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바람둥이는 진정한 사랑을 깨달으면 순애보가 된다
정원 가꾸기 1주 차.
세상에.
모종을 심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꽃이 필 줄이야···.
“와···.”
푸른 꽃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피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드십니까?”
“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헐거워진다.
흠흠.
이러면 안 되는데.
그동안 쌓아왔던 어리광쟁이의 이미지가···.
슬쩍 슈피를 바라본다.
그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저 눈으로 나를 바라봐야 일이 빨리 끝날 텐데.
으음.
뭔가 방법이 없을까.
생각보다 스킨십도 그렇게 안 일어나고.
얌전히 서로 묵묵히 모종을 심는 나날.
뭔가 분위기를 환기해줄 게 필요한데.
“앗.”
실수다.
생각에 빠져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흙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흙은 마치 마법처럼 날아 슈펠리에의 머리를···.
···.
오오.
이거 기회 아닌가?
“으악, 슈펠리에!”
“···.”
슈피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머리 위에 흩뿌려진 흙을 어찌할 생각도 못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난감한 것 같기도 하고.
항상 오빠같이 굴더니 의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큭, 푸하하하하.”
“···아샤님.”
“미, 미안해요.”
나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슈피의 머리를 털어주었다.
슈피는 목이 빨개진 채로 내 손길을 견디고 있었다.
으음.
장난 좀 쳐볼까.
나는 녹색 머리카락을 깨끗이 털어준 후 어깨로 손을 옮겼다.
슈피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샤님?”
“네?”
“거긴 제가 털어도···.”
“안 보이잖아요.”
나는 킥킥 웃곤 슈피의 어깨를 툭툭 털었다.
물론 털어주면서 옷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목을 살짝씩 쓸어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등도 털어줄게요.”
“아니···.”
슈피의 목이 타오른다.
으음.
얼굴 전체로 올라가면 진짜 꽃처럼 보이지 않을까.
“미안해서 그래요.”
나는 엷게 웃으며 슈피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툭툭, 등을 털어주었다.
나야 그런 경험이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몸에 이렇게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심장 소리 때문에 주위의 소리가 안 들린다고 했었는데.
지금 슈피도 그런 기분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샤님, 이제 됐습니다.”
슈피가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 아팠어요?”
“아뇨.
그···.”
어물어물하는 것이 귀엽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다 보니 얼버무리는 것조차 못한다.
근 한 달 정도 슈피를 보면서 깨달았다.
슈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슈피는 사람들의 생각이 대충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귀족들의 세계는 결코 진실을 내세우는 세계가 아닐 것이다.
권력과 정치의 세계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슈피가 상급 귀족인 공작, 후작, 남작 중 어느 가문의 자제였는지는 모르지만
높은 귀족이었을수록, 그리고 힘이 강한 귀족이었을수록 더 그랬을 것이다.
주변이 온통 거짓.
게다가 나는 그걸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것은 대체 어떤 세상일까.
내가 야심이 많고 위로 올라가려는 마음이 강하다면 괜찮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능력이 축복일지도 모른다.
교섭에도, 정치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슈피는 굉장히 섬세한 남자였다.
감성도, 그 마음도.
그런 남자에게 그 능력은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아팠으면 미안해요.”
나는 생글 웃고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슬쩍 슈피를 돌아보았다.
슈피는 턱까지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으음.
좀 너무 약발이 센데?
이 정도의 터치는 그냥 친구들끼리도 하지 않나?
“이건 언제쯤 펴요?”
나는 모종을 화단에 옮겨 심으며 물었다.
슈피가 겨우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이건 아마 2주쯤 있으면 필 거에요.”
“2주···.”
나는 이 꽃이 피는 걸 볼 수 있을까?
으음.
아니, 못 보는 게 좋은 거지.
“그때도 슈펠리에랑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입은 제멋대로 움직여 슈피를 겨냥한다.
이쯤 되면 거의 자동이다.
로봇처럼 입만 움직인다.
이대로 내 생각과 관계없이 몸과 입이 움직여 고백을 받아 내주면 좋을 텐데.
“그때까지 정원 일을 하시게요?”
“네.
재밌는데요?”
슈피는 질렸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입가에 살짝 걸린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필 듯 말 듯 한 미묘한 미소.
슈피.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내가 있는 모습을 그려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게 고백을 해주지.
지금이야 카이델이 얌전하지만 언제 냄새를 맡고 올지 모른다.
카이델의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빨리 결판을 내고 싶다.
처음에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자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생각보다 늘어지니 마음이 다시 급해진다.
“그것보다도 훨씬 후까지도 할거에요.”
나는 슈피를 보며 웃었다.
슈피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
“으음.”
“왜?”
“뭔가 사건이 필요해.”
“사건?”
“응.”
뭔가 결정적인 사건이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초상화를 그려줄 테고,
그래야 초상화와 함께 고백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이대로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어.”
“난 상관없는데?”
“내가 상관있어.”
두렵다.
몇 년이나 한 남자에게 고백을 받기 위해 집중한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대체 어떻게 될까.
지금의 나는 최대한 게임이라고 생각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틀림없이···.
“흐음···.
뭐, 설마 몇 년이나 걸리겠어?”
“그럴지도 모르니까 하는 말이지.”
“지금까지도 한 달 전에 다 승부 봤잖아?”
“그거야 대충 보이니까 그랬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슈피는 잘 안 보여.”
“슈피?”
“아, 슈펠리에.”
연신이가 흐응,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맨날 속으로 슈피슈피 하던 게 버릇이 돼서 나도 모르게···.
이러다가 슈피 앞에서도 슈피라고 부를라.
조심해야지.
“하여간 뭔가 없을까?”
“뭐?”
“뭔가 극적인 사건.”
“글쎄···.”
으음.
기사도 아니니 테베에게 써먹은 방법은 무리.
라이안에게 써먹은 방법도··· 무리.
슈피는 카이델이랑 친분이 있는 사이다.
내가 도망치게 도와달라고 해봤자···.
아니지.
오히려 도와줄지도 모르지.
그러려면 카이델의 질투를 유발해야 하는데···.
그러면 또 누군가가···.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털어낸다.
나는 그 어떤 희생을 보더라도 수단을 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내가 엔딩을 보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세계다.
그렇다면 누가 죽든 별 상관없잖아.
그러려면···.
누가 좋을까···.
질투를 유발할 상대가 필요한데···.
아.
“연신아.”
“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살살 물어~.
나 연약한 새야!”
···.
저거 콱 그냥···.
죽일까.
나는 끓어오르는 살의를 꾹 눌렀다.
순간 과대였던 선배가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깔깔거리던 게 떠올랐다.
그 새끼 진짜 짜증 났었는데···.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불타오르는 살의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카이델 동생은 어디에서 출몰해?”
“출몰이라니···.
몬스터냐?”
“···등장?
자주 나타나는 곳?
아무튼, 어디 가면 볼 수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칫.
동생이라면 설마 죽이진 않겠지 싶어서 물어본 건데.
여차하면 다음번 공략 상대로 점찍어놓기도 하고.
그럼 누굴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으음.
“···뭐, 바로 옆에 있는 방이 왕세자의 침실이라고 하긴 하더라.”
“왕세자?”
지금의 왕은 카이델.
그리고 카이델에게는 후사가 없다.
지금까지도.
왕이라는 자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자리다.
암살을 당할지 전장에 나갔다가 죽을지.
아니면 정사를 보다가 과로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왕세자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제 1 왕위 계승자는 카이델의 유일무이한 동생.
그 바람둥이 동생일 것이다.
“고마워, 연신아!”
나는 연신이의 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연신이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뭐, 너 좋으라고 가르쳐 주는 거 아니다, 뭐!
그냥 주워들은 소리거든!
아닐지도 모르거든!”
“그래도 고마워.”
흠흠.
바로 옆방이란 말이지?
“고마운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해도 돼?”
“뭔데.”
“요기 창문으로 나가서 옆 방 한 번만 보고 올래?
그 왕자가 있는지만 확인해줘.”
“엥?
싫은데?”
연신이가 몸을 홱 돌려버렸다.
으음.
뭐로 꼬신다.
“이거 들어주면 내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소원?”
연신이가 솔깃한 얼굴로 나를 본다.
흐흐.
역시 꼬실 때는 이런 게 최고지.
“뭐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
연신이가 생각에 잠겼다.
뭘 소원으로 빌까 고민 중인 걸까.
흠.
뭐, 끽해야 케이크가 먹고 싶다거나
아니면 쿠키가 먹고 싶다 뭐 그런 거겠지.
“나중에 빌어도 돼?”
“아니. 오늘.”
뭘 빌려고.
나는 무서운 예감에 즉답했다.
연신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불평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기간을 정해야지.
평생 소원 안 빌 거야?”
“뭐, 그건 그런데···.”
연신이는 으음, 하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대체 뭘 시키려고 저러는 거지.
먹을 게 아니란 말이야!?
“오케이.
그럼 갔다 온다.”
“자, 잠깐만.”
“왜?”
“내가 할 수 있는 거 한정이야.
내가 못하는 거 시키면 안 돼···?”
“응, 너 할 수 있는 걸로 빌 거야.”
왠지 불안한데.
내 불길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이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힘차게 날아올랐다.
으음.
대체 뭘 빌려고···.
나는 창문 앞에 서서 연신이가 뭘 소원으로 빌지에 대해 고민했다.
뭘까.
먹을 게 아니면.
“···설마, 굴욕적인 뭔가를 시킬 생각인가?”
개처럼 기면서 짖으라던가.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연신이가 돌아왔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연신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니, 좀···.”
···.
설마 뭐 이상한 거야 시키겠어?
연애소설의 신인데.
끽해야 이상한 표정 짓기 정도겠지···?
그··· 그렇겠지···?
“그래서 어땠어?”
“지금은 없어.”
흠.
나갔나?
내가 기억하는 카이델의 동생은 맨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안의 여자란 여자는 다 꼬드기려 드는 전형적인 바람둥이 캐릭터.
솔직히 말해 극혐이었다.
당연히 은하에게도 들이댔다.
그리고 은하는 그런 그에게 약간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은하라는 캐릭터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노는 것에 익숙한 나쁜 남자 캐릭터에 이끌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카이델이 무서워 그 호감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었지.
솔직히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주인공 유형이 바람둥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바람둥이 캐릭터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이후로는 그 여자만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바람을 피운다는 건 마음의 윤리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한 여자만 사랑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책임감이 없는 상태.
그런 인물은 분명히 다시 바람을 피운다.
내 동기 중 하나가 그랬다.
내 룸메였던 그 여자가 낸 소문 때문에 나는 소위 말하는 싼 여자로 이름났다.
그래서일까.
놈은 여자친구가 있는 상황에서 내게 접근했었다.
“애들 때문에 힘들지?
다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저러네···.
이거 마시고 힘내.”
솔직히 조금 고마웠다.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게 수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주가 지난 후였다.
“힘들었겠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
나는 그날도 주변 사람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처음 생긴 이성의 친구.
그래서 조금 들떴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자친구가 있는 놈이라 방심했다.
편의점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놈의 집이었다.
“···뭐 하는 거야?”
“아, 벌써 깼어?”
놈은 씩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필름이 끊긴 나를 길에 버릴 수 없어 데리고 온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답답하지?
옷 벗겨줄게.”
내 옷에 닿는 놈의 손을 느끼는 순간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놈을 발로 찼다.
“아, 씨발!
뭐 하는 거야!”
처음으로 놈은 내게 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의 모습은 다 가식이었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약을 먹였던 건지도 모른다.
맥주 세 캔에 그렇게 될 정도로 나는 술에 약하지 않았다.
“···쓰레기 새끼.”
나는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놈은 욕을 하면서 따라왔다.
“야, 씨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너도 알고 있었을 거 아냐?
너처럼 소문난 걸레한테 내가 왜 접근했겠냐?”
···.
아, 그만 생각하자.
생각할수록 열만 나지.
아무튼, 카이델의 동생은 어디로 놀러라도 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
밤이 오는 것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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