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의 정석, 건배!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을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야외 테라스에서 햇빛을 받으며 앉아있는 선남선녀는 확실히 그림 같았다.
내가 작가였으면 저거 절대로 표지로 썼다.
아, 근데 주인공이 공주가 아니지···.
회차 표지로 써야 하나.
“저기, 근데 폐하가 왜 여기에 계시···ㄹ···.”
으억.
카이델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
살짝 굳은 표정의 카이델이 눈으로 묻고 있다.
뭔가 문제라도 있냐고.
아니요···.
전혀요···.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샤님은 폐하의 손님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건지요?”
어색함을 깨고 공주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플라티나 공주님!
나는 시선을 공주에게 고정한 채 대답했다.
“잠시 외부에 나갔다가 우연히 만났소.”
아니, 대답하려 했다.
대체 왜 나한테 물은 건데 폐하가 대답을···.
“그렇군요.
아샤님은 머리카락 색이 몹시 독특하시네요.
원래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나신 건가요?”
“ㄴ···.”
“그녀의 세계에서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통이라고 하더군.”
···.
내가 공주랑 아예 대화를 못 하게 할 참인가.
설마 어제 내가 공주를 칭찬했다는 이유로 그러는 건···.
테라스 실에는 다시 침묵이 흐른다.
뭘 질문해도 카이델이 가로채 버리니 섣불리 질문하기도 어렵다.
눈치 없는 연신이만이 까삭까삭 소리를 내며 과자를 쪼아먹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피곤하실 테니 전 오늘은 이만 가 보는 게···.”
“그게 좋겠군.
가 보도록 하게.”
아니, 그러니까 왜 폐하가 대답하냐고요!
미치겠네!
나는 으득, 속으로 이를 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신이 포르르 날아 내 어깨에 앉았다.
“좀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냐?
과자 존맛탱.”
이 눈치 없는 새대가리가.
나는 슬쩍 째려보는 것으로 연신의 입을 막았다.
“그, 그럼 다음에 다시 뵐게요, 공주님.”
“그래요···.
다음엔 꼭 둘이 만나요, 아샤님.”
···제발요.
나는 그렇게 내 최애와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쫓겨나와야 했다.
“벌써 나오셨나요?”
데바인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시종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챈 데바인이 서둘러 내 쪽으로 왔다.
“으음···.
뭐, 네.”
이걸 나왔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쫓겨났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하하···.
“뭐, 마침 잘 되었습니다.
드레스 재봉이 완성되었다고 하니 한 번 가서 보시지요.”
켁.
드레스를 또 보라고···?
“어제 입은 건 어쩌고요.”
“무도회마다 드레스를 바꿔 입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도회 자체가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는 사교의 장이니까요.
아샤님께서는 폐하의 손님이시니 얕보이셔서는 곤란합니다.”
아니, 내가 카이델의 딸도 아니고 부인도 아닌데!
왜 얕보이면 곤란한데!
또 이상한 드레스 갖다 입히려고!
나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데바인을 보았다.
하지만 이 악마는 깔끔하게 날 무시하고 앞장섰다.
으으.
악마.
결국, 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얌전히 데바인을 따라 방으로 돌아왔다.
“아···.”
우리가 들어서자 창틀에 서서 무언가를 바라보던 상인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식적인 웃음 사이에 숨어든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문하신 드레스를 가져왔습니다.”
아, 역시.
예상했던 대로 드레스는 아주 반짝반짝 광이 나고 있었다.
보석이 빽빽이 박혀 블링블링한 드레스부터,
장인이 한 땀 한 땀 손으로 놓은 것이 틀림없는 섬세한 자수가 있는 드레스까지.
저게 다 얼마야···.
내 돈이었으면 절대 안 산다.
“괜찮군요.”
데바인이 냉정한 눈으로 열 벌의 드레스를 바라본다.
저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되는 건가?
“장신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신구?
엑.
귀찮은데.
“아샤님께서는 귀걸이를 하신 적이 없는 듯하여 귀찌를 대신 가져왔습니다.”
아, 그래요···.
거참 눈물겹게 감사한 배려네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상인이 차 테이블에 다양한 귀찌, 목걸이, 반지를 내려놓았다.
···.
이게 다 얼마야.
데바인, 좀 말려봐요···.
그냥 손님한테 대체 국고를 얼마나 쓰는 거야.
하지만 데바인은 나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장신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왕궁 사람들은 대체···.
“다 괜찮군요.
대금은 궁에서 상회 쪽으로 갈 것입니다.”
다?
지금 다라고 했나요?
이 사람이 미쳤나?
데바인이 미쳤어요!
이 많은 걸 다 산다고?!
“데, 데바인.
이걸 다 살 건 아니죠?”
“다 살 겁니다.”
아니.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데바인을 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아, 아샤님?”
힘으로 버티면 못 버틸 리 있겠냐만 데바인은 얌전히 나에게 끌려왔다.
내가 데바인에게 귓속말을 하려 까치발을 들자,
데바인이 살짝 허리를 숙여 주었다.
“데바인.
나는 언제 내 세계로 돌아갈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한테 저건 너무 사치라고요.”
애초에 뭐,
내가 돌아간 후에는 이야기가 끝나는 거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내 몸에 새겨진 소시민의 피가 거부한다.
저건 너무 사치야!
쓸데없는 물건을 살 순 없단 말이야!
내 절절한 외침에 데바인은 생각에 잠겼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나도 절실한 눈빛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데바인이 말했다.
“저건 다 폐하의 선물입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폐하께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왠지 순간 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 그래도···.”
“저는 어디까지나 시종입니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아샤님에게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폐하께 말씀드리시지요.”
···.
카이델에게 말하면···
“그대는 나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군.
공주가 선물했어도 그대는 그렇게 반응했을까?”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플라티나 공주에게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게 과대망상이 아니다.
실제로 원작 속에서 카이델은 은화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대신 공주에게 자주 기댄다는 것을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으니까.
“으으···.
다음에는 데바인이 좀 말려줘요···.”
데바인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남긴 채 허리를 폈다.
그렇게 나는 팔자에도 없는 드레스 더미와 장신구를 선물 받게 되었다.
···하···.
*********
이틀째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제보다 사람이 더 많다.
어제는 아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내게 시선이 집중된다.
뭐, 이유는 알고 있지만.
“아샤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공주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웃으며 공주에게 예를 갖추었다.
낮에 데바인에게 특훈을 받은 덕인지 제법 봐줄 만하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인사 예법이 몸에 익으셨군요.
대단하세요, 아샤님.”
으으.
이래서 유치원생들이 엄마 칭찬받으려고 뻘짓을 하는 건가!
매도의 말만 듣다가 칭찬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별말씀을요.”
멀리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던 카이델이 이쪽을 바라본다.
사실은 아까부터 2분에 한 번씩은 내 쪽을 쳐다보고 있다.
내 머리카락 색이 특이해서 보는 것도 있겠지만,
왕이 계속 쳐다보는데 어느 신하가 신경 안 쓰겠나.
제발 나 좀 그만 봐 줄래요, 카이델···.
“어제의 아샤님도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한층 더 아름다우시네요.”
···.
아니, 아름다움을 형상화해놓은 분한테 들으면···.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어지는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는 공주님이 훨씬 더 아름다우신데요.”
어제는 연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었던 공주였으나,
오늘은 화사한 흰 바탕에 금실로 섬세한 자수가 놓인 드레스를 입고 왔다.
작고 가녀린 몸이 풍성한 드레스 자락과 만나자 더 작아 보인다.
내가 하면 틀림없이 우스꽝스러울 텐데 그녀의 미모가 그 꼴조차 예술로 만들어버린다.
아름다운 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보석 비녀로 고정한 것도 예쁘고,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피부에 살짝 홍조를 더한 화장도 예쁘다.
으으.
오늘도 내 최애는 예뻤습니다.
“오늘은 폐하와 아샤님의 의상이 많이 겹치는군요.”
공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오늘의 내 의상은 보석이 송알송알 박힌 짙은 자주색 드레스다.
어제 한사코 거부했던 코르셋에 파니에까지 해서 움직이기 매우 불편한.
오늘의 카이델의 의상은 검은색 셔츠에, 검은 바지.
그리고 하얀색 외투에 자주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설마, 자기 약혼녀가 오는 자리에서 일부러 나랑 맞춰 입고 온 건 아닐 텐데.
···.
아니, 설마.
“우연히 겹친 건가 봐요.
저도 오늘 드레스를 받아서···.”
내 말에 공주가 화사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하하.
“오늘도 그대들은 사이가 좋군.”
어느새 인사를 끝마치고 온 것인지 카이델이 다가왔다.
안 그래도 공주랑 이야기하면서 주목받고 있는데 더더욱 주목받게 된다.
으으.
도망가고 싶다.
“오늘의 아샤님과 폐하께서 의상이 겹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공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카이델이 침묵했다.
아니, 거기서 침묵하면 어떻게 해요!
“우,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말씀드린 참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폐하···.
전 암살당하기 싫어요.
원작에서는 공주의 나라와 우호가 원활하게 성사되기를 원하는 모 남주인공 후보가
은화를 죽이려 계획을 짜는 장면이 나온다.
이름이 뭐더라.
재무대신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건 둘째치고 난 그렇게 이야기가 꼬이는 건 질색이다.
“···.”
카이델의 얼굴이 불만으로 굳어진다.
으아.
제발, 표정 관리!
여기서는 당신 왕이란 말입니다!
이웃 나라 왕도 와 있는데!
“거, 건배할까요···?”
뜬금없는 내 말에 둘 다 나를 바라본다.
“건배?”
“그게 뭔가요?”
···아, 이 세계에는 건배도 없나?
나는 재빨리 움직여 샴페인 세 잔을 손에 들었다.
“잔을 부딪치면서 건배! 라고 외치는 거예요.”
“잔을 부딪쳐···?”
카이델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샴페인 잔을 받아들었다.
공주도 아리송한 얼굴로 내 손에서 잔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내가 잔을 내밀자 두 사람도 잔을 내밀었다.
문제는···.
“윽!”
카이델이 너무 세게 부딪혀서 잔이 깨졌다는 것.
···.
아니, 그 정도로 부딪히면 당연히 깨지죠···.
천만 다행히 공주의 손은 무사하다.
카이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잔을 부딪쳤기 때문에 움찔했던 것 같다.
내 손은 너덜너덜해졌지만.
“···!”
이걸 어쩌나.
그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카이델이 날 또 어깨에 들쳐멨다.
왜 또!
“폐하···?”
공주의 당혹감 어린 목소리를 뒤로하고 카이델은 달렸다.
왕이, 성안에서, 달린다.
“폐하, 체통을···!”
이럴 때 체통이라고 하는 거 맞나?!
어깨 위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아래를 본다.
윽.
피의 길이 만들어졌다.
흔들리니까 출혈량이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슬쩍 카이델을 보자 그 얼굴은 나보다 더 하얗다.
평소엔 짙은 상아색의 건강한 색인데.
어지간히 놀랐나 보다.
사실 이 정도로 다치는 건 내게는 큰 사건이 아니라,
정작 나는 무덤덤하다.
오히려 내일부터 성안에 돌 소문 쪽이 더 걱정된다.
폐하가 갑자기 검은 머리 여자를 무도회에 데려와서,
그녀의 잔을 깨부수더니 들쳐메고 가버렸다.
음.
으으음.
그건 좀···.
“폐하!”
하지만 배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상황에서 큰소리를 질러도 한계가 있고,
카이델은 뛰느라 내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저항을 포기하고 피가 안 나는 손으로 카이델의 등을 꼭 잡았다.
조금 덜 흔들리면 피도 덜 나겠지.
그러는 사이 카이델은 어느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폐하?!”
그 안에는 가문의 문장을 가슴에 새긴 기사들이 있었다.
식사시간이었던 걸까.
미안한데.
“사제를 데려와라.”
카이델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카이델의 표정을 보고 심각성을 느낀 건지 기사 중 하나가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카이델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와우.
손의 상처가 벌어졌다.
그만큼 흔들렸으니 당연한 거지만.
카이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손의 상처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나이 지긋한 사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카이델이 내 손을 가리켰다.
“회복 마법을 걸어라.”
···.
사제는 잠시 황당하다는 눈으로 카이델을 보더니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별말 하지 않고 내 손을 보았다.
“큰 상처는 아닙니다.
조금 찢어졌을 뿐···.
이 정도면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회복 마법을 걸어라.”
앵무새세요?
카이델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제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를 항상 굽어살피시는 케리스만이시여.
저에게 당신의 권능을 빌려주소서.”
사제의 손에 하얗게 빛이 서린다.
그 빛을 내 손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자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유리 조각 안 뺐는데.
“···.”
사제가 몸을 일으키자 카이델이 달려들 듯 내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손을 유리에 베인 것 가지고···.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카이델이 내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살짝 감긴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
저건···.
글로, 머리로 알고 있던 카이델의 감정이 직접 흘러들어온다.
그 입술의 뜨거운 숨결로.
카이델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흘러들어온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카이델의 진심을 ‘느끼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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