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전 남친과의 추억의 장소에 현 남친과 가게 되면
“이쪽으로.”
가게 안은 소란스러웠다.
대부분은 모험가인 듯 가벼운 경장비를 걸치고 거친 언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이들도 꽤 많았다.
유명한 곳인 듯 빈 자리가 썩 많지 않았다.
솔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 소매를 잡았다.
···.
문득 내 로브 자락을 잡고 앞장서던 테베가 생각났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 솔라의 뒤를 따랐다.
“사람이 많네요.”
그때는 매운 것만 머릿속에 가득해서 주변을 둘러볼 생각을 못 했다.
일을 치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일을 쳐야만 한다.
소란이 일어야 한다.
그래야 카이델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언제 일을 칠까.
어떻게 일을 칠까.
최대한 소란스러워질 만한 것.
기왕이면 기사단, 경비단 같은 게 올 정도의 소란···.
뭐.
답은 하나뿐인가.
나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젖혔다.
사람이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로브가 살짝 벗겨졌다.
나와 부딪힌 남자가 반사적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모험가란 자들은 전승이나 전설에 예민하다.
내 머리카락 색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마녀···!”
작은 목소리가 소란 사이를 뚫고 흘렀다.
조금 전까지의 소란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뒤늦게 로브를 고쳐 썼지만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소란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마녀···.”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그 전설의 마녀인가?”
“죽여야 해.”
“하지만 전설이 진짜라고는···.”
“나라를 망하게 할 마녀···.”
수군거리는 소리에 솔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묘하게 침착했다.
“···나가도록 할까요, 아샤님.”
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얌전히 따라 일어나긴 했지만 허둥거리는 척하며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내가 도망간다고 생각했는지 몇몇 모험가가 우리를 둘러쌌다.
“···.”
척 보기에도 긴장한 게 역력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솔라가 재빨리 나를 뒤에 감췄다.
“무슨 일이시죠.”
“거기, 그 여자.
로브 좀 벗어 봐.”
“거절합니다.”
드물게도 솔라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강경했다.
그것이 남자들을 자극했다.
“형씨.
다치기 싫으면 좀 비키지?”
“아니면 홀려 버린 거 아녀?
저 빌어먹을 마녀한티?”
“머리색만 좀 확인할 테니 비켜보소.”
솔라가 이를 악문다.
등 뒤에서 알 수 있을 정도로 솔라의 몸은 굳어 있었다.
고민 중이겠지.
지금 정체를 밝힐까?
그랬다가 왕가가 마녀에게 홀렸다고 생각되면 어떻게 하지?
형님에게 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나를 넘겨주면 어떻게 될진 뻔하다.
형님이 사랑하는 여자.
절대로 넘겨줄 수는 없다.
최대한 소란을 크게 만들지 않고 끝낼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해야···.
그런 고민으로 머리가 가득할 거다.
좋다.
더 고민해라.
그러면 그럴수록 소란은 커질 거다.
테베 때랑은 다르다.
그때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회색으로 머리색을 바꾸고 나왔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나왔다.
처음부터 소란을 피울 생각이었으니까.
“무시하냐?”
“괜히 짱구 굴리지 말랑게.”
“야리야리한 형씨가 괜히 다치지 말고 비키소.”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진다.
몇몇 남자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다.
일촉즉발.
내가 나설 타이밍이다.
“···.”
나는 앞으로 나섰다.
손을 파르르 떨며.
두려움을 감추지 않은 채로.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화면으로 내 죽음을 봐왔지만,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회귀할 거다.
다시 처음으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제 로브를 벗으면 되는 건가요?”
“그래.”
남자들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솔라는 내가 나설 줄은 몰랐던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웃어주었다.
심호흡했다.
손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솔직하게 말하자.
연기가 아니다.
진짜 두렵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죽음이라는 미지의 것을 앞두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이미 한 번 각오했었다고 무뎌지는 것도 아니었다.
후···.
그래도 할 수밖에 없다.
해야만 한다.
나는 로브를 벗었다.
“···.”
소란이 가라앉았다.
두려움 가득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그 수많은 시선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되었을까요?”
“···마녀.”
그들 중 하나가 검을 뽑았다.
영상으로 보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카이델의 검에 꿰뚫려 죽음을 맞이한 나.
슈피의 부모님이 보낸 사람들에게 베어 죽임당했던 나.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의연하게 웃었다.
“제가 마녀로 보이시나요?”
“그 검은 머리가 증거겠지.”
나는 웃었다.
소리 높여서.
떨리는 손끝을 애써 감추면서.
“제가 마녀라면 지금 당신을 매혹 시켜버리지 않았을까요?”
“그건···.”
모험가들이 움찔했다.
나라를 기울여버릴 희대의 마녀가 모험가 하나 매혹 시키지 못할 리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두려워했다.
“이렇게 하지요.”
나는 솔라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마치 전혀 상관없는 사이인 것처럼.
“이 도시에도 경비대가 있겠죠?
경비대를 불러주세요.
그럼 당신들 중 몇몇과 함께 교회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마녀인지 확인도 할 수 있고,
경비대나 당신들을 매혹 시켜 도망가는지도 확인할 수 있겠죠?”
솔라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걸 뿌리쳤다.
솔라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뭐, 어차피 남자들은 수군거리느라 제대로 날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지만.
“좋다.
허튼수작은 하지 마.
여기엔 상태 이상에 저항이 강한 모험가들도 많으니까.”
뭐, 내가 진짜 마녀라면 그런 건 소용 없을 테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남자는 네 일행인가?”
“아뇨.”
즉답했다.
부자연스러울 만큼.
그래야 솔라가 이들의 기억에 남을 테니까.
이 소식이 카이델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화가 날 것이다.
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솔라에게.
스스로 조심하지 않은 나에게.
이런 소란을 만든 우리 둘에게.
그 틈새를 뚫고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솔라가 왜 나를 데리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솔라는 내가 정보를 얻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같이 있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카이델에게도 사실대로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왜 나를 이런 곳까지 데리고 온 걸까.
애초에 둘은 나갈 때마다 대체 뭘 하는 걸까.
자신조차도 홀리게 한 내가 솔라를 홀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솔라는 내게 아무런 마음도 없는 걸까.
나는 솔라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는 걸까.
생각이 쌓이고 의심이 쌓이면 집착이 시작될 것이다.
테베와의 그때처럼.
“무슨 일입니까.”
어느 틈엔가 경비대를 부른 모양이었다.
갑옷으로 몸을 감싼 남자 둘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조용한 가게 분위기에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나를 보더니 다른 이들과 같이 침묵에 휩싸였다.
“···.”
“저를 교회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제 머리 색 때문에 마녀라고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경비대 두 명은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죠.”
나는 솔라를 바라보며 웃었다.
솔라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켜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면 좋겠다.
그래야 카이델이 미쳐버렸을 때 나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경비대를 따라나섰다.
*********
“피곤해···.”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심심했었는지 연신이가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뭐했냐?”
“교회에 갔다 왔어.”
“엥?”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뭔데!
나도 가르쳐 줘!”
연신이가 눈을 반짝인다.
드문 얼굴이었다.
귀엽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귀여움의 위에는 다른 귀여움이 있는 건가.
“알아서 뭐 하려고.”
“···!”
연신이가 털을 부풀린다.
화가 났다는 표시.
귀엽다.
“너, 너!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나야 모르지?”
“창문도 안 열어놓고 가고!
내가 나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심심했는데!”
아.
그랬나?
“별 건 아니야.
식당에 갔다가 조금 일이 생겨서.”
“무슨 일인데?”
“로브, 벗겨졌거든.”
“히이이익?!”
연신이가 통통 튀었다.
아까의 화남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제정신이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아주 그냥 죽여달라고 곡을 하지 그랬냐!
로브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니가 유치원생이야?!”
···.
어쩔씨구?
“그럴 바엔 그냥 성에 콕 박혀서 나가지 마, 멍충아!
길거리에서 칼 맞아 죽고 싶냐!”
···.
“1절만 해라?”
나는 엷게 웃어 보였다.
너를 꼭 죽여버리겠다는 살기를 품고.
“흐, 흠흠.
아무튼,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거야!
너는 제발 조심이라는 걸···.”
“1절만 하랬다.
뭐, 애초에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
옆방은 솔라의 방이다.
이때까지 소리가 샌 적은 없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지.
나는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래야 소란이 일어나지.
그래야 카이델의 귀에 들어갈 거고.
그래야 카이델이 미쳐 날뛸 테고.”
연신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의 나와 너무 달라서겠지.
지금까지의 나는 카이델이 미치지 않는 것에 중점을 뒀다.
방해하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너, 연애소설의 신이랬지?”
“응?
어, 응.
그랬지.”
···.
그랬지?
“연애소설에서 남녀 주인공을 이어주는 게 뭐야?”
“사랑이지!”
···.
저게 그냥.
콱.
“고난이지, 멍청아.
역경과 고난을 거쳐 두 사람이 하나가 되고,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연애소설의 묘미잖아.”
뭐.
다양한 소재, 다양한 전개가 있지만, 목표는 항상 하나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가능했다면 해피 엔딩이 될 거다.
그리고 불가능했다면 배드 엔딩이 될 거다.
“이 소설에서 나에게 역경을 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어?
제일 큰 빌런은 카이델일걸.”
진짜 남주인공이 아니다.
그런 주제에 집착이 쩐다.
게다가 나에게는 손도 대지 않는다.
물론 배드 엔딩 때 실수로 내게 손을 댄 적은 있다.
화형을 시킨 적도 있다.
그러나 일단 공략 중에는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을 죽여댔지.
“지난번 슈피 공략 때 생각했어.
역경과 고난이 없으니까 공략이 너무 오래 걸려.
억지로 고백받는 게 미안해서 사양하려고 했었는데···.
이제 그런 거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아마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거라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
최근의 연신이는 왠지 유해졌으니까.
그런데도 묻지 않는다.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연신이에게 물어봤다가
“어? 지금쯤 현실 세계는 2030년쯤 됐을걸?”
따위의 대답이 나오면 나는 재기불능일지도 모른다.
뭐,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실 세계의 시간은 멈춰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매번 엔딩 때마다 나를 회귀시켜주는 연신이다.
이 세계가 내가 원래 살던 세계보다 빠르게 시간이 지나갈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불안하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불안해진다.
빨리 공략을 끝내야 한다고 조급해진다.
하지만···.
“···너는 괜찮아?”
“뭐가?”
“힘들었겠다.”
뜬금없는 연신이의 말에 웃었다.
힘들었겠다, 인가.
“힘들진 않았어.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라이안이 마침 그쪽 교회에 있었거든.”
라이안은 성안에 있는 교회의 사제다.
원래라면 도시에 있는 교회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라이안은 거기에 있었다.
그 차가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지만 나는 외면했다.
눈이 마주치는 게 일종의 시동 같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솔라와의 첫 만남 때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힘들었겠다.”
연신이가 내 손에 가볍게 몸을 부볐다.
나를 위로해주려는 걸까.
“귀여운 짜식.”
나는 손가락으로 연신이의 머리를 살살 긁어주었다.
자.
이제 카이델과 솔라는 어떻게 나올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나가야 할까.
나는 연신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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