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의 정석, 만남은 발코니에서 이루어진다.
“···.”
울리는 음악 소리.
자기들끼리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소리.
내가 무슨 영광을 보자고 여기에 서 있어야 하나.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에 든 잔을 기울였다.
지난번 것과 같은 푸른색 드레스와 푸른색 구두.
엷은 화장이 얼굴을 계속 간지럽힌다.
집에 가고 싶다.
“못 보던 얼굴인데?
머리는 염색이야, 마법이야?
너 좀 특이하다.”
아.
지난번 그 놈팡이.
이번에도 또 같은 대사로 다가오나.
귀찮다.
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이고는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 자리를 옮기려 했다.
“어디 지방 귀족 딸이야?
아니면 나처럼 돈으로 작위 산 아버지를 뒀나?
성이 뭔데?”
졸졸.
이건 뭐 개도 아니고 왜 따라다니고 난리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저는 폐하의 손님입니다.”
이번엔 가능한 한 카이델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다.
저번처럼 괜히 다가와서 춤추자고 하면 귀찮다.
내가 뭣 때문에 그 귀찮은 드레스 피팅을 참았는데.
저번처럼 복도에 나갔다가 또 카이델을 만나 차라도 마실까 봐
드레스 열 벌을 입히는데도 참았다.
카이델이랑 단둘이 있는 시간은 최대한 피하려고.
여기서 카이델의 시선을 끌어 춤을 추게 되면 또 밀착해야 하는데 그건 피하고 싶다.
나에게도 카이델에게도 썩 좋은 일은 아니다.
“···니가 폐하의 손님이라고?”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쉽사리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저에게 저지르는 무례는 곧 폐하의 체면에 진흙을 바르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나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나리라는 표현으로 되는 거려나?
모르겠네···.
뭐 여차하면 궁중 예법은 잘 몰라서요.
그런 식으로 대충 넘기면 되지 뭐.
하하하.
“미안했다.”
남자는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설마 저 남자도 남주인공 후보였던 건 아니겠지?
음.
대사나 하는 행동 보면 삼류 양아치인 것 같으니까 뭐.
그나저나 이런 파티에는 안 오겠지, 테베.
지금 확실한 건 테베 정도인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도회에서 카이델과 떨어져 있으면 나한테 말을 걸거나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으으음···.
모르겠다.
다들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 나한텐 관심도 없고.
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는 것은 카이델뿐.
그리고 카이델의 시선에 이끌려 가끔 나랑 눈이 마주치는 이웃 나라의 왕 말고는
나를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다.
이웃 나라의 왕이라.
뭔가 소설 속 묘사에서는 듬직한 연상, 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나랑 나이 차이가 꽤 나 보인다.
은화가 설정상 나랑 동갑이었으니까···.
에이, 아니겠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웃 나라 왕이 나를 본다.
어딘지 커피를 떠올리게 하는 진갈색 눈동자.
그리고 머리카락은 자그마치 보라색이다.
지금 기분을 말로 표현하면···.
TV에 나오는 모 중년 개그맨이 새빨간 머리카락을 하고 나왔던 때의 충격과 비슷하다.
그 정도로 어색하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샤프한 얼굴과 어우러져 꽤 잘 어울린다.
생김새는 단정한데 온화한 미소가 매력적이고,
입가에 살짝 잡힌 주름이 나름 멋있다.
음.
잘생기긴 했지만, 역시 아니다.
로판의 남주인공에게 주름이라니.
나는 고개를 내젓고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덥다.
온풍기 같은 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온도 조절을 하는 거지?
이것도 마법이려나.
손부채 질을 해봤지만 별 소용이 없다.
으음.
어차피 나 하나 빠져도 아무도 모를 것 같고···.
남주인공 후보가 무도회에 참가했다면
아마 내가 저번에 참여하지 않은 무도회 3일 차가 승부처다.
그 전에 참가했었다면 저번의 내가 대충이라도 눈치챘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지금의 나는 농땡이를 쳐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슬쩍 주변을 살피고 발코니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열려있는 유리문을 통해 슬쩍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내 몸을 감쌌다.
우와.
안이랑 온도 차이 장난 아니네.
그래도 더운 것보단 추운 게 낫다.
나는 발코니 구석으로 발을 옮겼다.
“어?”
발코니에 전등이 있긴 하지만 구석까지는 불빛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몰랐다.
구석에 사람이 있을 줄이야···.
나이는 한 16살이나 되었을까.
작고 가녀린 몸이다.
흐릿한 전등불 아래 새파란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
창백한 얼굴의 절반이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다.
저러면 앞이 보이기는 하는 걸까.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 웃어 보였다.
“여기서 뭐 해요?”
소년이 움찔하더니 몸을 움츠렸다.
마련된 의자 위에서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꽤 안쓰러워 보인다.
나는 소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
소년이 나를 바라본다.
아마 바라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눈이 안 보이는데 어딜 보는지 어떻게 알아···.
그냥 대충 머리 방향을 생각해보면 내 쪽을 보는 게 맞겠지.
응.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소년에게 씩 웃어 보였다.
“왜 혼자 있어요? 안 추워요?”
소년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고갯짓으로는 대답해 주는 거구나.
“안에 들어갈래요?”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층 더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럼···.”
“아샤님.”
어.
테베다.
무도회장의 불빛을 등지고 테베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금색의 머리카락이 전등 아래서 반짝거린다.
“여기서 무엇을···.”
테베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야 그의 눈에도 눈앞의 소년이 보인 모양이었다.
테베가 소년에게 예를 갖췄다.
“노아르망 경, 여기에 계셨군요.
델라 아가씨께서 찾으셨습니다.”
소년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와 테베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키가 꽤 크네.
“지금 그 아이는···?”
“···?
아, 노아르망 경이라면 이미 성인이십니다.”
엑.
성인이라니.
나는 지금까지 본 성인들을 떠올렸다.
카이델, 데바인, 가일, 라이안, 테베, 이웃나라 왕.
하나같이 180이 넘거나 최소한 그 근처로 보였는데···.
다들 그렇게 큰 거 아니었나?
“근데 왜 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 거예요?”
내 질문에 테베가 곤란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자 테베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조금 사정이 있으셔서···.
다른 분의 개인적인 사정이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테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음.
하긴 기사라는 것이 귀족의 비밀을 알기에는 참 좋은 직업인 만큼 입이 무거워야 할 것이다.
현대로 치면 경호원 포지션이니까.
“아샤님도 들어가시죠. 날이 춥습니다.”
으음.
들어가기 싫은데···.
무도회장 구석에서 서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건 질렸다.
먹는 것에도 별 흥미가 없고.
나는 조금 전까지 노르 뭐시기가 차지하고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테베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실례.”
테베가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끌러냈다.
그리고 그대로 내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었다.
“아니, 안 줘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따뜻하다.
나도 모르게 망토를 꼭 쥔 채 테베를 보자,
테베가 그런 나를 보고 엷게 미소지었다.
와, 대박.
진짜 잘생겼어.
“로이스터는 안 들어가도 되나요?”
“저는 폐하의 명으로 아샤님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아샤님의 곁에 있으라고 명령받았기 때문에···.”
“그럼 로이스터도 여기 앉아요.”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두드리자 테베가 흠칫 몸을 굳혔다.
은근히 테베도 얼굴이 많이 드러난다.
왜 처음엔 몰랐을까.
테베가 나한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어서요.”
테베가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내 옆에 꼿꼿하게 선 채로 발코니 밖을 바라보고 있다.
“어차피 카이델도 없으니까 앉아요.”
“그럴 순 없습니다.”
딱딱하긴.
나는 몸을 웅크리고 망토를 끌어당겼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문득 테베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기사도 귀족이던가.
그럼 테베도 귀족인가?
“아샤님은···.”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테베 쪽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뒷말을 기다렸다.
“아샤님은··· 무도회가 싫으십니까?”
싫냐, 인가.
굳이 따지자면 싫다.
저 후덥지근한 공기도 싫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드레스도 싫고
술 냄새도 딱 질색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 방에 들어가서 뒹굴뒹굴하고 싶다.
“폐하가 초대해 주셨으니까··· 어쩔 수 없죠.”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카이델의 손님인 이상 하라는 건해야지, 뭐···.
내게 선택권도 없었고.
테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보통의 아가씨들이라면 무도회를 동경하던데,
아샤님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으셔서요.”
“저요?
뭐에요, 로이스터.
설마 나 보고 있었어요?”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 새하얀 귀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담담한 척하고 있다.
그 갭이 꽤 귀여웠다.
무도회장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 안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날 보고 있었을 거다.
테베도 카이델처럼 내가 첫사랑인 건 설마 아니겠지.
뭐 그게 아니라도 마음에 걸리는 상대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원래 계속 쳐다보게 되는 것 아니겠어?
나는 짓궂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날 보고 있었는데요?”
“···.”
테베가 입술을 잘근 깨무는 것이 보였다.
나는 피식 웃고는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잠시 정적이 지난 후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로이스터는 이런 데 많이 와봤어요?”
“아뇨···.
보통 때는 폐하가 외출하실 때 동행합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제가 아닌 자른 분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럼 오늘은 왜 로이스터가 왔어요?”
“그분께서 오늘 가정에 일이 좀 생기셨습니다.”
흠흠.
기사도 휴가 같은 거 있는 건가?
하긴 이런 판타지 세계면 보통 중세나 근대를 이야기하니까···.
휴가 정도는 있을 수도 있겠지.
“로이스터.”
“예, 아샤님.”
“끝나려면 멀었죠?”
“아직 1시간 30분 정도 더 진행될 것 같습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벗어나고 싶다아아.
그런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나를 바라보던 테베가 말했다.
“폐하께 아샤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씀드릴까요?
그럼 쉬시라고 하실 겁니다.”
그럴까.
설마 카이델, 내 옆에 와서 계속 간병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그랬다간 또 이단 취급받고,
이단심문관의 수장은 두 번째 죽임을 당하게 될 텐데.
“아니, 그냥 기다릴게요.”
“하지만···.”
테베가 나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스러움과 알 수 없는 뭔가가 섞인 복잡미묘한 표정.
테베의 표정이 너무 웃겨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십니까.”
“로이스터의 표정이 재미있어서요.”
아직 남은 시간이 1시간 반이라···.
그동안 테베랑 이야기나 할까.
“그럼 로이스터.
나랑 잠깐 놀아줄래요?”
내 말에 테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굳은 얼굴인 채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하고 놀아줄 거에요?”
“뭘 해드리길 원하십니까.”
으음.
지금의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테베를 아는 것, 이려나.
“그럼 내가 문제를 내면 로이스터가 맞혀볼래요?”
“저는 퀴즈 같은 것은···.”
“로이스터가 풀 수 있는 퀴즈에요!
아니, 로이스터가 아니면 못 푸는 퀴즈에요.
해줄 거죠?”
테베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을 찬스다.
나는 이 찬스를 놓치기 싫은 마음에 테베의 옷 소매를 꽉 잡았다.
테베가 잡힌 옷 소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됐다!
뭘 물어보지.
나는 어떤 걸 물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좋아하는 여자 타입, 은 너무 노골적이고.
나한테 반했냐고 물어보는 것도 좀···.
뭐 물어봐야 잘 물어봤다고 소문이 나지!
나는 좀처럼 질문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끙끙거리던 나를 보던 테베가 입을 열었다.
“···아샤님.
몇 개라도 질문하시는 대로 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하십시오.”
테베가 엷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
나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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