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주정의 정석, 그는 그녀의 위로···.
내 대학 생활은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사람과의 트러블은 물론 괴로웠다.
하지만 진짜 최악인 것은 따로 있었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반 샷 개나 줘, 반 샷 개나 줘!”
그놈의 술을 왜 그렇게 좋아하나.
나는 술이라면 학을 떼는 인종이다.
누구나 나랑 같은 가정환경이면 그러지 않았을까.
“너 이거 안 마시면 쟤랑 사귀는 거다?”
지랄.
안 마시는데 왜 사귀래.
그따위로 사귈 것 같으면 내가 왜 모태솔로겠어.
나는 이를 으득 갈며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 먹어보는 술은 쓰고 맛없었다.
이딴 걸 먹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오~.
잘 먹는데?
더 마셔, 마셔.”
술 먹이고 무슨 짓을 하려 그랬는지.
다행인 건 내가 그놈보다 주량이 셌다.
운이 좋았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 사람들의 딸이기 때문이었는지.
소맥을 열 잔을 넘게 먹고 소주 한 병을 먹었는데도 필름이 끊어지지 않았다.
먼저 뻗은 것은 그놈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는 놈은 없었다.
어차피 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술고래 따위의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무시했다.
사실 그 날 어지러워서 눈이 핑핑 돌았지만 그걸 알려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말이 길어졌지만 하여간 중요한 건 그거다.
나는 술이 정말 싫다.
내가 먹는 것조차.
“···전하.”
그런 내게 술주정뱅이의 상대를 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만약 공략해야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도망갔을 것이다.
···.
그래도 도망갈 순 없다.
공략은 해야지.
망할.
나는 담담한 얼굴로 솔라를 바라보았다.
“어쩐 일로 이렇게 취하셨습니까.”
“···아샤님.”
솔라는 하염없이 내 이름만 불러댔다.
망할.
뭔가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일단 좀 앉으세요.”
나는 솔라의 손을 끌어당겼다.
덩치도 큰 남자가 순순히 내 손에 끌려 소파로 향했다.
“전하.”
“···결혼하신다고요.”
어라.
이야기 들었나?
그럼 이야기가 쉽다.
“네.”
“형님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건가요?”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의 드센 태도와 다르게 약간 약한 척 가련한 척 고개를 돌렸다.
“형님은···.
아샤님은 형님을 사랑하십니까?”
“전하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요?”
솔라는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카이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걸.
그걸 굳이 재확인하려는 것은···.
“아샤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호.
이래서 연신이가 나보고 가 보라고 했나?
뭔가 좋은 예감이 든다.
“어떻게··· 라뇨?”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다.
가늘고 금방 꺼질듯한 목소리.
솔라는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척하는 이유를.
“저는···.”
솔라는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뺨에 달콤한 냄새 가득한 손이 닿았다.
우웩.
술 냄새.
“저는···.”
“전하.”
나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
이대로 가면 분명 아닙니다, 같은 소리를 하며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런 식으로 독자들의 애를 태우는 소설이 한 둘이던가.
미안하지만 나는 거부하겠다.
오래 질질 끌 것 뭐 있겠어?
오늘 바로 승부를 봐버려야지.
“저는 전하의 형님이신 카···, ···폐하와 결혼할 몸입니다.”
망할.
이름 까먹었다.
카이···데릭?
카이드···엘?
뭐더라.
“이제 다시는 전하와 이렇게 만나는 일도 없겠지요.”
다시 빼앗긴다.
그 기분을 주어야 한다.
솔라는 카이델에게 많은 걸 빼앗겼다.
동생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나를 빼앗긴다.
어쩌면 생애 처음 진심으로 사랑했을 여자를.
혹은 생애 마지막으로 사랑할 여자를.
내 속성의 힘으로 나를 사랑하게 된 솔라는 평생 나를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카이델과 결혼한다면 솔라는 평생 그런 나를 그려야만 한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내일부터는 바빠질 테니까요.”
날짜를 정확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카이델은 서두를 것이다.
시간이 좀 남았다고 쳐도 솔라와 내가 지낼 시간 따위 주지 않겠지.
아마 오늘 밤이 마지막일 터다.
“그동안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원래 세계로는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까?”
솔라가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뭇 여성들이라면 가슴 설렜을 눈동자.
하지만 내게는 소름 돋는 시선이었다.
망할.
술 냄새 너무 많이 나.
집중하자, 집중.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더 찾아보면···.”
“폐하께서 갑자기 결혼을 이야기하신 것은
제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런 폐하께서 제가 돌아갈 방법을 찾도록 두실 거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솔라가 매달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와
형의 여자가 되어버릴 나에 대한 갈망.
그것이 뒤섞여 묘한 눈동자가 되어있었다.
“그러면···.”
“네.
아마 저는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부터 폐하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겠지요.”
족쇄를 채워놓을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기사단을 붙여 감시할지도 모른다.
가둬놓을지도 모르고.
지난 엔딩에서 보인 카이델의 광기를 생각해보면 다리를 잘라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엔딩에서 보였던 잔혹함을 생각하면.
“제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나는 웃는 얼굴로 솔라를 바라보았다.
모든 걸 포기한 듯 덧없는 미소.
솔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술이 깼는지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어떻게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그···, 그건···.”
솔라는 말끝을 흐렸다.
말문이 막히겠지.
한 번도 형을 거슬러 본 적 없는 솔라.
착하고 순수한 동생.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형을 지지하던 솔라가 카이델을 거스른다.
아마 상상조차 해본 적 없겠지.
처음에는 만족했을 것이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천국이 옆에 있다면,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
옆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저를 도망치게 해주실 건가요?
아니면 결혼식을 망쳐주실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실 건가요?
저를 어떻게 도와주실 건가요?”
솔라를 몰아세우며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다시는 남주인공 후보들을 몰아세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 전인데.
한 번 공략이 늘어진 정도로 솔라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다.
바보 같다.
줏대가 없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멍청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수단을 고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아이의 곁으로 가기 위해.
“전하는 폐하께 거스르실 수 없잖아요.
그런데 절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거죠?
폐하를 위해 자신조차 버려버린 전하께서?”
하품.
하품이 필요하다.
눈물이 고여줘야 하는데.
으으.
눈물이 잘 안 나온다.
그래도 어렴풋이 눈이 뜨거워졌다.
에잇.
한 방울 툭 떨어뜨려 주는 게 더 효과가 있겠지만···.
이걸로 만족해야지, 뭐.
“가르쳐 주세요, 전하.”
솔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너무 몰아붙였나.
“···.”
잠시 솔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둠 속, 시계의 초침 소리 만이 침묵을 긁어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솔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그런 것쯤, 전하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왜 그런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고 계시는지.
왜 저에게 다가오지 못하시는지.
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계시는지도요.”
촛불의 불빛 아래에서 솔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아.
나는 저 기분을 알고 있다.
쓰고 있던 가면을 억지로 벗겨낸다.
그 안에 들어있던 썩어서 질척질척한 나를 끄집어낸다.
그것은 고문이다.
“가르쳐 주세요, 전하.
전하께서는 폐하를 거스르실 수 있으십니까?
저를 폐하에게서 빼앗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나냐, 카이델이냐.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
대신 나를 선택하면 나는 너에게 갈 것이다.
“전하.
기억하시나요?”
나는 내 뺨에 닿은 채 굳어버린 손에 내 손을 겹쳤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솔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제게 전하를 가르쳐달라던 그 말을.”
큰 손은 카이델이나 테베와는 달랐다.
부드럽고 섬세했다.
“가르쳐주세요, 전하.
전하의 마음을.
오늘이 아니면 이제 전할 수 없을 그 마음을.”
마지막.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만약 아예 볼 수 없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계속 봐야 한다.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카이델의 옆에 설 것이다.
연회장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
정원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어딘가에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주칠지도 모른다.
카이델의 여자가 된 나를.
상상해.
더 상상해.
그래야 네가 떨어질 테니까.
“나는···.”
솔라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쉽게 입에서 흘러나오질 않는다.
대신 솔라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
언젠가 말했었던 것 같다.
내 고향에서 손 키스를 하는 건 청혼의 의미, 라고.
솔라에게.
솔라는 지금 내게 청혼을 한 것이다.
“전하.”
“나는···.
나는 더이상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붉은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던 물기가 흘러내린다.
마치 용암처럼.
열기를 머금은 채.
“형님이 좋습니다.
형님이 싫습니다.
형님을 존경합니다.
형님을 떨어뜨리고 싶습니다.
형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형님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솔라는 마치 봇물 터지듯 말을 뱉어냈다.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아아.
터졌나.
“하지만 다 참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둘째니까.
제가 있는 것만으로도 형님께 폐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없었다면 형님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평생 형님을 위해 이렇게 살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어리석다.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는 그걸 그 아이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솔라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던 거겠지.
솔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카이델의 위치가 위험해진다.
솔라가 있으므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난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을까.
솔라에게 야망이 있었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솔라에게 야망은 없다.
솔라는 그저 형님과 잘 지내고 싶은 한 명의 동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형님이 왕이라는 이유로 아샤님을 가지시게 되는 건···.
그런 건 너무합니다.
아샤님의 곁에 있었던 건 접니다.
아샤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도 접니다.
형님이 아닌 바로 나!
나였는데!”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물든다.
언제나 능청스러워 보이던 얼굴이 일그러진다.
으음.
역시 솔라는 카이델의 동생이었구나.
광기에 잠식된 눈동자가 똑같다.
“그런데 왜 형님이 당신마저 데려가려는 거죠.
당신의 곁에는 항상 내가 있었는데.”
가면이 벗겨진 얼굴 아래에는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버렸습니다.
형님을 위해서 모든 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안 되겠어요.”
솔라가 내 손을 끌어당긴다.
나는 자연스럽게 솔라의 몸 위로 넘어졌다.
솔라는 요령 좋게 몸을 뒤집어 내 위로 올라왔다.
···.
괘, 괜찮겠지, 이거.
솔직히 쫄린다.
그래도 티는 내지 말자.
“사랑합니다, 아샤님.
사랑해요.
형님을 버릴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됐다.
광기 어린 눈동자에 무언가가 흐른다.
그것은 광기와는 다른 무언가였다.
나는 모르는 무언가다.
뭘까.
사랑?
사랑이라기엔 어둡고 음습하다.
집착?
집착이라기엔 어딘지 애절하다.
저게 뭘까.
궁금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솔라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입 맞췄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리고, 시작되었다.
언제나의 일그러짐이.
“···이게 무슨···.”
솔라는 나를 꽉 껴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그리고 보았다.
내 눈을.
“아샤님···?”
“···.”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달랠 순 없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붉은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가만히 기다렸다.
세상이 부서지는 그 순간을.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