한 뉘앙스.
그리고 그 외에는 다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 외의 그 누가 제가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시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카이델이 테베를 바라본다.
테베는 담담한 눈으로 카이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샤님.
저는 폐하께서 아샤님을 발견하셨을 때부터 함께 해 온 자입니다.
아샤님께서 마녀가 아니라는 것은 폐하께서 보증하시니,
폐하를 섬기는 저는 당연히 믿고 있습니다.
아샤님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나는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듯 눈물 그렁거리는 눈으로.
카이델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스터 경은 신실한 자나 또한 충성스러운 자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나와 교회는 그대가 마녀가 아님을 보증한다.
그러니 그는 내 명령에 따라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흠.
됐나, 이 정도면?
내가 테베에게 관심이 없고 오로지 카이델만 의지한다는 식으로 어필은 충분히 됐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박한 이세계의 여자, 인 척도 해뒀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불안한 듯 손과 몸을 파르르 떨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부터 아샤의 곁에서 그대가 지켜주게.”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테베는 카이델에게 예를 갖췄다.
나는 휘청이는 몸을 바로 세우려 노력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카이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다리에서 힘이 빠지면서 비틀거린다.
물론 일부러 계산한 건 아니다.
3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샤!”
카이델이 내게 달려왔다.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카이델이 내게 가까이 왔다는 것은,
즉 테베도 내 근처로 왔다는 것.
나는 힘없는 눈동자로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은가?”
나는 엷게 웃었다.
마치 안심된다는 듯.
카이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갑자기 이런 세계에 떨어져서 저는, 저는 너무나···.”
나는 눈물을 흘렸다.
거짓된 눈물을 흘리기 위해 속으로 몇 번이나 하품을 삼켰다.
슬슬 찾아올 때가 된 것 같아 어제 밤을 샌 보람이 있었다.
눈은 따가운 데다 하품이 계속 나오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에 복받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쁘게 흘릴 수 있다.
뭐,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소설 속 캐릭터니 그렇게 예쁘게 울 수 있었겠지만 나는 불가능.
그렇다면 억지로 연출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소설의 독자였다면 저런 식으로 우는 여자가 어딨어?!
완전 재수 없네.
여자는 뭐 방귀에서도 꽃향기 나는 줄 아냐?
거의 신격화 수준 아냐?
따위의 이야기를 했겠지만···.
뭐, 하여튼 나는 이제 인상 지어졌을 것이다.
지켜줘야 하는 가련하고 위태로운 존재로.
나는 사실은 그런 여주인공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트랜드도 아니고.
다만 테베를 공략하면서
동시에 카이델을 폭주시키지 않으려면 이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을 뿐.
“아샤···.”
카이델은 내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따갑다.
안 그래도 따가운 눈 비비니 더 따갑다.
게다가 카이델의 손은 묘하게 거칠어서 더 따갑다.
그래서 오히려 눈물이 더 많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런 식으로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데요···.
나는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키며 엷게 웃었다.
카이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카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래 쳐다보면 안 된다.
진짜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고백이라도 하면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카이델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마음을 허락할 몇 안 되는 존재.
그 정도의 존재로 남아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는 테베를 바라보았다.
눈물 글썽이는 눈동자와 마주친 초록색 눈동자가 당혹스러워 보인다.
이제 테베의 감정은 얼핏 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곳은 다 포커페이스지만 눈동자만은 아직 순수하다.
감정이 그대로 내비칠 정도로.
나는 머뭇거리다 테베에게도 살짝 웃어 보였다.
“잘 부탁드려요, 기사님···.”
테베는 순간 숨이 멎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 이거 테베의 취향이었나?
노선 잘 탔네.
*********
테베는 그 날부터 계속 나한테 붙어있게 되었다.
목욕할 때나 화장실 갈 때 외엔 쭉.
뭐, 붙어있는 다고 해도 이 방에서 같이 있는 게 전부였지만.
나는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괜히 밖으로 나돌아다니다가 또 카이델의 질투를 사는 것은 싫다.
밥도 가능한 한 방에서 먹었다.
이전까지의 카이델은 내가 별로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어서인지
같이 밥 먹을 것을 강요하는 일이 많았지만, 이번의 카이델은 달랐다.
카이델은 최대한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를 대하는 것처럼.
거친 행동도 거의 없었다.
내가 이 세계를 두려워하는 것이 처음에 자신이 행한 거친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뭐, 나에게는 꽤 유리한 착각이라 굳이 수정하진 않았다.
덕분에 나는 방에서 나가는 일 거의 없이 이렇게 테베와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지난번까지는 여러 장소에서 이벤트를 강제 실행시키는 것으로 호감도를 벌어보려 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안 공략 때 느낀 건데 같이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별다른 사건이 없어도
호감도는 어느 정도 쌓이는 것을 확인했다.
대신 고백을 받아내기 위한 방아쇠가 될만한 사건은 있어야 한다.
어떤 사건을 일으킬지는 좀 고민해봐야겠지만···.
“아샤님?”
테베의 부름에 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차.
이야기하던 중이었지.
나는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뭘 물어보셨었죠?”
“아샤님의 그 새는 어디서 만난 것인지 여쭈었습니다.”
“아아, 이 아이요···.”
나는 옆에서 열심히 빵을 쪼아먹는 연신이를 보았다.
만날 테베와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연신이가 너무 답답해했다.
그래서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테베가 있을 때도 거의 나와 있다.
대신 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그래도 맛있는 다과를 먹을 수 있다는 게 꽤 행복한 모양이었다.
어제 잠잘 때 이야기하던 것을 들어보니
“으, 이제 더는 싫어···.”
“벌레, 맛없어···.”
“으아아악! 벌레의 습격이다!”
따위의 꿈을 꾼 듯하다.
그걸 보면 그동안 식사는 벌레로 때웠던 모양이다.
명색이 신인데 먹을 것 정도는 만들어내면 되지 않냐고 물어봤으니
“내가 그걸 만들 때 힘을 써야 하는데, 그걸 다시 먹어봤자 힘이 회복되겠어?
그냥 제자리걸음이지 뭐.”
라는 듯하다.
의외로 신의 힘이라는 건 보충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소모품인 모양이었다.
무한정이 아니었구나···.
“어젯밤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불빛에 이끌렸는지 창밖에서 날아왔습니다.
어째서인지 저한테 정을 준 것 같아···.
저도 로이스터 경께서 돌아가시면 쓸쓸하던 터라 그대로 두었는데 안 될까요?”
나는 매달리는 듯한 시선으로 테베를 바라보았다.
이미지는 뭐랄까···.
그래, 장난감을 원하는 아이 같은 시선.
돌봐주기를 좋아하는 테베로서는 당연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테베는 살짝 귀가 붉어졌다.
내게서 시선을 떼어 연신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연신이는 그러든가 말든가 빵에만 오롯이 신경을 쏟고 있었다.
저 조그만 몸 어디에 저게 다 들어가는 걸까.
신의 몸은 블랙홀인가.
“폐하께 허가는 받아야 하겠지만···.
제가 잘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이스터 경.
항상 저한테 이렇게 잘 해 주셔서···.”
나는 덧없는 듯 웃어 보였다.
뭐, 사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지만···.
예전에 날 욕하던 어떤 여자가 말했었다.
“그런 식으로 웃지 마.
가식적이고 역겨워.
니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나는 그냥 사태를 진정시키려 웃어 보인 것뿐이었는데.
뭐, 하여튼 그때 그 여자의 평가대로 내 이 웃는 얼굴은 뭔가 아련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테베는 그런 내게 엷게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저는 폐하의 명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감사는 폐하께 하십시오.”
“폐하께는 감사하고 있어요.
그래도 제 곁에 계셔 주는 것은 로이스터 경이잖아요?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도 이런 저주받은 여자의 곁에 있어 주시다니···.
로이스터 경에게도 감사를 표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나는 살짝 테베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테베는 흠칫 놀라긴 했지만, 손을 거두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귓불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맞닿은 타인은 따스했다.
테베의 손은 겉보기엔 유려하고 예뻐 보인다.
게다가 손등은 매끈거려서 감촉까지도 좋다.
하지만 그 손바닥을 나는 알고 있다.
검을 연습하느라 손바닥 한가득 까지고 굳은살 배겨 있는 그 손을.
나는 어머, 하며 가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슬쩍 테베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닙니다.
레이디의 손이라 뿌리치지 못했지만, 함부로 접해 죄송합니다.”
에헤이.
좋았으면서.
연신이는 뭐하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눈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다시 테베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로이스터 경의 고향에 관해 이야기 들려주세요.”
이미 다 들은 이야기다.
그래도 이번의 테베에게서는 듣지 않았다.
나는 싱긋 웃으며 테베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테베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차갑고 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살던 곳은 플라네일 공작령에 있는 작은 아모입니다.
제 아버지는 남작으로서는 드물게도 공작님의 직할지에 소속된 분이십니다.
거기서 치안을 맡고 계십니다.”
차분한 목소리.
고향을 떠올릴 때 테베의 목소리는 따스해진다.
마치 얼음 인형에 생기가 들어가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 생기가 흐른다.
그 목소리가 좋아서 나는 테베에게 자꾸 고향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테베는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공작 직할지는 총 다섯 개.
테베가 자란 곳은 그중 가장 작은 아모라고 했다.
아.
이야기 들은 바로는 직할령은 내가 살던 곳으로 치면 도.
아르라는 것이 시.
아모라는 것이 군정도 되는 규모인 것 같았다.
물론 땅의 크기는 비교할 게 못 되지만.
원래 아르는 후작이, 아모는 백작이 맡는 것이고 공작은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작도 자신의 영지가 따로 있는데,
이건 따로 지칭하지 않고 백작령과 같이 아모라고 칭한다고 한다.
하여간.
테베는 백작령 전체를 관통하는 강의 근처에 있는 작은 아모에서 자랐다.
거기에서 귀족 자제치고는 드물게도 평민의 또래들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제 아버지는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귀족이라는 것은 어차피 백성들을 위해 힘쓰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평민들이 귀족과 어울려주는 것에 감사하면서 함께 놀아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의 테베는 그야말로 성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에게 성녀라고 하면 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로 테베는 신성하게까지 보이는 미소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마 테베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카이델이나 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위치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좀 부러웠다.
평생 내가 가져본 적 없는 행복.
과연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버지···.
나는 나도 모르게 뿌드득 이를 갈았다.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테베가 문득 이야기를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아샤님?”
“···아니에요.
그냥 조금 옛날 생각이 나서···.”
나는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아마도 힘없이 보일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테베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보았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시 한번 웃고 찻잔을 들었다.
이제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을 쌓아가며 호감도를 올리면 된다.
그것이 2단계.
나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