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등장한 서브 남주인공과 긴장하는 남주인공.
“으음. 요즘 남자가 고백하길 기다리는 거 트랜드 아닌데···.
그냥 내가 고백하면 안 돼?”
“당연하지.
처음부터 고백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잖아.”
혹시나 해서 이야기해봤지만 역시나 까였다.
하긴.
남주인공 후보인 것 같으면
무조건 들이대서 고백하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하면 나한테 너무 유리하긴 하지.
으음.
고백을 받아내려면 질투작전이 역시 최곤가···.
휴.
질투작전이라···.
상대는 누구로 해야 하지?
뭐 연신이 상대로 꽁냥대도 질투는 해주겠지만···.
나는 연신이를 보았다.
연신이가 놀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진짜 이 새대가리로 정해?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진짜로 못 돌아가는 수가 생긴다.
그럼 남은 건···.
데바인, 은 좀 그렇고···.
그 때 내 머릿 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금발벽안의 인상 사나운 미청년.
가란데일.
으음.
나쁘지 않은데?
내가 만나러 가기도 좋고, 카이델 앞에서 꽁냥대기도 좋고.
카이델도 꽤 신뢰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막 쉽게 죽이지도 않을 것 같고.
남주인공 후보도 아닌 것 같으니 맘 편하게 들이대도 될 거고.
“좋았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나를 연신이 묘한 눈으로 바라본다.
저 눈빛의 의미는···.
미쳤냐는 뜻은 아니겠지, 설마.
나는 연신이를 한 번 노려봐 주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부터 질투작전 개시다!
*********
“가일!”
가일이 나를 쳐다본다.
내 뒤의 카이델이 굳은 표정으로 가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흐흐.
효과가 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일에게 달려갔다.
이렇게 가일과 마주할 때까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최근 며칠간 카이델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마구간으로 달려와 가일에게 승마를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마침 카이델이 가일에게 미리 이야기해둔 것도 있어 일이 쉬웠다.
며칠 동안 열심히 배운 보람이 있어 몸치인 나도 이제 말 등에 오르내리는 것은 쉽게 해낸다.
아직 달리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내 승마가 능숙해진 만큼 가일과의 사이도 꽤 가까워졌다.
“아샤 님.”
나는 가란데일을 애칭인 가일로 부르기 시작했고, 가일은 나를 아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우리를 처음 보는 카이델에게는 꽤 충격적일 것이다.
아직도 카이델은 폐하라고 꼬박꼬박 부르고 있으니까 아마 더 충격이지 않을까?
가일이 나를 향해 살짝 미소지었다.
그러자 사나운 눈매가 부드러워지면서 마치 강아지 같은 얼굴이 된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나는 가일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오늘은 폐하와 함께 왔어.
내 승마복이랑 장비들 좀 꺼내줄래?”
가일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두막 쪽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려는 나를 카이델이 멈춰 세웠다.
“아샤.”
“네, 폐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카이델을 보았다.
카이델은 뭔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란데일과 꽤 사이가 좋아진 것 같군.”
“아, 승마가 재밌어서 자주 오다 보니 친해졌어요.
알고 보니 저보다 동생이더라고요.
그래서 말도 좀 놓게 됐는데···.
혹시 예법에 어긋나나요?”
그럴 리가.
왕의 손님인 내가 마구간지기인 가일에게 반말을 하더라도 큰 문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가일도 좋다고 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닌 건 알고 있지만 나는 시치미를 뗐다.
“···그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무슨 말이 돌지 모르니.”
카이델은 지금 입맛이 쓸 것이다.
어느 세계건 종교란 신성불가침의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델은 나를 위해 이단 심문관의 수장을 죽였다.
그리고 그 뒤처리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내 소식은 데바인을 통해 듣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들었을 것이다.
내가 묘하게 자주 마구간을 들락거린다는 것을.
그렇게 며칠 만에 겨우 시간을 내서 날 만나러 왔는데 지금 이 상황이다.
카이델의 입장에선 상당히 열 받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도 카이델이 저렇게 차분하게 만류하는 이유는 뻔하다.
상대가 나이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최근 폐하께서도 찾아주시지 않고 성안에서는 할 게 없어서···.
시간도 때울 겸 나중에 폐하와 함께 승마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배웠던 것인데,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기분을 다운시켜도 좋지 않다.
그런 생각에 웃으며 카이델과 함께 있기 위함이었음을 어필했다.
카이델의 안색을 살피자 굳어 있던 얼굴이 살짝 풀린 것이 느껴졌다.
진짜 알기 쉬운 남자다.
“승마에는 익숙해졌는가?”
“제 특훈의 성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폐하!”
나는 씩 웃어 보이고 마구간을 향해 뛰었다.
오두막에 들어서자 가일이 내 장비를 꺼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워, 가일!”
가일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마자 승마복을 가지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 날, 처음으로 카이델과 함께 승마를 한 날 곧바로 맞춰 놓은 것인 듯하다.
가일과 친해지기 위해 마구간에 왔을 때는 이미 내 전용 장비가 갖춰져 있었으니까.
이제는 익숙해진 복장으로 갈아입고 장갑을 끼자 탈의실 앞에 부츠가 놓아 진다.
발에 꼭 맞는 부츠를 신고 가림막을 걷었다.
“가자, 가일.”
내가 먼저 앞장서자 가일이 등자와 안장을 들고 내 뒤를 따라왔다.
뭔가 좀 과묵한 강아지 같아서 귀엽다.
음···.
이런 생각은 사람 상대로 실례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카이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잘 어울리는군.”
진한 자주색 재킷과 새하얀 셔츠.
거기에 새하얀 백바지지만 의외로 촌스럽진 않다.
재킷을 수놓은 화사한 장식 덕분이겠지.
게다가 종아리 전체를 감싸는 부츠 덕분에 멋있는 느낌까지 난다.
뭣보다 치마가 아니다.
움직이기가 너무 편하다.
“좋은 옷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대는 드레스보다 승마복을 더 기뻐하는군.”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하자, 카이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여자겠지.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폐하.”
말은 카이델을 향하지만,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나도 가일을 바라보았다.
우리 둘의 시선 교환에 카이델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도움이 필요한가?”
“아니요, 폐하!”
나는 익숙하게 카멜의 왼쪽으로 향했다.
카멜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자 카멜이 나를 보고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매번 내가 인사하며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면 카멜은 저렇게 울음소리를 낸다.
마치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이런 걸 보면 명마가 영물이긴 영물인 것 같다.
“잘 부탁해, 카멜.”
왼손으로 고삐와 갈기를 움켜쥔 뒤 왼발을 내 사이즈에 맞춘 등자에 걸친다.
오른손으로 안정의 뒷부분을 잡고 오른발로 땅을 박찬다.
나는 안정적으로 카멜의 등에 올라탔다.
“오오.
그대가 이렇게 잘 해낼 정도면 어지간히 연습한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며 카이델이 가일 쪽을 보았다.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는 가일의 모습에
기분이 상한 것인지 카이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아직 혼자 달리지는 못합니다.”
그 시선을 떼어내려고 일부러 말을 걸었다.
가일에게 지나치게 질투하는 건 곤란하다.
나는 카이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폐하!”
카이델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다.
아마 지금의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눈부셔 보이지 않을까?
“가일!”
가일을 부르자 그가 내 고삐에 연결된 줄을 쥐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카멜을 끌어 구보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가란데일.
내게 주게.
내가 아샤와 함께 가도록 하지.”
가일의 발이 멈췄다.
가일은 나를 바라보더니 카이델에게 줄을 넘겨주었다.
카이델이 내 옆으로 좀 더 다가왔다.
“폐하가 직접 구보시켜주시게요?”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가란데일을 부르도록 하지.”
카이델의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이 소심한 남자가···.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당연히 폐하가 함께 해주시는 게 좋지요.”
생글생글 웃자 카이델이 살짝 고개를 돌린다.
오랜만에 보는 첫사랑의 여자.
거기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
만날 하자는 대로 네네 거리다가 보이는 맹랑한 모습까지!
이런 상황에서 설레지 않을 남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던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폐하?”
바빴던 이유는 시녀들의 이야기를 몰래 들어서 대충 알고 있다.
케리스만 교의 항의에도 대응해야 했고, 새로운 이단 심문관의 수장을 뽑아야 하기도 했다.
아무나 그 자리에 앉힐 순 없으니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게다가 매일매일 처리해야 하는 정무까지.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대를 보니···.”
말을 꺼내던 카이델이 문득 입을 닫았다.
평소의 카이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을 것이다.
새어 나온 본심에 당황한 것인지 카이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저를 보니 피로가 다 날아가기라도 하신 건가요?”
장난처럼 묻자 카이델의 얼굴까지 빨개진다.
오랜만에 보는 카이델은 여전했다.
“농담입니다, 폐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매일매일 폐하를 뵈러 갈 텐데요.”
나는 그런 카이델을 눈치채지 못한 척 웃었다.
그러자 카이델이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렇게 해줄 건가?”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
아마 내가 집중하지 않았다면 말발굽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델의 반응만 기다리고 있던 내 귀는,
말발굽 소리 사이에 숨어있던 그 말을 용케 주워들었다.
“그럼요.
폐하께서 제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생각하면 그 정도야 쉽지요.
어서 그 사람을 찾아야 폐하께 은혜를 갚고 제 세계로 떠날 수 있을 텐데요.”
카이델이 문득 발을 멈췄다.
말 위에 탄 나에게는 카이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로 얼추 표정을 예상할 뿐이다.
지금 카이델은 아마 날 만난 후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폐하?”
“그대는 그 사람을 찾으면 그대의 세계로 떠날 건가?”
카이델의 말에는 한기가 서려 있다.
이게 왕의 위엄이라는 건가.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카이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는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과 살아갈 테지.
내가 모르는 삶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살아가겠군.”
카이델의 말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내 말에 다시 떠올린 것이다.
내가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지난번에 내가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한 이후로 카이델은 긴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람을 찾기는커녕 매일매일 방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 것에 안심했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데바인과 카이델과 가일 뿐.
그래서 카이델은 내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것이다.
요 며칠은 안심이고 뭐고 날 지킬 방법을 고심했겠지.
어떻게 하면 날 죽이지 않고 살릴 수 있을지.
하지만 그사이에 내가 가일과 친해져 있는 것을 보며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방금 내 말로 확실하게 자각했을 것이다.
카이델은 내가 다른 세계로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카이델의 곁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폐하.”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이델을 불렀다.
그 뒷이야기를 하길 원한다.
그런 뜻을 담아서.
카이델이 나를 올려다본다.
그 눈동자에는 집착과 질투와 혼란과 공포가 섞여 있었다.
두렵겠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그리고 그건 나에게 고백하는 순간 끝날 것이다.
“저는···, 폐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작게 속삭이듯 이야기하자 카이델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리고,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아샤···.
나는 그대가···.”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